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 2화
사오리와 쿠로네코와의 통화를 마치고 나서, 시계를 보니 12시를 살짝 넘기고 있었다.
슬슬 점심때기도 하고, 키리노 녀석은 아침을 일찍 먹은것 같으니 더 배고프겠지.
나는 1층 거실로 내려가, 냉장고에서 어머니가 사온 죽을 꺼내 전자렌지에 데워 쟁반에 올려 가져갔다.
아직도 쌕쌕 숨을 내쉬며 잘만 자는 키리노. 설마 어제 에로게라도 새벽까지 하면서 악화된걸까, 이렇게 오래 자는걸 보니 신기하기도 하다.
"키리노, 점심 먹어야지"
역시나 한두번 부른걸로는 일어나지도 않는 키리노 녀석을 어떻게든 흔들어 깨웠다.
깨우긴 깨웠지만 일어날 생각은 없는지, 침대에 누운 그 상태에서 눈만 멍하니 뜨고 있는 키리노의 등을 잡아 부축하며 일으켰다.
"윽"
굉장한 땀. 이미 등쪽은 축축하게 젖어, 부축한 손이 축축해질 정도였다. 브라끈이 잡힌건 없던일로 하자.
침대에서 상체만 겨우 들어서 역시나, 지금도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반쯤 입을 벌리고 멍하니 앉아있는 키리노는 앞머리나 옆머리가 땀때문에 이마나 입에 붙어있는 둥, 가련하게 보였다.
"잠깐, 기다려봐"
나는 다시 거실로 내려가 최대한 푹신푹신한 수건을 찾아 가져왔다.
잠옷을 벗긴다던가 하는 선택지는, 쿠로네코가 못을 박았기 때문에 그만뒀지만.. 그 때까지 축축해 있는것도 불쌍하니, 옷 위로 최대한 땀을 닦아냈다. 그리고 얼굴의 땀을 닦고, 이마나 입에 붙어서 헝크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해주려는데 눈이 마주쳤다.
"......오빠?"
그제서야 나를 인식한건지, 반응하는 키리노를 보니, 이녀석도 철인은 아니구나, 란 생각이 들었다.
"죽 가져왔어."
키리노는 내가 침대위에 쟁반을 내밀자, 몇초간 멍하니 바라봤다.
"...안먹을래.."
"어이, 먹어야지 빨리 낫지"
내가 그렇게 말하자, 다시 멍하니 있던 키리노는 숟가락을 들어, 죽을 한입 먹으려고 고개를 숙이다가, 앞으로 고꾸라질뻔했다.
"키리노!"
간신히 중간에서 키리노의 상체를 붙잡았다. 키리노 녀석이 마빡이라도 찍어서 다치면 큰일난다. 게다가 죽이 침대위에서 어퍼지면 내가 빨아야되고.
다시 키리노를 일으켜 세우니, 키리노는 다시 나의 얼굴을 멍하니 몇초간 바라봤다. 자다 일어나서 그런지, 아직도 멍한 상태였다.
"......먹여줘..."
"네?"
에.. 먹여달란 말은 그... 아무리 여동생이라도, 아니 여동생이니까 더 부끄러운 행동인데 그건.
내가 잠시 고민하고 있자, 키리노는 나에게 마무리를 넣어왔다.
"오빠..."
"윽."
그래. 한심하게도 난 오빠소리를 들으니 무지하게 의욕이 난다고 망할.
그 건방지고 맨날 나를 '너' 라고 부르던 녀석이, 아무리 아프고 반쯤 자는 상태라고 해도, 기쁜건 기쁜거다.
어쩔 수 없이, 책상앞에 있는 의자를 침대까지 끌어 앉은후, 무릎위에 쟁반을 올려놓고 죽을 한숟갈 퍼서 키리노의 입으로 이동했다.
물론 '앙~' 같은 소리 없이, 입만 벌려서 받아먹은 키리노는 우물우물 씹어 삼키더니, 다시 입을 살짝 벌렸다.
...마치 아기새한테 먹이를 주는 어미같다는 생각이 들고, 평소에 기가 쎈 키리노가, 아파서 그런지 그 눈과 얼굴에 힘이 풀려서 멍한 상태로 우물우물 입을 움직이는 모양을 보니, 내 여동생은 진짜로 귀여운 녀석이구나, 생각이 들었다.
입을 살짝 벌리는 그것을 다 먹었다는 신호로 알고 수차례 숟가락을 이동시키고, 죽이 담겨있던 그릇은 깨끗하게 비었다.
먹이는 내내 낯간지럽고 부끄러워서 미칠뻔했기에, 내 정신력 소모는 대단했다.
말 없이, 죽을 다 먹은 키리노에게 물도 먹이고 (나중에 생각해보니 물은 혼자 먹을 수 있었을텐데, 분위기를 타버려서..)
해열제와 같이 있는 약도 같이 먹이고나서, 다시 키리노가 잘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 나가려는데, 뒤에서 저항감이 느껴졌다.
"키리노?"
아까와 같이 상체만 일으킨 상태에서, 내 옷자락을 잡은 키리노의 힘은. 내가 조금만 늦게 알아챘어도 풀릴 정도로 연약했다.
"......화장실.."
화장실에 가고 싶은건가. 으음. 뭐 자기 몸도 못가누니까 어쩔 수 없나.
나는 최대한 잡념을 뿌리치고, 키리노를 다시 일으켜 세워, 키리노의 옆구리를 살짝 안아, 부축해줬다. 그리고 화장실에 가려는데, 시선이 느껴져서 돌아보니, 키리노는 나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왜? 얼굴에 뭐 묻었어?"
내가 물어보자, 다시 몇초간 멍하니 내 얼굴을 바라보던 키리노는-
"......헤헤.."
실없이 웃었다.
"그런 미소, 평소에도 좀 지어보라고"
평소같았으면 바로 독설이 날아왔겠지만, 역시 아파서 멍한 키리노는 별로 반응이 없었다.
화장실에 갔다온 후, 약기운이 들었는지 바로 잠이 든 키리노를 두고, 나는 아침을 늦게 먹어서 살짝 출출하기만 했기에, 컵라면으로 떼우고 키리노의 방에서 계속 공부나 했다.
띵동ㅡ♬
현관문 벨 소리를 듣고 정신이 들자,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흘러있었다. 아마 사오리와 쿠로네코겠지.
나는 1층으로 내려가, 반가운 손님을 맞이했다.
"어서와."
"실례하겠소! 쿄우스케씨!"
"실례할게."
평소와 같은 대사를 하는 두 명을, 먼저 키리노의 방에 올려보낸 후, 나는 마실것을 준비해 올라갔다.
"마땅히 놀 것도 없는데, 괜히 헛걸음 하는거 아니야?"
"병문안으로 온거니까 놀지 않아도 좋소이다."
뭐 그렇게 대답할 줄 알고 물어봤던거지만, 사오리는 역시 사람좋은 녀석이다. 침대 옆에서 앉아있던 두명은, 내가 가져온 오렌지 주스를 받아들고, 이내 쿠로네코는 나에게 말했다.
"일단 선배. 옷을 갈아입히려는데, 혹시 이 여자의 속옷이나 잠옷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을까?"
"...아마 저쯤 서랍이 아닐까?"
내가 아무생각 없이 손가락으로 가르키며 말하자, 쿠로네코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듯이 말했다.
"서, 설마 선배.. 여동생의 속옷으로.."
"그럴리가 있냐! 어디까지나 일반론적으로 말한거야!"
이녀석, 분명히 일부러 물은게 틀림없다. 둘의 바보짓을 관전하던 사오리는, '호오 호오' 같은 소리를 내더니, 바보짓에 참전했다.
"어디까지나 일반론적.. 이라면, 쿄우스케씨의 속옷도 저 위치쯤의 서랍에 있다. 라는 것이오!"
"!!!"
"!!!!!!"
이녀석- 어떻게-! 내 속옷 위치를 들켜 당황하는 나보다, 쿠로네코가 더 당황했다. 그런 알고 싶지도 않은 폭탄정보의 계기가 자신이 한 말장난이었으니 당연하지.
"너.. 어딘가의 명탐정이냐."
"꼭 이 사건의 진속옷을 찾아내겠소! 할아버지의 명예를 걸고!"
'두뇌는 어른, 몸은 소녀' 같은 애드리브를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저쪽을 더 재미있게 봤나보군.
"이, 일단 선배는 나가줘. 다됬다고 하기 전까지는 절대 들어오면 안되니까."
아직도 얼굴이 빨간 쿠로네코는, 나를 강제로 방에서 밀어냈다.
문 밖에 서있기도 뭐해서, 일단 내 방으로 들어가있으니, 옆방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키리린씨. 스타일 발군.."
"윽.. 뭘 어떻게 관리하는거야?"
"쿠로네코씨도 충분히 스타일 좋지않소? 무엇보다, 그 흰 피부는 부럽소."
"그거보다 그..."
"아 이거 말이오? 쿠로네코씨도 몇년만 지나면 빵빵해질테니 걱정마시오!"
"빠, 빵빵이라니..."
......... 얇은 벽 때문에 듣기 싫어도 들려오는, 여자들의 꺄꺄 하면서 노는 소리를, 어느샌가 경청하는 내가 있었다.
몇분쯤 지났을까, 여자들의 꺄꺄 소리가 끝나고, 나는 바로 민첩하게 책상에 착석, 교과서를 꺼내 셋팅을 하자 바로 쿠로네코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까지 걸린 시간은 딱 3초!
"다 됬어 선배."
"오우!"
대답을 하며 책을 닫고 일어나, 쿠로네코와 함께 키리노의 방에 들어갔다.
"옷은 내가 세탁기에 넣어둘테니까."
"응? 아냐 내가 할게"
키리노의 옷을 들고 나가려는 쿠로네코에게, 일단 우리 집이기도 하고 손님한테 그런걸 시키는게 미안하니,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쿠로네코는 눈을 작게 뜨고 나를 노려보더니
"선배에게는 여동생 속옷 절도범의 용의가 걸려있으니까."
"어이.."
"게다가 집의 구조라던가 세탁기의 위치는 나의 마안으로 확인했으니, 문제는 없어."
또 그런 바보짓을, 앉아서 관전하던 사오리는
"이야~ 정말로 그곳에서 속옷이 나왔으니, 범인취급은 어쩔 수 없소이다."
..........
뱅글뱅글 안경 너머로 번뜩이는 시선과, 나를 벌레보는듯 보는 쿠로네코를 사이에 두고, 패닉될 수 밖에 없었다.
"어이 오해라고!? 그저 우연의 일치일 뿐이라고!?"
"확실히 선배가 그럴 배짱이 있다고는 생각 안하지만.."
나의 필사적인 모습이 보였는지, 쿠로네코가 응원타를 넣어줬다.
"의심암귀라고, 일단 용의가 있는건 확실하니까."
찌릿- 하고 나를 노려보던 쿠로네코는 이내 키리노의 옷을 들고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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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샌가 EE화!
이렇게 길게 연재될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의외로 길게 가네요!
언제까지 될줄은 모르겠지만 재밌게 보셨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