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46「개시」
짐승이나 요괴만 사람을 먹는 것이 아니다
신 또한 사람을 먹는다.
고대, 사람의 목숨이란 기근이나 재해로 간단히 사라지는 것이었다.
생명은, 변덕스러운 자연이 베푸는 것으로 풍요로웠고, 자연이 앗아가는 것으로 메말랐다.
일찍이, 자연이 일으키는 재해는 신의 힘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었다.
아직 인간의 힘이 약하던 그 시대. 그들을 기르고, 지켜낸 것은 신의 힘이었으며──그와 함께 그들을 덮치고, 위험에 빠트린 것 또한 신의 힘이었다.
절대적인 힘에 대해, 인간은 음식을, 동물의 생명을, 가끔 자신들의 생명조차 바치며 제사를 지냈다.
산제물로 선택 받은 인간들은, 누군가는 불합리한 희생으로서, 또 누군가는 존경하며 숭배하는 신에게의 봉사로서 자신의 생명을 바쳤다.
일찍이, 인간은 신을 진심으로 존경했고, 그것을 뛰어넘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인간은 신에게 대항할 수 없다.
그렇기에, 인간은 신을 두려워한다.
아무 예고도 없이 덮쳐오는 자연의 맹위와, 그 그늘 아래 숨겨진 신의 힘을 보고, 불합리함에 한탄하며, 분노하고, 또한 두려움에 떤다.
왜냐하면, 신은 변덕쟁이이기 때문이다.
빼앗는 것도 주는 것도, 신의 마음에 달린 것.
자그마한 봉사에 커다란 보답을 주기도 하는 반면, 아무리 깊은 한탄과 헌신에도 무자비하게 앗아갈 때도 있다.
하지만, 인간은 신을 거스를 수 없다.
그것은 하늘을 향해 시위를 당기는 것과 같다.
인간이 쏘는 화살 따윈, 신에게는 닿지 않는다.
인간이 울부짖는 소리 따윈, 신에겐 이르지 못한다.
아, 신이란 이 어찌 잔혹하며 불합리한 존재란 말인가──.
하지만.
그래야만 한다.
신이란, 잔혹하며 불합리해야만 한다.
자신을 존경하는 인간들의 생명을 변덕스럽게 앗아가는 불합리한 존재여야만 한다.
두 손 모아 비는 자에게 반드시 정당한 보답을 해주는 유도리 있는 존재여선 안 된다.
언제, 어떤 경우에도, 신의 행동을 정하는 것은 신의 의지 외에는 있어선 안 된다.
그 누구의 마음에도 좌우되지 않고, 그 누구도 책임질 수 없는 것.
신의 의지란, 인간에게 있어선 유일하며 절대적.
그래야만 한다.
그렇기에, 인간은 신을 존경한다.
그렇기에, 인간은 신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동족의 생명까지 바쳐서, 닿을지 어떨지 모를 소원을 담은 기도를 끊임없이 해왔다.
──이젠 먼 옛날, 구시대의 이야기이다.
◆
신사의 지붕 위에, 카나코는 자리를 잡곤 앉아 있었다.
왼발은 뻗고, 오른다리를 굽어 그 무릎 위에 오른팔을 가볍게 실은 자세.
시선은, 그저 막연히 앞만을 바라볼 뿐이다.
고지에서 한 눈에 보이는 야경을 살피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허공을 바라보며 자신의 기억을 되새기는 것으로도 보였다.
그런 카나코의 뒤에서, 스와코가 모습을 드러냈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튀어나오듯이 나타나더니, 지붕 위로 살며시 내려선 것이다.
「여기까지 말소리가 들리던걸」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카나코가 말했다.
「사나에는, 돌아갔어──」
스와코는 마치 서로의 모양새를 반대로 맞추는 것처럼, 카나코의 뒤에 기대앉았다.
나란히 마주 앉으면 서로의 표정을 들켜버리고 만다. 지금의 스와코는 그게 싫었다.
하지만 서로 맞닿은 등으로, 상대의 존재감을 확실히 느낄 수 있다.
이 자세는, 우리들 사이를 닮았네, 라며 스와코는 생각했다.
「내일, 사나에는 오려나?」
스와코는 혼잣말을 내뱉듯 중얼거렸다.
「오지 말라고 한 건, 너였을 텐데」
「응, 그야 뭐, 안 오는 편이 좋겠지만」
「스와코. 미리 말해두겠는데──」
「뭘?」
「난, 사나에에게 환상향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다」
「알고 있어.……반쯤은 의심했지만」
「사나에를 대할 때엔 네 의견을 존중해왔으니까」
「사나에의 힘을 이용하려 했던 주제에」
「이용이 아니라 협력이라고 불러라. 거기다, 그 아이에게 강요할 생각은 아니다. 사나에의 힘을 빌릴 수 있다면, 시기나 상황을 선택하지 않아도 환상향에의 이주가 가능하지. 당연히 생각해볼만한 것 아닌가」
「그 애의 힘을 수단으로 여기는 것부터가 마음에 안 들어. 여기서 더 『이쪽』 일에 엮이게 해서 어쩔 건데」
「어이, 그 녀석은 『풍축』이다. 우릴 받드는 무녀가 아닌가」
「아니, 그렇지 않아. 그 애는 고등학생이고, 졸업하면 대학생이 돼서, 그 뒤 결혼하고 신부가 되어 머지않아 어머니가 되어 삶을 구가할 거야」
반론을 펼치는 스와코의 말투에 담긴 분노가 명확히 드러났다.
「사나에가 가진 힘은, 초능력 같은 육체의 연장선 위에 있는 힘이 아니야. 신과 이어진 힘──신이 되기 위한 『소질』이지.
몸이라면 단련하면 되고, 재능이라면 갈고닦으면 돼. 그건 남한테 자랑스럽게 내보일 수 있는 거고, 살아가는 보람도 되니까. 하지만 그 힘은 아니야. 그런 걸 마구잡이로 써선 안 된다고」
「그 아이가 지니고 태어난 힘이다. 그걸 외면하게 만들 생각이냐」
「사나에에 대해 딱 하나 너와 생각이 맞지 않는 점이 있다고 한다면, 그건 카나코가 그 애의 힘을 꼭 기적처럼 여긴다는 거야」
「그래, 기적이고말고. 기나긴 세월을 거쳐 옅어졌던 『신의 핏줄』 중에서 사나에 같은 힘을 가진 아이가 태어난 건 기적이라 봐도 무방할 터다」
「기적이 아니야. 낡아 빠진 피가 만들어낸 저주지」
「사나에는 네 자손일 텐데, 스와코」
카나코는 크게 꾸짖듯 말했다.
하지만, 그런 카나코의 반응에도 스와코는 자조 섞인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사나에에게 자신의 피가 조금이라도 흐르는 것을 용납지 못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불쌍한 애야」
스와코가 말했다.
「어째서 이런 시대에, 그런 걸 갖고 태어나버린 걸까」
「사나에가 태어났을 때, 넌 기쁘지 않았던 거냐」
「──기뻤어. 신을 향한 신앙이 희미해져서 사람들의 눈에 비치지 않게 돼버린 우리들의 모습을, 갓난아기였던 그 아이가 찾아내어, 그 자그만 손을 뻗어줬을 때, 전율이 일 정도로 기뻤어」
「나도 마찬가지다」
「사나에의 탄생을 진심으로 축복했고, 감사했었지. 내가 신인 주제에 말이야」
「그래」
「그러니까」
「──」
「그러니까, 오랫동안 그 아이의 앞길을 방해하고 말았어. 우리들의 미련이, 사나에 본인의 인생의 장애물로 남아왔던 거야」
「그렇기 때문이냐」
「맞아, 그러니까. 그러니까 내일 하기로 마음먹었어. 지금까지 계획을 계속 미뤄왔지만, 이제야 겨우 결정할 수 있었어. 우리는, 드디어 사나에가 걸어 나갈 길에서 물러날 수 있는 거야」
자기 자신의 결심을 말로 끄집어낸 스와코는, 어느새 굳어져 있던 몸에서 힘을 풀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안심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낙담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는 음색을 띈 한숨이었다.
「그러고 보니, 사과가 먼저였지. 미안, 카나코. 그때 내 멋대로 계획을 결행하잔 말을 꺼내버려서」
「그곳엔 나도 있었다. 그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 않나. 불만은 없어」
「고마워」
「됐다. 마침 타이밍도 좋아. 확실히, 내일 몰아칠 폭풍우라면 사나에의 힘 없이 우리들의 힘만으로도 환상향에 갈 수 있을 터다」
「사실은, 사나에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때 사라지고 싶었지만. 역시, 사나에한테 쓸데없는 사실을 알려준 건 그 녀석들의 동료려나─. 그 두 명 말고도 요괴 동료 하나가 따로 있는 것 같았으니까」
투덜거리고 있음에도, 그 목소리에선 분노했다고 여겨질 정도의 감정은 담겨있지 않았다.
스와코의 입가에 지어진 그것은, 쓴웃음과 비슷한 의미만을 품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내가 결단할 계기를 가져다준 것도 그 녀석들이야. 이번 일이 아니었으면 또 지지부진하게 결단을 미루다가, 머지않아 사나에의 정에 얽매여버렸을지도 몰라」
스와코의 혼잣말에, 카나코는 답하지 않았다.
「그 녀석들, 대체 뭐하는 녀석들일까? 우리의 존재는 어떻든 간에, 계획까지 미리 알고 있었던 건 이해가 가질 않아. 아무리 환상향의 거주자라지만」
「──」
「그래도, 뭐……아무래도 좋으려나. 그 녀석들이 뭘 숨기고 있든 별 흥미 없으니까. 카나코도 그럴 테고」
「──」
「이주하는 곳에 연줄을 만들어둘 수 있다는 점은 적당히 고마운 이야기네. 환상향이 실제로 어떤 곳인지 아는 것도 아니고. 살기 편한 곳이면 좋을 텐데」
「──」
「환상향에 가면 뭐부터 할까〜? 우리 둘 다 신격이 쓸데없이 크니까, 그냥 조용히 사는 건 무리이려나. 저쪽에서도 민폐라고 생각할 거야. 아아, 어쩌지. 너무 기세만 타다 보니 뭘 할지 생각해 두질 못했어」
「──」
「아니 그것보다, 막상 일이 결정되고 보니 내가 다 놀랄 만큼 막 던지는 것 같네. 왜 이러지? 카나코는 따로 하고 싶은 거 있어?」
마치 강 건너 불구경 하는 것 같은 말투로 스와코가 물었다.
그 질문마저, 그냥 건네본 것에 불과했다.
카나코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까부터, 계속 입을 다물고만 있을 뿐이다.
「……카나코는, 그 녀석들이 그렇게 신경 쓰여? 특히, 그 『선대무녀』라던 인간이」
스와코는 어깨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카나코는 전혀 몸을 움직이지 않았기에, 그 표정을 볼 순 없었다.
하지만, 그 눈은 반드시 무언가를 노려보고 있을 것이다.
스와코는 알 수 있었다.
맞댄 등에서, 맞닿은 피부와 피부를 통해서 카나코의 안쪽에서 끓어오르는 무언가를 알 수 있다.
그것은, 무엇인지는 몰라도 억눌려 있었다.
확실하진 않다.
떨림으로도, 열기로도 느껴졌다.
아니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카나코의 몸속에서, 공기를 떨리게 할 정도로 격렬하게 불타오르는 무언가, 스와코는 그것을 막연하게 느꼈다.
그리고 그 불을 지핀 자가, 카나코가 계속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그 선대무녀라는 인간이라는 것만은 확신하고 있었다.
스와코는, 더 이상의 말 없이 입을 다물었다.
서로 긴 시간을 함께한 사이다.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상대의 심정이 전해질 때가 있다.
침묵의 시간이, 마치 카나코를 재촉하듯 흐른다.
「──그 녀석이」
카나코는 망설이는 듯 입을 달싹이고는,
「나를 보는 눈을 버틸 수가 없다」
고통을 토해내듯 그리 말했다.
「너도, 그 인간의 이상성은 알았을 거다」
「응. 그 녀석, 우리들을 『신앙』하고 있었으니까」
신에게 있어 인간이 바치는 신앙이란 힘의 근원. 그것이 많은 만큼 신으로서의 힘이 강대해지고, 적으면 존재를 유지하는 것조차 벅찬 신세가 된다.
물질적으로 보이는 것도 아니고, 에너지처럼 느낄 수도 없는 것이지만, 신에게 있어선 자신의 형태를 빚는 피륙 자체인 것이다.
사람이 음식을 혀로 맛보고 포만감을 느끼듯이, 신 또한 그들만의 감각으로 자신을 향한 신앙을 인식할 수 있다.
신앙에는, 크기나 강약 같은 개념은 없다.
기준을 정한다면, 그것은 바로 양.
많은 인간이 신앙할수록 큰 힘이 되고, 반대로 적은 인간이 굳게 신을 믿는다 한들 그 힘은 대단치 않다.
선대무녀의 신앙이 그녀들에게 향하고 있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것 또한 인간 한 명에 신앙에 불과하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확실히, 이상하긴 하지. 우리 같은 신이 있단 걸 알고 있었고, 이미 신앙심까지 갖고 있었으니까.
무슨 생각으로 신앙심을 가진 건지도 모르고, 어디서 우리를 알게 된 건지 모르니 기분 나쁘긴 하지만, 결국 『신앙은 개인의 자유』라는 거니까. 그냥 독실한 성격일지도 모르고 말이지」
하지만 그런 스와코의 견해에, 카나코는 동의하지 않았다.
「스와코. 너는, 모를 테지」
마치 비난하듯, 카나코가 대답했다.
「1대1로 마주섰을 때, 그 녀석이 날 어떤 눈으로 봤는지 모를 거다」
「보는 눈이 마음에 안 든다고 화를 내다니, 아무리 그래도 트집이 과하잖아」
카나코는 그런 농담에도 응하지 않았다.
「흐린 곳 하나 없는 올곧은 눈이었다. 그 녀석의 눈은, 완벽히 신을 보는 눈이었단 말이다. 의심 한 점 섞이지 않은 신앙 또한 느꼈다」
그것은, 기뻐해야할 일이 아닐까.
자신의 신사가 자리 잡은 이곳조차 문명화의 물결을 받고,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향한 신앙심이 옅어진 세상에서 마음속 깊이 신을 믿고 우러러보는 존재와 만난 것이다.
하지만 카나코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엔 기쁨이나 흥분감은 없었다.
혹시 있더라도 그런 감정을 너끈히 짓눌러버릴 수 있을 정도의 고통이, 그 목소리와 얼굴에 배어나오고 있었다.
「내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도, 그 녀석의 신앙은 흔들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보다 확고하게 굳어졌다.
이봐, 스와코. 신이 실체를 보인다는 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너는 알고 있을 터다. 일찍이, 누구도 신의 권위를 넘보지 못했던 그 시대라면 모를까, 인간이 신의 존재와 힘을 의심해나가고도 오랜 세월이 지난 바로 지금 이 시대에서.
인간은, 자신의 눈에 비춰지는 것만이 현실이라 믿는다. 명확한 형상을 가진 자가 신이라 자칭한다면, 인간은 이를 신이라고 믿지 않지. 신이란 두려움을 갖기에 합당한 절대적인 존재이기에 인간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모습을 갖추어야만 한다. 인간이 갖춘 『지혜』와 『힘』이 강대해졌기에, 그런 인식을 뛰어넘지 못하곤 신의 힘을 의심받는 시대가 되고 만 거다」
「……그래」
스와코는 작게 끄덕였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는, 알겠어. 지금은 이미 『현실』 『환상』이 애매하게 공존하던 시대가 아니니까」
「하지만, 그 녀석은 내 모습을 봐도 의심치 않았다. 나를, 신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지. 아니, 그 녀석에게 있어서 『내가 신이라는 건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렇구나. 카나코는, 그걸 눈치챈 거였어」
「알게 됐기에, 더욱 알 수가 없다──.
어째서, 녀석은 그럴 수 있는 거냐? 그저 내 존재를 알고 있었단 것만 가지곤 그 신앙심이 뭔지 설명할 수가 없다. 이 날 처음 만난 상대를 보고, 어떻게 그런 확고한 인식을 지닐 수 있는 거지?」
「카나코가, 그 녀석이랑 싸우려했던 건, 그것 때문이야?」
「그래. 하지만, 적의를 향해 봐도, 녀석의 인식은 변치 않았다──아니」
카나코는 말을 고치겠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나는, 그 녀석이 실망해주길 바란 거다. 그 의심 한 점 없는 눈이, 흐려지길 바랐다」
「……왜?」
「이유 따윈 어찌되든 상관없다. 그 녀석이, 나를 신앙하고 있다. 그 사실 하나가, 내겐 그 무엇보다도 무거운 거다」
스와코는, 카나코의 목소리에 변화가 생겼음을 깨닫고, 미간을 찡그렸다.
카나코의 말이 떨리고 있었다.
아픔, 아니면 격정을 견뎌내려는 떨림. 그렇게 느껴졌다
「버텨낼 수가 없다. 녀석의 눈에, 내 모습이 어떻게 보이고 있을지 아는 게 두렵다. 그 티 하나 없는 신앙 속엔, 틀림없이 나를 향한 경외심과 두려움이 있었다. 녀석이 마음으로 그리는 난, 완벽한 신이다」
카나코는 이를 악물고, 자신의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가슴속을, 서늘한 칼날이 헤집는 기분이었다.
「그 녀석이, 지금의 내 모습을 보는 걸 견뎌낼 수가 없단 말이다──」
◆
다음날 아침, 사나에는 이제껏 그래왔듯 자명종이 울리기도 전에 잠에서 깨어났다.
평소처럼 어머니가 만들어준 아침밥을 먹고, 출근하는 아버지를 바래다드린 뒤, 살짝 늦게 학교를 향해 발을 옮겼다.
뭐하나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아침이었다.
딱 하나 다른 게 있다면, 오늘 밤 자신이 모시는 신들이 이 세계에서 영원히 사라져버릴 것이란 걸 알고 있다는 것 뿐.
1교시 수업은 어떻게든 버텨낸 사나에였으나, 수업시간 대부분을 건성하게 때우며 선생님의 이야기는 전혀 듣고 있지 않았다.
2교시가 시작할 쯤, 몸이 아프다고 말한 뒤 조퇴했다.
물론 꾀병이었다.
아직 집에 계실 어머니에게도 연락하지 않았고, 그대로 돌아갈 생각도 없었다.
그렇다고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교복을 입은 채 마을로 갔다간 눈에 띌 테고, 아는 사람과 마주칠 것이라 상상만 해도 귀찮았다.
사나에는 남의 시선을 피하는 데 힘쓰며, 남은 힘으론 그저 방황하는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그렇게 걸으며, 도대체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고민한다.
──어딘가 가고 싶은 곳이라도 있는 걸까.
──아니면, 만나고 싶은 사람이라도 있는 걸까.
이상한 소릴 하고 있다는 건 자신도 안다.
어디인지, 누군지 스스로조차 알지 못하는 주제에 그것을 바라고 방황하는 자신.
이런 애매모호한 바람이 이루어진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기적 그 자체일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사나에는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그저 시간만이, 허무히 흘러간다.
자신이 신앙하는 두 신들과의──아니, 자신의 『소중한 인연』들과 이별하게 될 때가, 그저 무자비하게 다가온다.
선택을 내릴 시간이 이미 코앞까지 다가왔는데, 아직 자신은 대답을 내지 못했다.
라며──.
점점 흐려지는 감각 속에서, 사나에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앞에서 걸어오는 인물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사나에 씨 아닌가요」
사나에는, 믿겨지지 않는단 눈으로 자신의 이름을 부른 상대를 내려다봤다.
자신이 무엇을 바라고 있었던 건지, 지금 당장이라도 통쾌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야말로 기적이나 진배없었다.
「왜 그러시죠?」
멍하니 제자리에 우뚝 선 사나에의 얼굴을, 사토리가 들여다본다.
「사, 사토리 씨……」
「네, 하루만이네요」
「그게……」
「말씀하시죠」
「저기……그러니까, 뒤에 계신 분들은 누구시죠?」
약간 혼란스럽긴 했으나, 사나에는 우선 아까부터 신경이 가던 일행에 대해 물었다.
사토리의 옆엔, 두 명의 낮선 여성이 있었다.
한 명은, 미인이었으나 그 미모보다도 동성인 자신에게조차 느껴지는 매력이 더욱 눈에 띄는 푸른 머리칼의 여성.
사토리처럼 인외에 속한 존재임을 단숨에 알 수 있었다. 그 외모 외에도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점 또한 눈에 띄었다.
다른 한 명도 아름다운 여성이었으나, 이쪽은 다른 무엇보다 그 몸집이 눈에 각인됐다.
자신이 고개를 들어 올려 봐야할 정도의 키에, 상처로 뒤덮인 몸을 가린 남성용 옷까지, 이쪽도 상당히 특이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이, 초등학생처럼 자그마한 사토리와 함께 걸어 다니는 풍경.
사토리가 요괴라는 사실을 아는 사나에가 보자면, 납득이 가기도 하고 가지 않기도 한 신기한 조합이었다.
「저 말고도, 함께 환상향으로 가고 싶어하는 동료가 있다고 말씀 드렸었죠?」
「예, 어제 들었어요」
「이 둘이 그 동료랍니다. 여기서 말하기도 뭐하니, 잠깐 자리를 옮길까요」
사토리가 제안했다.
「침착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해 보이니까요」
말문이 막힌 사나에에게 시선조차 돌리지 않으며, 사토리가 앞장서서 그 자리를 떴다.
어느새 사나에까지 이 집단에 합류해버린 꼴이 됐다.
그렇게 걸으며, 안면을 트지 못한 두 사람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선인, 곽청아란 사람은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음에도, 어째선지 묘하게 열이 깃든 시선을 보내왔다.
과묵한 선대무녀라는 사람의 본명이 살짝 신경 쓰였지만, 그에 대해 질문할만한 용기가 나지 않았다.
처음 만난 사람들과의 대화에 깊이 고민할 새도 없이, 네 인요는 침착히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법한 장소, 인적이 드문 공원으로 발을 옮겼다.
딱히 목적이 있어 찾아온 것은 아니고, 그저 적당한 곳이 이곳이었을 뿐이다.
사토리는 가볍게 고개를 두리번거리더니, 공원 한 구석에 있던 천장과 탁자, 벤치가 들어서 있던 쉼터에 자리를 잡기로 했다.
사토리의 재촉에 못이긴 사나에는 자연스레 세 인요와 마주보는 자리에 앉게 됐다.
인원수가 치우쳐진 배치에, 사나에는 새삼스레 깨달았다.
사토리는, 정말로 자신의 이야길 들어줄 생각인 것이다.
「저기, 사토리 씨──!」
「알고 있어요. 상담하고 싶은 일이 있으신 거겠죠?」
기세가 앞서 몸을 들이민 사나에를 바라보며, 사토리는 약간 기가 찬단 표정으로 말했다.
사토리가 마음을 읽는 능력을 지녔다는 것을 떠올리고, 사나에의 뺨에 살짝 홍조가 돌았다.
자기 자신조차 알 수 없는 고민마저, 그녀는 이미 전부 알아채고 있었던 것이다.
「……상담하고 싶은 게, 있어요」
사나에는 다시금 말이라는 형태를 거쳐,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찬 문제를 끄집어냈다.
「사토리 씨는, 이미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고 계시는 거죠?」
「뭐, 마음을 읽을 수 있으니까요」
「그럼, 분명 대답도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해요」
「과연 그럴까요?」
「그야, 제 마음을 읽을 수 있으신 거죠? 제 진심이 『어느 쪽』을 선택했는지, 사토리 씨라면 알고 계시잖아요!」
「스스로의 마음은, 본인 스스로가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게 아니었나요?」
「그 본인인 제가 모르니까, 묻는 거예요!」
여차하면 달려들 것 같은 기세로 사나에가 외쳤다.
주변에 사람이 있었다면 무심코 고개를 돌려 바라볼 정도로 비통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사토리는 그런 사나에의 격정 섞인 태도에도 똑같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만약 제가 그 답을 말해주고, 당신이 그 답에 따라 행동한다 한들, 당신이 후회를 할지 하지 않을지는 알 수 없는데도 말인가요?」
사나에는, 저도 모르게 먹먹해졌다.
「저는, 당신의 선택을 책임져줄 생각은 없어요」
「그, 그런 뜻은……」
「그리고 그런 일은 저보다, 여기 있는 둘과 상담하는 편이 당신을 위한 일일 것 같군요」
마치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사나에가 시선을 돌렸다.
「청아 씨는, 사나에 씨한테 큰 흥미를 가진 것 같아요」
청아가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눈으로 사나에를 바라봤다.
「선대라면, 분명 저보다 훨씬 진지하게 당신의 고민을 받아들여주겠죠」
선대는 평생 변치 않을 것만 같이 딱딱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사나에를 똑바로 마주봤다.
둘 다, 사나에와 진지하게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같았다.
사나에는 한순간 사토리에게 시선을 돌리곤, 다시 그 둘의 얼굴을 번갈아 본 뒤, 굳은 몸에서 힘을 빼려는 듯 크게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것처럼 힘겹게 말을 이었다.
어젯밤, 스와코에게 어떤 말을 들었다는 것.
그 때문에, 지금 자신이 고민하고 있다는 것.
자신이 지금 느끼는 바를 말로써 표현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오늘 밤이 되기 전에 골라야 할 선택지는 이미 나와 있었다.
그것은 즉.
──환상향에 두 신과 함께 가느냐, 가지 않느냐.
그저 그뿐인 문제, 나누기는 편하나, 결단하긴 곤란키 짝이 없는 선택지.
「──진부한 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만」
사나에의 이야기가 끝나고, 먼저 입을 연 것은 선대였다.
「주변은 신경 말고, 자신이 바라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좋으리라 본다」
엄격해 보이는 외모나 딱딱한 말투와는 전혀 다른, 상냥한 말이었다.
올바른 길을 걸어온 어른이 아이에게 보이는 너그러움이 엿보였다.
그런 모습을 의외롭다고 생각하면서도, 사나에는 고개를 저었다.
「가족을 소홀하게 하고 싶진 않아요. 이것 또한, 제 바람이에요」
「하지만, 우선 네 인생을 가장 먼저 염두에 두거라」
「부모님도 제 인생의 일부잖아요. 가족을 위해 자신의 소망을 접어두는 건, 인간으로서 올바른 일 아닌가요?」
사나에의 질문에, 선대는 입을 다물었다.
스스로의 과거를 돌이키고, 그 말에 납득 가는 점이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답을 망설이는 선대를 대신하여, 이번엔 청아가 입을 열었다.
「지금, 어느 쪽이 올바른지 같은 재미없는 생각은 관두죠」
말 그대로 단조로운 말투였다.
「코치야 사나에 씨, 왠지 당신에게선 매우 친근감이 느껴지네요. 아, 말 놔도 될까? 혹시 실례니?」
「아, 아니요. 괜찮아요. 제 쪽이 연하일 테니까요」
「고마워. 후후훗, 미안해. 나도 참 답지 않게 기뻤거든. 왜냐하면, 요 며칠간 매력적인 사람들을 많이 만났으니까」
「매력적……이라고요? 제가?」
「그래 맞아, 당신. 사나에 씨는, 굉장한 재능을 감추고 있잖니」
「아, 예」
「그래, 숨기고 있는 거야. 당신이 자각하고 있는 힘은 그저 빙산에 일각에 불과해. 나머지는 네 속에서 잠들어 있어. 이미 완성되어 있는 선대와는 다른 부류인걸. 나, 당신을 보고 있으면 아주 두근거려」
「두근, 거린다?」
「맞아. 기대돼서 마음이 떨려」
「기대……」
「저기, 사나에 씨」
「예」
「함께 환상향에 가자」
「네에!?」
「응~? 가자. 그곳에선 분명 당신의 힘을 마음껏 꺼내 보일 수 있고, 평가 받을 수 있을 거야. 당신은 환상향에 가는 편이 좋아, 분명해!」
청아는 몸을 들이밀어 사나에의 손을 꼭 부여잡았다. 그 눈은 이미 형형색색 빛나고 있었다.
사나에 자신의 의사를 존중해준 선대와는 정반대다.
억지로 이쪽을 선택하라며 등을 떠미는 격이다.
하지만, 사나에는 그 행동이 불쾌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확실히 억척스럽긴 했으나, 그 속에 악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기 보단 선의조차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런 번거로움을 밀쳐내는 알 수 없는 힘이 그녀에겐 있었다.
청아에겐 일말의 망설임도 없다. 자신의 욕망에 따라 사물을 관측하고, 행동한다.
그 모습이, 지금의 사나에로선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그래도, 가족이……」
「확실히 가족과 떨어져 환상향에서 살아가게 된다면, 머지않아 후회할 때가 올지도 몰라」
청아는 맑디맑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 세계에 남아 있으면 죽을 때까지 후회할 거야」
청아는 단언했다.
등골이 얼어붙을 것 같은 한마디였다.
「나는, 당신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어. 당신은 이 세계에 싫증이 난 거야. 아니, 실망했다고 보는 편이 맞겠지」
「그렇지……」
「이대로 살아봤자, 평범한 행복을 누릴 순 있겠지만, 만족할 일은 결코 없겠지. 왜냐하면, 당신의 그릇은 남들보다 훨씬 거대하니까」
「──」
「남들과 똑같은 행복으로 스스로를 속일 수 있겠어? 당신 자신의 힘만으로 해낼 수 있는, 당신만의 정상을 노리고 싶지 않아?」
「나, 만의」
「누구보다 높게 날아오르는 거야. 그러면, 남들은 당신을 우러러보겠지」
사나에는 청아의 눈을 마주봤다.
빠져들 것만 같은 깊은 눈동자가 자신을 비춘다.
「자신의 바람을 위해 가족을 버려도 돼. 아무도 용납지 않는다 해도, 내가 용납해줄게. 일찍이, 가족을 버리는 길을 택한 내가」
망막을 통해, 그녀의 속에서 화르륵 타오르는 시꺼먼 불길이 비추는 것 같았다.
그녀는 항상 그 열기에 몸을 맡기고 있는 것임을 사나에는 이해했다.
그렇기에, 청아는 헤매이지 않는다. 망설이지 않는다.
자신의 속에서 타오르는 욕망의 불꽃을 원동력 삼아, 그녀는 행동하는 것이다.
지금의 자신에겐 이미 사그라진 불꽃. 사나에는 그녀에게서 그 편린을 볼 수 있었다.
이 말을 계속 듣다간, 이 눈을 계속 마주보고 있다간, 자신에게도 이것이 옮겨 붙을 것이다.
그녀의 말을 따라, 그 길을 선택해버리고 말 것이다.
하지만, 갑작스레──.
청아의 입가가 풀어졌다.
오니와 부처라는 상반된 존재를 연상케 하던 강렬한 미소가, 단순히 요조숙녀다운 부드러운 미소로 변해 있었다.
「──라고 말하긴 했지만, 결국 결정하는 건 당신」
청아는 그제까지 부여잡고 있던 사나에의 손을 살그머니 놓았다.
「당신이 결정할 일이기에 가치가 있는 법이야. 나는 힘을 내가 원하는 길로 몰아가는 것보단 스스로 어떻게 나아가는지를 보는 쪽을 좋아하거든」
「아, 예……감사해요. 여러모로 참고가 됐어요」
「만약, 환상향으로 이주하게 된다면, 다시 이런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어. 그땐 여러 가질 가르쳐줄 테니까.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조금 못된 일도 말이지」
사나에는 죄어든 것 같은 미소를 짓곤, 애매하게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나눈 대화만으로, 청아가 대하기 꺼려지는 존재라는 생각이 뿌리박힌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강하게 이끌리는 면도 있었다.
사나에가 지금까지 만나보지 못한 타입의 여성이었다.
당연한 윤리관만을 입에 담는 어른들과는 다르다. 그녀의 말에는 위험스런 기색이 있긴 했지만, 그녀만의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만 흥미가 돋아버린다. 꼭 술이나 담배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청아의 됨됨이를 알게 되니, 더더욱 이 세 사람의 조합에 신경이 갔다.
외모도, 성격도, 모든 것이 반대로 보이는 선대에게 자연스레 시선이 옮겨갔다.
「……방금 한 이야기 말이다만」
이제까지 침묵을 고수하던 선대가, 갑작스레 입을 열었다.
「역시, 넌 네가 바라는 길을 가는 게 좋다고 본다」
여태까지 계속 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가, 라며 사나에가 놀랐다.
「내게도 딸이 한 명 있다」
「──에, 자녀분이 계신가요!?」
「그래. 피는 이어지지 않았다만, 소중한 아이지」
어안이 벙벙해지는 발언에도 불구하고, 사나에는 계속되는 선대의 말을 어떻게든 들으려 노력했다.
「나로선 네가 정말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고, 네 부모님의 심정을 대신하는 무책임한 일도 할 수 없다」
어디까지나 진지하게, 선대는 사나에를 마주보았다.
「그러니, 어머니로써의 내 생각을 말해주마」
「……네」
「아이가 걱정해주는 건, 매우 기쁜 일이다. 늙은 날 돌봐주고, 삶을 다할 때까지 내 아이와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건 분명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일일 테지」
선대는 머릿속으로 상상한 광경에 살포시 미소 지었다,
「하지만, 난 그 무엇보다 내 아이가 행복해지길 바라고 있다」
그럼에도 선대는 그렇게 말했다.
「그 행복이 가족과 함께하는 것이라면, 그보다 기쁜 일은 없을 게다. 하지만, 그게 무언가에 도전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 탓에 머나먼 여행길에 오르게 될지라도, 나는 내 아이가 바라는 대로 해주고 싶구나」
「……하지만, 부모님이 슬퍼할 일은 하고 싶지 않아요」
「자식이 자립하여 부모에게서 독립하는 건, 자연의 섭리다. 그저, 그 섭리에 다양한 형태가 존재하고 있을 뿐. 분명 이별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만, 그보다 더한 기쁨도 있는 법이다. 어떤 부모라도 마찬가지일 테지. 아마도」
가슴 속 깊이 실감할 수 있는 말이었다.
물론, 사나에로선 선대가 느끼고 있을 부모의 심정을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기에야말로, 꼭 부모님에게 직접 같은 말을 들은 것 같았다.
그 감각조차, 자신이 스스로에게 유리하게끔 멋대로 단정 지은 착각인 게 아닐까 의심이 가긴 했다.
그럼에도──.
「……저기, 사토리 씨」
두 사람과 이야기를 하는 동안, 줄곧 말없이 있던 사토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턱을 괴는 모습이 꼭 한가함을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
이렇게 무관심하다니, 생각보다 너무한 사람이네. 같은 생각을 하면서도, 사나에의 입가엔 쓴웃음이 지어져 있었다.
「감사해요」
「전 딱히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답례를 하고 싶다면 그 둘한테 하세요」
물론, 사나에는 선대와 청아에게도 깊이 고개를 숙였다.
머리 위로 펼쳐진 하늘은, 어느새 붉은 노을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학교를 나와, 이리저리 방황하던 시간이 길었던 걸까, 아니면 너무 오랫동안 대화를 나눈 걸까.
가족들은 자신이 조퇴했단 사실을 모르겠지만, 슬슬 귀가하는 게 좋을 시간대였다.
집에 돌아가면, 곧 밤이 찾아온다.
모든 것을 결정지을 밤이.
아직도 망설임은 있었다.
아직 어떻게 해야 할지 확실히 결정하진 못했다.
지금 이 마음은, 부모님을 본 순간 다시 바뀌어버릴지도 모른다.
「오늘 밤, 출발한다고 했죠」
「예, 예정대로라면 말이죠」
「또 만날 수 있을지 어떨지는 알 수 없지만──」
사나에는, 그 다음 말을 내뱉길 망설였다.
여기서 「다음에 봐요」라는 말도 「잘 가요」라는 말도, 자신이 선택을 내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결국,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한 채 사나에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시 한 번 깊게 고개를 숙이곤, 귀갓길에 올랐다.
공원을 나오기 전에 뒤를 돌아보니, 말없이 자신을 배웅하는 선대와 「기다리고 있을게~」라며 손을 흔드는 청아의 모습이 보였다.
◇
──현대들이한 지도 벌써 3일. 드디어 오늘 밤, 우리들은 환상향으로 돌아간다!
우리들은, 아침 일찍 우리가 묵던 호텔에서 체크아웃 했다.
되새겨보니 짧으면서도 긴 3일이었다.
날짜만 보면 살짝 여행하는 분위기로 볼 수도 있는 현대 생활이긴 했지만, 아무 목표도 정하지 못했던 처음엔 정말 어째야 될지 몰랐다니까.
하지만, 여러 행운과 노력이 겹쳐서, 우리들은 보는바와 같이 무사히 환상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나 원 참, 이걸로 일단 안심해도 되려나.
아직 마음을 놓기엔 이르단 느낌이 들긴 하지만, 여태껏 나도 모르게 팽팽해진 머릿속의 끈이 느슨하게 풀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역시 사토리가 처음부터 줄곧 마음에 걸려왔기 때문이다.
나 혼자뿐이었다면, 정말로 콘크리트 정글 속 서바이벌 생활을 해나갈 자신이야 있었지만.
오히려, 에어마스터라든가 스트리트 파이터처럼 노상 격투 생활을 즐기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태평해질 수 없었던 이유는, 사토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랄까, 이런 내 자신에 행동에 대해 책임감 비슷한 걸 느끼게 됐다.
누가 뭐라던, 사토리는 내 친구니까.
친구, 니까!(강조)
어쨌든, 그 책임감이 이제야 그나마 가벼워진 것 같은 느낌이다.
아직 오늘 밤에 벌어질 최대의 이벤트가 남아 있긴 하지만, 이 일에 대해선 내가 노력해봤자 어떻게 될 일이 아니다.
카나코 님과 스와코 님의 힘 나름. 적어도, 내 신앙이 조금이라도 힘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해보자.
사나에가 어떻게 나올지 조금 신경 쓰이긴 하지만──그것 역시, 내가 섣불리 끼어들 문제가 아니고.
「지금부터 어쩌실 건가요?」
호텔을 나오자마자 청아가 내가 물었다.
궁금한 건 알겠는데, 팔짱껴오지 말아줄래?
밀착해서 그 부드러운 몸이나 가슴이 맞닿는 건 됐다 치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몰리거든. 일단, 나도 여자로 보이긴 하니까.
그런 속내에도 무색하게, 청아를 향한 선대의 말없는 항의는 전해지지 못했다.
아니, 그냥 무시당한 걸지도.
「딱히 생각해둔 건 없다만」
「그럼 그냥 밤이 될 때까지 호텔에 있었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바로 옆에서 걸어가던 사토리가 투덜댔다.
덤으로, 첫날에 사고가 일어난 뒤로 거의 항상 내가 손을 잡고 걸어다니고 있다.
확실하게 능력의 범위 안에 들어가 있을 수 있다는 점도 있지만.
뭐, 가장 큰 이유는 우리들이 『진정한 벗』이라 그런 거지만!
「정확한 시간을 모르는 이상, 되도록 항상 빠르게 행동해두는 편이 좋을 거라 생각했다」
난 호텔을 나온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사토리의 생각도 이해가 가지만, 나로선 만약에 대비해 오늘 하루는 언제든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두고 싶었다.
만약에 대비한다고 말하긴 했지만, 구체적인 사태에 대해 상정해둔 건 아니다. 하지만 호텔에서 나올 때엔 약간이라곤 해도 나름 시간이 걸리니, 그 시간을 최대한 단축해두고 싶었던 것이다.
무단으로 호텔에서 나가면 종업원 여러분께 폐를 끼치게 되기도 하고.
아름다운 사람은 떠난 자리도 아름답다고들 하잖아.
……아침에, 새삼스럽게 현재 방치 중인 청아의 집이 떠오른 게 원인이기도 하다.
본인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지만, 저거 나중에 어떻게 관리되는 걸까? 애당초 청아의 호적 문제는 어떻게 되는 거지?
한 번 시작하니 끝없이 생각이 이어진다. 아아, 관공서 직원 여러분 미안해요──.
그런 생각들에 쫓겨 반쯤 현실도피 하듯 바깥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일단, 밤까지 시간을 보내기위해 이곳저곳을 산책하는 기분으로 걸어 다녔다.
배가 고파지면, 대충 근처에 있는 가게에 들어가면 된다.
정말 여행이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편한 마음이다.
카메라가 손에 있었다면 기념으로 몇 장 찍었을지도 모르겠는걸.
청아한테 부탁하면 사줄지도 모르겠다만, 아무리 그래도 쓸데없는 지출은……돌아갔을 때 레이무나 유카리한테 자기들 마음도 모르고 즐기고 온 거냐며 혼날지도 모르고.
그렇게 여기저길 떠도는 동안, 도대체 무슨 인연인지, 우리들은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
그녀, 코치야 사나에와──.
교복을 차려입은 사나에가, 우리들 앞에 떡하니 등장한 것이다.
실제로 사나에와 만나는 건 처음이었지만, 이때 느낀 놀라움이나 감동은 생각만큼 크진 않았다.
이미 사토리를 통해 사토리가 사나에와 만났다는 것과, 그때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를 들었기 때문이다.
사나에와 만남에 감동하기보다, 사나의 본인이 어떻게 행동할지가 마음에 걸리던 차였다.
아니나 다를까, 사나에는 오늘 밤의 일에 대해 상담을 청해왔다.
──환상향으로 갈 것인가, 가지 않을 것인가.
고민을 털어놓은 사나에의 심각해 보이는 표정을 보면서, 나는 어찌 대답해야할지 고민했다.
한심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나로선 진부한 말 외엔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내 나름대로 생각하는 바는 있다.
코치야 사나에에게 기대 또한 품고 있다.
하지만, 스스로의 생각과 기대만을 내세우는 것은, 내가 생각해도 너무 오만방자한 행동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감각은, 이제껏 인생을 살아오며 몇 번이고 느껴왔다.
그럴 때마다, 난 항상 생각한다.
──내가 가진 『전생의 지식』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 편이 낫다. 나 자신을 포함한 어느 누구를 위해서라도 주어져선 안 될 것이다.
물론, 이 지식이 편리하게 여겨질 때도 많고, 이것 덕분에 구사일생한 적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이 세계에 대한 지식── 『동방 Project』라는 세계의 정보──만큼은 내 고뇌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번 일 또한 그렇다.
동방 캐릭터를 만날 때마다 나는 항상 원작의 지식을 전제에 두고 그 인물을 대한다.
아무리 스스로를 타일러도, 마음 한구석에선 그녀들의 삶이나 인격을 이미 알고 있단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마치 내가, 남의 앞날을 알고 운명에 순응하라며 행동을 강제하는 것 같아서,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원작에선, 사나에는 카나코 님들과 함께 환상향으로 온다.
그렇지만, 사나에 본인은 그 상황에 이를 때까지 스스로 고민하고, 선택한 것이다.
눈앞에 서 있는 이 아이처럼.
그런 소녀에게 내가 대체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환상향에 가라, 고 말하면 이미 정해진 운명이니 순응하라는 것처럼 들린다.
환상향에 가지 마라, 고 말하면 그저 전생의 지식을 부정하고 싶은 심리에서 나온 값싼 반항심처럼 느껴진다.
자신의 조언이, 아무 의미도 없을 것처럼 느껴진다.
「지나친 생각이에요」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내 옆에서, 사토리가 중얼거렸다.
사나에와 청아가 대화하는 중에, 나한테만 들리게끔 작은 소리로 말한 것이다.
「만남이 평등했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따져봤자 아무 의미도 없어요. 『몰라도 되는 사실을 알고』 남과 마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 꼭 당신만 있는 건 아니에요」
턱을 괴는 시늉을 하며, 눈만을 굴려 나를 바라본다.
「당신이 항상 이 세계, 그리고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모든 자들을 진지하게 대하려 노력하고 있단 사실은 알고 있어요」
사토리는 쓰게 웃었다.
「제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네요」
「사토리──」
이윽고, 청아와 사나에의 대화가 끝났다.
결국, 내가 사나에에게 해준 말은, 나 스스로가 느끼는 부모로서의 마음이 전부였다.
레이무를 향한 내 심정을, 그저 말로 치환해 가르쳐준 것이 다다.
사나에는 우리들에게 감사하다 했지만, 그다지 도움이 되어준 것 같진 않다.
그저 오늘 밤, 사나에가 조금이라도 덜 후회할 선택을 해주길 바랄 뿐이다.
사나에가 떠난 뒤, 하늘을 올려다보니, 벌써부터 붉은빛이 도시를 뒤덮기 시작하고 있었다.
해가 져간다.
이제 곧, 밤이다.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지만, 얼마 안 있어 폭풍우가 몰아칠 것이다.
「지금부터 어떻게 할까요?」
청아가, 왠지 기시감이 드는 질문을 던졌다.
이제 어쩌지.
일단 지금 신사로 가 있어도 괜찮을 듯했다.
언제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할진 모르겠지만, 폭풍우가 몰아치기 시작한 뒤에 움직이기 시작해봐야 분명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될 테지.
아직 사람이 남아 있다면, 사람 눈을 피해 몰래 들어가면 된다.
그 뒤엔 이동할 시간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끝이다.
거기다 생각해보니 우리들 중에선 사토리만이 신들을 만나보지 못했다.
얼른 가서 서로를 소개해두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사토리의 의견을 들어볼까.
나는 아까부터 줄곧 입을 열지 않고 있는 사토리를 바라봤다.
「사토리?」
의자에 앉은 채,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그런 사토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사토리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선대」
왜 그래?
「이거」
왜, 그렇게 허약한 미소를 짓는 거야?
왜, 그렇게 어쩔 수 없단 것처럼 웃는 거야?
「늦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사토리!?
「사토리!?」
의자에서 쓰러지는 사토리의 몸이 땅바닥에 엎어지기 직전, 내가 어떻게든 잡아챘다.
하지만, 품에 안아 든 사토리의 몸에선 이미 힘이 전부 빠져나간 듯, 옆으로 늘어진다.
얼굴을 보니, 괴로워 보이는 듯한 표정이 지어져 있다.
그런 표정에서조차 허약한 낌새가 느껴졌다.
고통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참아내는 모양새였다.
「왜 그런 거냐!?」
사토리의 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어째서 이렇게 갑자기 쓰러진 거지.
아무 징조도 없었을 텐데.
분명 그랬을 터.
──설마, 그게 아니었다고?
「이건, 아무래도 상황이 나빠진 것 같네요」
「청아, 뭔가 아는 게 있나!?」
사토리의 상태를 살피는 청아에게, 나는 지체 없이 바로 질문했다.
곤란하다는 듯 웃으며, 청아가 대답했다.
「사토리 님은 환상향에서 바깥 세계로 나와 버린 탓에, 소멸해가고 있었답니다」
「……뭐라고?」
「죄송해요. 사실 말하지 말란 부탁을 받았거든요」
나는, 한순간 청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소멸?
그건, 죽는다는 게 아닌가?
어째서, 아무 말도 없었던 거냐.
아니, 아니야──어째서 깨닫지 못한 거냐, 난!!
「어떻게 하면 되지!?」
「한시라도 빨리, 환상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어요」
「……스와 대사로 간다」
「아직 시간이 되질 않았는데요」
「됐으니까, 간다!」
더 이상 한 마디 말도 잇지 못하고 있는 사토리를 엎고, 난 내달리기 시작했다.
청아의 말대로, 아직 약속 시간보다 훨씬 이른 시간이다.
신사에 도착했다고 해봤자, 환상향으로 돌아갈 수단은 신들의 힘 뿐.
하지만 지금의 나로선 이 정도 일 말곤 할 수 있는 것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 외의 어느 것도 생각해내지 못했다고 함이 옳다.
그저 달릴 수밖에 없다.
이 쓸모없는 녀석.
이 무능한 놈.
빌어먹을.
빌어먹을.
젠장.
젠장.
젠장…!
텅텅 빈 머릿속에, 스스로를 매도하는 말만이 계속해서 떠오른다.
저녁놀이 진 하늘은, 아직도 구름 한 점 없이 펼쳐져 있었다.
◆
──환상향의 지저 깊은 곳.
코메이지 사토리가 지상에 나간 탓에 3일 동안이나 주인이 부재중인 지령전.
사토리가 며칠간 돌아오지 않을 것이야 예상하고 있었으니 업무상의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지령전 한쪽에선 작은 소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사토리 님한테 무슨 일이 생기신 거야!」
「아직 확실한 건 아니잖아!?」
말다툼을 벌이던 것은 카엔뵤우 린과 레이우지 우츠호였다.
애당초 지령전엔 인간의 말을 할 수 있는 요괴나 짐승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사람으로 둔갑할 수 있는 요괴는, 오로지 이 둘 뿐이다.
아이가 떼를 쓰는 것처럼 소릴 꽥꽥 내지르는 우츠호를, 린이 달래고 있었다.
「그래도, 원래 사토리 님은 어제 돌아오실 예정이었잖아? 그런데 그 다음날인 오늘까지 돌아오시지 않는 건 이상해!」
우츠호의 반론은 아주 정당했다.
누구보다도 린 스스로가, 그 점에 대해서 가장 불가사의했다.
1박2일 동안만 지상에서 볼일을 보고 올 예정이라고 말한 건 사토리 본인이다.
이르면 어제 아침, 늦어도 밤엔 지령전에 돌아와야 할 터다.
그런데 돌아오지 않는다.
사흘째인 오늘 아침을 지나, 낮을 훌쩍 넘겼는데도 아무 연락도 없는 것이다.
이제 곧 밤.
만약, 오늘도 돌아오지 않는다면──.
불안함이 가시지 않는 건, 린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사토리 님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야……나, 지상에 다녀올게!」
하지만, 우츠호의 그 생각엔 결코 찬성할 수 없었다.
「갈 수 있을 리 없잖아!」
「갈 수 있어, 사토리 님이 하쿠레이 신사란 곳에 갔다는 것 정돈 알고 있는걸!」
「정확히 어디 있는 곳인지 알고 있냔 뜻이야! 애당초, 너 지상의 지리 같은 건……」
「그럼, 알고 있는 녀석한테 물어보면 돼!」
「지저에서 온 요괴란 게 알려지면 싸움이 날 게 분명해! 그것보다 너, 지상에 펼쳐진 결계는 어쩔 건데!?」
「사토리 님한테, 이거 받았어!」
우츠호가 자신만만하게 꺼내든 기다란 부적을 보고, 린은 눈이 튀어나올 만큼 놀라고 말았다.
지상으로 가는 통행 허가증으로서 기능하는 부적.
원래는, 필요에 따라 관리자만이 발급해줄 수 있는 것이며, 사적으로는 물론, 돈이나 연줄 같은 부정한 수단으로 얻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자, 잠깐……그거 어디서 찾았어!?」
「사토리 님의 책상 서랍에서」
「이 멍청아───!!」
허가증을 빼앗으려 린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우츠호는 오히려 몸집이 작은 것을 살려 생각보다 재빠른 움직임으로 피해냈다.
얼마 전까진 익힌 지 얼마 되지 않아 뻣뻣하게 움직이는 게 다였던 우츠호의 몸놀림에, 린은 빈틈을 찔렸다.
「헤헷, 어때! 나도, 사토리 님을 지키기 위해 점점 강해지고 있으니까!」
「큭……! 그렇다고, 지상에 가는 건 바보짓이야!」
「오린, 오린은 왜 그렇게 반대하는 건데!?」
「왜냐니……」
──지상이 위험해서 그래.
그렇게, 솔직하게 대답할 순 없었다.
린에겐, 일찍이 지상에 나와 그 요괴들과 마주쳤을 때의 공포가, 아직도 뇌리에 선명히 박혀 있었다.
만약, 그 요괴들과 우츠호가 만나기라도 하면──.
그런 생각만으로도, 린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만약 우츠호가 자기 같은 상황에 처한다고 상상하니, 그때보다 더욱 큰 공포가 느껴진다.
우츠호가 걱정돼서 이러는 것이다.
그 이유를 알려주고, 설득하고 싶다.
하지만, 그런 말을 했다간 우츠호의 지상으로 나가겠단 결의가 더욱 굳어질 것임을, 린은 알 수 있었다.
「오린도 같이 가면 되잖아! 사토리 님이 걱정되지 않아!?」
린은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사토리는 그런 위험한 지상으로 가버린 것이다.
게다가, 린은 사토리의 목적지인 하쿠레이 신사가 어떤 곳인지도 알고 있다.
하쿠레이의 무녀──선대무녀가 일찍이 살던 곳이며, 야쿠모 유카리와도 인연이 깊은 장소.
위험하단 말 하나로 끝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온갖 귀찮은 사건의 중심지. 무슨 사태가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는 혼돈의 한복판.
자신이라면, 결코 엮이고 싶지 않은 두려운 곳.
사실, 사토리가 나간다는 말을 한 뒤에도 그 신사에 가는 것은 반대해온 자신이다.
아니, 애당초 선대무녀와의 인연 자체를 끊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바다.
하지만, 존경하는 주인님은 이미 가버린 뒤.
사토리를 걱정하는 마음은, 그때부터 이미 싹트고 있었다.
우츠호의 말이 맞다.
사실은, 사토리를 위해서라도 지상으로 가고 싶다.
그렇지만──.
「사, 사토리 님껜……사토리 님 나름대로 생각이 있으셔서……」
우츠호로부터 눈을 돌리고, 겨우겨우 목소리를 짜내어 말을 잇는다.
사흘 전, 사토리의 방에서 찾아낸 그 그림이.
그보다 훨씬 전, 선대무녀와 밀회를 가졌을 때 보았던 주인의 모습이.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어, 불안과 함께 머릿속을 맴돈다.
그것이 린의 행동을 주저하게끔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이제 됐어, 나 혼자 갈 거야! 지상에는, 오린보다 의지할 수 있는 친구가 있는걸!」
린이 제정신이 들었을 땐 이미 일이 터진 뒤.
우츠호는 방에서 말 그대로 뛰쳐나갔다.
「바보, 오쿠!」
멈출 틈은 없었다.
날개를 펼치고, 창문을 통해 지령전의 바깥으로 뛰쳐나간 우츠호.
그 손엔, 통행 허가용 부적이 굳게 쥐어져 있었다.
그걸 본 린이 혀를 찬다.
지옥까마귀 요괴인 우츠호를 비행으론 따라잡을 순 없다.
그럼에도 쫓아야 한다는 생각이 가득했지만, 그보다 먼저 지상으로 나가버릴 가능성이 높았다.
당연히, 허가증이 없는 린으로선 결계를 통과할 수단이 없다.
결계를 통과하기 전에 따라 잡지 못하면, 허사가 되어버리고 만다.
린이 고민한 것은 단 한순간뿐이었다.
지능이라면, 우츠호보다도 뛰어난 요괴인 린답게, 그 자리에서 판단을 끝내고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언니!」
지저의 요괴로선, 결계를 빠져나갈 수 없다.
하지만, 이 지령전에는 현재 딱 한 명, 지상으로 나갈 수 있는 예외의 인물이 있다.
「콘파쿠 언니!」
「──린 씨. 왜 그러세요?」
저녁 식사 준비를 하고 있던 콘파쿠 요우무가, 달려온 린을 불가사의하단 시선으로 바라봤다.
◆
일찍이, 하쿠레이 신사가 있던 장소는 빈터가 되어 있었다.
빈터라고 해봤자 그렇게 어지럽혀져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 자리에 새로운 신사를 세우기 위해 무너진 건물의 잔해를 깔끔하게 정리한 뒤였다.
잔해를 해체한 뒤 나온 일부의 목재나 기와 등등, 재활용 할 수 있는 재료는 잘 모아 한구석에 쌓아져 있다.
할 마음만 든다면, 당장이라도 제자리에 신사를 다시 지을 수 있을 정도다.
단 3일 만에, 이렇게 많은 일을 해준 것은 스이카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변의 범인을 찾으러 떠나 있는 스이카의 분신들이었다.
부탁만 하면, 스이카의 분신들이 신사를 재건하는 작업을 시작해줄 테지.
오니의 뛰어난 건축 기술이라면, 새 신사가 세워질 때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레이무는 아직 그런 부탁에 대해 한 마디 말도 꺼내지 않고 있었다.
「──이제 가는 겨? 레이무」
지진이 신사를 덮친 지 사흘째.
어머니가 눈앞에서 사라진 지 사흘째.
그리고, 하쿠레이 대결계에 균열이 생긴 지 사흘째인 오늘.
그 결계의 균열을 수복한 레이무는 지금, 일찍이 하쿠레이 신사가 있던 장소에 다시 서 있었다.
「응, 다녀올게. 마미조」
레이무는 뒤를 돌아 자신을 배웅하는 마미조를 바라보았다.
옆에는 유카리와 스이카도 함께 서 있다.
레이무는 그 둘을 차례로 돌아보곤 말했다.
「유카리, 어머니의 수색은 맡길게」
「알겠어, 그러니 넌 이변의 해결에 집중하렴」
유카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스이카, 범인이 『천계』에 있다는 게 틀림없지?」
「어, 움직이지도 않고 있어. 또 다른 내가, 바로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니 믿으라고」
「움직일 생각은 없단 소린가」
「기다리고 있는 거야, 자길 퇴치하러 올 녀석을」
「그건, 이변을 일으킨 동기와 관련된 걸까?」
「나로선 아무 말도 해줄 수 없어. 레이무 스스로 당사자한테 확인해보는 편이 나아」
「과연. 분노는 모아두라, 는 거구나」
「충고할 필욘 없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내가 옳다』는 식으로 방심하진 마. 이 사건을 일으킨 녀석은 꽤나 수상하니까」
「알고 있어」
「그리고 레이무보다 먼저 홍마관의 메이드와 흑백의 마법사가 도착할 것 같아」
「마리사는 왠지 모르게 알 것 같지만, 사쿠야까지? 어째서?」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도 그런가. 뭐, 거기 도착하면 직접 물어보지 뭐」
스이카의 정보를 확인한 뒤, 레이무가 끄덕였다.
하쿠레이 신사를 덮친 지진──나아가서, 현재 환상향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상 기후의 원인이, 천계에 사는 천인의 짓임을 스이카에게 보고 받은 건 바로 조금 전이었다.
스이카의 힘이라면 더욱 빨리 정보를 얻는 게 가능했을 텐데, 그걸 바로 전달하지 않은 건 결계의 수복에 집중하고 있는 레이무의 신경을 빼앗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이겠지.
분노에 정신이 팔려 할 일을 내팽개치고 적에게 달려가 싸우는──그런 어리석은 짓을 레이무가 할 리 없긴 하지만, 그녀가 동요하는 모습을 보았던 스이카로선 일말의 불안함을 떼어 놀래야 떼어낼 수 없었다.
하지만, 실제로 레이무를 만나보니 예상했던 것보다도 침착한 모습에 놀라고 말았다.
유카리가 위로라도 해준 건가 싶긴 했지만, 그럴 리 없다고 생각을 고쳤다.
친구이기도 한 유카리와는 꽤 오랜 세월 사귀어온 사이다. 어떤 성격인지는 알만큼 안다.
그렇다면, 그 요인이 된 것은, 어느새 레이무 옆에 들러붙어 있는 이 낮선 요괴일 터.
스이카는, 마미조를 몰래 올려다보았다.
「『천계』라는 디가 뭘 해쌌는 딘지, 알곤 있는겨?」
다시금 자신을 마주본 레이무에게 마미조가 물었다.
바깥 세계에 대해선 박식한 그녀였으나, 환상향의 일이라면 역시 아는 바가 없다.
「몇 번 이야기를 들어보긴 했어. 구름 위에 있는, 천인들이 사는 곳이라던가. 요괴의 산에서 하늘 위로 오르면 있다던데」
「흐음, 우에 가는지만 안다면야 되었구먼. 근디, 그 천인이란 문디들이 내가 아는 기랑 똑같다 허면, 꽤 귀찮은 상대여. 엔간한 선인보다 한 수 위인 것들이니께」
「그것도 알고 있어」
「준비는 충분한겨?」
「문제없어」
「상황이 여의치 않음 냉큼 내뺄 수 있게끔, 머리 쫙 식히고 있는 기라」
「알고 있어……그것보다, 부끄러우니까 그만둬」
손빗으로 머리카락을 정리한 뒤, 목깃을 고쳐주려 드는 마미조의 손을 레이무가 밀쳐냈다.
「이야, 미안혀. 아무래도, 니보다 내가 더 쫄았나벼」
부끄럽다는 듯 미소 짓는 마미조를 따라, 레이무의 입가에도 작은 미소가 지어졌다.
잠깐의 기분 전환을 끝마친 레이무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온다.
천계가 아무리 구름 위에 있다 한들 예외는 아닐 것이다.
어둠 속에서의 싸움이 될 테지.
지금은 잠시 기다리고, 다음날 해가 나왔을 때 움직이는 편이 유리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럼, 다녀올게」
레이무는 살며시 땅 위로 떠올랐다.
「레이무」
마미조에게 불린 레이무가, 고개를 돌린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좋으니께, 꼭 돌아와서, 내한테 말해주는 기다」
「알았어」
굳게 끄덕이며, 레이무는 요괴의 산을 향해 날아올랐다.
작아져가는 레이무의 모습을, 마미조와 유카리들이 나란히 배웅했다.
이윽고, 모습이 사라져갈 쯔음, 유카리는 시선만을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마미조는, 아직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사흘간, 함께 보내봤지만, 당신이란 요괴에 대해 잘 모르겠어」
혼잣말을 하듯 유카리가 중얼거렸다.
「특히, 레이무와 그렇게나 친해진 영문을」
「그거야 니가 인간하고 우찌 사귀는 긴지 몰라싸니까 그런 기다」
그대로 하늘을 바라본 채, 마미조가 대답했다.
「요괴로서의 지식이나 경험이라 카면, 틀림없이 내보다 니가 훨씬 낫겠제. 하지만 말여, 인간들과 부대낀 날들은 분명 니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은 거여. 니보다 억수로 가까운 곳에서 인간하고 있었으니 말이여. 너구리가 구라를 치는 상대라 하믄, 대부분 인간이니께」
「확실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을 속이며 살아간 요괴의 일화는 수없이 전해지지. 그리고, 그러다가 퇴치 당했다는 결말도 함께」
「그도 맞는 말이긴 하제. 인간한테 당했다 카는 동료들의 이야기는 수도 없이 들었으니께, 그래서 인간을 포기해삔 놈들도 잔뜩이여. 하지만, 그렇지 않은 놈도 있는겨」
「그게, 당신이란 거야?」
마미조는 빙긋, 하고 애교 섞인 미소를 지으며, 유카리를 돌아봤다.
「내도, 그렇게 속여 먹은 인간한티 아픈 꼴을 본 것이 한 두 번이 아녀. 들어 쌌키만 혀도 눈물 콧물이 줄줄 새어나오는 이야기도 있고, 또 술판 벌일 때 써먹을 농담 같은 것도 있제」
그런 말에도 무색하게, 자랑스럽다는 듯 마미조는 가슴을 피고 있었다.
「그래, 그런 거여. 실컷 웃어삐며 인간 이야길 할 수 있어, 적어도 내는 그려.
인간과 엮여서 부끄러운 꼴도 겪고, 잔뜩 실패하기만 한 적도 있지만서도, 그 인간들과 함께 부대끼며 성장한 거여. 남자한테 반해부렸던 얼레리꼴레리한 경험도 있고, 우짜다 실수를 해싸서 인간의 아이를 길러본 적도 있었제」
옛 과거를 돌이키듯, 마미조는 다시금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런 그녀의 옆모습에선, 야쿠모 유카리만큼이나 노련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단순히 쌓아온 세월이라면, 유카리가 한 수 위.
사람의 수명 따윈 고작해야 수십 년에 불과하다. 그런 인간들과 사귀는 시간 따윈, 눈 깜짝할 새 지나가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 눈 깜짝할 새에 얼마나 많은 의미가 담겨있는지──.
옛날의 자신이었다면 비웃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알 수 있다.
마미조가 말하는 『인간과 사귀는 법』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지금이라면.
「레이무는 좋은 아여. 내도 모르게 보살펴 주고 싶어지지. 그렇제, 유카리 공」
「……그래, 그 말대로야」
유카리는 살그머니 눈꺼풀을 닫았다.
저녁놀이 깔리고, 기분 좋은 고요함이 내려앉는다.
이윽고, 주변이 어슴푸레해질 쯔음, 유카리와 마미조는 저택에 돌아가기 위해 틈새 속으로 들어섰다.
스이카의 분신은 자신의 역할을 끝낸 뒤, 어느새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어이 너」
저택으로 돌아온 두 요괴를 마중한 것은, 이마에 핏대를 세운 란이었다.
유카리를 정중하게 맞이한 후, 일변해 마미조를 적의로 가득 찬 눈동자로 예 찾아낸다.
이 3일간으로, 특별히 드물지도 없어진 광경이었다.
「엉? 뭐여, 문디 여시?」
「또 저질렀더군」
「무슨 소릴 하는겨?」
「이걸 말하는 거다」
란이 마미조의 눈앞에 들이댄 것은, 자그마한 병이었다.
안엔 녹색 가루가 들어가 있다.
「조미료를 놔두는 선반들 속에 섞여 있었다. 이건 대체 무슨 짓이지?」
「뭐라니, 내가 손수 만든 맛가루인디」
「볶은 찻잎 찌거기와 소금을 섞은 게 전부 아닌가! 맛가루 따위 새로 사면 될 것을, 가난뱅이 냄새 풍기는 짓거린 그만둬라!」
「가난뱅이 냄새라니, 환경 친화적이라고 말하란 말이여, 환경 친화적! 애당초, 닌 너무 낭비가 심하단 걸 모르는 기가!」
「네 녀석의 기호 따윈 알 바 아니다, 내가 관리하는 저택에서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마라! 유카리 님의 저택에서 지내게 해주는 것만도 송구스러워 해야 마땅할 판에, 네 행동은 저택의 품격을 깎아먹고 있지 않나! 아니, 네 녀석의 존재 자체가 문제다!!」
「핫, 그로코롬 소리 안 질러싸도 니 같은 문디 여시의 관리 따윈 필요 없으여! 내가 그걸 만든 이윤 레이무한테 먹여주려 한 기지, 누가 니 같은 문디한테 먹여줄 성 싶드나!」
「누가 이런 걸 먹을까보냐! 그리고 네 녀석, 왜 네 멋대로 부엌에서 채소 절임 따위를 만든──」
그렇게 말다툼을 시작한 두 요괴를, 유카리는 저 멀찍이서 보며 웃었다.
「사흘 간, 질릴 날이 없네」
◆
천인 소녀가, 세계를 내려다본다.
어떤 산보다 높고, 구름보다도 더더욱 높은 곳에 있는 장소.
그곳이 소녀가 사는 땅이었다.
온갖 만물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천공의 대지.
소녀에게 있어서, 그 눈에 들어오는 살아 있는 것들은 전부 『땅을 기어다니는 것』에 불과했다.
땅은 흔들리나, 하늘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야말로 반석 위의 세계.
그렇기에──지루하다.
「지루해」
소녀는 마음속에 맺힌 말을 토해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생각보다 허무한 행위임을 이해했다.
「지겨워」
무거운 한숨을 내뱉었으나, 소녀는 제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땅에 꽂힌 금줄에 휘감긴 날카로운 바위, 그 바위에 걸터앉은 소녀.
벌어진 두 무릎 사이에 검을 꽂고 그 손잡이 위로 두 손이 겹치게끔 얹은 자세였다.
시커먼 칼의 도신은, 금속 특유의 반사광이 아닌 다른 수상한 빛을 자기 스스로 엷게 뿜어내고 있었다.
소녀는, 가만히 앉은 채 움직이지 않는다.
가만히,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아니, 사냥감이 다가오길 기다리는 맹수와도 같은 눈빛을 숨기고, 그저 힘을 다해 기다리고 있다.
「──아」
이윽고, 소녀의 눈이 점점 다가오는 사람의 형체를 발견했다.
해가 진 하늘엔 구름으로 가려지지 않은 달과 별이 스스로를 뽐내며 반짝인다.
이상하게도, 그런 빛만으로는 앞뒤가 맞지 않을 만큼 그 주변에선 어둠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늦은 밤임이 분명한데, 소녀의 모습도, 발밑의 땅도, 풀도, 나무도, 훤히 보인다.
마치 하늘 위에 떠오른 이 환상의 대지 자체가, 스스로의 존재를 주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
소녀의 입에서, 짧게 끊어지는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하핫」
사실, 소녀는 기뻐하고 있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하핫」
사람의 형체가, 그 정체를 알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다.
저 쪽에서도, 이쪽을 발견한 듯, 이곳을 향해 거리를 좁혀왔다.
두 명.
메이드복을 입은 인간과 마법사 같은 옷을 입은 인간.
둘 다, 진심으로 기다리고 있던 상대는 아니었지만, 소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자──」
소녀가, 만반의 준비를 끝마친 뒤 일어선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자극적인 시간의 시작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