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Story - 키리노의 경우 1화
저번의 큰 사건으로 키리노와 화해하고, 쿠로네코와 연인이 된 후에는 나의 앞으로의 생활이 장미빛 꽃밭이 될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키리노의 취미를 알고, 그 오타쿠 친구들과 친해지기 전까지는 애인은 커녕 여자아이와 친하게 지낸 적도 없었기에 (소꿉친구는 예외다) 장미빛 생활이 맞긴 하지만, 서있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은게 인간이지 않냐.
처음에는 쿠로네코를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대화 하는것만으로도 만족하고, 손을 잡는것만으로 만족했지만 당연스럽게도 나는 진도를 올리길 희망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아까 말한 것들로 만족하지 못한다는 소리는 아니고…
하지만 그런 나의 희망을 당당히 깨트리듯이, 요즘들어 나름 꽤 스트레스를 받는 요인이 생겼다. 대충 어떠한 거냐면…
"그, 쿠로네코…"
"무, 무슨 일일까 선배"
"…"
"……"
내 방에서 쿠로네코와 단둘이 앉아있다가 어느정도 분위기가 무르익고, 나는 쿠로네코의 입술을 응시하며 조금씩 다가갔다.
나의 의도를 파악했는지 쿠로네코는 화들짝 놀라더니, 이내 어느정도 각오가 생겼는지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살짝 눈을 감았다.
꿀꺽.
쿵쾅쿵쾅. 긴장을 해서 그런지 심장은 매우 크게 날뛰고 있었고, 무의식적으로 침을 삼킨 소리에 내가 놀랄 정도로 큰 소리가 난것 같았다.
그, 쿠로네코도 딱히 싫은것 같지도 않고… 나는 그대로, 쿠로네코에게 다가가려고 하는 찰나ㅡ
찰칵
"요번주에 다같이 놀거 말인데ㅡ"
"!!"
"!!!"
갑작스러운 키리노의 난입에 온몸의 털이 쭈삣 서는 느낌을 받으며 양 무릎위에 손을 올리는 차렷자세로 돌아가서 옆을 보니, 쿠로네코도 마찬가지로 차렷자세를 하고 있었다. 우와 부자연스러워…
정말, 내 방에 자물쇠가 없다는 것을 이렇게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은 처음이다. 그냥 내 용돈으로 자물쇠를 달던가 해야겠다…
키리노는 그런 우리를 보고 씨익 하고 웃더니
"에 뭐야, 누구씨가 말한 '불결한' 짓을 하는 중이었어? 방해했나 보네 미안~"
당연히 방해지 이녀석아!! 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왠지 그런 말을 하면 지는것 같았다…
뭐 지금이라도 나가준다면 나야 고맙지만, 이미 만들어놓은 분위기는 그냥 날아가 버렸고, 저번에 쿠로네코가 했던 말의 말꼬리 까지 잡는다면 당연히 쿠로네코의 반응은 아마-
"아, 아니야! 뭘 멋대로 착각하는거야 당신은? 방해같은거 아니니까 어, 어서 들어와"
"그래애~? 그렇다면 사양않고~♪"
그럼 그렇지. 절대 지기 싫어하는 (특히 키리노에게는) 쿠로네코는 당연히 이런 반응을 보였다.
그렇게 키리노가 들어오고 나서는 평소 다같이 놀때의 분위기가 되버려, 오후 늦게까지 그 게임을 하고 오타쿠회의를 하는 등 완전히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그럼, 오늘은 이만 가볼게"
"응. 나중에 또 봐~"
"그럼 앞까지 바래다줄게"
묘하게 평소보다 얼굴을 반질거리며 기뻐하는것 같은 키리노를 보면 가슴이 쓰려왔지만, 쿠로네코와 단둘이 있고 싶은 것도 있어서 나는 그렇게 말했다.
"…"
"……"
단둘이 골목을 걸어가면서 느껴지는 콧등이 간질간질 거리는 침묵.
나도 쿠로네코도 서로를 힐끔힐끔 보면서 안절부절 하고 있었다. 말을 꺼낼 타이밍을 못잡고 있다가, 이때쯤이면 괜찮다 싶어서 말을 꺼냈다.
"그, 쿠로네코" "서,선배"
"……"
"머,먼저 말해" "선배 먼저"
"………"
"……………"
그 후 다시 정적. 서로 동시에 말을 꺼내고, 그 후 동시에 서로에게 먼저 말하라고 권한다.
10년은 더 된 로맨스 영화에서 본듯한 장면이었다. 만일 다른 사람이 이런 상황을 연출한다면 '드라마 찍냐? 촌스럽게…' 같은 생각이 들었겠지만, 막상 자신이 여자친구와 이런 상황에 놓이니 촌스럽기는 커녕, 엄청나게 신선했다. 마치 영화의 주인공이 된듯한, 그런 기분도 들었다.
그럼 이 상황 이후에서는 누가 먼저 말을 꺼내야 할까,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쿠로네코를 쳐다보자, 쿠로네코는 살짝 고개를 숙여 나에게 표정을 안보이게 가렸다.
그런 꽁트 속에서도 착실히 큰길가에 도착했고, 아까의 간질거리는 침묵을 쿠로네코는 아주 자연스럽게 깨며 말했다.
"그… 선배. 오, 오늘의 일은… 다, 다음에…"
"으,응…"
얼굴을 붉히고 수줍게 말하는 쿠로네코 때문에 다시 심장이 크게 쿵쾅거렸다.
역시 쿠로네코도 싫지는 않았나 보다. 그래. 오늘은 키리노 때문에 방해 받았지만, 다음에라면 분명히 가능하겠지…
나도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으니, 쿠로네코는 "그럼" 이라는 말과 함께 뒤돌았다.
"적어도 집까지 바래다 줄게"
"사양할게. 오늘은 이만 돌아가"
"그러냐…"
내가 약간 실망한 듯한 목소리를 내서 그런지 쿠로네코는 다시 깜짝 놀라더니
"그, 그런게 아니야… 나도 그… 마음의 준비를 가질 시간이… 아니 마음의 준비라는건 그러니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건지, 쿠로네코는 허둥지둥 하며 엉망진창인 말을 하고 있었다. 뜻은 모르겠지만, 다만 나를 배려해주기 위해 그랬다는건 뼛속까지 느껴졌다. 쿠로네코는 갑자기 조용해지더니, 이내
"아, 아무튼 그럼 이만"
그런 말을 하고 도도도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
이번에는 기필코 쿠로네코와 진도를 더 나가리라.
그런 마음에 그 다음의 데이트. 한적한 공원에서 나란히 앉아, 나름 좋은 분위기를 겨우 끌어냈다.
"쿠로네코, 이제 나…"
"으,응…"
서로 얼굴을 붉힌 채로 마주보고 있자, 벤치 뒤쪽에 있는 수풀 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검은거?"
"또 너냐!?"
대체 뭘 어떻게 알고 딱 일보직전의 타이밍에 자꾸 튀어나오는거야!? 나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키리노를 노려봤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고, 또다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호오 쿄우스케씨 쿠로네코씨. 데이트하고 있었소이까?"
뒤에서 잔뜩 짐을 들고 나타난 사오리는 부끄러워하는 쿠로네코. 분노하는 나. 장난스러운 얼굴의 키리노를 차례대로 보더니 입을 ω모양으로 만들더니
"이야~ 키리린씨. 연인의 데이트를 방해하면 못써요? 자자 방해꾼은 바로 사라집시다"
"그러네~ 우린 상식인이니까"
그러니까 이미 늦었다니까!! 에? 아니 잠깐만, 왜 사오리랑 키리노가 단둘이 아키하바라 근처에서 돌아다니는거지?
"어이, 왜 너희 둘이 아키하바라에서 놀고 있는거야?"
나의 질문에, 키리노는 한심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긴 왜야? 사오리가 필요한 물건이 있다고 해서 같이 나온거야. 너희들 오늘 데이트 하는거 알고 있으니까 딱히 안부른거고"
그런 마음이 고맙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그런것까지 신경써줘서 우리 모두의 만남이 줄어드는것 같은, 그런 섭섭한 느낌도 들었다.
내가 아주 잠시 미간을 찡그리는 것을 봤는지, 사오리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는 목소리로
"아니 아니 괜찮소이다 쿄우스케씨. 그리 큰 일도 아니고, 항상 주말마다는 같이 놀지 않소이까?"
"그건 그렇지만…"
나는 그렇게 답하며, 내 옆에 있는 쿠로네코를 살짝 봤다.
그리고 쿠로네코는, 역시나 내 예상대로
"그런거로 하나하나 일일히 신경써줄 필요는 없어. 괜찮으니까, 오늘은 넷이 놀자"
"엣,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새삼스럽게. 항상 다같이 놀았잖아?"
이렇게 말했다.
적어도 나와 동급으로 키리노와 사오리를 생각하는 쿠로네코가, 그런 말을 듣고도 '어 그래? 그럼 안녕' 같은 말을 하지는 못하겠지.
나는 어느정도 이해는 하면서도, 다시 쿠로네코와의 데이트가 방해되었다는 생각에 약간은 슬퍼졌다.
"그래? 그렇게 됬으면, 자 어서 가자!"
역시 키리노는 평소보다 쓸데없이 텐션이 높아 있었다.
그런 말을 하며 키리노는 즐거운듯 앞장을 섯고, 쿠로네코는 앉아있는 벤치에서 일어나기 전, 나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정말, 사귀기 전보다 사귄 후가 골치 아프다는건 신기하네…"
정말, 그 말대로다.
그 날은 그대로 넷이서, 평소처럼 놀았다. 다만 내가 쿠로네코와 연인이 된 후부터는, 쿠로네코는 나를 신경쓰는 듯한 행동이 많았고. 그럴때마다 사오리는 휘파람을 불며 우리를 놀렸다.
나름 이것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데도, 주말에 다시 다같이 놀 때에 쿠로네코의 한마디 때문에. 나는 완전히 공황상태에 빠졌다.
"이번에 나, 이사 가게 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