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습! 1화
"언니 전 약혼 같은거 생각 없다고…"
"에에~? 그치만 아버지가 약혼 하라고 난리잖아?"
"그, 그래도…"
뜬금없는 이야기 인것 같지만, 혹시 엄청 강압적인 형이나 누나를 둔 사람 있어? 음, 혹시 외동이거나 하면 엄청 강압적인 아버지나 어머니를 생각하면 될거야.
어렸을 적부터 그렇게 느껴서 그런걸까, 상상으로 조차 이기는 상상이 되지 않는 상대. 그런 상대랑 공평한 입장에서 대화를 할 수 있다고 해도 자신의 의견을 완전히 말하는 것 따위 불가능하다. 이미 그건 엄청나게 커다란 '벽' 그 자체라구.
나의 경우는 엄청나게 엄한 아버지를 둔 덕에 엄청 고생했지만 말이야. 하지만, 키리노의 취미 때문에 아버지와 싸우고, 오타쿠에 관련된 범죄자료를 긁어모으면서 '흥. 너희 때문에 조사한건 아니다' 라고 하던 아버지의 모습이나, 미국으로 유학간 키리노의 걱정 때문에 외국이라면 얼굴까지 창백해지는 아버지가 미국 공항에서 택시를 잡는 방법. 키리노의 숙소 주소, 전화번호, 담당자 연락처, 심지어는 일본대사관의 연락처까지 조사해두고 언제든지 키리노가 있는 미국에 날아갈 수 있는 준비를 했다는 것을 보면 '아버지가 키리노나 나에게 그렇게 엄한 것도 우리를 걱정해서구나' 라는 실감이 들었다.
에… 잠깐, 생각해보니 이거 새침떼기 속성 아니야? 아버지한테 말하면 맞아죽겠구만.
하여튼, 부모가 자식을 사랑한다는 아주 당연한 이야기도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가슴으로 이해하는 것은 다르다고. 그 덕분에, 그렇게 무서웠던 아버지의 이해자가 될 수 있었다. 특히 키리노에 관련된 일은 전적으로 나를 의지해 주시기도 하고 말이야.
으음…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여튼 지금 사오리의 경우가 딱 그 경우라고 생각한다고. 소심한 자신이 동경하던, 일찍이 있었던 커뮤니티를 이끌어가던 리더인 언니에게 말대답을 하긴 힘들겠지. 그것이 언니가 자신을 걱정해주는 것이라고 해도 말이야.
뭐, 적당히 도와줘볼까
"에… 마키시마씨"
"카오리로 좋아"
"카오리씨. 무슨 정략약혼이라던가 그런거야?"
"응?"
카오리는 눈을 크게 뜬채 잠시 벙쪄있더니
"푸하하하하하하하하하! 정략약혼이라니, 드라마 너무 봤어!"
한손으로 소파를 팡팡 치면서 폭소하고 있었다. 크윽. 역시나 상대하기 짜증나 이사람!
나는 관자놀이에 힘줄이 딴딴하게 생기는게 느낄 정도로 짜증을 삭히면서 말했다.
"그, 그럼 사오리가 꼭 약혼을 해야되는 이유라도 있는거야? 본인이 괜찮다고 하는데도?"
"에에? 그 편이 더 재밌을것 같잖아"
"……………………………………………………………"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내 귀가 이상해진건가? 뭔가 터무니 없는 소리를 들은것 같은데.
"저기… 잘 못들었는데"
"그 편 이 더 재 밌 을 것 같 잖 아 ♡"
카오리는 한글자 한글자 또박또박 말하며 허공에 키스마크를 날렸다.
"어이!?!?!?!?!?!?!? 이 상황이면 '겉으로는 생각 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동생을 생각하는 자상한 언니'가 나오는게 정석이잖아!? 내 감동 어쩔꺼야!?"
"언니는… 예전부터 사람을 가지고 노는게 무엇보다 좋아하는 취미였어요… 특히 자기가 귀엽다고 생각하는건 더…"
"니네 언니 진짜 성격 최악이구나!? 동경하던 언니 아니었어!?"
"꺄하하 너 진짜 재밌구나! 어때? 진짜로 누나랑 불장난 한번 할래?"
"시끄러워! 이 이상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지 마!!!"
"…저건 그거에요. 쿠로네코씨가 굉장히 마음에 드신거 같아요…"
"뭐야 그럼!? 쿠로네코가 귀여우니까 날 가지고 장난친다고!? 니네 언니는 도대체 어디까지 꼬인 성격인거야!?"
아아 진짜 머리가 아파오네 진짜!! 아까 했던 말 다 취소! 동경하던 언니!? 얼어죽을!
내가 머리를 싸매고 두통과 싸우고 있자, 왠지 모르게 멍하게 입을 벌린채로 구경하던 키리노가 입을 열었다.
"우와… 진짜 훌륭한 딴죽… 너 일년치 딴죽 다 쓴거 아니야?"
"알까보냐!!"
나의 반응이 불만인지, 아니면 불장난 하자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아서 그런지 카오리는 입을 - 3- 모양으로 하면서 투덜거렸다.
"아니 그래도 결혼해서 나쁠건 없다고? 누가 뭐래도 여자의 행복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한 이후부터 시작이야. 뭐 어느정도 면식도 있고, 상대도 사오리를 소중히 생각하고 있고. 바로 결혼하는것도 아니고 약혼 정도면 괜찮지 않아?"
"이제와서 무게잡아도 늦었거든요!? 이제 뭐가 진담인지 아닌지 모르겠다고!"
"쳇, 눈치가 빠르네"
"아아, 이제 뭐가 뭔지!!"
개그프로를 보는듯 피식피식 웃으면서 구경하는 키리노와, 무언가 해탈한 표정으로 조용히 앉아있는 사오리. 그리고 내 뒤에서 내 옷을 잡은채로 흠칫흠칫 하면서 떨고있는 쿠로네코.
정말 태풍, 아니 폭풍같은 여자다… 도대체 이 여자가 중심이었던 사오리의 옛 커뮤니티에 있었던 사람들은 대체 얼마만큼의 성인들인거야!?
혹시 언니가 결혼하고 커뮤니티가 붕괴된게 아니라, 언니한테 강제로 휘둘리던 사람들이 그걸 빌미로 탈출한거 아냐!?
"흐응. 뭐 이대로라면 무난하게 약혼 성사될것 같지만, 사오리가 싫어하기도 하니까 너희들이 도와준다면 없던 일로 만들 수도 있어"
"그렇게 된것 자체가 너 때문 아니야!? 은근슬쩍 아군인척 하네!? 너가 제로스냐!!"
"작전 결행일은 이틀 뒤! 다같이 사오리의 약혼을 방해하자고♪"
"…이제 그냥 맘대로 하셔요…"
하얗게 불태웠다는게 이런 느낌일까. 진이 다 빠진다…
대인배 모드인 사오리 버지나로서의 케릭터를 사용하지도 못한 사오리와, 특기인 독설에서 압도적으로 밀린 쿠로네코. 그리고 우리들중 유일한 딴죽케릭인 나까지 사실상 항복을 선언한 직후, 우리들중 가장 평소와 똑같은 키리노는 아쉬워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에에? 벌써 끝난거야?"
키리노. 만약 너가 저런 어른이 된다면 나는 아버지 앞에서 할복하는 수밖에 없으니 제발 참아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