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2화
"바다!? 무슨바다!?"
내가 당황하며 물어보자, 키리노는 머리카락을 빙글빙글 돌리던 검지를 멈추더니, 한심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바다면 그 바다밖에 더 있어?"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내가 왜 널 따라 바다에 가야되냐고."
"어차피 같이 갈 친구도 없잖아? 집에서 외롭게 에로게임이나 할까봐 챙겨준건데, 고맙게 생각해."
"누가 친구가 없냐!"
크윽.. 하나 하나 전부 비꼬는구만! 나도 같이 바다를 갈정도로 친밀한 친구는 있다고! 마나미랑! 아카기랑!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음...
"애초에 너, 딱 일년정도 전에 책임지고 너가 재밌어 할만한 곳에 데려가라고 할때, 계곡같은데 놀러가자고 할때는 '아야세랑 가지 기분나쁘게 너랑 왜가' 라고 하지 않았냐?"
그런 주제에 이제와서 무슨 바다냐고. 거의 대답을 회피하는 식으로 떠오른 대사였지만, 이정도면 충분히 위력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키리노는 그런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오히려 내 쪽을 바보놈으로 보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일년전이고."
으아아! 이녀석 진짜! 이정도로 신경을 거슬리게 하니 나도 오기가 생겼다. 누가 갈까보냐!
"됬어 난 거절한다. 너나 친구들끼리 재밌게 놀다 오시지."
"하? 너, 거부권 따위 없으니까."
나는 키리노 녀석을 불편하게 노려봤고, 키리노 역시 지지않고 내쪽을 노려봤다.
"므..."
키리노 녀석은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노려보더니, 나를 노려보는것을 그만뒀다. 이제 포기했나- 싶더니, 키리노는 벌떡 일어나면서
"됬어! 아버지한테 이야기 할거니까!"
"아아 그러시던가!"
키리노 녀석이 자기 방에서 나가고, 나도 혼자 키리노 방에 있기 뭐해서 바로 내 방에 돌아왔다. 뭐지, 키리노가 요즘 멍한 이유를 찾으러 갔었는데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졌다.
그렇게 방에서 10분 정도, 이것저것 생각을 하느라 침대에 누워있었다.
딸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고개를 돌리니, 키리노 녀석이 살글살금 문을 열고 있었다. 뭐 자물쇠가 안잠기는 문이니까 노크좀 하라고 몇번을 말해도, 노크를 할 생각은 죽어도 없나보다.
"어이 오래비. 아버지가 오라고 하셔.."
키리노가 나를 부르는 호칭은 몇가지가 있다. 왠만하면 '너' 라고 하지만, 가끔 자기가 기분 내킬때는 '오래비' 라고도 한다. 나도 평범하게 '오빠'나 '오라버니' 로 듣고 싶지만, 키리노가 그런 호칭을 불렀을 때는 저번 고열때밖에 없다.
"아. 내려간다."
시큰둥하게 말하고, 나는 키리노를 지나쳐서 거실에 내려갔다. 1층 거실 티비 앞 소파. 항상 아버지가 앉는 1인용 소파의 맞은편에 앉으니, 아버지가 입을 열으셨다.
"쿄우스케. 이야기는 들었다."
"네?"
무슨 이야기.. 를 말씀하시는거지?
"키리노랑 함께 갔다와라."
"네?"
뭘 어떻게 아버지를 설득시켰는지, 그 고지식한 아버지는 나까지 바다에 놀러가라.. 라고 말씀하시고 계신거다. 그리고 나는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바다에 가는거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뭔가 지는 기분이 든다고!
"아버지, 나 수험생이라고? 바다같은데 놀러갈 시간 없어."
좋아, 이거라면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어!
"다 큰 처녀 셋이 놀러가는데, 보호자가 필요하다."
"엥?"
분명 당연한 이론이긴 한데... 뭔가 아버지, 굉장히 침울한.. 느낌인데
"마음같아서라면 내가 직접 가고 싶지만, 일도 일이고 키리노도 나이먹은 아저씨보단 차라리 너가 함께 가는걸 좋아할거다."
아버지는 고개를 숙인 상태에서 한숨을 한번 쉬더니 이어서 말했다.
"그러니 '보호자로서' 다녀와라. 그거라면 괜찮다."
"......"
아버지... 키리노랑 바다.. 가고싶었구나..
"대답은 어떻게 됬나 쿄우스케."
"아, 알겠다구 아버지."
그 아버지가 저렇게 침울해 하면서 하는 부탁이니, 거절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올라가려는데 아버지가 한번더 불렀다.
"쿄우스케."
"네?"
내가 고개를 돌려서 대답하자, 아버지는 평소의 엄한 모습으로 다시 돌아갔다.
"행여나, 다른 자녀분께 욕보일 짓을 한다면.."
"그럴리가 없잖아.."
나, 그렇게까지 믿음직스럽지 못한걸까...
아버지는, 헛기침을 한번 하시더니 말했다.
"알았으면 됬다."
하아.. 내 방에 돌아가려고 계단을 올라가자, 계단의 끝이자 2층의 입구에서 키리노가 길을 막듯이 서있었다.
키리노는 뭔가 마음에 안드는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내가 올라오는걸 보자 물어왔다.
"어떻게 됬어?"
이녀석, 정말 아버지랑 바다가는걸 걱정하는걸까, 아니 딱히 키리노가 나쁘다는게 아니라 그 나이대의 여자애라면 당연한 반응이겠지만. 아버지가 불쌍하다고.
나는 양손을 들어 손바닥을 보이며 항복의 제스쳐를 취하며 말했다.
"아아 내가 졌다."
키리노는 갑자기 확 표정이 환해졌지만, 나한테 약한모습을 보이기 싫은건지, 바로 헛기침을 하며 다시 노려보는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건 그렇고 처녀 셋이라니, 어느쪽이랑 놀러가는거야? 아야세 카나코? 쿠로네코 사오리?"
뭐랄까, 아야세랑 놀러가는거에 내가 낀다면 살해당할것 같은데. 한 개체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후자면 좋겠다.
"검은거랑 사오리. 사오리가 그쪽 맨션 이용권을 구했다고 해서 제안받은거야."
"아아 그러냐."
역시 만화속에서 처럼 부자인 여자애가 '사실 여기 우리 매장이었어, 사실 여기 우리 별장이었어' 같은 스토리는 없겠지.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쿠로네코와 사오리의 수영복을 상상했다. 아니 상상해져버렸다. 당연한거라고 이건. 딱히 내가 변태라서 그러거나 하는건 아니니까.
단순히 컬러이미지 대로라고 하면.. 쿠로네코는 분명 검은색, 사오리는 파란색. 음.. 키리노는 노란색이려나?
"응 그래서, 토요일 아침에 가서 1박 하고 오니까."
"1박이라니.. 설마 남자라고 나만 밖에서 재우진 않겠지."
"어 그럴건데?"
"얌마!"
키리노는 농담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킥킥 웃었다.
"그럼 토요일날 가는거니까, 이것저것 준비해둬!"
키리노는 그렇게 말하며, 자기방으로 들어갔다. 하아. 요 몇일간의 평화는 끝이구만.
다음날, 평범하게 수업을 마치고 돌아가는데, 다시 주머니속의 진동음을 깨달아, 발신인을 보니 아야세였다.
삑
"여 아야세."
"오빠!!"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아야세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핸드폰을 귀에서 살짝 멀게 하니, 아야세가 계속 말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신거에요?"
"뭐,뭐가?"
묘하게 박력있는 아야세에게 살짝 겁먹어 말하자, 아야세는 랩이라도 하듯 빠르게 말했다.
"어제는 그렇게 기운없어 보이던 키리노가 오늘은 하루종일 싱글벙글 대고 있어요! 설마 키리노한테..."
빠르게 말하던 아야세는 마지막 쯔음에 다시 어둡고 느린 목소리로 돌아가기에,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그러니까 그럴 리 없다니까! 너도 저번에 오해라는거 알았다며! 키리노 녀석이라면 아마 친구들이랑 놀러가는거 때문에 그럴거야."
"아.. '그쪽' 친구들이요?"
"아아 그래."
"흐응.."
아야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다시 차분한 목소리로 돌아와 나에게 말했다.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오빠."
"오,오우."
그렇게 통화가 끝났다. 뭐야 대체? 정신없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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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che님 덕분에 '아니키'의 그나마 적절한 의역호칭을 찾았네요 감사합니다.
그냥 대놓고 아니키, 오니상으로 넣어도 됬겠지만, 최대한 일본어를 빼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