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10권. 1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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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집이라고 부르는게 더 정답게 느껴지는 원룸으로 돌아오는 내내, 나의 기분은 최악의 상태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짜증이 나는것은 대체 내가 왜 이렇게 짜증이 나는지, 나 자신도 정확한 이유를 모르기 때문이었다. 방금 아야세와의 통화로 키리노가 나를 수신거부 했다는 점도 무척이나 짜증나는 일이긴 했지만, 단순히 그것뿐만인 이유는 아닌것 같았다. 지금도 가슴 정 가운데에서 느껴지는 갑갑함. 마치 음식을 잘못먹어 체한것처럼 느껴지는 이 갑갑함은, 확실히 오늘 아침에 아카기 녀석이 말한것처럼 오늘뿐만이 아니라 요즘따라 계속 느껴지는 감정이었다.
뜬금없는 이야기인것 같지만 예전에 어느 책에서 본적이 있는데,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민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는것만으로 대부분의 문제는 해결된다고 한다. 자신의 머릿속에서 정리되지 않은 이야기를 남에게 전달하기 위해 이야기를 정리하는 도중 해결책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고, 그런 해결책이 없는 단순한 감정적인 고민은 정말로 남에게 이야기하는것 만으로도 풀린다고 말이다. 뭐라고 하더라? 실제로 심리치료사들의 카운셀링이 대부분 그런 의미라고 하는것 같았는데. 정확한 용어는 생각나지 않는군.
뭐, 간단히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이미 좋은 예가 곁에 있다. 자신의 오타쿠 취미를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철저하게 이중생활을 하던 키리노 말이다. 그 비밀을 나에게 들키게 되고, 그 비밀을 공유할 수 있는 친구들이 생긴 지금에야 말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그 전의 키리노는 무척이나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였다. 아니 뭐, 그때의 녀석이 나를 지금보다도 훨씬 싫어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말이야. 그런 이유뿐만이 아니라, 뭐라고 해야할까- 인간으로서는 완벽하지만 가족이나 친구로는 불완전하다고 할까. 흠을 잡을래야 잡을 수 없는 인간이라는 것은 아무리 가족이라도 무섭다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쿠로네코가 알려준것처럼 멋대로 키리노를 질투하고, 원망했었지.
아마, 내가 모르는 키리노의 친구들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 전보다는 훨씬 다가가기 쉽다고 말이야. 나는 전문가도 아니고 쿠로네코처럼 다른 사람의 심리를 잘 읽는것도 아니지만, 그것은 분명 키리노에게 좋은쪽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어찌됐든 자신의 단점을 극복한거니깐 말이다.
같은 맥락으로, 나는 지금 무지하게 내 답답한 감정을 다른이에게 쏟아내고 싶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이 짜증의 원인을 찾아내거나, 아에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그 정도로 무지하게 짜증이 나 있다고.
"누가 좋으려나"
나는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을 꺼내, 누구에게 전화를 하는것이 좋을까 고민했다. 나의 무지막지한 한탄을 들어야할테니 어지간히 인간성이 좋은 녀석이어야 했다.
당연히 제일 먼저 떠오른건 나의 소꿉친구인 마나미였다. 마나미라면 나의 한탄을 웃는얼굴로 전부 받아주고, 나에게 적절한 어드바이스를 해줄게 분명하겠지만,
'나도 쿄우를 사랑하니까'
문뜩, 다시한번 마나미의 한마디가 떠올랐다. 내가 아는 마나미라면 나에게 장난을 치거나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는 않았을것이다. 그렇다면, 마나미는 대체 나에게 어떤 의미를 전달하고 싶었던 걸까.
"………"
그 이후로, 나는 묘하게 마나미를 의식하게 됐다. 예전에는 어머니 이상으로 포근한, 가족보다도 더 가족같은 녀석이었는데. 이렇게 의식하기 시작하니 끝이 없구만. 그런고로 이번엔 마나미의 신세를 지는것은 피해야겠다.
그럼 누가 좋을까.
키리노, 는 당연히 제외다. 장담하건데, 아야세라면 모를까 내가 싫다고 수신거부까지 당한 마당에 더이상 내 쪽에서 먼저 전화를 할 생각은 없다. 녀석이 먼저 전화를 하는거라면 모를까, 나도 이제 모른다고.
순간 검지손가락의 끝에서 다시 한번 키리노와 같이 찍은 커플용 스티커의 감촉이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그 스티커를 다시 보고 싶은 충동이 생겼지만, 지금 키리노 때문에 잔뜩 짜증이 나 있는데 귀여운 여동생을 보고 싶다고 하면 내가 뭐가 되겠냐. 나는 한숨을 쉬며 내 자신을 타일렀다.
그것도 아니면 아야세? 아야세와는 방금 통화를 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아야세한테 키리노의 흉을 볼 정도로 나는 멍청하지 않다. 추태를 보이는 것도 보이는 것이지만, 그 뒷감당을 감당할 수 없으니깐 말이다.
사오리에게는 항상 신세를 지고 있고, 게다가 저번엔 미카가미 녀석 때문에도 마음고생했을텐데. 이쪽도 미안하구만.
쿠로네코라면…… 아니, 그만두자. 이쪽은 오히려 내가 쿠로네코의 대화에 끌려다니겠지.
"그럼 적당히 아카기 녀석한테나 전화해서 징징대보실까-"
만만하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골치아픈 여동생을 가지고 있는 아카기 녀석이라면 지금 내가 짜증이 난 원인을 알고 있을것 같았다. 이녀석도 사람은 좋은 녀석이니깐 말이야.
"!"
그렇게, 주소록에서 아카기 녀석의 번호를 찾고 있자, 부르르, 하고 손에 들고 있는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나는 쏜살같이 핸드폰을 뒤에 가져가 댄체, 짜증을 숨기지도 않은채 말했다.
"뭐냐,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라도 들었냐?"
「뭐가 미안하다는 걸까」
"쿠, 쿠로네코?"
내가 잔뜩 감정이 상했다는 느낌으로 퉁명스럽게 말을 하자, 전화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키리노가 아닌 쿠로네코였다. 순간 번호를 잘못봤나 싶었지만, 생각해보니 나는 걸려온 전화의 번호조차 확인하지 않았었다.
「왜? 연락을 기다리는 상대라도 있었던 걸까?」
"그, 그건 아닌데…"
제길, 왜 난 당연히 키리노 녀석이 전화를 했을거라 생각하고 있었던 거지?
내가 약간 억울하기도 하고, 약간 창피하기도한 기분을 곱씹고 있자, 쿠로네코는 '하아…' 하고 크게 한숨을 쉬더니,
「약속, 잊었다고는 하지 않겠지」
"아"
맞다, 그런게 있었지?
「역시, 잊고 있었나 보네」
"…미안. 그래도 도착하자마자 가서 카나타씨한테 물어볼테니까"
「약속만 지켜준다면, 괜찮아」
'저주해주겠어' 나, '후후후… 이제 당신은 3일내로 죽게 될거야' 같은 독설이 날라올거라 생각했지만, 전화 너머의 쿠로네코는 무척이나 평탄한 목소리였다. 마치 이럴것을 미리 예상하고 있다는것처럼 말이다.
"거의 다 왔으니까, 카나타씨한테 이야기 해보고 바로 전화할게"
「그럴 필요없어」
"응?"
「이미 와있으니까」
쿠로네코가 그렇게 대답하는 동시에, 내 시선에 쿠로네코가 들어왔다. 아마 학교지정용일 가방을 양손으로 든채 허리를 꼿꼿히 피고 서 있는 쿠로네코는, 내가 어제 전화로 이야기한것과는 다르게 무척이나 청초한 분위기를 뿜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청초한 분위기를 한껏 올리는 소품아닌 소품이 있었으니,
"너, 그 교복…"
나에게 있어 쿠로네코의 교복 모습은 그렇게 새삼스러운 모습은 아니었다. 쿠로네코가 전학을 가기 전, 같은 학교일때 입었던 교복은 거의 3년동안 봐오던 교복이니깐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 이사를 가고 전학을 간 쿠로네코의 교복은, 신선하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할 정도였다. 그도 그럴것이, 요즘은 꽤나 보기 힘든 세라복이었다.
검은색 바탕에 하얀색 줄로 장식이 되어있는 세라복은 세라복 중에서도 정석이라고 한다면 정석이라고 부를 수 있는 세라복이었다. 파란색이나 노란색같은 만화같은 분위기는 없지만서도, 쿠로네코의 세라복 모습은 무심코 입이 벌어질 정도로 놀라웠다. 아카기 녀석이 말하던 것처럼 세라복 여고생은 남자의 본성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
시야 끝에 있는 쿠로네코는 여기서도 보일 정도로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옆으로 숙이더니, 전화 너머에서도 겨우 들릴만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갈아입고올 시간이 없어서……」
"아니, 아니아니아니! 괜찮아! 그냥 오길 잘했어!"
암! 그렇지! 이거 또 신선해서 좋구만!
「설마 이 나를 바보취급 하는걸까 당신…」
그런 대화를 하면서, 이제 통화를 하지 않아도 서로의 목소리가 들릴만한 거리까지 가까이 오자,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것도 없이 동시에 귀에서 핸드폰을 내렸다. 가까이서 보니까 더 좋구만 이거.
"그럼, 곧바로 이야기하러 가볼까"
"가까운거야?"
"응, 저기"
쿠로네코는 바로 옆에 있는 건물을 가르키는 나의 손가락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대로 팔짱을 끼려고 했지만 가방을 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흥. 하고 살짝 콧방귀를 낀 쿠로네코는 나를 쳐다보며,
"이름으로 예상하건데, 여자야?"
"오우"
"나이는?"
"글쎄, 겉으로 보기엔 중학생 같아서 모르겠는데"
"…무슨 만화같은 소리를……"
"아니아니, 너도 직접 보면 알거라고!?"
나는 하하… 하고 멋쩍게 웃은후, 그대로 카나타씨가 사는 건물이 아닌 원룸의 내 방으로 올라가려고 했다. 그러자 쿠로네코는 뒤에서 "저, 저기…" 라며, 왠지 자신이 없는듯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어디로 가?"
"아니 뭐, 카나타씨가 없을수도 있고, 바쁠수도 있으니깐 말이야. 일단 내 방에서 기다리는게 낫지 않아?"
"……응"
쿠로네코는 혹시나 마스케라의 원작자인 카나타씨를 만날 수 없는걸까. 하는듯한 실망한 표정이었다. 어쩔 수 없는 녀석이구만, 나는 느릿느릿 계단을 올라오려고 하는 쿠로네코의 머리에 가볍게 손을 얹히고 말했다.
"오늘이 안되더라도 반드시 만나게 해줄테니까, 걱정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