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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7: ◆GULJi96aoSzS 2013/09/07(土) 08:23:34.84 ID:eLclzfIK0
계산을 마치고 나오자 유키노시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미아라도 된 건가 하고 걱정이 되어 두리번두리번거리고 있자, 등뒤에서 갑자기 뭔가가 목 사이로 쑥하고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하고 돌아서자 유키노시타가 있었다.
「히키가야 군도 추울 것 같이 보여서…」
유키노시타는 열기를 띤 시선으로 내 목 언저리를 보고 있다.
그 말을 듣고 목 언저리로 손을 뻗자 둥그렇게 목도리가 둘려 있었다.
유키노시타는 나에게 맞는 목도리를 찾고 있었던듯 하다.
나는 외톨이인 주제에 목도리는 여자애한테 선물받을 때까지 하지 않는다는 이상한 폴리시를 가지고 있었다.
그 염원이 드디어 이루어지는가 싶어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동과 기쁨이 몰려왔다.
348: ◆GULJi96aoSzS 2013/09/07(土) 08:29:59.41 ID:eLclzfIK0
쑥스럽지만 가까이에 있는 거울에 내 모습을 비춰본다.
이 무늬는 꽤 괜찮네…….
거울 너머로 유키노시타를 보자 심심한지 꼼지락꼼지락하면서 나를 올려다보고 잇었다.
이렇게 귀여운 몸짓하는 유키노시타도 좋구나 하고 무심코 엉뚱한 생각을 하고 만다.
여성물품 가게 앞에서 우리 뭘 하는 거지.
엑……!
급히 냉정을 되찾는 것과 동시에 나는 큰 실수를 깨달았다.
「어이, 이거 여성용이잖아……」
확하고 순간적으로 빨개지는 유키노시타.
얼굴을 양손으로 가려도 새빨갛게 물든 귀까지 숨길 수는 없다.
「이, 이거……, 깨, 깨끗하게 접어서 원래 있던 데 놓고 와줘!」
재빠르게 말을 마치고 도망치듯 가게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또, 또냐고, 이 전개. 어이!
352: ◆GULJi96aoSzS 2013/09/07(土) 17:15:56.06 ID:eLclzfIK0
남겨진 나는 목도리를 다시 푼다.
여성전문점 앞에서 여자 목도리를 하고 서있는 나를 방치하지 말아줘…….
이쪽이 훨씬 더 부끄럽잖아.
조급해하면 조급해할수록 매듭은 더 얽혀서 점점 풀기가 어려워진다.
뱀장어한테 목이 졸려서 기절한 금빛 여우의 기분을 지금 잘 알 것 같다.
353: ◆GULJi96aoSzS 2013/09/07(土) 17:21:13.43 ID:eLclzfIK0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킥킥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겨우 목도리를 풀러내 손수레에 되돌려놓자
그제서야 유키노시타가 돌아왔다.
유키노시타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시선을 딴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자, 이거 줄게」
아까 건네주려다 기회를 놓쳤다고 할까, 건네줄 타이밍을 주지 않은 비닐봉투를 건 내민다.
「고, 고마워……」
설마 자기한테 선물을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겠지.
가게 이름이 들어간 핑크빛 비닐봉투를 소중한듯이 껴안은 채 꼼짝 않고 서있다.
그런 유키노시타의 모습에 감싸주고 싶은 마음이 솟아난다.
354: ◆GULJi96aoSzS 2013/09/07(土) 17:23:12.51 ID:eLclzfIK0
「안에 안 봐도 되냐」
그 자세로 계속 굳어있는 모습이 웃기게 느껴져서 말을 마치기 전에 불쑥 내뱉고 말았다.
쑥스러움을 감추려는지 가볍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 봉투를 열어보는 유키노시타.
봉투 안에서 나온 건, 무릎 덮개였다.
「부활 시간이 되면 난방 꺼지잖아. 추울 거 같아서……. 그리고 공부 봐주고 있으니까, 그 답례야……」
「마침 집에서 가져와야 하나 또 한 장 사야 되나 망설이던 참이었어……. 멋진 무늬네. 고마워……」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인사를 하는 유키노시타의 미소에 이제 어떻게 되어버릴 것 같다.
355: ◆GULJi96aoSzS 2013/09/07(土) 17:27:43.98 ID:eLclzfIK0
다음으로 남관의 사이제에 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핑크색 비닐봉투에서 무릎 덮개를 꺼내서 바라보고 있다.
마음에 든 것 같아 나도 기분이 좋다.
356: ◆GULJi96aoSzS 2013/09/07(土) 17:42:48.32 ID:eLclzfIK0
먹을 걸 주문한 다음 드링크바로 두 사람 분의 음료수를 가지러 갔다.
나는 카푸치노고 유키노시타는 캐모마일티다.
한 번에 가져가려고 컵을 두 개 들었지만 역시 이건 힘들었다.
쏟아지지 않게 신중하면서 천천히 거북이 걸음으로 자리를 향했다.
이제 조금 남았다.
유키노시타의 등뒤가 드디어 가까워졌다.
왜 저러지, 저 녀석?
갑자기 유키노시타가 느릿느릿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키노시타의 기괴한 행동이 신경쓰였지만 이제까지처럼 신중한 발걸음으로 다가가기로 했다.
357: ◆GULJi96aoSzS 2013/09/07(土) 17:46:49.45 ID:eLclzfIK0
「!」
어, 어이…….
뭔가 했더니, 유키노시타는 무릎 덮개에 뺨을 비비고 있었다.
너, 우리집 카마쿠라냐.
아무리 나지만 여기엔 깼다.
이건 좀, 똑바로 볼 수가 없네.
자리에 앉을까 말까 망설이고 있자, 내 인기척을 느꼈는지 즉각 재빠르게 무릎 위에 올렸다.
그리고 돌아보면서 하는 말이
「가져다줘서 고마워」
하고 미소지으며 얼버무렸다.
방금 본 걸 건드리면 안 된다, 목숨이 아까우면…….
현명한 난,
「컵 뜨거우니까 조심해」
하고 한 마디 덧붙여 말하곤 테이블 위에 놓았다.
363: ◆GULJi96aoSzS 2013/09/07(土) 20:29:10.97 ID:eLclzfIK0
평소와 같이 멍하니 있으면서 둘만의 시간을 보낸다.
유키노시타는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지 몇 번이고 무릎 쪽을 보며 미소를 띠고 있었다.
스스로도 뭐라 하면 좋을지 모르겠지만 그런 유키노시타의 모습을 왠지 보고만 있을 수 없게 됐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막 산 문제집을 여기저기 펼쳐놓기로 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글씨를 보고 있으니 차츰 유키노시타를 잊고 점점 어두운 기분이 됐다.
아, 짧은 겨울방학은 이 문제집과 함께 보내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