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 1화
상쾌한 아침 새소리에 눈을 뜬 아침.
원래는 항상 자명종의 시끄러운 소리에 눈을 뜨게 되서 매일아침 찌뿌등했는데,
최근 몇일동안은 키리노가 깨워줘서 비교적 상쾌하게 일어나다 보니, 아무래도 기상시간에 적응을 했나보다.
(자명종보다 여자목소리가 좋은건 당연하다. 그게 나를 끔찍히 싫어하는 여동생이라도) 항상 나를 괴롭히던 자명종시계는, 키리노 녀석이 치워버렸다. 자기가 깨워주니 필요 없다나 뭐래나...
아직 키리노가 깨우러 오지도 않았는데, 엄청나게 오래 잔듯 매우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흐응, 그럼 내가 깨워볼까"
절대로 좋은 의미로 여동생을 깨우려는게 아니라, 자기가 깨워준다고 해놓고 내가 깨워준다는 상황으로 놀릴 의미였다.
"설마 자는 중에도 자물쇠 걸어놓지는 않겠지..."
내 방엔 자물쇠도 없는데 말이야.
그런 생각을 하며, 키리노 녀석의 방문을 살짝 열어보니, 시원스럽게 열렸다.
키리노는 아직 수면중. 이쪽은 부탁한적도 없는데, 자기혼자 모닝콜을 자처하더니 몇일도 안되서 이모양이다.
"어이 키리노, 아침이야 일어나"
꽤 큰소리로 말했는데도, 일정한 규칙으로 위아래로 흔들거리는 이불을 보면은 깰 생각이 없나보다. 보통은 귀찮다는듯이 '우응~" 같은 소리를 내야 정상이 아닌가?
"어이 키리노"
다시한번 말하며, 흔들어서라도 깨워버리겠다는 집념으로 가까이 다가가니, 뭔가 이상하다.
괴로운듯이 식은땀을 흘리며 쌕쌕 하며 숨을 뱉고, 얼굴이 빨간 키리노는 한눈에 봐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어이 너.."
이녀석, 어제만 해도 확실히 감기기운이 있었다. 하지만 가벼운거라도 본인이 말했기도 했지만, 이정도로 아팠던거야? 남에게 걱정끼치는게 싫어서, 저번에도 감기에 걸렸어도 아무말도 안한녀석이었지만..
"미안, 잠깐만"
혹시나 깨있을수도 있으니 양해를 구하고, 키리노의 이마에 손을 갖다댔다.
"앗뜨!"
손에 화상을 입는 착각이 드는듯한 정도의 열기. 물론 그정도는 아니겠지만, 상상하던 열과 차이가 너무 심하니 더 뜨겁게 느껴진다. 이마에 손까지 가져다 댔는데 정신을 못차리는 키리노를 보며 나도 식은땀이 났다. 이거 위험한거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리다 키리노 방에 있는 케릭터 시계가 보였다.
"에?"
시간은 이미 10시. 상쾌하게 일어난게 당연하다. 오래잤으니까.
하지만 평일에, 학교도 가야되는데 아픈 키리노는 그렇다 쳐도, 왜 나까지 이렇게 오래 잔거지? 분명 자력으로 일어나야하는건 맞지만, 지각할 위기까지 오면 어머니가 깨워주시고는 한다.
상태가 안좋아 보이는 키리노를 그대로 두기도 좀 그랬지만, 일단 무슨일이 생긴건 아닐까 하고 1층 거실에 내려가니, 식탁위에 랩으로 쌓여진 밥과,약봉투, 쪽지 하나가 있었다.
[키리노가 많이 아프니까, 오늘 하루 돌봐주도록 하세요. 학교에는 이미 말해뒀으니까]
어머니.. 아들의 출석일수는 상관없는거야? 물론 키리노 녀석을 돌봐주는건 불만이 없지만... 적어도 나한테 상담은 해줬어야지...
그런저런 생각을 하며, 이녀석 밥은 먹었나 하고 다시 2층으로 올라가, 키리노 방에 들어왔다.
"......"
자는건지, 아니면 정신이 몽롱한건지, 옆에서 깨워도 쌕쌕대며 힘든 숨을 내쉬는 키리노를 보니 딱해보였다. 그리고 집에있는 구급약통에서 체온계를 가져와 (귀에다 넣는 그녀석) 키리노의 열을 재보니
"39도!!??"
어이 이거 진짜 위험한거 아니야?
"어이 키리노! 키리노! 일어나봐!"
내가 당황해서, 큰소리를 치며 흔들어 깨우자 그제야 키리노는 천천히 눈을 띄우며 말했다.
"으응... 오빠..?"
오빠라고!? 이녀석이 나보고 오빠라고!? 이거 심각한거 맞네!
"키리노, 해열제는 먹은거야?"
내가 진지하게 가족을 잃는 걱정을 하면서 물어보니, 아직도 꿈을 꾸는건지, 멍~ 한 표정으로 키리노는 늘어지는 목소리로 마지못해 대답했다.
"약 먹었어.. 죽도 먹었구... 나 잘래.."
그리고 다시 이불을 코아래까지 끌어당겨 꼬물꼬물 이불속으로 파고드는 키리노.
뭐 워낙 강한 녀석이니까, 이정도로는 아직은 괜찮은가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시간도 시간이니 1층으로 내려가 나도 아침겸 점심을 먹었다.
냉장고를 확인해보니, 키리노 녀석이 먹을 죽은 어머니가 이미 사온듯 했으니, 적당히 점심때 깨워서 데워주도록 하자.
"아.. 그러고 보니..'
키리노의 방, 키리노의 책상에서 내 공부를 하면서 (아마 키리노 녀석이 정신이 들면 노발대발 하겠지만 상태가 저 모양이니) 생각났는데, 아마 오늘은 쿠로네코와 사오리가 집에 놀러오기로 된 날이다. 뭐 키리노가 이 모양이니 당연하게 모임은 취소다.
괜히 헛수고 하게 하면 미안하니, 전화를 하려고 했지만 혹시라도 수업중일 확률이 있다. 그래서 '키리노가 아파서 모임은 못할것 같다. 미안' 이라고 둘에게 메일을 보냈다.
부우우우우웅-
20분 정도 지났을까, 전화가 온건 사오리였다.
"여 사오리냐"
"안녕하세요. 쿄우스케 오라버니"
"응?"
사오리 버지나 모드가 아니라 마키시마 사오리 모든데 이거.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두뇌를 회전시키자, 답은 빠르게 나왔다.
부유한 아가씨인 사오리가 학교에까지 뱅글뱅글 안경의 오타쿠패션으로 갈 일은 없는거다.
그것은 우리들과 놀기 위해, 사오리 버지나라는 케릭터를 만든것에 불과. 그 인격의 스위치인 뱅글뱅글 안경 (혹은 사오리 버지나의 본체일수도.) 이 없는 상태에서는, 전화상이라도 그 케릭터를 연기할 수 없는거다.
"키리노양.. 얼마나 아픈가요?"
걱정스러운듯 물어보는 사오리에게, 그래도 거짓을 말해도 의미는 없으니
"열이 39도야"
"......"
전화너머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모임이 취소됬어도, 병문안 가겠습니다."
"어이, 오는건 안말리는데, 와서 감기라도 옮으면 큰일이라고"
그러자 사오리는 후훗 하면서 살짝 웃더니 말했다.
"친구가 아프다는데, 어쩔 수 없잖아요?"
"그러냐.. 고맙다 사오리."
재차 사오리의 확인을 받고, 전화를 끊자 또 바로 전화가 왔다.
"여 쿠로네코"
"......그 여자가 아프다는게, 사실일까?"
"열이 39도야"
"......"
사오리와 같이, 쿠로네코도 잠시 숨을 삼키는듯 하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방울 안나올것 같은 여자가 감기라니, 어이가 없네."
걱정스러워서 전화한 주제에 뭐라는거냐. 말은 이렇게 하고, 아무리 평정을 가장해도, 목소릴에서부터 걱정스럽다는 티가 팍팍난다.
"그래서? 선배는 학교도 빠지고 여동생 수발중?"
"뭐 그런셈이지. 내 의사랑은 상관없이 어머니가 학교도 빠지게 했지만"
"어머니가?"
"나랑은 다르게 여러모로 훌륭한 여동생이라 말이지. 아무래도 우선순위가 떨어져"
반 농담에 반 진실. 차별ㅡ 까진 아니더라도, 확실히 부모님에게 키리노가 더 사랑을 받는건 사실이다.
아버지는 무뚝뚝 하셔서 그런지, 아니면 최대한 나를 배려해주는지, 이것저것 나를 인정해준다는 생각은 들지만.
"헤에, 선배가 애정결핍이 된게 그 때문인가"
"애정결핍이라니... 것보다 너, 저번에 내가 말했지 않았나? 키리노 이상행동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차별의 케이스를 들은건 이번이 처음이니까"
뭐, 그 때의 이야기로는 와닿지 않았다는 건가. 나는 잠시 한숨을 쉬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래서 부모님도 다 나가셔서, 어쩔 수 없이 내가 학교까지 빠지고 키리노 수발중이라는 거야. 이녀석이 아프니까 모임도 취소된거고"
"뭐?"
쿠로네코는 크게 당황한것처럼 물었다. 내가 무슨 말실수를 했나 하고 생각하고 있으니
"......선배는, 다 큰 처녀의 병수발을 남자 혼자서 한다는 것의 의미, 알고 있을까?"
의미.. 라고 까지 해도, 그냥 옆에서 이것저것 편의를 도와주면 되는거 아닌가?
"열이 39도나 되는 감기면, 주기적으로 땀에 범벅이 된 잠옷이나 속옷을 갈아입힐 필요가 있는데, 선배가 할 작정?"
"아, 영화..나 만화에서 그런 장면은 많이 봤는데, 진짜 그럴 필요까지 있는거야?"
잠시 내가 얼빠진 소리를 내고 되묻자, 쿠로네코는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거야 당연하지. 그정도 고열이면 더웠다 추웠다 하는데, 땀범벅된 옷을 입고 있으면 낫기는 커녕 더 심해져."
으아아아아아! 어머니! 언제돌아오는거야!!
하지만 상대는 환자고, 필요하다면 어쩔 수 없다. 내가 희생하는 수밖에.
"괜찮아. 여동생의 알몸이라면 노 카운트다."
"......그 여자한테 죽을텐데? 아니 애초에 그 전에, 시스콘인 당신이 아픈 여동생의 알몸으로 욕정하면, 아무리 나라도 해결해줄 수는 없어"
"너 임마..."
"하아.."
쿠로네코는, 내 말을 시원스럽게 짜르며 한숨을 쉰 다음에 말했다.
"학교 끝나고, 병문안 가서 도와줄테니까, 그때까지는 손대지마. 여동생들 아팠을 때도 있으니까 당신보다는 능숙해. 그리고 어차피 그 거인녀도 걱정된다며 병문안 올게 뻔하니까."
"너.."
말은 그렇게 해도, 키리노의 걱정도 걱정이지만 내 걱정도 해준건가..
"고맙다. 쿠로네코"
"......기분 나쁘게 또 자기 좋을대로 생각해서 착각하지마."
처음에는 그저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해서 말만을 이렇게 한다. 정도로 정의했는데, 오타쿠 문화에 밝아지고 나니까 알게된건데, 이녀석, 새침때기 케릭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