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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크 레이디


파멸 1화




숲의 안쪽. 피범벅 도끼 부족의 오크들 사이에서는 수정 호수라 불리는 커다란 호수를 끼고 피범벅 도끼 부족의 마을이 있었다. 높은 나무 울타리로 둘러쌓인 마을의 한가운데에서는 커다란 불을 피어올리며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오래된 숙적인 엘프들을 몰아내고 그간 엘프들의 손에 스러져 갔던 오크들의 복수를 달성했음을 축하하는 축제였다. 그리고 동시에 격한 싸움 속에서도 오크들을 보호하고 승리로 이끌어주는 투신 다라칸과 위대한 다라칸의 곁에서 끝없는 투쟁을 계속하며 전사들을 보호해주는 선조 오크들을 기리는 의식이기도 했다.

기도를 통해 신을 섬기는 인간이나 드워프들과는 달리 오크들에게 기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싸움터에서의 투쟁이야말로 신에게 전하는 오크들의 기도이며 승리에 환호하는 함성이 성가였다. 잘 단련된 무기는 교전이었고, 복잡한 절차의 의식대신 승리를 축하하는 축제가 의식이었다.

화려하게 타오르고 있는 불을 중심으로 오크들은 춤을 추고 있었다. 인간들이 만들어낸 춤처럼 아름답거나 고상한 맛은 없었지만 붉게 흔들리고 조명 아래서 정렬적으로 몸을 흔드는 오크들의 모습은 그 나름대로의 맛이 있었다. 고르마크는 춤판에서 적당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투구와 갑옷을 벗어던지고 새하얗게 새어버린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고르마크의 모습은 단련된 근육이나 수많은 싸움에서 얻어왔던 셀 수 없을정도의 상처를 제외한다면 부락의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한 오크의 노인처럼 보였다.

"모든 것이 끝났군."

고르마크는 흙을 빚어 만든 쟁반에 술을 따라 그대로 들이켰다. 반쯤 남은 술을 바닥에 주르륵 흘리고 있던 고르마크의 귀에 자그마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소란스러운 축제의 한복판에서는 거의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소리였지만 수많은 싸움 속에서 단련될 대로 단련된 고르마크의 청각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를 잡아낼 수 있었다. 후 하고 가볍게 숨을 내쉬며 고르마크는 어깨 너머로 고개를 돌려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으음―?"

자그마한 아이가 있었다. 아직 10살도 채 안 되어 보이는 자그마한 오크의 여자아이. 날개뼈 근처까지 길게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는 품에 자그마한 지팡이를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꼬옥 끌어안고 있었다. 입술을 오물거리며 앉아 있는 고르마크에 눈을 맞추고 있는 소녀는 늙은 전사장에게 무언가 할 말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고르마크는 고소지으며 술이 담겨있는 쟁반을 바닥에 내려두었다. 고르마크는 백 수십에 달하는 부족사람들을 모두 알고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소녀는 조금 특별한 존재였다.

"아직 안 자고 있었나?"

"아니. 시끄러워서 깨 버렸어. 바깥, 굉장히 소란스럽고. 고르마크가 이겼다는 소식도 들었으니까."

작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소녀는 대답했다. 말은 그런 식으로 하고 있지만 역시나 피곤한지 눈은 여전히 반쯤 감겨있는 상태다. 껌뻑거리는 눈을 손등으로 슥슥 문질러 비비며 입을 크게 벌리고는 '하우응' 하는 신음소리와 함께 하품을 한다. 앙증맞은 송곳니로 아랫 입술을 살짝 깨물며 잠기운을 날려버리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소녀를 보며 고르마크는 곤란하다는 듯 껄껄 작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웃고 있는 고르마크를 보며 소녀는 입술을 삐죽 내민 채 턱을 가슴으로 당기고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웃지 마."

"이거 실례했군. 하지만 넌 아직 어린아이니까. 피곤하면 무리하지 말고 일찍 잠자리에 드는 편이 좋아."

"시러―"

혀를 낼름 빼물며 대답한 소녀는 빙그르 몸을 돌려 고르마크를 향해 등을 내보였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이런 날 정도는 조금 무리해도 괜찮아."

소녀는 그대로 쓰러지듯 몸을 무너뜨리며 그 곳이 마치 자기 자리라도 되는 것처럼 고르마크의 무릎 위에 자연스레 걸터앉았다. 크고 작은 상처로 가득한 고르마크의 몸에 자신의 자그마한 상체를 기대며 소녀는 하우― 하고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자그마한 엉덩이와 가느다란 다리를 꼼지락대며 편하게 자세를 고친 소녀는 품에 꼬옥 안고 있었던 제사용 나무 지팡이를 마치 마술봉이라도 되는 것처럼 손 안에서 핑그르르 돌리곤 고개를 들어올려 고르마크를 턱 아래서부터 올려다보았다.

"고르마크."

고르마크는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눈동자를 마주친 채 소녀는 말했다.

"머리 쓰다듬어줘."

"……."

마을의 최연장자중 한 명. 모든 전사들이 동경하는 전사장 고르마크에 대해 너무나도 당돌한 요구였다. 고르마크는 잠시 할 말을 잊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지만 금새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굳은 살이 잔뜩 박혀있는 거친 손으로 소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흐응♬ 하고 가볍게 콧노래를 부르는 소녀. 슬쩍 고개를 들어 고르마크는 축제가 한창인 광장의 한복판을 바라보았다.

마치 이른 아침부터 달이 떠오를 때까지 계속되었던 싸움이 마치 거짓말이라고 말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태평스런 분위기 속에서, 고르마크는 한쪽 손으로 싸움 중에 새로 얻었던 몇 개의 상처를 손으로 어루만졌다.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가 따끔거리며 쓰라렸다.

"이런 손이 좋은게냐. 요르다."

"응. 고르마크의 손은 부족의 모두를 지키는 손인걸. 싫을리가 없어."

"아직 피냄새가 남아있다."

"그 점도 포함해서 좋아."

요르다라는 이름으로 불린 소녀는 언제나 들고있는 제사용 지팡이가 보여주는 것처럼 피범벅 도끼 부족의 주술사였다. 대외적으론 고르마크가 전사장 직위와 더불어 다라칸의 주술사라는 위치를 겸하고 있었지만, 사실 뼛속은 물론이고 영혼까지 전사였던 고르마크에게 주술적 능력같은건 없었다.

피범벅 도끼 부족의 주술은 거의 요르다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부족의 선대 주술사였던 코가르의 딸인 요르다는 선조의 영혼들은 물론이고 때때로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천재였으니까.

단지 너무 어렸기 때문에 때로는 부족민들의 카운셀러 역할까지 해야되는 주술사의 자리를 맡길 수 없었을 뿐이었다.

"고맙대."

고르마크와 함께 광장을 바라보고 있던 요르다는 뜬금없이 말했다.

"모두 고맙다고 했어. 복수를 해 줘서 고맙다고."

"그래. 잘 됬구나."

"그리고 또 하나―"

요르다는 고개를 돌려 다시 고르마크를 바라보았다.

"이상한 이야기가 있었어."

고르마크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요르다의 이야기는 대부분이 부족의 선조 영혼들이나 다라칸이 전하는 이야기였다. 별것 아닌 사소한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쉽게 넘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게다가 요르다가 꿈 속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가지고 '이상한' 이야기라고 했었던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잠들어 있던 숲의 지배자가 눈을 떴으니 그것은 수 천년 전부터 계획되어지던 어느 오래된 이야기의 종막(終幕). 작은 존재여. 그대는 이야기 해서는 안 될 비밀을 품어안은 전령이 되어 이 낡은 이야기의 마지막 배우들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야 할 것이다. …래. 이상하지?"

고르마크가 듣기에도 확실히 이상한 이야기였다.

"무슨 소리지? 그건."

"몰라― 그 이야기 외엔 특별한 이야기는 없었으니까."

그 때 다른 목소리가 섞여왔다.

"어이, 요르다! 너 또 전사장님 괴롭히고 있는거냐."

"아―!"

고르마크도 요르다도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요르다는 입술을 삐죽이 내민 채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켈록을 뾰로통한 표정으로 쏘아보았다.

"뭐야! 나 고르마크 안 괴롭히는걸!"

켈록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뭔 소리를 하는거야. 누가 봐도 딱 괴롭히고 있는 모양새인데. 거 전사장님도 얼굴좀 푸십쇼."

"흐음?"

갑자기 지명당한 고르마크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요르다는 힐끔 고르마크를 돌아보고는 다시 켈록을 향해 소리쳤다.

"고르마크는 날 좋아한다고!"

"하하. 그건 너만의 생각이겠지!"

"뭐야아― 켈록!"

"어이쿠 도망가야겠다!"

고르마크의 무릎 위에서 튕겨지듯 일어서며 요르다는 켈록을 쫓아 뛰기 시작했다. 거대한 모닥불을 두고 빙글빙글 돌며 쫓고 도망가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고르마크는 가볍게 미소지었다. 하지만 방금 전 요르다가 했던 묘한 이야기가 신경쓰이는 것은 역시 어쩔 수 없었다.

"수 천년 전부터…인가. 뭔가 상상도 못할 굉장한 일 같은 느낌이지만 지금으로썬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없군."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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