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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크 레이디


프롤로그 1화


강철의 날개를 활짝 펴고 거대한 전투도끼가 비상한다. 후두두둑 사방으로 핏방울을 흩뿌리며 태양을 향해 날아오른 도끼의 비행은 짧았지만 강렬했다. 뼈를 가르고 살을 찢어내는 섬찟한 소리와 함께 피가 분수처럼 튀어오른다. 미처 반응을 할 시간도 없이 반토막난 엘프는 경악스러운 표정과 함께 썩은 나무토막처럼 쓰러졌다. 처참한 모습으로 쓰러진 엘프를 커다란 발로 짓밟으며 오크는 포효했다.

"으오오오―!!"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 너무도 평화로운 하늘 아래 피의 맛이 진하게 느껴지는 전투함성이 울려퍼진다. 양날의 전투도끼를 땅에 내려찍으며 검은 철투구를 쓴 오크는 비어있는 손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그 앞에는 엘프들의 마을이 있었다. 전투의 흥분 때문인지 아니면 살육의 광기 때문인지 붉게 충혈되어 있는 눈동자가 칠흑의 투구 속에서 번뜩인다. 철컹! 철컹! 힘있게 도끼를 빼어드는 젊은 전사들의 모습에서도 망설임 따윈 찾아 볼 수 없었다. 만족스런 미소를 입가에 띄우며 철투구의 오크. 피범벅 도끼 부족의 전사장이며 오크들을 보살피는 투신(鬪神) 다라칸의 주술사이기도 한 고르마크는 목이 터져라 소리를 높여 외쳤다.

"들으라! 피범벅 도끼 부족의 용맹스런 용사들이여! 그리고 보아라! 드디어 이 숲의 진정한 주인을 결정할 때가 왔노라! 이 지긋지긋한 피의 역사의 끝을 맺을 때가 왔노라! 그간 잔악한 엘프들의 화살과 칼 앞에 쓰러져 갔던 우리들의 형제와 자식 부모들의 복수를 할 때가 찾아왔다. 두려워 말라! 물러서지도 말라! 이 영광스러운 전투에서 쓰러지는 자들은 위대한 다라칸의 곁으로 돌아가 영광스러운 투쟁에 참가할 수 있으리라. 우리들에게 복수의 힘과 피 그리고 영광을!"

"우리들에게 복수의 힘과 피 그리고 영광을!"

수십의 오크 전사들은 손에 든 도끼를 하늘을 향해 높이 들어올리며 고르마크의 말을 복창했다. 오크들에게 있어 이 전투는 오랜 시간동안 이어져 왔던 엘프와 오크의 분쟁의 끝을 보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그동안 엘프들의 손에 쓰러진 오크들에 대한 복수였다. 숲의 수호자를 자청하는 엘프들은 몬스터인 오크들을 죽이는 것을 자연스러운 행위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다른 자들의 손에 죽은」 동족의 복수를 하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고있는 오크들에게 있어 엘프들의 행위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사장 고르마크의 소집에 응한 전사들의 대부분은 엘프의 손에 한 명 이상의 가족들을 잃은 경험이 있는 오크들이었다.

"싸우기 좋은 날이군."

고르마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고르마크의 두꺼운 손 위에는 흙을 구워서 만든 자그마한 도끼 모형이 들려있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장난을 친 듯한 단조롭고 엉성한 느낌이었지만 고르마크가 애용하는 거대한 양날 도끼 '다라칸의 손' 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

"정말이지 복수하기에 더없이 좋은 날이다."

고르마크는 그대로 손을 꼬옥 틀어쥐었다. 손 안에서 바스라진 도끼 모형을 땅 위에 흩뿌리며 고르마크는 힘있게 다라칸의 손을 들어올렸다.

"보고 있어라. 이 할애비의 싸움을!"

쿵! 하고 고르마크는 한 발을 내딛었다. 단지 그 뿐이었다. 하지만 그 한 걸음을 신호로 웅성거리던 소음이 멎었다. 오크들은 얼굴 만면에 환희의 웃음을 띄우며 난폭한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 다시 오크들의 시선이 집중되었을 때 그 곳은 나무로 된 방책으로 막혀있는 엘프 마을 입구였다.

"가자! 용사들이여!"

"크오오오오!"

"이 때만 기다리고 있었다!"

"다 ​죽​여​버​리​자​아​아​악​!​"​

"네놈들 때문에 삼형제였던 내가 외동아들이 되어버렸다!"

"내 며느리 목숨값으로 네놈들 열 명을 데려가주마!"

오크들은 괴성을 내지르며 엘프 마을을 향해 쇄도하기 시작했다. 그건 어찌보면 무모해 보일 정도의 정공법. 멀리서 공격할 수 있는 활과 마법으로 무장하고 있는 엘프들에게 있어 아무런 방비도 없이 닥치는대로 달려드는 오크들은 너무나도 노리기 쉬운 표적이었다.

"흥! 뻔히 보이는 정면 공격인가. 바보같은 오크 놈들!"

엘프 마을의 수호병. 27명의 포레스트 가디언을 지휘하는 젊은 엘프 카일란드는 활을 겨눈 채 경계하고 있던 엘프들을 향해 공격 신호를 전했다. 공격거리의 압도적인 우위를 바탕으로 불리한 백병전이 진행되기 전에 적들의 기세를 꺾어놓을 심산이었다.

"쏴라!"

―슈슈슈슛

나무 위와 마을의 방책 뒤쪽에서 화살들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정확하기로 정평이 나 있는 엘프들의 사격에 가장 앞서 달려나가고 있던 몇 명인가의 오크들이 다리나 목 등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땅 위를 나뒹굴었다. 빠득! 고르마크는 어금니를 깨물며 다라칸의 손을 크게 휘둘러 자신을 노리고 날라오고 있는 화살들을 막아내며 소리쳤다.

"방패를 들어라!"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오크들은 등에 매달고 있었던 방패를 들어올린 채 계속해서 달려들어갔다. 악귀같은 표정의 오크들이 달려들어오고 있는 급박한 상황. 신중한 정신 집중이 필요한 마법을 정확하게 맞출 수 있을만한 거리가 아니었고 방패를 앞세운 오크들에게 화살이 생각외로 효과를 보지 못하자 엘프들은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오크들을 비웃으며 조소하던 카일란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크오오! 우리들을 이런 화살 따위로 저지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도끼를 휘두르기도 귀찮다는 듯이 통나무 같은 팔을 휘둘러 화살을 쳐내며 고르마크는 호기롭게 외쳤다. 크게 고함을 지르며 달려오는 고르마크를 보며 카일란드는 이를 갈았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자신의 정령검을 뽑아 저 건방진 오크를 단검에 베어버리고 싶었지만 파도처럼 몰려오는 오크들 앞에서 그런 행동을 하는 건 무모한 일이라는 것 쯤은 카일란드 역시 알고 있었다.

"좀 더 제대로 쏴라! 오크들의 방패는 작다! 좀 더 확실히 노려라!"

되는대로 외쳤지만 말처럼 쉽게 될 수 있을리가 없었다. 오히려 카일란드의 동요는 엘프 수호병들 전체로 퍼져나가 화살의 날카로움마저 떨어뜨리고 있었다. 어느새 피에 굶주린 듯이 붉은 눈을 빛내는 오크들이 방책 근처까지 달려오고 있었다. 카일란드는 허리춤에서 검을 뽑으며 마지못해 활을 재고있는 엘프들을 향해 외쳤다.

"활은 버리도록! 이제부터는 마법과 정령으로 대응한다. 거기 다섯! 나를 따라라 백병전으로 맞서겠다! 이 건방진 오크놈들! 이 숲의 진정한 수호자의 힘을 보여주겠다."

"아, 알겠습니다!"

엘프들은 활을 버리고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검술에 자신이 있는 엘프들은 칼을 뽑아들고 카일란드와 함께 방책 앞을 막아섰다. 앞서 달려오는 오크들을 보며 카일란드는 입술 끝을 흉폭하게 비틀어 올렸다. 전황은 틀림없이 엘프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주문 영창이 끝나고, 불덩어리와 얼음조각 등이 오크들을 향해 날라가고 있었지만 오크들은 오히려 그것들을 몸으로 받아냈다.

파랗게 얼어붙고 있는 팔을 스스로의 도끼로 쳐내며 울부짖는 오크를 보며 엘프들이 되려 질린 표정을 지을 정도였다.

"싸워라! 난 지금부터 벨단을 소환한다!"

황급히 외친 카일란드는 그대로 쓰러지듯 무릎을 꿇으며 자신의 검을 대지에 거꾸로 박아넣었다. 그것을 신호로 카일란드를 따라 방책앞에 서 있던 엘프들은 굳은 표정으로 카일란드를 둘러쌌다. 달려오는 오크들이 허리춤의 손도끼를 던져 카일란드를 노렸지만 엘프 검사들은 검을 들어올려 손도끼를 빗겨냈다.

상황은 불리하다 못해 절망적으로까지 치닫고 있었다. 상당한 숫자의 오크들이 쓰러지거나 전투를 속행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지만 그래도 그 숫자는 엘프들의 배 이상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엘프들의 얼굴에는 희망이 남아있었다. 카일란드의 정령검에 봉인되어 있는 대지의 정령기사 벨단. 거대한 오우거조차 한손에 쥐어짜 버린다고 하는 대지의 거신이 소환된다면 아무리 많은 오크들이 있다고 해도 승리할 수 있을거라는 확신히 엘프들을 지탱하고 있었다.

"일어나라!"

카일란드의 호령에 대지가 요동쳤다.

땅을 뚫고나온 거대한 손이 가장 앞서 달려나오던 젊은 오크를 그대로 붙잡아 올렸다. 손아귀에 붙잡혀 버둥거리며 발버둥치던 오크는 그대로 바위와 흙이 뒤섞인듯한 손아귀에 쥐어짜졌다.

푸확! 하고 피보라가 허공에 흩날린다.

"뭣이!?"

처음으로 고르마크의 얼굴에 당황의 빛이 스쳐지나갔다. 그대로 대지 자체가 몸을 일으키듯 몸에 붙어있던 흙을 떨어내며 대지 정령계의 중급 정령인 벨단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엘프 마을의 입구를 당당히 지키고 선 그 모습에 엘프들은 화색을 띄며 환호했고 두려울 것 없이 달려들고 있던 오크들은 한 풀 기세가 꺾인 모습이었다.

"엘프는… 쓰러지지 않는다."

카일란드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중얼였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지만 카일란드는 자신을 부축하려는 엘프의 손길을 만류하며 스스로 몸을 일으켰다.

"이 노옴! 우리 형을!"

한 젊은 오크가 도끼를 치켜든채 달려들었다. 그리고 어리고 무모했던 오크를 향해 거의 오크의 몸통만한 주먹이 내리떨어졌다.

"크헉!"

숨넘어가는 비명소리와 함께 피와 살덩이가 하늘로 튀어올랐다. 벨단의 주먹에 짖눌린 오크는 이미 형체도 알수 없는 고깃덩이로 변해 있었다. 거대한 바위 거인의 뒤에서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엘프를 보며 고르마크는 이를 갈았다. 하지만 지금와서 후퇴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엘프들의 추격에 큰 피해를 입을것이 틀림없었고, 앞으로도 엘프들을 피해 숨어 살아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전사장!"

고르마크는 부름에 뒤를 돌아보았다. 오크 치고는 특이하게 두 자루의 검을 사용하는 젊고 실력있는 오크인 켈록이었다. 켈록은 굳은 표정으로 고르마크를 바라보았다. 켈록 역시 엘프들의 흉악한 손에 부모를 잃은 경험이 있었다. 누구보다도 엘프를 싫어하고 또 부모들을 엘프들에게서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무리할 정도의 훈련을 통해 젊은 나이에도 차기 전사장 후보라 불릴 정도의 실력을 쌓은 자였다.

"저 괴물은 내가 상대하겠습니다."

고르마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켈록의 실력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훌륭한 전사였지만 눈 앞의 괴물을 상대하기엔 아직 부족했다.

"그건 안 된다. 자네의 실력으론 아직 부족해."

"그렇다면!"

켈록은 답답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고르마크는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건 내 몫이다."

무얼 망설이는가.

무얼 두려워하는가.

결단은 이미 내려져 있었다.

고르마크는 다라칸의 손을 휘두르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하​부​지​―​ 이거 선물!"

 ​고​르​마​크​는​ 자신을 향해 내밀어진 자그마한 손을 바라보았다. 앙증맞은 그 손에는 도끼 모양을 한 조각이 들려 있었다.

 "하하 이건! 다라칸의 손이로구나. 네가 만든게냐?"

 "웅! 언제나 우리를 지켜주는 하부지― 엄청 좋아!"

그건 턱없이 무모해 보였다. 벨단의 주먹이 고르마크를 향해 휘둘러졌다. 자욱한 모래 먼지가 시야를 뒤덮고 고르마크의 등을 지켜보던 오크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엘프들은 두 손을 들어올리며 환호성을 질렀고 카일란드는 불끈 주먹을 움켜쥐며 자신감에 찬 웃음을 흘렸다.

​"​크​오​오​오​오​―​!​!​"​

울려퍼지는 괴성, 그리고 백은의 섬광이 번뜩였다.

촤악―

그건 거짓말이었다. 아니 단지 거짓말이라고 믿고 싶었다. 거대한 정령이 흙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챙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카일란드의 손에서 떨어진 칼이 나뒹굴고 있었다. 카일란드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했다. 무너지고 있는 흙과 모래 그리고 돌맹이들 사이로 천천히 걸어나오고 있는 건 새하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채 반쯤 박살나버린 투구를 빗겨쓰고 있는 고르마크의 모습이었다.

오크들의 함성이 울려퍼졌다.

가까워지는 발걸음 소리가 지축을 울린다.

"네놈…!!"

카일란드는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들고 앞을 가로막는 엘프들을 헤치며 고르마크를 향해 달려들었다.

"네놈 같은 오크 따위에게― 우리가!"

"우리 엘프들이!!"

.

.

.

.

.

.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오크들은 엘프들의 집을 불태우고 저항할 수 없는 엘프들을 닥치는대로 베어넘어뜨리고 있었다.

그 중에는 아무런 힘이 없는 엘프의 여자들이나 아이들도 있었다. 그건 참혹한 풍경이었다. 더 이상은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힘든 일방적인 학살. 고르마크는 그런 난장판의 한가운데서 떨어진 통나무 위에 앉아 있었다. 손에는 부숴진 투구를 들고 도끼를 땅에 기대어 두고 있는 고르마크의 표정은 완전히 침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허무하군. 하지만 이것으로 아이들과 형제들의 영혼도 편히 쉬리라."

그 때 무심코 고개를 돌렸던 고르마크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그건 자그마한 엘프의 꼬마였다.

품에는 무언가의 자그마한 조각을 소중히 끌어안고 있는 엘프 꼬마는 고르마크를 노려보고 있었다. '후우…' 고르마크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엘프 꼬마를 죽이는 건 손바닥을 뒤집는 것 만큼이나 간단한 일이었지만 고르마크는 저런 꼬마에게까지 복수의 칼날을 들이밀고 싶지 않았다.

"어서 도망가라. 다른 오크들에게 들키기 전에."

엘프가 오크의 말을 이해할 수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어쩌면 단지 취익거리는 요란한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마치 고르마크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꼬마 엘프는 품에 안고있는 조각을 세게 끌어안으며 말했다.

"… … …."

엘프의 말을 모르는 고르마크는 아이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고르마크의 의도만은 전해진 것 처럼 꼬마 엘프는 곧 몸을 돌려 숲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 때 고르마크의 머리속에 무언가가 스치고 지나갔다. 감출 수 없는 불길함이었다. 하지만 고르마크는 금방 그 생각을 잊어버렸다. 그런 생각 하나하나까지 생각하기에는 너무도 피로한 전투였다. 하지만 고르마크는 알지 못했다. 그 때 보내주었던 엘프 꼬마가 그의 그리고 부족의 운명을 바꿔버릴 거라고는…

전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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