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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미 연애 광상곡

黄薔薇恋愛狂想曲


원작 |

역자 | 淸風

9. 마음, 트라이앵글.


 요시노 양에게 얻어맞은 날로부터 그녀와 이야기할 기회도 없는 채로, 오직 의미없이 시간만이 흐르고 있었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화냈나 고민했지만, 리리안에 다니는 아가씨니 남자에 대해서도 결벽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지, 그게 아니면 다른 생각이 있었던 건지. 정말 어떤지는 예상이 안 된다.
 뭐가 있었던 건지 물어보고 싶다. 그녀가 뭘 생각하고, 어떤 마음으로 접해왔던 건지 알고 싶다. 하지만 어떻게 접하는게 좋은걸지.
 직접 리리안으로 향해서, 하교하는 걸 기다린다고 하는 건 상책이 아니다. 아가씨 학교인 리리안에선 부상한 남자가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있다간 경비원한테 잡혀 버린다. 설령 교복을 입어서 하나데라 학생이라는 걸 명확하게 할 수 있어도, 교문 앞에서 기다릴 수는 없다. 다른 학생에게 보였다간 요시노 양에게도 폐를 끼쳐 버린다.
 그리고, 요시노 양의 집은 학교에서 쉽게 걸어갈 수 있을만한 곳이라고 한다. 귀가 도중에 기다릴 수 있을만한 곳도 없다.
 전화를 하는 것도 생각할 수 있지만, 갑자기 전화해서 뭘 이야기하면 괜찮을지도 구체적으로 떠오르지 않고, 다른 가족이 받았다간 어떡해야 좋을지에 대해 쓸데없는 고민도 떠올라 버린다.
 유미에게 부탁하는 선택지는 최종수단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연락수단을 찾기 힘들었다. 그런데 거기서 문득 떠올린 게 저번의 약속. 아니, 약속이라고 할 정도로 확실한 건 아니다. 유키가 대답하기 전에 결국 어영부영하게 끝나 버렸으니까.

 크리스마스날, 6시에 역앞에―――.

 동의한 건 아니었지만, 부정했던 것도 아니다.

 요시노 양은 과연 당일, 그곳에 오는 걸까―――



 고민하고 생각하는 동안에도 시간은 평소와 다름없이 지나가는 법이다. 어느샌가 기말시험도 끝나고, 세상 전체가 크리스마스 모드로 들어가 있었다. 이제 앞으로 며칠만 지나면 연말연시모드로 바뀌겠지. 어느쪽이건 거리는 떠들썩하고, 사람은 바쁘고, 날짜는 지나간다.
 시험시간 중에는 한동안 중단했던 과외도 재개되었다.
 기말시험 문제의 답을 맞혀보면서 틀린 곳을 복습. 채점해 보면 점수는 약간 올라가 있었다. 영어 점수가 제일 크게 좋아졌지만, 눈에 띈 변화가 있다고 할 정도는 아니다. 아직 과외를 받기 시작한 뒤의 기간도 짧으니, 그리 쉽게 큰 성과를 볼 수야 없을테니, 당연하고 하면 당연한 결과다.
 그래도 유키의 성적이 오른 것에 대해서, 에리코 씨는 정말로 기쁜듯한 표정을 지으며 기뻐해 주었다.
 첫 가정교사니, 혹시 성적이 내려가기라도 했다간 어떡해야 할지, 자신의 가르치는 방법이 나빴다면 어떡해야 할지, 사실은 불안해서 어쩔줄 몰랐다고 자백했다.
 그래서일까.
 점수가 좋아졌다고 말한 뒤에 처음으로 본 순수한 미소에 무심코 심장이 쿵쾅거린 거다. 평소에 보여주는 깊은 의미를 담은, 장난스런, 귀여운 악녀같은 미소와는 다른, 솔직한 표정을 엿본 순간.
 꾸밈없이 웃는 표정은 평소에 느끼는 연상의 여성이란 느낌을 지워, 단순히 귀여운 여성을 겉으로 내보이고 있다. 뭘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신비적인 분위기는 어디엔가 가 버리고 친밀함을 내풍긴다.
 지금까지 별로 본 적 없는 그런 표정을 봐 버리면, 갑자기 의식해 버린다. 오늘의 옷도 정말 평범한 터틀 넥 스웨터에 단순한 주름치마였지만, 에리코 씨가 몸에 두르고 있는 것 만으로도 굉장히 세련되게 보이기 시작한다.
 가늘면서도 부드러운 몸. 그 몸에 유키는 몇 번이나 닿았던 걸까. 고의가 아니었을 때도 고의였을 때도 둘 다 있었지만, 에리코 씨의 부드러움은 변함없었다. 겨우 두 살밖에 차이 나지 않을 텐데도 훨씬 어른스러워 보여서 전혀 당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지만, 몸은 놀랄 만치 부드러워 약간 힘을 넣어서 만지면 부서져 버릴 것 같아서.
 무심코 바라보고 있었다가, 턱을 괴고 있던 에리코 씨와 눈이 마주쳤다. 눈동자가 ‘무슨 일이니?’라고 물어보고 있다.
 부끄러워진 유키는 조급히 눈을 돌린다. 그 때, 책상 위에 놓여있던 탁상 달력이 눈에 들어온다.
 곧 약속의 날이 찾아온다. 약속조차 되지 못한 약속의 날. 그래도 유키는―――

“……응?”
 그만 에리코 씨의 얼굴이 유키의 눈길을 쫓듯이 움직인다. 유키는 그제서야 무의식중에 부주의한 행동을 해 버린 걸 깨달았다.
 탁상달력 위의 크리스마스 날에는 작은 동그라미가 쳐져있다. 다른 날에는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으니, 그날에만 뭔가 있으리라는 건 확실해 보였다. 눈을 돌리려 해도 이미 늦어서 에리코 씨의 눈은 완전히 달력에 못박혀 있으니, 이제와서 숨기려고 했다간 더더욱 부자연스럽겠지.
눈이 큰 것처럼 시력이 좋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책상 위라고 해도 그리 멀리 있는 건 아니니, 보여버릴 건 명백했다.
“크리스마스날, 뭔가 용건이 있니?”
 정말 평범한 말투.
 뭔가를 의심하고 있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왠지 몸이 떨린다. 그리고 그 탓으로, 부자연스러운 대답을 해 버렸다.
“아, 아뇨. 딱히 아무것도.”
 나중에 생각해 보면, 친구랑 크리스마스 파티가 있다는 식으로 말해뒀으면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급작스런 일이어서 단순히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명확히 뭔가 있다고밖에 할 수 없는 표시가 되어있다고 하는데도.
 예상대로 에리코 씨의 눈초리가 변한다.
“흐응……저기, 유키 군.”
 약간 몸을 이쪽으로 내민다.
“유키 군에게 상 줄까? 성적이 오른 상.”
“에, 괘, 괜찮아요. 그런 건.”
 무심코 ‘상’이라는 단어의 울림에 두근거려버린다. 에리코 씨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면 묘한 에로티시즘을 느껴 버리는 건 자의식 과잉인 걸까.
 거기에 말려들지 않도록 굳세게 주먹을 쥔다.
“애초에 제가 배워서 성적이 좋아졌으니, 거꾸로 답례를 하고 싶을 정도예요.”
“어머, 그러니? 그럼, 그 말에 어울려 볼까?”
 검지를 뺨에 대곤,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에리코 씨는 입을 열었다.
“……그럼, 크리스마스 날에 나랑 데이트 해 주지 않을래?”
“―――에?”
 무심코 눈을 크게 뜬다.
 하지만 에리코 씨는 유키의 표정을 알아차린 건지, 아니면 알아차려 놓고 시치미를 떼고 있는건지, 즐거운 듯 말을 잇는다.
“모처럼의 크리스마스인걸. 가족들하고 파티하는 것도 괜찮지만, 남자랑 하는 데이트로 멋진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고 싶어.”
“그래도, 저기, 그건.”
“아, 그래도 오해하지 말아줘. 별로 호화스런 뭔가를 바라는 건 아니야. 그냥 같이 식사라도 할 수 있으면 괜찮아. 패밀리 레스토랑이든 어디든. 괜찮잖아? 그날에는 특별히 아무 예정도 없다고 말했었고.”
“그건, 그래도.”
 요시노 양과의 약속이 있다.
 그러자 갑자기 에리코 씨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역시, 나같은 거랑 데이트 하는 건, 싫니?”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자그마한 손으로 입가를 감추며, 기분탓인지 축축한 눈동자로 유키를 바라본다.
“그, 그럴 리 없잖아요. 단지 그, 에리코 씨랑 데이트라니, 저 같은 거랑 하는 건 아깝다고 할까, 격에 안 맞는다고 할까.”
“그럼, 나랑 데이트하는 게 싫다는 건 아닌 거지?”
“그, 그거야 그렇죠.”
 여기까지 오자 에리코 씨는.
 아까까지 지었던 침울해 보이던 표정에서 표정을 확 바꿔, 꽃이 피는 듯한 미소를 보인다. 몸을 앞으로 내밀며 유키의 손을 잡고, 두근두근거리고 있는 유키의 얼굴에 다가간다.
“다행이다. 그럼 문제없는 거네. 유키 군이라면 아까울 리 없고, 유키 군도 싫어하는 게 아니라면. 그럼, 크리스마스날 기대하고 있을게.”
“에, 아니 그래도, 에리코 선생님.”
“그렇구나. 6시에 역앞에서 어떠니?”
“잠, 엣? 저기, 에리코 선”
“앗……차, 슬슬 갈게. 마침 오늘 돌아가는 길에 들릴 곳이 있어서.”
 손목시계의 시곗바늘을 보곤, 태도를 확 바꿔서 마치 유키에게서 달아나듯이 빠르게 돌아갈 준비를 하곤, 멈춰새울 틈도 없이 에리코 씨는 유키의 방에서 떠나갔다. 서둘러 쫓아서 현관 앞에서 붙잡았지만, 에리코 씨는 이미 신발에 발을 찔러넣고 있었고.
 일어난 에리코 씨는 우아하게 이쪽을 돌아보고.
“기대하고 있을게, 유키 군.”
 고혹적인 윙크를 던졌다.
 정면에서 제대로 윙크를 받아버린 유키는, 물속에 빠진 듯이 숨조차 쉬지 못하게 되어, 결국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하고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귀를 지나가는 걸 의식 어딘가서 멍하니 느낄 뿐이었다.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뒀다. 이브 파티의 소란도 즐거움도 지나가 버리면 별 것 아니고, 그 뒤에 남는 건 망설임 뿐.
 아직껏 어떡할지를 정하지 못한 건 뭐 이리도 우유부단한 건지. 요시노 양과의 약속, 에리코 씨의 초대. 어느쪽도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 가면 둘이 맞부딪칠 건 틀림 없고, 그걸 막을 수 있는 건 유키뿐이다. 지금이라면 아직 막을 수 있다. 전화해서, 사정이 나빠졌다는 식의 말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전화하라고 하는 건가. 요시노 양은 그토록 화내고 있었는데다 명확히 약속을 나눈 것도 아니다. 전화하자마자 바로 끊을지도 모르고, 게다가 레이 씨나 사치코 씨랑 다르게 아직 장미님이 아닌 요시노 양의 연락처는 듣지도 못했다. 유미에게 물으면 가르쳐 주겠지만, 당연히 이유를 추궁당할 거다. 대체 어떻게 대답하라는 건가.
 에리코 씨한테도 전화로 뭘 이야기하면 좋을는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역시 먼저 약속한 요시노 양과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한 번은 힘을 내서 전화를 걸었었다. 하지만 전화를 받은 건 에리코 씨가 아니라 가족이었고, 셋 있다는 오빠 중 한 명이었을 거로 생각한다. 그 사람은 유키가 ‘에리코 씨는 댁에 계신가요?’라고 물은 것만으로도 노골적으로 심기가 언짢은 소리를 내며 에리코 씨가 없다는 대답만을 하곤, 이쪽이 말하는 말도 제대로 듣지 않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 이후로 전화는 하지 않았다.
 아무런 해결도 되지 않았는데, 시간만은 담담히 나아간다.
 지금이라면 아직 전화하면 때에 맞는다. 유키는 홀로 고민에 잠겼지만, 간단히 결론이 나올 리도 없어서 머리가 오버히트 할 것만 같았다. 조금 침착해지려고 한숨을 돌린 참에, 문득 눈에 들어온 게 있었다.
 책상 위에 참고서나 공책이 쌓여있던 아래에 비집어 나온, 확실히 교과서완 다르게 보이는 것.
 나쁜 예감을 느끼며 손가락으로 집어서 꺼내봤더니, 그건 유키 앞으로 보낸 편지 봉투였다. 뒤집어서 확인해 보면 보낸 사람은 ‘하세쿠라 레이’
 봉투를 뜯어서 내용물을 꺼내보면, 심플한 편지지에 공들여 쓴 글자로 쓰인 문장이 있었다. 그걸 읽는 중에 유키의 핏기가 가셨다.

​"​…​…​も​し​良​か​っ​た​ら​、​会​え​ま​せ​ん​か​?​ ​2​5​日​の​1​8​時​半​、​駅​前​で​待​っ​て​い​ま​す​“​
「……혹시 괜찮다면 만날 수 있겠습니까? 25일 18시 반, 역앞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마지막에 쓰여있었던 이 한 문장.
 심플한 편지봉투. 그래서 깨닫지 못했던 걸까. 확실히 학교 시험이 끝나고 과외도 일단락 되어서 참고서를 계속 그대로 두고 있었다.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
 소인을 확인해 보면, 도착한지 시간이 상당히 지난 걸 알 수 있다. 깨닫지 못했던 것보다는 괜찮았겠지만, 사태가 좋아질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 바로 전날이 되어서 거절을 하려고 해도, 그 뒤는 다음날인 당일이 되어 말할 수밖에 없다. 한참 전에 닿았는데 당일까지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고 갑자기 취소한다는 건가.
 머리카락을 쥐어뜯는다.
 누구랑 약속을 지키고, 누굴 거절하면 되는 건가. 간단히 결론이 나올만한 일은 아니지만, 답을 내지 않을 순 없다. 아무리 유키라도 세 사람과 사이 좋게 보내는 분위기 같은 게 나올 수 있을 리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아직 자신의 마음도 기분도 굳히지 못했는데, 누구 한 명을 고르지 않으면 안 되는 건가.

 덧없는 미소녀로 보이는데 사실은 오기있고 드세고, 그런데도 어딘가 덜렁거리는 부분이 있는, 커다란 눈과 땋은 머리가 잘 어울리는 소녀.

 늠름한 미소년 같은 용모인데도 정말로 여성스런 마음을 겸비한, 짧은 머리가 더할나위 없을 정도로 잘 맞는 여자애.

 어른스러운 듯이 보이면서도 때때로 어린애처럼 사랑스러운, 살랑살랑한 세미 롱의 머리카락도 아름다운, 어딘가 마성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그녀.

 알고 있다. 자신의 우유부단함이 부른 사태라는 건. 에리코 씨의 말을 들었을 때, 솔직히 약속이 있다고 말해 뒀으면 괜찮았던 거다. 레이 씨의 편지도 마땅히 눈치챘어야 했던 거다.
 그러니 지금, 자신이 고민하고 있는 건 자업자득인 거다…….

 그런데 그 때.
 방문이 가볍게 노크되었다.

“……예?”
“유키, 아직 일어나 있었니? 오늘 밤은 추워. 눈이 내리는 것 같고……후아암.”
 시계를 보면 이미 날짜는 한참 전에 바뀌어, 거의 2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화장실같은데 가느라 일어난 유미가 유키의 방문 틈새로 빛이 삐져나오는걸 보곤 말을 걸었던 모양이다.
“아, 아아. 이제 잘거야.”
“응, 잘자~…….”
 잠이 덜 깬 듯한 목소리로 말한 뒤 발소리가 멀어져 간다.

 이제와서 과거의 일을 후회한대도 뭐가 바뀌는 것도 아니다. 쓸데없이 시간을 쓸 정도라면 후딱 생각을 바꿔, 내일 어떡할지를 고민하는 편이 훨씬 건전하다. 그래, 내일에는 제대로 답을 내자. 뭐가 정답인지, 틀림없는지. 쓸데없는 생각을 치우고 자신이 어쩌고 싶은지를 스스로 고르는 거다.
 일어나서 살짝 창문을 열어보자 냉기가 실내에 밀어닥쳐온다. 유미가 말한 대로 비교적 큰 눈송이가 하늘에서 송이송이 내려오고 있다.
“화이트 ​크​리​스​마​슨​가​…​…​.​”​
 그런 단어로 속거나 하진 않는다.
 유키는 밤을 향해서 살며시 숨을 내쉬었다.


 떨어져 내리는 눈은, 거리를 아스라이 흰빛으로 덮어, 어둠에 잠긴 세계를 빛내고 있었다.



 밤에 내리던 눈도 아침이 되면 그쳐 있었다. 하지만 세계는 흰색에 감싸여 있었다.
 지붕 위에 쌓여있는 새하얀 눈.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입김.

“우왓, 추워…….”
 창을 열어서 밖을 보자, 눈의 세계였다. 요시노는 손을 비벼대며 차가운 손끝을 데우려 했다.
 추운 건 서툴렀다.
 어릴 무렵부터 병약하다 보니 몸도 가냘파서, 추위를 막아줄 만큼 살이 없었던 거다. 말라서 좋겠다는 소리를 자주 듣지만, 거기에도 한도라는 게 있다. 몸이 좋아졌다곤 해도 어릴 무렵부터 이런 몸이었으니 간단히는 바뀌지 않는다.
 그래도 옛날에는 추워지면 바로 감기에 걸리고, 밖에도 그리 쉽게 내보내 주지 않았으니까 비교해보면 훨씬 더 좋아진 거다. 외출한다고 해서 그걸 막는 일은 없어졌고, 기껏해야 주의하라든지 따뜻하게 입고 나가라는 등의 말을 거는 정도다.
“춥네, 추워.”
 창을 닫고 양손으로 가볍게 뺨을 두드린다.
 가슴의 흉터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지만, 일상생활에서 신경 쓰이는 일은 없었다. 흉터도 요시노의 일부가 되어 있다고 느낀다.

 그런데.

 왠지 오늘은, 가슴의 흉터가, 쑤신다―――



 얼어붙을 듯한 냉기로 뒤덮인 도장 안에서, 레이는 오직 홀로 조용히 죽도를 휘두르고 있었다.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춥다는 평판을 듣는 도장이지만, 레이는 싫어하지 않았다. 특히 겨울 무렵에는 날카로움마저 느껴지는 도장의 공기가 자신의 정신을 안정시켜서, 마음을 집중시키는 데는 절호의 장소였다.
 죽도를 휘두르는 동안에 자연스레 몸은 데워져, 움직임도 부드러워져 간다. 몸이 굳어있는 동안은 한 번 휘두를 때마다 그걸 확인하듯이. 근육이 풀린 지금은 흐르는 듯한 움직임으로.
 그러고 보면, 옛날부터 뭔가 불안한 일이나 긴장할만한 일이 있으면 도장에 와서 죽도를 휘둘렀었다.
 옛날부터 바뀌지 않았다고 자신에게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멈춘다. 몸은 따스했지만 땀이 날 정도는 아니다.
“……나, 불안한 걸까. 아니면 긴장하고 있는 거려나.”
 홀로 속삭인다.
 밖을 은빛 세계라고 표현하는 건 지나친 과장이겠지만, 눈이 쌓여 있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레이가 좋아할 만한 시추에이션.
 편지에 대해서도 오늘에 대해서도 요시노에겐 말하지 않았다.
 서로 사양하지 말자고, 대화를 나눠 맹세했으니 아무런 문제도 없을 거다.

 그런데도.

 아무래도, 마음이, 흔들린다―――



 옷장 문을 열곤, 에리코는 가만히 굳어 있었다.
 부잣집 아가씨는 아니라고 해도 에리코의 집은 나름대로 유복하다. 오빠 셋도 각자 성인으로서 직업을 가지고 있는데 아직 독립하지 않은 탓인지, 자금에도 여유가 있다. 에리코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도 있어, 오빠들은 경쟁하듯 여러 물건들을 사 준다. 옷도 역시 그렇다.
 그러니, 커다란 옷장 속에는 정말로 갖가지 옷들이 흘러넘치고 있다. 사랑스러운 것부터 어른스러운 것, 마음에 드는 옷도 있고, 한 번 입고 끝낸 것도 있다.
 창 밖에 눈을 향해보자, 한가득 하얀 광경이 펼쳐져 있다.
 데이트같은 건 지금까지도 여러 번 해 왔지만, 그 상대는 친오빠들 뿐이었다.
“그런 건, 진짜 데이트라고는 안 하려나.”
 에리코는 옷장에 팔을 뻗어서 옷을 꺼낸다.
 단지, 오늘이라고 해서 데이트가 될지 어떨지는 알 수 억다. 일방적으로 약속을 던진 것 뿐인 거다. 달력 너머로 보인 그녀에게 도전하듯이.
 그러니, 애쓸 필요는 없는거다.
 평소처럼 태연자약한 태도를 보여주면 된다. 그리고 사태를 즐기면 된다. 어떤 방향으로 굴러가도 재밌는 상황이 될건 틀림 없으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다―――



 각자의 마음을 안고, 시간은 흘러간다.

 
계속
~가운뎃말~
 흔히 있는 전갠가. 그런데 과연 어떻게 될까.

역자의 말:
 수! 라! 장!
 수! 라! 장!

 ……그런데 사실 잘 보면, 승자는 이 편에서 이미 정해져 있죠.
 그래서 유키가 누굴 고를지가 아니라, 어떤 수라장으로 끝날지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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