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10권. 12화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있어, 소리샘으로 연결…」
"음……"
키리노 녀석, 핸드폰 배터리가 다 떨어졌나?
전화를 안받는것도 아니고 못받는거라면 계속 전화를 해서 억지로 받게 하는것도 불가능하다. 이대로 키리노 녀석을 따라 집까지 쫓아가는 방법밖에 없겠지만, 자취를 시작한지 얼마 안되는 내가 그렇게 자주 집에 돌아갈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여러가지 의미로 키리노 때문에 자취를 시작하게 된건데 그 여동생 때문에 집으로 돌아간다면 어머니에게 환영받지도 못하고, 직접 방을 잡아주신 아버지도 얼마나 한심하게 생각하실까. 게다가 이런 상황에서 머리 끝까지 화가 난듯한 키리노를 상대하는 것은 꽤나 난이도가 높은 일이니까 말이다.
"뭐, 어쩔 수 없지"
고양이과 동물처럼 자세를 낮추고 캬악! 하고 화를 내고 있는 키리노의 모습을 상상한 나는, 내일이라도 키리노에게 전화를 해서 사정을 설명해 오해를 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시간이 지나면 기분이 좀 누그러지니까 말이다.
그럼 먼저 쿠로네코에게 사정을 설명하는게 확실히 나을거라는 생각에 나는 쿠로네코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섯번 정도의 신호음이 가자, 쿠로네코가 전화를 받았다.
「무슨일일까」
"아 그, 난데…"
아까 있었던 오해에 대해 설명하려고 전화를 한것이지만, 저 한마디를 뱉고나서 나의 입은 움직이질 않았다. 오해를 푼다고 해도,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면 좋은것일까?
그렇게 10초정도 지났을까. 내가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갈피를 못잡고 있자, 전화 너머의 쿠로네코는 '하아' 하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지금당장 말해줄 필요는 없어. 나도 당신을 곤란하게 만드는건 사양이니까, 혹시나 다른 문제가 있으면 그거부터 먼저 해결하는게 어떨까?」
"다른 문제?"
「당신 여동생 말이야」
"…………"
쿠로네코는 꽤나 자주 나의 속마음을 잘 알아맞춘다. 당연히 쿠로네코는 영화에서 나오는 심리학 교수도 아니고, 평생을 함께 살아온 가족과 비교하면 그리 오랜 시간동안 같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고작해야 1년 남짓이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쿠로네코의 말은 절대적이 아니며, 쿠로네코가 틀릴때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쿠로네코를 신뢰하며, 그 말 역시 신뢰한다. 그렇기에, 옛날이라면 '그럴리 없잖냐' 하고 부정했을 말을, 한번더 곰곰히 생각해봤다.
지금 내가 불안해하고 있는건 키리노랑 싸웠기 때문일까? 전혀 상관이 없을텐데도, 나는 아카기 녀석의 말이나 어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물론 절대로 그럴리는 없겠고, 정말로 만에 하나지만 나는 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을뿐, 나는 키리노를 이성으로 보고 있는걸까? 아니면, 적어도 주위에서는 그렇게 보이는 걸까?
의심이 의심을 낳고, 부정이 부정을 낳기 시작했다. 전화 너머의 쿠로네코는 체감상 몇분이 지날동안 이런저런 생각 때문에 한마디도 안하고 있는 나를 질책하지 않는다. 그저 전화 너머에서 조용히 들려오는 발소리와 사람소리가 쿠로네코가 아직 전화를 끄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
쿠로네코는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묻지도, 따지지도 않은채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 조용한, 마음속을 꿰뚫는듯한 기분나쁜 침묵이 나의 그 예상이 옳다고 증명하는것 같았다. 우리 남매에 관해서라면 모든것을 알고 있는것 같은 쿠로네코가 순간 진지하게 마녀로 느껴질 정도니까 말이다.
"키리노라면 연락이 안돼. 그러니까 너랑 먼저 통화하는게 낫겠지"
그리고 나는 그런 나의 생각을 부정하듯, 말이 없는 쿠로네코의 무언의 걱정을 부정하듯, 말을 꺼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고집일 것이다. 그것도 아니면 자존심 싸움일려나.
「…뭐, 상관없지만」
"오우"
그런 용기 아닌 용기를 얻은 나는 쿠로네코에게 처음부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키리노의 오타쿠 취미를 발견하게 된 일부터, 아야세를 만나게 된일. 그리고 첫 코미케때(이건 쿠로네코가 같이 있었지만) 아야세가 키리노의 취미를 알게 되고, 오타쿠를 혐오하는 아야세가 키리노와 절교를 하게 되고, 그리고 그 둘이 화해한 이야기까지. 뭐, 괜히 대충 말했다가 나중에 불똥이 튀기는건 사양이니까. 최대한 자세히 설명하는게 낫겠지.
덤덤히 나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던 쿠로네코는 어이가 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결혼해달라는 이야기는?」
"켁"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아, 그게…"
「그게?」
"자, 장난이라고 하,할까~ 그,그런거 있잖아? 괴롭히면 반응이 재밌다고 할까~ 아. 아하하"
「당신. 그거 성희롱이란건 알고 있을까」
묘하게 예리한곳을 지적한다!!?
"그, 그런,가…?"
「후후후…」
"?"
쿠로네코는, 마치 어둠속에서 스멀스멀 진흙이 올라오는듯한 낮은 웃음소리를 내더니,
「감히 나를 속이려고 하다니 이 멍청이가. 그 육신에서 영혼을 뿌리채 뽑아버리겠어」
"쿠로네코씨!!? 대사가 무섭습니다만!!?"
「당신들 남매는 바보야. 그렇게 티나게 거짓말을 하는건 저주를 받아도 괜찮다는 말로 받아들여도 되겠지?」
"알았어! 말할게! 말할테니까! 대체 옆에서 들리는 뿌득이는 소리는 뭐야!?"
「내 오른손이 힘을 내뿜기 전이야」
"거 되게 무섭네!"
정말, 나는 몇년이 지나도 이 조그마한 고양이에게 여러모로 휘둘릴것 같구나.
나는 크게 한숨을 쉬면서,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사실을 말했다.
"무지하게 내 취향이라 좀 친해지면 좋을것 같아서 그랬어. 그래도 너랑 사귀고 나서는 그런짓 안했으니까"
「……취향? 어떤점이 발정난 개 같은 당신의 가슴을 직격한걸까」
"뭐 일단 이쁘기도 하고"
「………(뿌득)」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청초한 검은 생머리는 남자들의 로망이라고. 이건 어쩔 수 없어"
「…청초한 검은 생머리라면, 나도…」
"아니아니아니, 너가 청초하지는 않지"
「………(뿌드득)」
"응? 쿠로네코? 아까부터 이상한 소리가 나는거 같은데"
「그럼, 그 빗치는 청초해?」
"아야세 말이야? 아야세는 뭐… 외, 외모만 청초하지"
그 브리짓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아야세님'이라고 부를 정도니까 말이지.
"자 어때, 궁금한건 다 풀렸어?"
「그래. 당신이 구제할 수 없는 멍청이라는건 잘 알았어」
"어째서!!?"
쿠로네코는 왠지 기분이 나쁜지, 밑도끝도 없이 갑자기 화를 내기 시작했다. 갑자기 또 왜 이런데!?
「그럼, 끊을게」
"자, 잠깐만!"
나는 퉁명스럽게 말하며 그대로 전화를 끊으려고 하는 쿠로네코를 붙잡았다. 분명 오해는 풀렸을텐데, 쿠로네코는 왜 기분이 나쁜거지?
그대로 쿠로네코가 기분이 나쁜채로 전화를 끊으면 방금의 대화들은 전부 의미가 없어진다. 그렇기에 나는, 다음주까지 숨기려고 했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다음주 있을 모임에, 너한테 줄 선물이 있어"
「흥… 아야센가 하는 그 빗치한테 선물하지 그래?」
"뭐 아야세는 오히려 싫어할테지만… 그런것보다, 너를 위해 구한 선물이니까 아야세한테는 안줄거라고"
거기까지 말하자, 갑자기 탁! 하는 소리가 났다, 순간적으로 '아' 하고 약간 먼곳에서 들리는 쿠로네코의 목소리를 보건데, 핸드폰을 떨어트린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내 예상을 증명하듯, 약간의 시간 후에 쿠로네코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흐,흥… 그 정도면 합격점일까」
"너 오늘따라 되게 기분이 왔다갔다 한다… 그것보다, 핸드폰은 괜찮아?"
「괜찮아」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쿠로네코는 왠지 킁- 킁- 하면서, 세게 숨을 쉬는듯한 소리를 냈다.
"왜그래? 코라도 부딪혔어?"
「걱정마. 떨어진 마력을 보충하는 중이니까. 킁킁-」
"……?"
그렇게 10초 정도, 킁킁 거리면서 숨을 쉬던 쿠로네코는 만족했다는 듯이, 평소보다도 쾌할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그 선물이라는건 뭘까?」
"지금 들으면 재미없을텐데… 뭐, 괜찮으려나? 마스케라 작가의 친필싸인이야. 그것도 너 앞으로"
「뭐!?」
평소에는 도도한 여왕의 목소리를 연기하면서, 소리한번 지르지 않던 쿠로네코는 소설로 쓴다면 느낌표가 붙을만한 정도로 큰 소리를 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쿠로네코의 경우엔 엄청나게 희귀한거라고 이거.
「그, 다,당신이 그걸 어떻게? 거짓말이지?」
"진짜야. 거짓말 같으면 직접 카나타씨랑 만나볼래?"
엄청나게 놀랐는지,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보는 쿠로네코. 나는 그런 쿠로네코가 더 기분이 좋아졌으면 하기에 분위기에 휩쓸려 평소라면 꺼내지 않았을 말을 꺼내버렸다. 아니 뭐, 카나타씨라면 당연히 ok. 할것 같지만. 아니, 저번에 카페에서 만났을때 한번 쿠로네코를 소개해달라고 하지 않았었나?
「지, 지금 당장 갈테니까…」
"어이어이…"
어지간히 기대되는 모양이구만. 나는 기분좋은 한숨을 쉬며, 쿠로네코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내일이라도 카나타씨한테 말해볼테니까"
「괘, 괜찮을까?」
"오우, 내가 장담한다"
굉장히 기분이 좋은듯한 쿠로네코는 듣는쪽이 기분이 좋을듯한 소녀다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카나타씨와의 만남을 약속한 후, 전화 너머에서 조그마하게 "언니다!"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집에 도착했나 보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 라고 말 해도 이미 도착했나 보네"
「으,응」
수줍게 대답한 쿠로네코는 전화를 끊기전 마지막으로, 왠지 자신이 없다는 듯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고마워. 쿄우스케」
"오,오,오우"
그 한껏 부끄러워 하는듯한 소녀같은 목소리에,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