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42「환상들이」
「이걸로, 끝인가……」
레이무는 이마의 땀을 닦았다.
적수를 보기 드문 술식의 재능이 있는 레이무라 하더라도, 신체적 능력은 역시 인간의 범주에 속한다.
소녀의 가냘픈 팔로 기왓장과 돌덩이들을 들어내면서, 그 아래에 묻힌 물건을 꺼내는 것은 힘든 노동이었다.
이미 일각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겨우겨우 쓸 수 있을법한 것들을 대충 파낼 순 있었지만, 그건 거실이 있던 장소에만 한정될 뿐이었다.
부엌에 있던 식기나 식재료 등, 못 쓸 정도로 짓뭉개졌을 가능성이 높은 것들은 뒷전으로 미뤄뒀다.
레이무의 눈앞에는 잡일도구 한 세트와 무사했던 사유물 몇 가지가 늘어서 있었다.
스이카와 결투를 벌였을 때 파괴된 것 대신 린노스케가 새로 준비해준 음양옥 두 개.
평소에도 미리 준비해두고 있는 부적과 바늘.
이것들은 언뜻 보기에 망가지기 쉬운 듯 보이지만, 레이무의 힘이 담겨져 있기에 전부 상처 하나 없었다.
그밖에도 전투나 탄막놀이에 견뎌낼 수 있는 하쿠레이의 무녀용 장비는 전부 무사히 회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유물 쪽에서 무사한 것은 놀랄 만큼 적었다.
옷이 개어져 있던 서랍은, 떨어져내린 지붕의 무게에 어느새 부서져 있었다.
몇 벌 멀쩡한 옷이 있긴 했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몇 벌을 제외하곤 전부 못 쓸 만큼 찢어져 있었다.
청결함을 제외하곤 의복을 갖추는 데 있어 별다른 애착을 가지지 않는 레이무는 평소에도 무녀복을 입고 생활한다.
그것을 제외한 사복이라 한다면, 해봤자 잠옷이 다다.
딱히 그 옷들에 대한 집착은 없다.
못 쓰게 됐다면, 새로 사면된다.
하지만 서랍 안쪽에 넣어놨던 끔찍하게 찢어진 어머니의 옛날 옷을 찾아냈을 때, 레이무는 잠시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부러진 기둥 중에서, 몇 개의 상처가 난 기둥을 발견했을 때도 그랬다.
「──」
거의 모든 가구가 박살나는 꼴을 면하지 못했다.
목재에 깔려 부러진 낡은 재봉 용품 상자를 발견하고, 속을 확인한다.
아니나 다를까, 말도 나오지 않을 만큼 부서져 있었다.
부러져서 못 쓰게 된 바늘과 무사한 바늘을, 하나하나씩 추린다.
이 재봉 도구는, 일찍이 어머니가 썼던 것을 물려받은 것이다.
성장해가는 자신의 몸에 맞춰 옷을 다시 꿰매는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며, 자신도 그렇게 옷을 수선하곤 했다.
재봉하는 법은 「언젠가 혼자 생활할 때를 위해」라며 어머니에게서 받았다.
어머니는 결코 재봉을 잘 하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눈 깜짝할 새에 레이무가 더 잘하게 됐지만, 재봉을 다 배운 뒤에도 둘이 같이 작업하는 것을 좋아했다.
생각에 빠져 있던 레이무는, 손가락 끝에서 전혀져온 작은 통증에 제정신을 차렸다.
부러진 바늘에 손가락을 찔려버린 듯하다.
손가락 위에서, 핏방울이 점점 부풀어 오른다.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레이무의 시야가, 갑자기 흐려졌다.
뜨거운 무언가가 눈 안쪽에서 솟아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 느껴졌다.
손가락의 아픔 때문이 아니다.
가슴에 구멍이 뚫린 것 같은 아픔.
처음으로 느껴보는 괴로움.
부서진 것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한 자의, 절망.
「……으」
그렇게, 견디지 못할 정도의 상실감이 몰려들었다.
「으으……크……읏」
헐떡이듯이 벌어지려는 입을, 떨리는 손으로 부여잡고 이를 악물었다.
변해버린 집 위에서 꿇어앉은 레이무는 필사적으로 넘쳐흐를 것 같은 소리를 씹어 삼켰다.
당분간, 그렇게 견뎌낼 수밖에 없었다.
「──오매야, 이긴 또 뭐시여?」
갑자기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레이무의 몸이 굳었다.
마당과 이어진 계단 쪽이다.
마침, 등을 보이고 있는 자세.
점점 다가오는 발소리의 주인이 요괴의 기척을 흘리고 있음을 깨닫고, 레이무는 속으로 혀를 찼다.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평소의 레이무를 생각한다면 상상도 못했을 실수였다.
「─시방 일이 귀찮게 된 듯헌디」
태평하게 투덜대는 목소리를 등으로 들으며, 그 속에 요괴 특유의 하쿠레이의 무녀를 향한 적개심이 없다는 것을 느낀 레이무가 천천히 일어섰다.
아직 등은 돌린 채다.
적의가 없다곤 하지만 상대에게 이쪽이 동요했음을 일부러 가르쳐줄 생각은 없었다.
자연스럽게 눈매를 소매로 닦고, 두 눈에 가득 들어찬 열이 빠져나갈 시간을 벌기 위해, 레이무는 등을 돌린 채 입을 열었다.
「요괴주제에 참배라도 하러 온 거야?」
「으음. 기도 얼마든 혀줄 순 있지만……여긴 분명 하쿠레이 신사가 맞는 기가?」
「맞아. 여기가 하쿠레이 신사야」
「신사……없어져 부렸는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전」 하쿠레이 신사야. 이렇게 된 건 오늘 아침, 얼마 안 됐어」
「그기, 참말로……애통한 일이구먼」
풀이 죽어 돌아온 상대의 대답에, 레이무는 한숨을 내뱉었다.
몸에 남아 있던 마지막 의욕이 빠져나가고 말았다.
아무래도 상대는 하쿠레이 신사를 모르는 듯했다.
그리고 신사가 이렇게 된 원인 또한, 당연히 모르겠지.
이번 사건의 외부인이자, 외지의 요괴로 보인다.
낯선 요괴라는 이유에 최소한의 경계는 해두고 있지만, 냉정을 되찾은 레이무는 눈에서 느껴지는 위화감 사라진 것을 확인한 뒤 느긋이 몸을 돌렸다.
「아─, 그라믄 니가 하쿠레이 신사에 사는……살았던 하쿠레이의 무녀가 맞나?」
「맞아. 나는 하쿠레이 레이무야」
「그리 예의 차릴 필욘 없다카. 내는──」
「요괴잖아. 알고 있어」
「으, 음. 성격 한 번 딱 부러지는 아네……」
레이무는 다시금 그 요괴를 관찰했다.
목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알고 있었지만, 처음 보는 요괴다.
겉모습은, 레이무보다 나이 많은 여성으로 보였다.
많다고 해봐야, 늙은이 같은 말투와는 반대로 충분히 젊고 아름답지만.
얼굴은 「미모」라기 보단 「귀염성」이라 표현하는 게 올바를 듯한 싹싹한 점이 돋보였다.
콧잔등 위에 얹혀진 둥그런 안경이, 그런 부드러운 분위기를 더한다.
하지만 그녀가 인외의 존재라는 것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머리와 엉덩이에, 짐승의 귀와 꼬리가 돋아나 있었던 것이다.
「너구리 요괴?」
꼬리의 생김새를 살핀 레이무가 판단했다.
「맞다, 변신 너구리지」
「얼핏 보니, 꽤 대단한 힘을 갖고 있는 것 같은걸」
「오오, 아는 기가. 후후후, 내의 굉장함을 알아채다니 그리 젊은디 대단한 인재로구먼. 역시 하쿠레이의 무녀!」
가슴을 펴고, 이상한 모양새로 감동하는 상대방의 행태에, 레이무가 약간 탈진한 듯 늘어졌다.
적이 아니라지만, 이렇게까지 깜짝 놀라게 만드는 요괴는 드물다.
환상향의 요괴는 전부, 크든 작든 인간을 업신여기는 녀석들뿐이다.
그건 「인간은 요괴를 두려워한다」라는 섭리가 지켜지고 있는 이 세계에선 당연한 일이다.
그런 점을 따졌을 때, 눈앞의 요괴는 묘하게 인간을 허물없이 대하려 드는, 환상향 입장에선 이질적인 존재였다.
「……너, 혹시 바깥에서 온 요괴야?」
그 지적에, 눈앞의 요괴는 이제야 알아보았냐는 듯 얼굴이 펴졌다.
「그 말 대로여! 보는 대로, 내는 바깥세계서 온 요괴랑께!
……글타 혀도, 이가 환상향이라 카는 비경이란 건, 헤매다가 이야기를 듣고서야 알았지만 말이여」
「즉, 환상향에 들어와 살 목적으로 온 건 아니구나」
「맞구먼. 쉬이 풀어 얘기 허자면, 무슨 사건에 말려들어온 것이제」
「무슨 사건이라니?」
「그걸 모르겠다 이 말이여. 여긴 뭔가 크대나단 결계로 격리된 것 같은디, 그 결계를 우찌 넘어온 건지, 내도 전혀 알 수가 읍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여기에 있었을 뿐이여」
「흐─응」
레이무는 적당히 맞장구쳤다.
상대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 라는 사실은 왠지 모르게 감으로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할 정보 또한 갖고 있었다.
원인은, 아마 그 지진일 것이다.
「솔직히 말하는 것인디, 내는 환상향에 오기 직전에 바깥세계의 어느 곳을 찾아가던 중이었어. 잠깐 관광이라도 해볼까 혀서 말이여」
「어떤 장소라니?」
「그기 이름은 하쿠레이 신사라고 혀, 이미 찾는 아도 없는 다 낡아빠진 신사제」
──「바깥세계」의 하쿠레이 신사인가.
레이무는 그 말을 듣고 확신했다.
그녀가 있던 장소가, 지금 이 장소와 마찬가지로 환상향의 경계선일 가능성이 높다.
딱, 이곳이 환상향의 안쪽이며, 저쪽이 바깥쪽.
그곳으로부터, 지진을 계기로 결계를 건너왔다.
그때, 눈앞에서 어머니가 사라져버린 것처럼.
지진에 의해서 발생한 결계의 벌어짐에, 환상향에서 튕겨나간 것이 어머니이고, 바깥세계에서 빨려온 것이 이 요괴다.
거기까지 생각이 도달하자, 레이무의 가슴이 크게 뜀박질했다.
결계의 균열을 넘어 환상들이한 눈앞의 요괴가 이렇게 무사하다면, 같은 상황에 처한 어머니 또한 바깥세계에 무사히 있을 것이다.
「여기로 넘어왔을 때, 넌 어디에 있었어?」
생각지 못한 정보를 손에 넣고 기뻐 날뛰고 싶은 마음을 숨기며, 레이무가 물었다.
「정신이 차리니께 눈앞에 호수가 있었제. 신사가 있는 곳은 산일 턴디, 주변 공기가 생판 달라져서 당황하긴 혔지만서도, 우연히 거기서 만난 요정이 마을로 안내해 준 덕에──」
「아, 그 다음 일은 됐어」
「아니아니! 바깥세계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게 된 요정과 만난 것도 그렇지만, 그로부터 듣는 아도 말하는 아도 질질 짤 눈물겨운 여정이──」
「길지?」
「그려」
「그럼 됐어」
「그, 그렇구먼」
추욱 하고 귀를 늘어뜨리는 그녀를 무시하며, 레이무는 생각하는 데 온 정신을 쏟았다.
경계를 사이에 둔 바깥세계의 하쿠레이 신사와 이곳이 지리적으로 일치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아무 연관도 없는 안개의 호수에서 나타난 것으로 보아, 완전히 랜덤한 장소로 전이된 것은 틀림없다.
그렇다면, 어머니도 똑같은 상황에 빠져 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무사하단 것은 알았다.
하지만 어머니가 돌아오기 위해선, 단순히 여기서 바깥세계로 향하는 길을 여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말았다.
바깥세계 어디로 날아갔는지도 모를 인간 한 명과 요괴 한 마리를 찾아야 할 이유가 생긴 것이다.
희망과 함께 새로운 문제가 나타나 눈썹을 찡그렸다.
「……뭔지는 모르겄지만, 니도 꽤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는 것 같은디」
입을 다문 레이무를 향해, 그 요괴가 말했다.
상대를 염려하는 마음이 가득 담긴 상냥한 목소리였다.
「뭐어, 그야 이를 보면 딱 나오긴 하지만 말이여」
싫어도 눈에 들어오는, 기왓장과 돌조각들의 산으로 변해버린 하쿠레이 신사였던 것을 둘러보며, 쓴웃음을 짓는다.
이상하게도 불쾌함이 느껴지지 않는 미소였다.
「그러고 보니, 넌 왜 하쿠레이 신사에……」
「오오, 그 마을에서 또 이것저것 들어부려서 말이여. 바깥세계로 돌아가고 싶음 하쿠레이의 무녀한테 상담하라 카더라」
「바깥으로 돌아가고 싶어?」
「여기도 매력적이긴 혀고, 두고 온 가족도 없다. 근디, 당장 이주하자니 이야기가 쪼까 갑작스러워 탈이다 아이가」
팔짱을 낀 채 난해하단 표정으로 요괴가 그르렁댔다.
아무래도 돌아갈 생각은 있어도, 반드시 그럴 필요까진 없는 듯 보였다.
지금 상태에선 딱 좋은 이야기다.
환상향에 들어온 바깥의 인간을, 다시 바깥 세계로 돌려보내는 것 또한 레이무의 일이다.
인간 한 명 정도라면, 레이무 개인의 판단으로 결계에 간섭하여 바깥세계로 이어지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평상시의 이야기.
「……무슨 말을 하는 건진 알겠어. 하지만 아무래도 당장 돌려보내줄 수 있을 것 같진 않아」
사정을 듣지도 않고, 사태를 파악했다는 듯 요괴가 한숨을 내쉬었다.
「운이 나빴네」
「그쪽도, 재난이었제」
「딱히 너한테 동정 받을 이유는 없어」
「집이 폭삭 무너져부렸잖여. 그럼 울고 싶어질 만도 하제」
「딱히 울지 않았는데」
「그려. 뭐, 용케 숨기고 있구먼」
어린 아이를 대하듯 돌아온 대답에, 레이무가 불쾌하단 표정을 지었다.
무의식적으로 눈매를 어루만진다.
본인은 위화감을 느끼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거울을 보지 않는 한 알 수 없다.
눈앞의 요괴는, 그 사소한 변화를 꿰뚫어 보았을 수도 있다.
너구리 요괴답게, 얕볼 수 없는 상대다.
노려보듯 상대를 향해 눈빛을 쏘아냈지만 정작 그 상대는 허리에 손을 얹고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럼, 지금부터 우짤꼬──」
별 거 없는 혼잣말을 흘려들으면서, 레이무도 똑같이 위를 향해 고개를 들어올렸다.
딱히 따라 본 것은 아니다.
이번엔, 하늘로부터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존재를 확실히 알아챘기 때문이다.
하늘에 작은 사람의 그림자가 비춘다.
그것이 천천히 이 장소를 향하여 날아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레이무는 두리번두리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몇 번을 다시 봐도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곳에 있는 것은 기왓장과 돌조각으로 쌓인 산뿐이다.
무너져버린 하쿠레이 신사의 잔해다.
귀찮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뱉은 레이무는 고개를 다시금 위로 돌렸다.
「여어」
마당에 내려서며, 그 그림자는 레이무에게 자연스레 인사를 건넸다.
「마리사. 무슨 볼일이라도 있어?」
레이무는, 자신을 찾아온 마리사를 향해 쌀쌀맞게 대꾸했다.
「뭐야, 오늘은 왠지 기분 나빠 보이네」
「그래 보여?」
「뻔히 보인다고. 난 반대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너네 어머니가 오는 날 아니었어?」
「어머니는, 올 수 없게 됐어」
「아하~앙, 그래서 기분이 안 좋았던 거구나」
마리사는 다 알았다는 듯 심술궂은 미소를 지었다.
「그럴지도」
레이무는 적당히 맞장구를 치며, 착각에 맞춰 대답했다.
「그래서 그렇게 혼자 거실에서 토라져 있는 거야?」
그런 지적을 받은 레이무가 시선만을 움직여 발밑을 바라본다.
여전히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채, 일찍이 거실이었던 곳 위엔 잔해만이 겹겹이 쌓였을 뿐이다.
시선을 올리자, 마리사는 레이무의 생각대로 여전히 심술궂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너도 올라올래?」
「됐어, 사양할게. 나도 푸념 정도는 들어주고 싶지만 할 일이 있거든」
「그럼, 대체 여기 뭐 하러 온 거야?」
「네 어머니가 있었으면, 널 빌미로 차라도 한 잔 마시고 갈 생각이었지만. 주제는 딴 거야」
「주제?」
「아. 그게 말이지, 레이무──아무래도 이변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아」
그렇게 말하는 마리사의 신묘한 얼굴을 바라보며, 레이무는 가볍게 뺨을 긁적였다.
한 번 더, 시선을 돌린다.
무너진 하쿠레이 신사.
그 잔해 위에 서 있는 자신.
그리고 눈앞엔 자신만만한 표정의 마리사.
이윽고 레이무는 모든 게 납득됐다는 듯 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놀랍네」
「뭐야, 그렇게 모른 척 안 해도 된다고. 어차피 너니까 무슨 감이라도 잡았을 거 아냐」
「그럴지도」
「사실, 나도 아직 확증은 없어.
아침에 일어나보니, 집 바깥에서 비가 내리고 있었어. 그런데 마법의 숲에서 나와 보니, 그 숲 바깥으론 비가 내리지 않았단 말이지. 그게 다가 아니야. 홍마관 주변에만 안개가 자욱하게 끼기도 했고, 눈까지 내리는 곳도 찾았어」
「이상 기상이라는 거구나」
「아직 거기 말고도 다른 곳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을 거야. 그리고 난 이걸 누군가 벌인 짓이라 예측했단 거지」
「오호라」
「잠깐, 아무 말도 하지 마! 레이무, 너라면 감으로 대충 누가 범인일지 알고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나한테는 내 방식이 있어」
마리사는 빗자루에 걸터 앉으며 말했다.
「나는 이번 사건을 좀 더 조사해볼 거야. 하쿠레이 신사에서도 뭔가 이상한 일이 생기진 않았나 보러 왔다만──」
「보는 대로야」
「그래, 지금은 딱히 아무 일도 없어 보이네. 기다리던 날이 떠나간 바람에 네 기분이 나빠진 걸 빼면 말이야」
마리사가 장난스런 미소를 지었다.
악의를 갖고 저러는 게 아니란 것쯤은, 마리사와 오래 사귀어온 레이무도 안다.
그녀 나름대로, 기분이 나빠진 친구를 격려하고 있는 것이다.
「할 맘 없으면, 거기서 계속 차라도 마시고 있으라고. 이번 이변은, 내가 해결해줄 테니까!」
마지막으로 선언하듯 말을 마친 마리사가 하늘 높이 뛰어올랐다.
뒷모습이 눈 깜짝할 새에 멀어져갔다.
왔을 때처럼, 갑작스런 작별이었다.
「……바람 같은 아구먼」
그때까지 계속 입을 다물고 있던 요괴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레이무는 그 친절해 보이는 미소가 지어진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역시, 네가 한 짓이구나」
「아까 그 아의 눈을 속인 거 말이여?」
「맞아. 악의가 없었으니까 가만 놔둔 거야」
「역시, 니한텐 안 통했나벼, 어쩐지」
그렇게 말하고, 턱을 가볍게 어루만지는 요괴.
레이무의 지적에 대한, 행동을 통한 긍정이었다.
조금 전, 신사를 찾아온 마리사가 무너진 하쿠레이 신사 위에 서 있는 레이무와 부자연스러운 대화를 나눈 것도.
바로 옆에 서 있는 듣도 보도 못한 너구리 요괴의 모습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던 것도.
모두, 그 요괴 본인이 벌인 일이란 것에 대한 긍정이다.
「너구리답게 사람을 속였을 뿐이여」
「마리사가 집에 들어오려 했으면, 어쩔 생각이었어?」
「그 아 말대로, 차 한 잔 정도야 이래저래 속일 수 있구먼. 차의 정체는 그냥 물이었겠지만 말이여」
「소변이나 대변이 아니라니, 양심적이네」
「니 우리 변신 너구리를 그렇게 악랄한 요괴로 몰지 말어. 혹시, 쓸데없는 참견이었던 겨?」
「아니, 고마워. 마리사한테는 이 상황을 설명해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친구 맞제?」
「맞아」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았나 보구먼」
「쓸데없이 걱정에 빠져서, 본인보다 자기가 더 화내는 성격인걸, 저 녀석. 말해준다 쳐도, 일이 전부 끝난 뒤에 해주고 싶었을 뿐이야」
「그렇구먼. 내가 해준 게 도움이 됐다면 다행이여」
「너는, 요괴 주제에 꽤 특이하네」
「때와 경우에 따라 달러. 내도, 나쁜 맘 먹고 인간한테 구라를 치기도 혀니께. 그려도 지금은 그래봤자 의미 없잖여. 아 하나가, 상처 받을 뿐인디」
「난 애가 아냐」
작게 뺨을 부풀리고 반론을 펼치는 레이무의 모습에, 요괴는 웃으며 끄덕일 뿐이었다.
레이무는 그 요괴를 대하기 어려웠다.
지금까지 나눈 대화로, 눈앞의 요괴가 적이 아니라, 오히려 우호적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알았기에, 괜시리 대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상태만 평소 같았다면, 이런 인상은 받지 않는다.
역시, 지금의 자신은 상태가 이상한 게 분명하다.
혼자서 기왓장과 돌덩이들을 밀어 헤칠 동안 느껴지던 울적한 기분이 어느새 가벼워진 것에, 감사함조차 품을 정도였으니까.
레이무는 외면하듯 상대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기왓장과 돌덩이 아래에서 무사한 것들을 회수하는 작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거실이 있던 곳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여 다시금 작업을 이어나가려 하던 레이무는, 말없이 고개를 뒤로 돌렸다.
「왜, 너까지 끼어드는 거야?」
도우려 드는 요괴를 노려보며, 레이무가 물었다.
「내 목적은 알려줬구먼. 내는 바깥세계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여」
「오늘은 무리야. 얼른 딴 데로 가서 오늘 밤 묵을 곳이라도 찾아」
「딱히 노숙을 혀도 곤란치는 않여. 그보다야, 네 일을 도와주고 조금이라도 빨리 돌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을 뿐이제」
그런 대답에 레이무는 말문이 막혔다.
이제 와서 이 요괴가 무슨 계획을 꾸미고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지만, 단순히 친절하다고 순순히 받아들일 수도 없다.
하지만 괜한 참견을 하지 말라거나 동정이냐고 되묻기엔, 자기 스스로가 가엽고 비참하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싫다.
상대는 그런 레이무의 심정까지 헤아리고 그런 대답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역시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결국, 어디까지고 자신이 걱정 받고 있을 뿐임을 깨달은 레이무.
왠지 분한 기분에 묵묵히 주저앉고는, 양손을 바삐 움직이며 기왓장과 돌덩어리를 치우기 시작한다.
이미 다른 두 손이, 마찬가지로 침묵을 지키며 그녀를 돕고 있었다.
「……너」
「응?」
레이무는 상대의 얼굴을 보지 않은 채 말했다.
「아직, 이름 듣지 못했는데」
「아, 그러고 보니 그랬구먼」
과장되게 놀란 목소리의 주인을, 다시금 바라본다.
「내 이름은 「후타츠이와 마미조」여. 편하게 마미조 씨라고 불러도 좋구먼」
마미조는 그렇게 말하고는, 애교 섞인 미소를 지어보였다.
◆
작은 가게였다.
언뜻 보면, 평범한 주택처럼 보이기도 했다.
입구 위에 걸린 간판에는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어려운 한자가 쓰여 있어 뭐하는 곳인지도 알 수 없었고, 고객에게 어필하기 위한 쇼 윈도우 또한 없다.
상용자가 아닌 간판의 한자를 보고 겨우 중국과 관련된 가게임을 아는 게 다였다.
특히, 현재는 밤이라 문을 닫은 상태.
영업 중이었다면 이것 말고도 입간판이나 현수막 같은 게 걸려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런 것도 없다.
선대와 사토리는 청아의 손에 이끌려 그런 건물 안으로 초대 받게 되었다.
「침구사로서 낡은 가게를 운영하고 있답니다. 그밖에 한방약을 처방하기도 하죠」
매장을 지나, 뒷문을 통해 생활공간이 자리 잡은 실내로 안내 받은 두 인요.
열쇠가 잠겨 있었던 점이나, 불이 꺼져 있었던 것을 보면 홀로 생활하는 듯했다.
여자가 홀로 자취하는 곳에, 처음 만난 사람을 둘이나 들이는 건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꽤나 조심성 없는 일이긴 했지만, 청아의 정체를 아는 선대와 사토리 입장에선 아무 문제도 없었다.
그녀는 현대사회 속에서 살아남은 신비의 구현자.
인간을 초월한 「선인」이다.
적어도, 청아에게는 건물 옥상을 건너다니며 도망치는 선대에게 눈치채이지 않고 추적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이 있다.
「한방약이라면, 「선단」 같은 것에 쓰이는 기술을 살려 생활하고 있는 건가요」
청아의 설명에, 사토리가 자신의 지식을 드러냈다.
선단이란, 선인이 되기 위한 약이다.
의학적으로 약효가 해석된 약은 아니다.
실재하는지 하지 않는지도 모를 재료를 쓸 뿐만 아니라, 만들 때 들어가는 양이나 순서조차 제대로 알려진 것이 없다.
현실적이지 못한 영약이다.
하지만 먼 옛날, 선인의 약은 병이나 상처를 낮게끔 하는 신비한 효능을 보였다.
그로부터 파생된 시대의 진보에 맞추어진 기술. 청아는 그것을 생업으로서 사용하고 있을 것이다.
사토리는 이미 거기까지 추측한 지 오래였다.
덤으로, 옆의 선대는 평소와 똑같은 무뚝뚝한 표정을 지은 채, 평소와 똑같이 이 대화의 뜻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침구사가 어떤 직업인지, 필사적으로 떠올리려 하고 있을 정도였다.
「침은 「바늘 치료」를 뜻하고, 구는 「뜸 치료」를 말하는 거군요. 이 세계에선, 이미 옛날 의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마음을 읽은 사토리가, 대화를 잇는 것처럼 가장하며 자연스레 나를 도왔다.
집안을 분주히 돌아다니던 청아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아다닌다.
「자세하시네요, 현대사회에」
우호적인 미소 속에 숨겨진 탐색전.
하지만 청아는 그것이 아주 쓸데없는 짓임을 바로 깨달았다.
그 「눈치」까지, 사토리는 이미 읽어냈을 테니까.
사토리의 능력 앞에선 자신의 속내를 숨기고 상대를 살피려는 행동 따윈 무의미하다.
일방적으로 정보가 알려지고 마는 상황의 고단함에 쓴웃음을 지으며, 청아는 그 둘을 거실로 안내했다.
앤티크한 가게 풍경과는 반대로, 깔끔하면서도 넓은, 매우 신세대적인 인테리어로 꾸민 방이었다.
청아 본인이 말했던 「낡은 가게」로 보기엔, 조금 다르단 느낌이 들었다.
낮의 태양처럼 밝은 빛을 내뿜는 형광등은, 환상향에서 살아오던 두 명의 눈엔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다.
사토리에 이르러선 거실 한쪽에 있는 시스템 키친이 무슨 설비인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지금 차를 준비해오죠」
청아가 준비를 하는 동안, 중앙의 탁자의 앉은 두 인요──특히 사토리는 실내를 신기하다는 듯 둘러보고 있었다.
선대의 기억이나 그녀에게 들은 이야기들 덕에 어느 정도의 지식은 있다.
하지만 바깥을 돌아 다녔을 때처럼, 눈앞에 그 환경을 두고 체험하자니 다르게 다가오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옆에 앉은 선대와 자신의 차이를 다시금 실감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오래 살아온 환상향과의 차이에 당황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적응한 듯, 침착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머릿속의 지식만이 아니다.
그녀에게는 환상향이 아닌 다른 세계에서 생활했던 때의 기억이 영혼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것이다.
선대는 환상향의 인간이 아니며, 또한 바깥세계의 인간도 아니다.
이세계에서 전생해온 인간.
아무리 생각해도 특이한 존재였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사고에 빠져들려던 그 순간, 청아가 두 명의 앞에 녹차가 타진 머그컵을 내려놓았다.
사토리는 특유의 눈치로 선대 앞에 놓인 컵이 자신의 것보다 큰 남성용품임을 알아챘다.
지금 앉아 있는 탁자 또한, 혼자서 쓰기에는 과하게 큰 물건.
무엇보다도, 의자가 여러 개다.
그게 뭐 어떻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사토리는 사소한 정보 하나조차 놓치지 않도록 집중했다.
경우에 따라선, 지금부터 교섭을 벌여야만 하는 상황.
탁자 너머의 정면에 위치한 의자에, 청아가 자리를 잡는다.
드디어 본격적인 주제를 가진 대화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그럼,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볼까요」
그렇게 말하는 청아의 얼굴에는, 즐기는 듯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표정을 꾸며낸 것이 아니다. 마음을 읽혀지는 대화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사토리는 선대에게 시선을 보냈다.
마치 미리 짠 것처럼 서로의 시선이 마주친다.
자신의 생각을 선대에게 전하는 능력 같은 건 없었으나, 그 둘은 극히 자연스럽게 아이콘택트를 통한 의사소통을 이룩하고 있었다.
──대화는 사토리가 진행한다고 봐도 좋겠지?
선대의 마음을 읽고, 사토리는 눈동자를 굴려 긍정했다.
──당신은 도움이 안 되니, 쓸데없는 소리 말고 잠자코 계세요.
들리지 않을 터인 대답을 받은 선대는, 속으로 주눅 들었다.
그것을 무시하며 시선을 청아에게 되돌리고, 사토리가 입을 열었다.
「그러면, 우선 저희들의 자기소개부터 시작하도록 하죠──」
◆
사토리는 청아가 자신들을 집에 초대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유가 어떻든 간에, 그 행동이 고립무원에 빠진 자신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도.
환상향에 돌아가기 위해선, 청아의 협력이 필요불가결하다.
다소의 무례함엔 눈을 감아줄 요량도 있다.
「과연. 환상향이란 말이죠──」
사토리의 간결한 설명을 들은 청아는, 감명 깊다는 듯 중얼거렸다.
설명은 정말로 간단했다.
자기소개의 내용은, 서로의 이름과 종족 뿐. 환상향에서의 지위나 직무마저 말해주지 않았다.
환상향이라는 장소와 그곳에서 이곳에 이른 경위까지는 자세히 설명했지만, 그것도 필요하다고 판단한 범위 내에서만 했을 뿐이다.
주어진 정보를 주축으로, 불투명한 사실을 향한 의문은 당연히 생겨나는 법.
청아는, 그 의문을 일부러 말하려 들지 않았다.
구멍이 숭숭 뚫린 이야기를, 마치 아이가 동화를 듣듯 즐겁게 경청할 뿐이었다.
「저 또한 이래봬도 선인 나부랭이. 현대사회로부터 사라져가는 요괴나 신이 살아가는 외지에 대한 소문은 들은 적이 있어요」
「일부러 가리지 않아도 됩니다. 천년을 넘게 살아온 선인인 당신은, 환상향이 결계로 단절되기 이전에도 그 존재에 대해 보다 직접적으로 파악하고 있었겠죠. 직접 방문한 적이 없다는 말은 사실로 보이지만요」
「어머, 그랬었죠. 당신 상대로 책략을 도모하는 건 쓸모없는 일이었어요」
사토리의 지적에, 청아는 감정이 상하지도 않은 듯 미소를 지어보였다.
「애당초, 제쪽에선 딱히 교섭을 벌일 생각은 없었지만요. 당연히, 이것도 믿어주실 수 있겠죠?」
「저희들의 목적에 협력해주시겠다는 건가요」
「예에, 여러분이 환상향에 돌아갈 때까지 도와드릴 수 있게 해주세요」
「담보는 아무것도 없습니다만」
「그것도 아직은 모르는 일 아닐까요?」
「……고생이 많을 것 같은 성격이군요. 아니, 버릇이라고 말하는 편이 좋을까요」
「어쩔 수 없죠」
말과는 정반대로, 청아의 표정은 만족스러워 보일 정도였다.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사토리에겐, 보다 구체적인 그녀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진절머리가 났다.
왜, 자신의 주변엔 괴짜만 모이는 것일까.
「저, 강한 사람을 아주 좋아하니까요」
청아는 두 명에게──특히 선대에게 뜨거운 시선을 보내며 속삭이듯 고백했다.
선대는 표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동요했고, 사토리는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런 의미로, 두 분은 아주 매력적이랍니다. 힘이 되어드리고 싶어요. 저, 한다면 하는 여자라고요」
「선대는 그렇다 쳐도 저까지요?」
「마음을 지배한다는 건, 궁극적인 힘의 모습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죠」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닙니다만」
「괜찮아요. 제가 좋아서 할 뿐이니까요」
「질릴 때가지, 말이죠」
「후후훗, 그런 점이 멋져요」
사토리에겐, 그런 말이 숨기지 않은 진심임이 훤히 보였다.
서투른 타입이다.
야쿠모 유카리가 만약 자신에게 호의적이었다면, 이런 인상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적대하고 싶진 않지만, 아군으로 두기도 꺼려지는 상대다.
하지만 마침 딱 좋은 상황이라는 것엔 변함이 없다.
처음 결의한 대로, 환상향에 무사히 돌아가기 위해서 참아야만 하는 것도 있다.
「──그러면, 환상향에 돌아가는 일에 협력해주실 수 있다고 봐도 무방하겠죠?」
「예, 도와드릴게요」
그때, 침묵을 고수하던 선대가 갑작스레 입을 열었다.
「청아, 네가 원하는 건 그게 다인가?」
툭하고 던지듯 건네진 말.
본명을 불린 청아가 뺨을 붉혔다.
「우리에게, 뭔가 바라는 바는 없나?」
「보수를 요구하지 않겠냐는 말인가요?」
「그렇다」
「상냥하네요. 저, 상냥한 분은 좋아해요」
「당연한 권리일 뿐이다」
「아앙, 그런 재미없는 점도 멋져」
「이제 뭐가 됐든 좋은 거 아니냐」라고 딴지를 걸고 싶어지는 마음을 다잡으며, 사토리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청아가 보수를 바라지 않고──나쁘게 말하자면 자기 멋대로 자신들을 도우려 하는 것은 틀림없이 본인의 의지다.
앞날을 예측하고 타산지석을 쌓으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순수하게, 자신의 욕구와 욕망대로 행동할 뿐.
그것이 결과적으로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선대는 그것에 납득하지 못한 듯, 순수하게 보답해주고 싶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원작 지식을 가지고 있다지만 고의적일 정도의 기존 캐릭터에 대한 호의적인 해석은, 그대로 처음 만난 상대에 대한 경계심의 결여와 직결된다.
그게 바로 선대가 위험한 점이다.
──이 선인, 생각보다 훨씬 귀찮은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사토리는 분위기를 읽고는, 일부러 경고하려 들진 않았다.
이대로 착각하게 두는 편이, 결과적으로 좋은 방향을 향해 나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우리들에게 가능한 일이라면, 뭐든 해주마」
「후훗, 당신 정도의 사람이 그리 쉽게 「뭐든지」란 말을 입에 올려선 안 돼요. 하지만, 그렇게까지 말하신다면야──」
청아는 살짝 몸을 앞으로 내세웠다.
「저도, 당신들과 함께 환상향으로 가게 해주세요」
그 요구는, 선대에게도, 사토리에게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사토리는 이미 마음을 읽어 알고 있었다.
선대가 보자면, 청아가 환상향에 오는 것은 이미 정해져 있는 일이다.
서로의 의견을 조율할 필요도 없었다.
「괜찮겠지. 모두 함께 가도록 하자」
선대가 대답했다.
청아는 꽃이 핀 것 같은 미소를 지었다.
「기뻐요! 당신과 함께, 환상향의 흙을 밟을 수 있다니」
「바깥세계에선 청아에게 도움을 받으마. 그 대신, 환상향으로 돌아가면 내가 네게 도움을 주지」
「예. 신세를 지겠어요」
사토리는 곁눈질로, 기가 막힌다는 듯 선대를 바라봤다.
무어라 조언이나 충고를 줄까 해서 말을 꺼내려다가, 결국 전부 내다 버리겠다는 듯 차를 입에 머금는다.
이젠 참견하기도 귀찮다.
뭣보다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사토리는, 선대와 청아의 대화 속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인식의 차이를 무시하기로 했다.
둔한 선대가 나쁘다.
멋대로 아수라장에 들이 박아버리라지.
그 대신, 다른 일에 대해선 참견하기로 했다.
「환상향에 오는 건 좋습니다만, 그렇게 간단히 이곳에서의 생활을 버려도 괜찮나요?」
사토리는 솔직히 물었다.
「보아하니, 가족이 있는 듯하던데」
「아니요, 가족은 없어요」
「적어도 남성과 동거하고 있는 건 아닌가요?」
「확실히 결혼은 했었죠. 하지만, 남편은 몇 년 전에 죽었고, 아이도 없어요」
「미망인 떴다 이거!」라며 왠지 모르게 텐션이 오른 선대의 마음속 절규를 무시하며, 사토리는 이어지는 청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거기에, 이 세계에 미련은 없답니다」
툭하고 내던져진 말.
입가의 미소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차가운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이윽고 찾아올 앞날에, 아무 기대도 하지 않아요. 실망했다고 말해도 괜찮겠죠」
「이곳에서의 생활이 질렸다는 건가요?」
「그렇네요.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아깝군요. 부족한 것 하나 없어 보이는 생활인데……」
마치 그럴거면 자기한테 달라는 듯 부럽다는 표정을 지은 사토리를 보며, 청아는 작게 쓴웃음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 또한 곧바로 허무하게 변해버린다.
「확실히, 지금 생활은 옛날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편리해졌어요.
옛날이라는 건, 제가 선인이 된 천 년 전도 아니에요. 그저 수십 년 전과 비교해도, 기술의 진보와 사회의 발전은 눈부신 것이었죠.
사람의 힘은, 일찍이 애매함으로 가득 찬 어둠을 몰아내고, 그곳에서 숨죽인 채 살던 환상을 쫓아냈죠. 상처나 병은 요괴가 한 짓이 아니며, 폭풍이나 해일은 신의 분노가 아님을 알게 된 거예요.
일찍이 농락당할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재앙. 인간들은 그것을 자신들이 만들어낸 기술과 학문으로 극복하고, 지금 그들이 살아가는 환경조차 스스로 만들게 됐죠. 안전한 것에서 끝나지 않고. 보다 편리하게, 보다 쾌적하게, 세계를 창조했죠. 보다 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
「시대와 함께 발전해가는 세계의 모습에, 저도 한 번은 매료됐어요. 개인의 힘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가진 힘의 가능성. 그것이 열어준 새로운 세계──」
「우주, 로군요」
사토리가 청아의 마음속에 그려진 것을 읽어내고, 말로서 표현했다.
선인인 청아에게서 「우주」라는 말이 나왔다는 사실에, 선대는 표정 변화 없이 놀라고 있었다.
저 무녀는 해당사항이 없다지만, 음양도 같은 술식을 사용하는 하쿠레이의 무녀로서 그 반응은 좀 아니지 않은가 하는 생각에 사토리는 기가 막혔다.
풍부해 보이는 지식이나 뛰어난 감성이, 이런 근본적인 부분에서 현대인스럽다.
이런 점이 바로 선대무녀에 대한 주변의 인식과 현실의 차이였다.
우주라는 말은, 과학적인 전문 용어가 아니라 아득한 옛날부터 종교 등에도 존재했던 개념이다.
청아의 놀라움과 흥미는,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물리적인 방법을 통해 그곳에 도착했다는 사실과 쾌거를 향한 것이겠지.
「월면 착륙이 보도된 날이, 벌써 40년 전이네요. 그때는 주제도 모르고 감동했어요.
사람의 손으론 결코 닿지 못할 하늘에서 빛나는 환상의 존재, 그 날 인류는 그것을 단순히 거대한 돌덩이에 발을 디뎠을 뿐이라 말했죠. 그 뒤로 이어진, 대지도 천공도 넘어선 무한한 세계를 발견했으니까요.
오랫동안, 그저 강한 힘을 가진 자에게 매료되어 방황을 일삼을 뿐이던 저조차, 그 터무니없이 확대된 세계를 알고, 인간이 이룩할 미래를 향한 진보라는 막연한 가능성에 꿈을 꿨답니다」
청아는 쉴 새도 없이 말을 이었다.
마음을 속일 수 없는 사토리의 능력 앞에서, 말하지 않아도 괜찮은 것까지 전부 고백해버리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로부터 40년. 그렇게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인간은 아직 화성에조차 도달하지 못했어요.
21세기는 우주의 세기니 뭐니 했지만. 지금은 그저 환경을 지킨다느니, 경기대책이 어떻다느니 하면서 안쪽으로 눈을 돌릴 뿐. 자신이 넓힌 생존권을 관리하고, 유지할 수밖에 없게 됐죠」
마치 상냥하게 매도하는 듯한 말투였다.
「어느 누구나, 뭘 하려고 태어난 건지 생각하지도 않는 사람들 뿐. 세상을 인공물로 채워버린 탓에, 모든 것이 규격통일화 되고 사람의 가치관 또한 평등함이 미덕이 되어버렸죠.
특출 난 힘과 인격은 부정되고, 소리 높여 호소하는 사람을 이상하다 여기고 야유하는 세계가 되고 말았어요.
이곳엔 이미 보편적인 관리 아래 존재하는 것들뿐이에요. 제가 한때 꿈꾼 무한한 가능성도 없고, 제가 사랑하는 힘을 가진 존재도 없죠.
텔레비전이나 신문에서 들먹이는 유명 스포츠 선수 같은 「초인」의 정체는, 같은 인간의 상식이나 상상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틀에 박힌 존재에 불과해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겠어요. 하지만, 당신이 바라는 건, 천 명의 인간을 죽이고 영웅이라 불리는 존재라고요」
「훌륭해요. 그렇게 수많은 목숨을 죽여서라도 자신의 의지를 내세우려 드는 마음과 그것을 가능케 하는 힘──그런 사람이 있다면, 분명 아주 좋아하게 될 거예요」
「──」
「주변의 뛰어난 환경이 길러준 힘 따위가 아닌, 열악한 환경 속에서 덤벼오는 시련을 떨쳐낼 만큼 강한 힘이야말로, 제가 사랑해마지않는 것이죠.
지금의 인간은 확실히 뛰어난 기술이란 힘을 가졌지만, 그건 아무 가치도 없는 인간조차 손에 넣을 수 있는 보편적인 힘. 스스로가 만들어낸 정교한 종이호랑이를 등에 업은 쥐떼로밖에 보이지 않아요.
──정말로 뛰어난 힘이라는 건, 개인만이 가지는 거라고 생각해요.
집단 속에서 홀로 튀어나온 것. 주변을 휘말리게 하는 폭풍의 눈. 상식에 들어맞지 않는 자. 비정상적임──굳건히 쌓여진 사회의 골조를, 단숨에 부서 버릴 수 있는 그런 것들이야말로 진정한 「힘」이겠죠」
어느새, 청아의 시선과 목소리엔 뜨거운 열기가 깃들어 있었다.
스스로가 살아가는 세계를──현대사회에 대해 말하던 때처럼 싸늘히 식은 감정이 아니다.
청아는, 선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 속에, 불길이 일었다.
눈을 통해서, 몸속에 있는 불길로 육체를 불태우는 것처럼 보였다.
조금 전, 그녀가 말했듯이, 지금까지의 생활 속에서 찾아내지 못했던 그 열기를, 선대를 보는 것으로 되찾은 것이다.
「고쳐 부르도록 할게요, 선대무녀님. 저는, 당신이 거리에서 일으킨 사건의 자초지종을 눈에 담았답니다」
청아는 뜨겁고도, 속삭이듯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이 쌓아올린 기술과 군중이 가진 상식마저 손쉽게 파괴하는 힘. 그것을 눈앞에 둔 범부에 불과한 인간들은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에 두려워하겠죠.
하지만 당신은 개의치 않아요. 신경 쓸 이유도 없죠. 왜냐하면, 당신은 강하기에. 상식 따위에게 붙잡히지 않기에.
당신이 길을 걷기만 해도 불안해하고, 그 의도를 착각하는 겁쟁이들 따윈 눈에 넣지 않아도 괜찮아요.
저는, 그런 당신이 가고 싶은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그저 보고 싶을 뿐이랍니다. 당신이 그 힘을 발휘하는 모습을 부디 옆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주세요」
◇
하루의 피로를 달래는 데엔 목욕탕이 최고지.
목욕은 생명의 세탁이야, 라고 서비스를 자주 외치는 사람(숙부 말고)이 말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지만, 환상향이 아니라 그녀가 사는 세계와 비슷한 현대에서 이런 말에 가슴 속 깊이 공감하게 되다니, 얄궂은 일이다.
지금, 나는 사토리와 함께 청아의 집에 있는 욕실을 빌리는 중이었다
이러쿵저러쿵 대화를 나눈 끝에, 청아가 우리들을 도와주게 됐다.
이 「도움」이라는 것은 환상향으로 돌아가는 것에 협력하는 것만이 아니라, 돌아갈 때까지 우리들의 의식주까지 제공한다는 것이 조건이었다.
목욕탕만이 아니라 잘 곳까지 마련해주었다.
내일 아침식사는 「실력을 보여드려야겠네요」라며 힘을 냈고, 우리들의 옷도 현대와 어울리는 것으로 사준다고 한다.
물론, 비용은 전부 청아의 지출이다.
매우 고맙다는 생각과 함께, 무서울 정도로 황송한 제의였다.
이렇게까지 해주면서 정작 본인이 별다른 담보나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고 하니, 아무래도 이 세계에 있는 동안엔 항상 그녀에게 고개를 들 수 없을 것이다.
셋이서 나눈 대화가 끝맺어진 뒤, 시간이 늦었단 이유로 환상향에 돌아가기 위한 구체적인 대책을 세우는 것은 내일로 미루기로 했다.
그리고 청아의 권유에 따라, 이렇게 목욕까지 하게 된 것이다.
「오늘 밤은 피로와 땀을 씻어내고 느긋이 쉬어주세요」라며 상냥한 미소와 함께 말해주었다.
──싫다 참, 이 극진함은 대체 뭐야.
바깥세계에 내던져져서 고립무원에 떨어졌나 했더니, 사태가 이렇게 단숨에 호전될 줄이야.
처음 만났을 때엔 사토리가 경고한 탓에 살짝 당황했지만, 청아는 진짜 천사였어!
「그녀 나름대로 속셈이 있었을 뿐이에요. 애당초, 당신을 향한 태도나 말에서 위화감을 느끼진 못했나요?」
내 눈앞에서 서로 마주 본 채 목욕통에 몸을 담근 사토리가 말했다.
사람 두 명은 충분히 들어갈만한 넓은 욕조일 텐데, 역시 내 몸이 너무 크구나.
게다가 상대는 몸집이 작은 사토리일 텐데, 가끔 손이나 발이 닿을 정도로 좁다.
「그녀한테는 사랑받는 것 같군」
「그런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고요」
사토리가 손으로 따뜻한 물을 뿌렸다.
얼굴에 뿌려진 물을 닦아낸다.
뭐어, 확실히 인품 같은 거에 호감을 가진 게 아니라는 정도야 알고 있지만……요컨대 청아는 강한 사람을 좋아한다는 거잖아.
그리고 트럭을 맨손으로 부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내가 마음에 들었다.
그게 다다, 꽤 단순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는데.
약간 과격한 사상을 갖고 있는 것 같단 생각이 들긴 해도, 그쯤이야 환상향의 요괴들이랑 비교하면 귀여운 편이잖아.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유카라던가.
얀데레랑 츤데레에서 「데레」를 뽑아낸 것 같은 그 녀석한테 비한다면, 우리들한테 공짜로 협력해 주는 만큼, 청아는 충분히 선량하고 우호적인 인물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말로는 잘 표현할 수 없어요. 어쨌든, 그녀 앞에선 너무 방심하지 마세요」
「알았다」
납득은 가지 않지만, 사토리의 진지한 충고였기에 나는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느 쪽이 됐든지 간에, 환상향으로 돌아가기 전까진 청아의 호의에 기대는 수밖에 없다.
그에 대한 감사는 걸맞은 행동으로 표현하고 싶다.
그녀를 어떻게 대할지를 구체적으로 고민하는 것은, 환상향으로 돌아간 뒤에 하는 게 나을 것이다.
「뭐, 당신이 그걸로 좋다면 괜찮겠지만요. 하지만 환상향에 그녀를 데리고 간 뒤엔 또 어떻게 하실 건가요」
아, 그런 문제도 있구나.
환상향에 가면, 이번엔 청아가 살 곳이 없어져버리고 만다.
은혜를 받은 입장으로서 그런 청아를 돕는 것이 당연한 도리일 터.
몇 시간 전까진 돌아갈 계획을 세우는 것조차 곤란했지만, 어느새 돌아간 다음에 할 일을 생각할 정도로 여유가 생겨났다.
오늘은 정말 노도 같은 하루였어…….
──집, 이라.
따뜻한 물의 열기에 들뜬 듯, 내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지금 떠오르는 것은, 레이무와 하쿠레이 신사다.
내가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 탓에, 그 아이가 걱정하고 있진 않을까 마음이 괴롭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레이무가 처해 있을 상황에 대해 고민했다.
원작에선 텐시가 일으킨 사건 때문에 신사가 무너져버렸었지.
환상향에서 날아가기 직전의 모습을 생각하면, 아마 무사할 리는 없다.
그렇다기보다, 레이무가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 정도로 큰 지진이라면 평범한 건물은 틀림없이 빈대떡이 됐을 것이다.
레이무, 괜찮을까?
오늘 밤에 잘 수 있는 곳은 찾았을까?
무엇보다, 그 신사는 레이무가 자라며 만들어온 추억이 가득 깃든 집이다.
그게 무너져버리다니, 충격을 받지 않을 리 없다.
유카리나 마리사 같은 애들이 도움을 줬으면 하는걸──.
「야쿠모 유카리에게 기대하는 건 심력의 낭비가 아닐까요」
말하지 마…….
저래 보여도, 꽤나 레이무를 걱정하고 있으니까.
묘하게 딱딱하게 굴긴 하지만 말이야.
「지금의 저희들과 달리, 하쿠레이 레이무에겐 도와줄 인간이나 요괴가 주변에 많잖아요」
뭐 그렇겠지.
내 따님이 사랑 받지 않을 리가 없어!
「부러울 따름이에요」
괜찮아, 사토리한테는 내가 있으니까.
그런 친구 레이저를 눈에서 발사하니, 사토리는 기분 나쁘단 표정을 지으며 욕조에 잠긴 몸을 일으켰다.
후후후, 이건 부끄러워 하는 것이로군요. 저는 압니다.
나도 함께 따뜻한 물 속에서 몸을 끄집어냈다.
몸을 씻기 위해서다.
「그나저나, 고작 목욕탕 하나에 이렇게 많은 차이가 있을 줄은 몰랐어요」
나와 사토리가 함께 입욕하고 있는 건, 평범하게 알몸을 보여도 괜찮은 친구 사이여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지령전의 온천에밖에 들어가지 않았던 사토리에게 있어, 이 최신식 욕탕은 조금 버거웠다.
거실에서도 생각한 거지만, 청아는 정말 「낡은 가게」라고 말한 것치곤 엄청 세련된 곳에 살고 있는걸.
이 욕실도, 들어간다는 말을 꺼내니 원터치 시스템으로 눈 깜짝할 새에 목욕물이 데워졌고, 샤워기도 버튼식에, 실내엔 난방 기능까지 있었다.
이래서야 내가 가르쳐주지 않으면 사토리는 샴푸와 보디소프의 차이조차 모를 것이다.
그러니 내가 이렇게 등을 닦아주려는 거야.
어쩔 수 없잖아.
「아니, 가르쳐 주기만 해도 좋아요. 그 다음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런 말 하지 말고!
등 닦게 해줘!
머리 감겨주게 해줘!
샤워기로 하는 편이 효율적이란 건 인정하지만, 일부러 통에 물을 담아서 「그럼 끼얹을게」라고 말하면서 거품이 잔뜩 일은 머리를 씻겨주는 드라마 같은 상황을 연출하고 싶단 말이야!!
「알 바 아니에요. 혼자 씻을 거니까, 당신은 푹 익을 때까지 욕조에나 들어가 있어세요」
아직 욕조에서 채 나오지 않은 내 몸을, 사토리의 가감 없는 발차기가 되밀어냈다.
우우, 너무해!
나는 그냥 좋은 일 좀 해보잔 생각에 그랬을 뿐인데……!
「──어머, 떠들썩하네요」
스르륵 열린 미닫이 문 사이로, 요염한 목소리가 우리들의 대화에 끼어든다.
나와 사토리 말고, 이 집에서 목욕할 인물은 한 명 뿐이다.
그렇지만, 왜 이 타이밍에 들어오는 거야?
갑작스런 난입에, 속으로 혼란에 빠진 나는 목욕탕의 입구를 바라본 채 굳고 말았다.
알몸의 미망인이 그 자리에 있었다.
「세……청아」
「후훗, 저도 실례할게요」
대답도 듣지 않고, 청아가 목욕탕에 발을 들이민다.
아니, 대답이고 뭐고 여긴 청아의 집이니까 「나가다오」라고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아니 근데, 이게 무슨 성인게임이냐!
앞을 타올로 가리고 있긴 하지만, 그녀의 훌륭한 지체가 얇은 수증기 너머로 똑똑히 보인다.
큭, 공기조절기 아저씨. 좀 더 환기를 게을리 하셔도 괜찮은데요?
같은 여자라지만, 내 근원인 전생의 기억과 섞여서 생겨난 「어느 쪽이라고 구분지을 수 없는 성별」의 부분이, 묘한 긴장감을 자아냈다.
것보다─, 정말로 색기가 쩌시네요.
같은 알몸이라도 사토리에게서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무언가가, 청아에게선 느껴진다.
아니, 눈앞의 광경에 대한 자세한 코멘트는 삼가겠지만……일단 「냥냥슴가」라는 한마디를 남기고프다.
청아는 사토리를 지나 내가 있는 욕조로 들어왔다.
사토리 수준의 몸집으로도 비좁았던 공간이었기에, 거의 밀착하듯이 서로를 마주보고 앉게 됐다.
아, 이건 안 돼.
따뜻한 물이 넘쳐흐르면 아깝기도 하고, 마침 사토리가 몸을 씻으려 하니 사토리를 도우려면 나도 나가야─하는데, 잠깐, 가까워! 가깝다고!
「선대, 물이 식어버려요」
청아는 내 몸에 올라타듯 온몸을 사용해 나를 욕조에 밀어붙였다.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센 건 아니다.
그렇지만, 이거 진짜─……아니 저항 같은 거 무리라고! 닿고 있다고! 부드럽다고!
위험해, 뭐야 이 상황!?
태어나서 처음 겪는 타입의 위기인데요!
「상처투성이네요」
청아는 내 몸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며, 열정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응, 뭐 좋게 말해도 여자다운 몸은 아니라고 생각해.
눈앞의 미녀의 본보기 같은 몸이랑 비교하면 더욱 더.
「딱히 남에게 보일만한 것이 아니다」
「그럼, 당신은 이 상처가 부끄러우신가요?」
「아니……」
「그렇겠죠.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어요. 이 상처는 당신이 가진 힘의 증거, 단단한 몸은 자신의 힘을 연마한 결과──」
「내 아집 탓에 생겨난 결과다. 그런 말을 들을 만큼 훌륭한 게 아니지」
「아니요. 그게 중요한 거예요. 이 평등함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세계에서, 자신의 의지로 아픔을 감수하면서 이렇게 본인의 몸이 변할 정도로 혹사한 인간은 여태껏 보지 못했어요」
무엇이 그리 즐거운 건지. 움직이지 못하는 나의 몸을 열심히 관찰하던 청아는,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바라봤다.
홍조가 떠오른 그 얼굴에 서린 것은, 요염한 미소.
「역시, 당신은 멋져요」
「그런 걸 봐봤자 즐거울 리는 없을 텐데」
「아니요, 정말 즐겁답니다. 이 육체에 새겨진 기억을 상상하기만 해도, 불이 붙어버릴 것만 같아」
「──」
「제가 봐왔던, 그 어느 인간보다 매력적인 육체에요. 선대」
한숨과 함께 귓가로 들려오는 속삭임.
뭐야 이거 에로해.
것보다, 귓가?
것보다, 이 감촉, 귀를 핥고 있는 거야?
나, 정말로 완전히 달라붙어 있는 것 같은 자세인데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지금까지 만나보지 못한 타입의 여성.
그리고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스킨쉽이었다.
오랜 세월 사귀어온 탓에 가끔 장난을 쳐오는 유카리조차,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달라붙지는 않는다.
어……어쩌지?
청아와 밀착된 몸은, 손가락 하나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
나는 도움을 바라며 눈을 굴려 사토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정작 사토리는 그런 내 마음을 읽을 수 있을 텐데도, 완전히 무시하고 머리를 감고 있었다.
아까 한 충고를 가볍게 여긴 대가란 말인가.
역시, 사토리의 말이 맞았다.
인식을 고쳐야만 한다.
곽청아──여러 가지 의미로 위험한 상대다!
반성할 테니까, 도와줘 사토링!!
「부디, 느긋이 즐기고 오세요」
사토리는 강 건너 불구경하는 태도로 말했다.
큭……날 버리겠단 게냐, 사토리.
좋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하나 가르쳐주지.
──그건 샴푸가 아니라, 보디소프다!
◆
사토리의 눈이 뜨였을 때는,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심야였다.
옆에서 자는 청아를 일으키지 않게끔, 살그머니 침대 밖으로 기어 나온다.
어째서 그녀와 동침하게 되었는가.
그건 단순한 소거법으로 인한 일이었다.
이 집에는 2인용 침대가 하나밖에 없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 집에서 살고 있던 것은 청아와 그녀의 남편인 남자뿐이었다.
아이가 없는 부부였기에, 침대는 하나만 있어도 충분하다.
자기 전, 청아는 선대와 사토리가 같이 이 침대를 사용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자긴 거실 소파에서 잘 테니까, 라면서.
이 제안은, 선대가 앞장서서 거부했다.
입에 담은 말은 적었지만, 집주인인 청아를 향한 사양과 단순히 몸을 걱정하는 마음이 가장 컸음을 사토리는 알고 있었다.
그에 대해 「그럼, 저와 함께 주무시는 건 어때요?」라고 대답하는 점이, 곽청아라는 여자의 귀찮은 면이다.
이래저래 입씨름을 되풀이하다, 결국 선대가 소파에서 자고, 사토리가 청아와 함께 침대에서 자게 된 것이다.
사토리가 상대가 되니, 청아가 얌전해졌다.
침대에 들어가 서로의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두 명은 자연스레 잠에 빠졌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심야.
사토리는 갑작스럽게 눈을 떴다.
사토리의 가벼운 발걸음 소리를, 부드러운 카펫이 조용하게 죽였다.
사토리는 청아의 잠옷을 빌려 입고 있는 중이었다.
귀여운 생김새의 파자마. 청아가 입기에는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디자인이다.
실제로, 청아 본인의 잠옷은 피부가 비쳐 보이는 색기 가득한 네글리제였다.
이 파자마는, 결혼했을 때에 남편과 커플룩을 맞추어 산 것이라던가.
자신의 체격엔 좀 과하게 큰 잠옷의 옷자락을 다시금 걷어붙이며 , 사토리는 천천히 창을 향해 다가갔다.
커텐을 제끼자, 아직 어두운 바깥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창밖의 세상을 비추는 것은 달빛만이 아니다.
멀리서 깜빡거리는 몇 개의 불빛이 보였다.
그것이 거리에 설치된 인공적인 빛임을 사토리도 알 수 있었다.
밤의 정적 또한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듯, 귀를 기울이면 멀리서 낯선 소리가 울려 퍼지곤, 귀를 자극한다. 차가 내달리는 소리다.
바깥세계의 인간들에겐 잠이 없는 것만 같다.
이곳에선, 모든 사람들이 잠에 빠져, 아무도 나다니지 않는 시간대란 게 존재치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마음의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이 느낌 또한 사토리에겐 기묘한 감각을 주었다.
──이곳은 다른 세계.
──내가 살 수 없는 세계.
막연히, 그렇다는 것을 느꼈다.
「왜 그러시죠……?」
어느새, 잠들어 있었을 터인 청아의 눈이 뜨여 있었다.
사토리가 놀랄 것도 없었다.
그녀는 아직 제 3의 눈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다.
「자는 척 하면서 관찰하려 했습니다만, 그만둬야겠네요」
「일일이 변명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딱히 당신이 하는 일을 꼬치꼬치 예의주시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사토리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시시하단 듯 말했다.
어깨너머로, 청아가 웃는 기척이 전해졌다.
「그렇지만, 제 앞에서 마음을 놓진 않잖아요?」
「여러모로 보이는 게 있으니까요」
「되도록 거짓말은 하지 않게끔 신경 써서 말하고 있는걸요」
「거짓말은 하지 않았더군요. 몇 개, 말하지 않은 게 있지만요」
사토리는, 청아와 지금까지 나눈 대화 속에서, 직접 말하지 않은 내용 또한 전부 마음을 읽어내어 알아냈다.
예를 들면, 죽었다는 그녀의 남편의 대한 일이다.
언제, 어떻게, 어째서 죽었는지 그녀는 말하지 않았다.
선대는 일부러 묻지 않았고, 신경 쓰지도 않았다.
하지만 사토리는 알고 있다.
청아가 남편의 유산을 상속 받은 것을 알고 있다.
그 돈을 써서, 자유로운 생활을 누리는 것도 알고 있다.
알고 있다. 그뿐이다.
「뭐, 그런 게 어떻든 딱히 중요하진 않지만요」
「선대에게 말할 생각은 없으신 건가요?」
「말해봤자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니까요」
「저라는 존재에 대한 경고로도 쓸 수 있을 텐데요」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할 필요도 없고요」
「제 입으로 말하기도 뭐하지만, 전 선량하지 않아요. 옛날부터 「타락했다」거나 「간사하다」는 평을 종종 들어왔을 정도랍니다」
「하지만 당신 자신에게 본인이 악이라는 자각은 없다. 확실히 「자신이 악임을 깨닫지 못한 진정한 사악함」이군요」
「어머, 재미있는 표현이네요.──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렇군요……」
사토리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라는 듯, 맥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뭐, 제가 지금까지 봐온 마음 중에선── 「적당한 정도」에요」
어깨너머로 고개를 돌리며, 그렇게 대답했다.
그런 가벼운 대답에, 청아는 예상이 빗나간 것 같은, 혹은 허탕 친 낚시꾼 같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이윽고, 점점 새어나오려 드는 웃음을 참으려 하더니, 어깨가 떨리기 시작했다.
나름 재미있는 대답이었던 듯하다.
킥킥거리며 웃음보를 터트린 청아의 모습에, 사토리는 이게 아닌데 하는 기분으로 그녀를 노려봤다.
「……역시, 당신도 멋져요」
한 바탕 실컷 웃은 뒤, 청아는 눈매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선대와는, 또 다른 강함이 있어요. 만만치 않다고 말하는 게 맞을까요」
「익숙해져 있을 뿐입니다. 싫거나 더러운 건, 이미 넘치도록 봤거든요」
「자신의 매력은, 남밖에 모르는 거랍니다」
「──「그래서 돕고 싶다. 이대로 잃기엔 아깝다」인가요」
사토리는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었다.
청아를 추궁하기 위해서다.
그녀가 자신들에게 협력한다고 말했을 때 읽어낸 사고의 단편이 계속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당신이 저희들을 진심으로 도울 셈이란 건 의심하지 않아요」
「예」
사토리의 확인하는 듯한 말에, 청아는 솔직히 답했다.
「자기 자신이 환상향에 가겠단 목적도 있습니다만, 그 목적의 중요도 자체는 역시 두 번째에요. 당신은 저희가 환상향으로 돌아가는 걸 가장 우선하고 있죠」
「예」
「선대의 힘이, 본래 있어야 할 세계에서 휘둘러지는 모습을 보고 싶기 때문인가요」
「예」
「이 세계에서도 그녀의 힘은 주목을 이끌 테지만, 결코 인정받을 수는 없다. 그건 아까운 일이다. 그렇기에 돕고 싶다」
「예」
「그리고 저 또한, 그 정도의 마음으로 돕고 싶다고요」
「예」
「그 이유는──」
한껏 미소 지은 채 대답하는 청아와는 반대로, 사토리는 지친 듯 숨을 크게 내쉬었다.
가라앉은 기분을 따라 흘러나온, 어두운 한숨이었다.
「이대로 있다간, 제가 죽기 때문이군요」
「그 말 대로에요」
청아는 단번에 긍정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존재가 소멸해버리고 말죠」
입을 다문 사토리를 대신하여, 이번엔 청아가 말을 꺼냈다.
「일찍이 존재했던 「환상」은, 지금 이 세계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 대신, 이 세계에는 「환상을 부정하는 힘」이 가득 차있죠.
온갖 사물과 사상을 이론과 수식으로 해석하고, 세간에서 말하는 환상적이며 애매한 것들은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요괴나 신을 믿는 인간보다, 믿지 않는 인간들이 훨씬 많아진 탓이죠」
「──」
「예를 들면, 당신이 자신을 요괴라고 말한다고 해보죠──아무도 믿지 않을 거예요」
「──」
「왜냐하면, 요괴 따윈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 따윈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제3의 눈을 가진 생물 따윈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이상한 힘 같은 건 없어요.
인간은 선인이 될 수 없어요.
인간은 하늘은 날 수 없어요.
만약, 이것들이 전부 현실에 「있었다」고 말해도, 결코 믿지 않아요──」
마치 세뇌하듯 말을 늘어놓던 청아가 한 차례 심호흡했다.
「저처럼 환상의 힘을 품은 자들은, 이런 부정에 대해 끊임없이 논쟁하지 않으면, 그 힘을 잃게 된답니다」
「그리고 순수한 요괴인 저는, 힘만이 아니라 생명조차 잃게 된다는 건가요……」
「요괴도, 신도, 이 세계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게 됐어요. 어딘가로 떠나간 건지, 사라져버린 건지……그것조차 알 수 없죠」
「이대로는, 저도 같은 말로를 맞이하게 된단 소리군요」
「예. 그래서 저는 당신도 돕고 싶은 거예요」
청아는 전혀 심각하지 않다는 태도로, 상냥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물론, 사토리는 그런 청아의 선량한 미소에 한 조각의 감동조차 느끼지 않았다.
그저, 다시금 한숨을 내뱉었다.
자신을 기다리는 미래에 대한 비장함보단, 지루함이 더 크게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대충 본 걸로 말해도 괜찮아요, 저는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요?」
사토리는 참고가 될 만한 사실에까지 발을 들였다.
입을 다무는 것도, 선의의 거짓말도, 그녀의 능력 앞에선 무의미하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아마, 앞으로 3일 정도겠죠」
상쾌하게 진실을 선언하는 청아의 말투는, 너무나도 잔혹하게 울려 퍼졌다.
역자후기
사토링 폭발사산 D-3
어서와라, 데드플래그 계 히로인의 세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