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점 2화
다음날 토요일.
모처럼의 휴일인데도 불구하고 마땅히 할 일이 없다는건 조금 오묘한 기분이었다.
사실 어제도 사오리가 돌아가고 나서 계속해서 수험공부를 하였기에 슬슬 지친다고 할까… 기분전환도 중요하다고.
점심때가 되기 전. 키리노는 어제 놀지 못한 아야세와 만나러 밖으로 나갔다.
또 아키하바라에 가서 행패를 부리는건 아닐까 싶었지만, 카나코까지 만나서 셋이서 논다고 하는걸 보니 아무래도 그쪽 계열은 아닌것 같다. 아야세가 키리노에게 함락당한 것처럼, 카나코가 브리짓에게 함락당하지 않았으면 말이다.
모처럼 집에 혼자 있으니, '그것'이나 해볼까…
「인생상담이 있어」
「너 임마… 자고있는 사람 깨워놓고 뭔소리냐?」
「하? 닥쳐 시스콘 주제에. 초 귀여운 여동생이 부탁하는 거니까 사실 무지 기쁘잖아?」
「………」
"……………우와 기분나빠…"
내가 하고 있는건, 어제 키리노가 플레이 했던 LX 사의 신작. [시스터x시스터 콤플렉스 ~완벽초인 여동생~]
키리노 녀석이 세이브 했던 데이터는 내버려 두고, 새로이 시작. 겨우 30분 정도 플레이로 키리노 녀석이 하던 장면까지 따라잡을 수 있었다.
뭐, 이런 에로게임에서 개연성이 있는게 이상한거겠지만. 외모면 외모,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요리면 요리 모든게 우수한 완벽한 여동생이 전체적으로 평범한 자기의 친오빠를 공략(..)하는 내용이다.
여동생은 어느 에로게임에서나 나올법한 노란색으로 염색한 장발의 새침떼기 속성. 흔하다면 흔한 케릭터인데… 누군가가 겹쳐 보이는건 어쩔 수 없는게, 이건 키리노가 우리들의 이야기를 LX 사의 앙케이트에 적어 넣었기 때문이다. 아 물론, 자고 있는 오빠 위에 올라타 뺨을 때리면서 '인생상담이 있어' 라고 하는 전개에 도움이 되는 정도지만 말이야.
그리고 당연하게도 오빠는 엄청난 시스콘이지만, 엄청나게 뛰어난 여동생이 자신에게 쌀쌀맞게 대하니 여동생이 자신을 싫어하는지 알고 거리를 벌리려고 하는 설정이다. 당연히 나랑은 아에 틀리다고?
그 이후로도 계속 착각하고 있는 오빠와, 오빠를 좋아하지만 오빠에게 고백을 받고 싶은 여동생의 밀고 당기기가 계속되었다.
30분 정도 더 플레이 하자, 욕구불만의 오빠가 오히려 반대로 여동생이 자고 있을때 여동생의 방으로 들어갔다.
「사츠키……」
「……………」
그러더니 자고 있는 여동생에게 몰래 입맞춤을 한 후 방에서 나간다.
「바보……」
당연히 이 에로게임은 여동생의 시점이기에, 이 장면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여동생이 자고 있지 않다는 거지만…
그거보다, 너희 다 큰 남매가 서로 옆방에 겉으로는 사이도 안좋아 보이는데 방문 안잠그냐? 우리쪽 여동생은 맨날 잠가놓는데!? 그나저나, 너도 당첨이구나 아카기…
계속해서 플레이 하면서 드는 생각은 여러 상황과 정황은 다르지만, 아무리 봐도 저 여동생 케릭터 자체는 키리노 본인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닮아 있었다. 완벽초인이라는 설정부터 시작해서 여러가지로. 뭐, 자기 오빠를 좋아한다던가 그런거는 아니지만. 아 그리고, 이 여동생은 요리도 잘한다고 되어있지만 키리노 녀석, 요리는 괴멸적으로 못한다고. 알고 있어? 작년 발렌타인때 아야세가 다죽어가는 얼굴로 복통을 호소하던 사건이 있었는데… 키리노의 초콜렛을 먹고 나도 같은 증상이었으니 분명해. 애초에 저녀석 요리하는거 본적도 없고.
키리노 녀석, 대체 뭘 어떻게 적어서 냈길래 이렇게 자세한거야? 오빠 케릭터나 여동생 케릭터나 말투까지 똑같은거 같아서 진짜 무섭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용지의 면적이라던가, 질문의 내용이라던가 이렇게 구체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 만한 내용이 아니었다. 혹시 키리노가 거기에 뭐라고 써내서 당첨된 후 직접 제작에 참가했다던가 그런건가? 하하하. 나도 무슨 바보같은 생각을 하는지, 그럴리가 없잖아.
분명히 모에산업에 종사하시는 분들이 생각하시는 스토리가 우연히도 우리의 일과 비슷한거겠지…
두시간쯤 했을까, 슬슬 이짓도 힘겹기에 그만뒀다. 쿠로네코에게 연락이나 해볼까…
뚜… 뚜… 뚜…
"흐음. 바쁜건가"
토요일의 오후 3시. 꽤 널널한 시간이라고 생각해서 전화를 한건데도 쿠로네코는 받지 않았다. 문자라도 남겨둘까.
뭐라고 남기면 좋을지, 현역 여중생처럼 이모티콘을 잔뜩 넣어서 길게 해볼까- 하면서 어떤 말을 해야 가장 자연스러울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보낸 문자는
'어제 잘 들어갔어? 몸은 괜찮아?'
정도가 다였다. 큭, 남자는 대부분 이런다고. 그치? 괜히 이것저것 말을 늘려가면서 하면 뭐라고 할까… 부, 부끄럽다고. 쿠로네코와 연락이 안된다면 또 마땅히 할게 없군…
"다시 수험공부나 해볼까"
어느정도 기분전환은 됬으니 괜찮겠지. 나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사오리가 줬었던 컴퓨터를 종료하고 공부할 준비를 하고 있으니, 핸드폰이 울렸다.
오오, 쿠로네코가 전화한건가? 하고 들고있는 책을 침대위로 던져버리고 핸드폰을 열자, 아쉽게도 미카가미 녀석이었다.
"뭐야, 너냐"
「다른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나봐?」
전화너머의 목소리는 더 여자같은 녀석이군. 미성이라고 할까, 간들간들 거리는 목소리다.
"아 뭐, 그렇지. 무슨 일이야?"
「오늘 시간 괜찮아? 저번에 이야기 했었던 커플링. 완성됬거든. 택배로 보내도 되지만, 내 손으로 전해주고 싶어서 말이야」
확실히 그러고 보니, 그런 이야기도 있었지.
뭐, 공부할 기분이 아니기도 하고, 꽤 기분나쁜 녀석이지만, 나름 좋은 녀석이니 오늘은 이녀석이랑 놀아줄까.
"그래? 그럼 아키하바라에서 또 대충 돌아다녀볼래?"
「응. 나야 고맙지.」
"아 그럼 지금 나간다"
「에, 지금?」
"싫으면 말고"
「아, 아니야 나도 괜찮아. 그럼 조금이따 보자」
삑.
이녀석이랑 있으면 처음 봤을때도 그랬지만 열등감을 느낀다고 할까… 그래서 항상 꽤 말을 툭툭 뱉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민감하게 반응하지도 않고 넘기니 사람 됨됨이까지 좋은 녀석이라 더 짜증난다고. 그래도, 좋은 녀석이긴 하지만.
그대로 대충 옷을 껴입은 후, 전철을 타고 아키하바라에 도착. 그리고 다시 전화통화를 하고 기다리니 여성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 방향에서 미카가미 녀석이 도착했다.
"기다렸어?"
언제나 처럼 사람 좋아보이는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미카가미는 말했다. 여장이 잘 어울리는 남자. 라는게 실제로 있을줄은, 솔직히 이녀석 보기전에는 그저 2D의 이야기인줄 알았다고.
"아아. 기다리다가 지쳤다"
"미안, 신호에 꽤 걸렸거든"
그리고 아까의 웅성거렸던 여성들로 추정되는 여성 오타쿠 (저번에 세나가 말했던 동족혐오라고 해야되나… 왠지모르게 알것 같다) 들이 힐끗힐끗 이곳을 보며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꺄! BL이야! 진짜 BL이야!'
'여,역시 미소년 쪽이 수? 공?'
'오래 사귄 사이같아!'
부녀자는 망상전개 하지 말고 소녀들의 거리나 가라 이것들아.
"가자"
그런 부녀자들을 무시한채, 나는 미카가미 녀석을 데리고 대충 저번에 갔었던 곳을 피하면서 돌아다녔다. 저번에 키리노 녀석이 뒤집어졌었던 메루루 회장이라던지, 라디오 회관이라던지, 혼자서도 여러번 와봤을텐데도 솔직히 기뻐해 주니까 그래도 꽤 고맙군.
"오늘도 재밌었어. 신경써줘서 고마워"
대충 두시간 정도로 관광을 마무리. 음… 대충 코스로 치면 한 세코스 남았나? 뭐, 나중에 또 놀러가면 되겠지
"나도 오늘은 한가해서 말이야"
새침떼기 같은거 아니다. 진짜로 한가해서 그런거거든. 멋대로 오해하지 말아줘.
"아아 맞다. 여기, 저번에 말했던 커플링"
"너 이거…"
아무렇지도 않게 주머니에서 연분홍색의 반지케이스를 꺼낸 후 열어서 내용물을 보여주는 미카가미를 두고 나는 무의식적으로 숨을 삼켰다.
저번에 코미케에서 팔았던 목걸이나 반지같은 악세사리들도 시부야에 있는 악세사리 가게에 진열되 있는 것보다 고급스러우면 고급스러웠지, 절대 밀리지는 않을 작품이었는데 이건 아에… 이런것에 그리 관심이 없는 내가 보기에도 심각할 정도로 비싸보였다. 대충 내가 가격을 메긴다면 10만엔은 나올거 같은데…
"어때? 내 자신작이야. 거의 한달 내내 만들었어. 쿠로네코씨랑 쿄우스케의 이미지를 구현화 한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이 정도로 느낌이 좋게 나올줄은 몰랐다니까!"
자신의 작품을 자랑하듯, 아니, 이 경우엔 자랑하는게 맞지. 눈을 반짝거리며 미카가미는 가슴을 피면서 말했다.
이중으로 교차된듯 하면서도 옆면에 물결무늬같은 세세한 세공이 새겨져 있는 실버링. 게다가 그 위에 조그마한 검은색 보석같은게 박혀있다. 투명이나 빨강, 파랑같은 일반적인 색깔이 아닌 검은색의 보석(아마 큐빅이겠지만)이 실버링과 묘하게 매치가 잘 되어서 꽤 신비한 느낌을 풍겼다. 딱 쿠로네코가 좋아할법한, 그러면서도 중2병이 아닌 일반인의 시각으로 봐도 만족할 수 있는 그런 반지였다. 전문가가 아니므로 뭐라고 설명은 못하겠지만, 정교하면서도 고급스럽다. 정도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다.
"진짜로… 받아도 되냐…?"
그런 반지가 2개나 들어있는 반지케이스. 그것을 내미는 미카가미 때문에 일단 받아들고, 조심스럽게 반지를 들어 이곳저곳 확인해보자, 정확히 반지의 밑면에 하나는 Ruri, 하나는 Kyou 라고 이름까지 박혀있었다.
솔직히 조금 기대는 하긴 했지만, 이 정도일줄은 상상도 못했다. 내가 꽤 당황한 표정으로 말하자, 미카가미는 오히려 또 싱긋 웃으면서
"무슨 말을 하는거야? 애초에 널 주려고 만든건데 당연히 받아도 되지. 아니, 꼭 받아줬으면 좋겠어"
양손으로 곱게 반지케이스를 든채 멍하니 있는 나를 두고 미카가미는 보는 쪽이 기분이 좋아질 정도로 활짝 웃으며 말했다
"처음으로, 친구한테 주는 선물이거든"
"너… "
부끄러운 대사를 한 자각은 있는지, 미카가미는 얼굴까지 조금 붉혔다.
"응… 고맙다. 정말로 고마워. 나도 이렇게 까지 정성이 담긴 선물, 처음으로 받아봐"
"부담같지 말아. 재료 자체는 그렇게 가격이 나가지는 않으니까"
"…혹시나 하는데 얼마나?"
"10만엔 정도?"
"………못들은 걸로 할랜다"
물론, 거리 한복판에서 반지케이스를 넘기는 남자와, 그것을 뿌듯한 얼굴로 받는 남자를 보고 길거리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수근거리면서 구경거리가 된건, 인수인계가 끝나고 나서야 눈치챘었다. 망할.
미카가미 녀석과 헤어지고, 집에 돌아온 나는 키리노 녀석이 돌아오지도 않았는데, 쫓기듯 내 방에 들어가서 다시한번 반지를 확인했지만 역시… 아까 평가한건 잘못된것 같다. 10만엔 가지고는 택도 없겠네…
문제는 이걸 어느 타이밍에 넘겨주냐는 건데, 음… 일단, 천천히 생각하도록 하자. 내일은 일요일. 다시 쿠로네코와 사오리. 키리노와 함께 다같이 노는 날이니까.
하지만 다음날. 쿠로네코는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