10. 종착점, 출발점
크리스마스 당일인데도 왠지 전날 정도의 활기가 없었다. 케이크도, 호화로운 식사도, 파티도, 선물 증정도 다들 이브 날에 마쳐 버렸다. 그렇다 보니 크리스마스 당일인데도 뒷처리같은 느낌을 받는다.
오늘 중에 케이크를 다 떨어내려고 케이크를 대폭 할인하고 있는 케이크 가게 옆을 지나가면서, 요시노는 가게의 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봤다.
코드에 모자. 벙어리장갑에 머플러까지 쓴 완전방어상태지만, 꾸미지 않은 건 아니다. 하여간에 오늘은 승부의 날이니까.
거기서 요시노는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승부의 날이라는 식으로 말하긴 했지만, 과연 어떨는지. 분명 25일 16시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 뒤의 소동으로 대답이 어정쩡하게 되어 버렸다. 그래도 말한 건 분명하고 거절당한 기억도 없으니까 분명 약속은 그대로 유효한 거로 생각하고 있다.
혹시나 이 상황에서 유키 군이 오지 않는다면, 그건 유키 군 잘못이다. 연락 하나 주지 않았으니까, 보통은 말한 대로 할 거로 생각할 거다.
요시노는 그렇게 자기 자신을 납득시키고 집을 나섰다.
상당히 이른 시간에 집을 나선 건, 걸으면서 고민을 하려는 생각도 있었고, 약속 시간까지 쇼핑을 하자 싶었던 것도 있었기 때문이다.
여하튼 간에 크리스마스 약속인 거니까, 별것 아니더라도 선물 하나나 둘쯤 있는 편이 재치있는 거겠지. 단지 무의미하게 끝날 가능성도 생각해 자기가 직접 쓸 수 있는지를 의식하면서 선물을 고르게 되는 건 어딘가 마음이 약해져 있는 증거인 걸까.
하늘을 우러러보자 이미 하늘은 어두워져 있었고, 대신에 거리의 빛들이 세계를 밝히고 있었다. 어젯밤의 눈이 아직 잔뜩 남아있어서 빛을 반사하며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것 같았다.
눈길을 아래로 되돌려 손목시계의 시간을 바라보자 약속 시간까지 앞으로 30분쯤 남아 있었다. 쇼핑은 마쳤고, 기분도 나름대로 침착해 졌다.
요시노는 한 번 눈을 감고 기합을 꾸욱 넣었다.
“……좋아!”
혼잣말을 한 뒤 요시노는 약속장소로 향하려 발걸음을 옮겼다.
창밖을 사람들이 흘러 지나간다. 즐거운듯한 사람, 무표정한 사람, 냉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 가족들, 친구들, 애인들, 갖가지 사람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에리코는 아무런 생각 없이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들이 시끄러워서 빨리 집을 나서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뭔가 할 게 있었던 게 아니다 보니 따분했다. 그래서 일단 찻집에서 책이라도 읽으며 시간을 때우고 있었는데, 얼마 안 가서 책을 읽는 것도 질려 버렸다.
과연 유키 군은 와 줄는지.
달력의 오늘 날짜에 표시가 있었던 건 틀림없이 다른 예정이 있었기 때문이겠지. 에리코에게 바로 대답하지 못했던 걸 생각하면, 상대는 역시 여자애일 거고, 그렇다면 요시노 쨩인게 아닐까. 단지 그러면서도 에리코가 꺼낸 이야기를 바로 거절하지 못했던 건 다른 한쪽의 약속은 애매한 상태인 거로도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설령 그 자리에서 거절하지 못했다고 해도, 이후에 다시 거절하면 괜찮았을 거다. 그렇지 않았다는 건 에리코와의 약속에 무게를 둬 줬다는 걸까.
리필한 커피를 가져온 웨이트리스를 보내곤, 깊은 한숨을 내쉰다.
여러모로 생각한 끝에 위에는 검은색 니트 위에 롱 카디건을 겹쳐 입고 아래는 폭 좁은 바지에 모피 부츠를 맞춰 입은 차림으로 나왔지만, 과연 이걸 기합이 들어가 있다고 할 수 있는 건지, 아니면 그냥 보통인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이렇게나 안절부절못하게 되는 건 어째설까. 설령 유키 군이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그걸 탓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닐 테고, 올 확률도 과연 어느 정도나 될지.
그런데도 에리코는 기대한다. 에리코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유키 군이 와 주는 걸.
“……제 사정만 좋은 생각이네.”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를 머릿속에 떠올리면 눈 깜짝할 새에 투지가 끓어오른다. 질까 보냐 하는 생각에, 좀 약한 마음도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다.
고개를 든다.
에리코는 전표랑 코트를 손에 들고, 시원스런 걸음으로 계산대를 향했다.
차가운 공기에 감싸인 거리를 레이는 홀로 걷고 있었다.
어젯밤에 내리던 눈은 날이 샐 무렵에는 그치고 가볍게 쌓였던 눈도 제설되긴 했었지만, 저녁에 다시 눈이 흩날렸던 탓인지 길은 넘어지기 쉬운 상태였다. 레이는 단련된 하반신과 균형감각으로 손쉽게 긴 보폭을 유지하며 경쾌히 앞으로 나아간다.
눈이 내리면 자기 자신보다 요시노를 지켜보는 걸로 큰일이었다. 요시노는 눈장난을 하고 싶어 견디기 힘들어했었지만, 심장이 약한 요시노에게 격렬한 놀이를 시켜줄 수 있을 리도 없었다. 그래도 눈길 위를 달려가는 게 즐거웠던 모양인지, 어른들의 눈을 피해 눈 위로 계속 발을 디디려 했었다.
요시노가 걱정되어서 좇다 보면 자신의 발걸음에 주의가 미치지 않아 그 탓에 넘어져 버리는 일도 있었다. 그러면 요시노는 레이가 둔하다고 말하며 웃었었지만, 요시노가 웃어 주니까 뭐 괜찮다며 레이도 함께 웃곤 했었다.
“………….”
왠지 그런 어릴 무렵에 있었던 일이 자기도 모르게 떠올라서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 본다.
겨울 이 시기다 보니 이미 하늘은 새까맣고, 세계는 빌딩이나 가로등의 빛으로 빛을 얻고 있었다. 그 세계 속에서 혹시 자신 혼자만이 세계에 존재하는 게 아닌가 하는 기묘한 감각을 느낀다.
주위에는 갖가지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는데도 그런 착각을 느껴 버리는 건, 자신이 불안에 휩싸여 있기 때문이다.
유키 군은, 와, 주는 걸까.
편지라는 고풍적인 수단을 썼던 건 직접 만나거나 전화로 이야기했을 때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편지라면 냉정하게 글을 써내려갈 수 있고, 다시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답장이 온 것도 아니니 유키 군이 어떻게 응할지는 전혀 예상되지 않는다. 혹시 올 수 없는 상황이라면, 혹은 레이를 거절한다면, 어떠한 답장이라도 보냈으리라 생각하지만, 확실하진 않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렇게까지 낙천적으로 생각할 순 없었다. 결국 그 시간이 되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거다.
레이는 시간을 확인했다.
약속 시간보다도 30분 이상 이르다. 가만히 있으려 해도 침착하게 있지 못해 빨리 집을 나서긴 했지만, 너무 일렀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지금부터 어디에서 시간을 때울 만큼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레이는 약속 장소로 발걸음을 옮긴다.
역전에는 자그만 광장이 있고, 어디에나 있을 법한 시계탑이나 분수 같은 게 설치되어 있다. 밖에서 기다리는 건 추울 것 같지만, 이 시기에 일루미네이션이 장식된 역전 분위기를 레이는 좋아했다.
그리 큰 역은 아니니, 그렇게까지 화려하게 장식된 건 아니다. 하지만 레이는 역으로 이런 조촐한 장식이 마음에 든다.
약간 춥긴 하지만, 이만큼 이르게 왔으면 아직 유키 군은 오지 않았을 테니 기다리게 하는 일은 없겠지. 자신이 기다리는 거라면 문제없다. 경치를 바라보며 유키 군이 왔을 때를 떠올리며 기다리고 있으면 분명 시간 같은 건 금방 지나갈 거고, 추위도 그렇게 신경쓰이진 않을 거다.
몇 시간 전까지는 긴장으로 안절부절못했었지만, 여기까지 와 버리면 이제 뭘 어쩔 수도 없다. 그래선지 신기하게 마음은 차분해져 있었다.
그런데.
“……레이 쨩?”
“―――레이?”
“……에?”
너무나 익숙한 두 사람의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
기분 탓인지 고민한 순간에 그 생각은 박살 나 버렸다. 역전 광장에 나란히 서 있는 건 틀림없이 그 두 사람의 모습.
여동생이자, 가장 사랑하는 사촌동생인 요시노.
언니인 에리코.
어째서 둘이 이 장소에 있는 건가. 언제 둘이서 뭔가 약속이라도 했었던 걸까. 하지만 둘 사이에는 그런 부드러운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어딘가 긴장된 분위기조차 느껴진다.
조금 전까지 평온했던 레이 마음속의 수면이, 갑자기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요, 요시노……언니……?”
오직 그런 말밖에 꺼내지 못하고, 그러면서도 둘에게 다가간다.
“어째서, 레이 쨩까지 여기에?”
“요시노 쨩, 멍청한 질문 아닐까? 레이의 모습을 보면, 얼마나 기합을 넣어 왔는지 빤히 보이잖아?”
에리코가 레이의 온몸을 핥듯이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보우타이 블라우스의 위에 칼라 없는 콤팩트 한 재킷을 맞춰 입어, 코트를 입어도 무겁게 느껴지지 않도록 하고 있다. 하의는 하얀 울 바지. 다리가 긴 레이에겐 산뜻한 하얀색이 정말로 빛나 보인다.
“그런가……그렇, 구나.”
요시노도 이해한 듯이 끄덕이고 있다.
하지만 레이만이 홀로 영문도 모르겠다는 듯이 멍하니 멈춰서 있다. 그런 레이의 모습을 보고, 에리코가 살짝 질린 듯이 어깨를 움츠려 보인다.
“레이도 아무개 씨랑 약속인 거 아니니?”
그 한마디로 레이도 이해했다.
하지만 그러면서 동시에 당황한다. 마음속에서 파도가 격렬히 날뛰어, 레이를 그대로 삼키려 하고 있다. 어째서, 어째서 둘까지―――?
그 의문을 입에 담아 준 건 요시노였다.
“유키 군도 참……무슨 속셈인 걸까.”
귀로 듣고, 정말로 그랬었다는 걸 다시금 이해한다.
레이를 더한 세 사람이 모두 같은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거다.
“우리 세 사람을 같이 농락하려고 하고 있는 거려나?”
에리코의 농담도 약간 피상적인 것처럼 들려왔다.
“이건 정말, 캐물을 수밖에 없겠네. 대답에 따라서, 그냥은 못 끝내겠어.”
그래.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다른 여자 세 사람과 같은 날 같은 시간 같은 곳에서 만날 약속을 한 거니까, 여자애를 바보 취급하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세 사람 다 진심으로 화내지는 못하고 있다.
셋 전부, 제대로 된 약속을 나눈 게 아니었으니까.
요시노는 약속 도중에 다른 일로 이야기가 굴러가서 화낸 끝에 어정쩡한 상태로 오늘에 이르렀다.
에리코는 단지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뒤에 대답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레이는 상대가 대답하는데 시간을 요구하는 편지라는 매체를 썼기에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러니, 제대로 화낼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셋이 사이 좋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만한 분위기도 아니고.
같은 황장미 자매면서도, 사이 좋은 자매면서도,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풍기며 눈을 서로 피하고 있었다.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일루미네이션 최후의 빛이 노랑 장미 세 사람을 비춘다.
요시노의 눈같이 하얀 피부를 요염하게 비추며, 유리구슬처럼 큰 눈에 반사되는 화려한 빛.
밤이슬을 드리운 듯 빛을 내는 촉촉한 머리칼을 흔들며, 우수를 띈 젖은 눈동자가 마성의 색기를 내보이는 에리코.
늠름한 소년 같은 모습 가운데, 일곱 색으로 빛나는 빛을 받아 불안스런 표정이 역으로 소녀답게 보이는 레이.
삼인 삼색의 마음을 안고서 계속 기다린다.
팽팽하게 가슴을 죄는 듯한 시간 속에서, 레이는 찌부러질 듯한 기분을 느낀다. 기다리는 게 괴로운 건 아니다. 그 뒤에 찾아올, 운명의 심판을 들을 시간이 무서운 거다.
내뱉은 입김처럼 이 자리에서 사라지고 싶어진다.
견디기 힘든 분위기 속에서.
“……뭐어, 본인에게 확실히 해 달라고 하면 괜찮겠지.”
에리코의 그 말에 남은 두 사람이 정신을 차린다.
어느샌가 시곗바늘이 1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주위에 다른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것과는 확실히 다른 기척을 느낀다.
긴장에 휩싸인 상태로 레이는 그쪽을 돌아봤다.
요시노 역시 몸의 방향을 바꾼다.
“유키, 군.”
누가 꺼낸 말인지.
자신이 입에 담은 것처럼도 느껴지고, 다른 두 사람이 낸 소리처럼도 들렸다. 주위의 소리가 모두 어딘가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애매하게 녹아간다. 단지 확실한 건, 그 사람이 나타났다는 것.
역전광장의 분수 부분은 원형이고, 주위보다 낮은 장소에 있다. 분수 앞에 서 있는 세 사람을 내려다보는 모습으로 유키는 서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어, 유키 군.”
“무슨 속셈인지, 설명해 줄 거지?”
에리코와 요시노가 최대한 부드러운 말투로 캐물었다.
레이도 두 세걸음 다가가서 입을 열었다.
“유, 유키, 군……”
하지만 무슨 소리를 하면 좋을는지.
망설이는 동안 에리코와 요시노의 소리가 말을 덮었다.
“설명도 뭣도 없어. 그냥, 세 사람 중 누굴 고를지잖아?”
“아니……그, 그래도 에리코 님.”
“어머, 요시노 쨩은 그럴 셈으로 온 건 아니니? 적어도, 나는 그럴 셈으로 오늘 이 자리에 온 거야.”
“그, 그래도!”
내심은 어떻든, 에리코 쪽은 주눅든 기색도 보이지 않는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손녀에 대한 대항심인지. 한편 요시노 쪽은 아직 속마음이 흔들리는 건지 정해지지 않은 건지, 얼굴을 붉히면서 불투명한 태도를 보인다.
“……저기? 레이도 그렇지?”
에리코의 질문이 레이를 향한다.
한순간 대답에 막혔지만, 가슴에 손을 얹고 깊게 심호흡을 했다. 이제 와서 되물을 것까지도 없다. 뭘 위해서 지금 자신이 여기에 있는 건가.
“저, 저는.”
말하려고 했을 때.
위화감이 레이를 덮쳤다.
에리코가 아니다.
요시노도 아니다.
그렇다면.
“……유키 군……?”
그 말을 입에 담았을 때는, 레이는 달리고 있었다. 에리코와 요시노 두 사람 사이를 빠져나가듯 유키가 있는 곳으로.
그리고 유키는.
세 사람 쪽으로 가려고 했던 거였을까. 분수광장으로 향하는 계단에 발을 한 걸음 디딘 뒤, 거기서 눈으로 미끄러워진 지면에 발을 헛디뎠거나 균형을 무너뜨린 건지 몸이 크게 기울어졌다.
“유키 군?!”
겹치는 에리코와 요시노의 목소리를 등으로 받으며, 레이는 쓰러지는 유키를 받아들려 했다.
“…………에?!”
유키의 몸이 레이에게 기대어왔다.
딱 몸의 위치는 레이 쪽이 아래가 되어 있었기에, 레이의 어깨에 유키의 턱을 멋지게 싣고, 또 유키의 양 겨드랑이 아래에서 안는 꼴로 팔을 두곤 레이는 유키의 몸을 받아들 수 있었다.
유키의 뺨과 레이의 뺨이 서로 닿아 있다.
유키의 호흡은 거칠었고, 그리고 닿은 뺨은 녹아버릴 정도로 뜨거웠다.
하지만 그보다도, 레이 쪽은 귀까지 새빨개져 있었다.
틀림없이 유키가 컨디션을 무너뜨려, 그래서 쓰러질 뻔했던 거라는 건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도 레이는 패닉에 빠질 것 같은 마음을 제대로 정리할 수 없어서.
“미, 미안……레이 씨…….”
“으, 으으응.”
뜨거운 입김을 내면서 약한 목소리로 사과하는 유키에 대해, 레이는 수긍하는 것 밖에 할 수 없었고.
멍한 표정을 지으며 에리코와 요시노가 바라보는 동안, 크리스마스 일루미네이션의 마지막 빛을 받으며 레이와 유키 두 사람은 신비한 포옹을 나누고 있었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광경을 그리며, 성스러운 밤은 급작스레 끝을 보였다.
에필로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