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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9: ◆GULJi96aoSzS 2013/09/14(土) 23:39:14.03 ID:UijBmWGo0
× × × ×
퍼붓는 빗속에서 유키노시타 유키노는 오늘도 서 있었다.
다행이다…….
유키노시타는 새빨간 우산을 쓰고 내 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젖은 고양이가 된 유키노시타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는데, 일단 안심이다.
튄 물방울에 소매를 젖혀가면서 나는 유키노시타가 있는 곳을 향해 잔달음질했다.
510: ◆GULJi96aoSzS 2013/09/14(土) 23:40:23.24 ID:UijBmWGo0
「여기, 히키가야 군……」
편의점에서 파는 비닐우산을 건넨다.
역시 유키노시타.
이런 세세한 곳까지 신경을 써준다.
사가미가 아무것도 안한 문화제나 사가미가 아무것도 못한 체육제를 잘 꾸려나간 실력이 어디 가지 않는군.
「땡큐, 비 오는데 기다리고 우산까지 준비해주다니 고마워.」
유키노시타의 마음씀씀이에 감사하며 잽싸게 우산을 폈다.
511: ◆GULJi96aoSzS 2013/09/14(土) 23:41:31.77 ID:UijBmWGo0
「그거랑 이거……」
예쁜 꽃무늬가 인쇄된 손수건을 건넨다.
아무리 그래도 이걸 쓰는 건 망설이게 된다.
「손수건 더럽히는 건 좀 그러니까 내 거 쓸게」
하고 주머니를 뒤적거린다.
청바지 주머니 깊숙이 들어있어 꺼내는데 시간이 걸린다.
겨우 손수건을 찾았다.
512: ◆GULJi96aoSzS 2013/09/14(土) 23:42:44.97 ID:UijBmWGo0
「!」
유키노시타가 내게 오른손을 뻗는가 싶더니 손수건으로 이마에서 뺨으로 흐르는 물방울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뜻밖의 유키노시타의 행동에 내 체온이 급상승하고 고동이 빨라지는 게 느껴졌다.
유키노시타의 손수건이 움직일 때마다 얼굴이 붉어진다.
이건 틀림없이 주위의 시선이 모였을 것이다.
분명 카와사키도 보겠지.
기척을 지우는 게 특기였던 나는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513: ◆GULJi96aoSzS 2013/09/14(土) 23:44:21.34 ID:UijBmWGo0
유키노시타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유키노시타가 정면으로 돌아들어왔다.
마치 흠뻑 젖고 들어온 어린아이를 닦아주는 어머니와 같은 따뜻한 눈길이었다.
그리고 눈이 마주치자 뺨을 붉히며
「너는 정말 손이 많이 가는 구나……」
하는 밉살스러운 말을 들었다.
514: ◆GULJi96aoSzS 2013/09/14(土) 23:45:11.36 ID:UijBmWGo0
하늘이 온통 흐리다.
구름이 흐르듯 움직이며 트랜스포머와 같이 금방금방 모습을 바꿔 간다.
아직 당분간은 비가 멎을 것 같지 않다.
유키노시타는 언 손에 후하고 새하얀 숨을 불고 있었다.
오늘은 바로 근처에 있는 찻집에 가기로 했다.
517: ◆GULJi96aoSzS 2013/09/15(日) 02:01:50.63 ID:uhzeDYYe0
× × × ×
유키노시타의 요점을 파악한 지도 덕에 어제보다도 공부가 효율적으로 진행되었다.
강의 중에 그 자리에서 단어 카드를 고치고 수학 공식 카드에 공식을 써넣은 덕에 어느 정도 기억에 남은 것도 주요했겠지.
공식을 못 외는 걸로 유키노시타에게 매도당하지 않는 게 가장 큰 증거다.
어제는 벡터 복습으로 시간을 다 썼지만 오늘은 내일 센터 수학 예습도 끝낼 수 있었다.
이다음은 집에 돌아가 다시 한 번 수Ⅱ 복습을 하면 다른 과목에 시간을 낼 수 있다.
518: ◆GULJi96aoSzS 2013/09/15(日) 02:03:59.26 ID:uhzeDYYe0
「땡큐, 유키노시타. 오늘도 늦게까지 잡아둬서 미안해」
유키노시타 쪽을 봤지만 반응이 없다.
뭔가 멍하니 바라보다가 내 시선을 눈치 채곤,
「……아니. 벼, 별로 감사를 들을 정도는 아니야. 내가 그냥 그러고 싶은 것뿐이니까……」
하고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왜 그래, 유키노시타?」
나는 무의식중에 유키노시타에게 무언가 미안할 일이라고 했나 싶어 유키노시타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뺨을 붉게 물들이며 또다시 눈을 피한다.
「내가 무슨 터무니없는 말이라도 꺼냈어?」
오늘은 꽤 집중해서 공부했다.
공부에 온정신을 쏟고 쓸데없는 생각도 안 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의심암귀가 되어버렸다.
519: ◆GULJi96aoSzS 2013/09/15(日) 02:05:26.67 ID:uhzeDYYe0
「유키노시타……」
다시 한 번 무슨 짓을 했는지 물어보려고 돌아선 때 유키노시타가 순간적으로 마주친 눈을 세 번 피했다.
점점 더 혼란스러운 나에게 유키노시타는 얼굴을 돌린 채 간신히 들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히, 히키가야 군의 그런 눈……처, 처음 봐……」
내 시선을 느끼고는 잠시 얼굴을 외면한 채 침묵하고 있었다.
항상 죽은 생선의 눈 같다는 말을 듣지만 지금 어떤 눈을 하고 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나 자신은 평소와 비교해 무엇 하나 바뀌지 않았을 터이다.
그렇지만 유키노시타는 분명히 당황하고 있다.
뭔가가 다르다…….
520: ◆GULJi96aoSzS 2013/09/15(日) 02:11:58.72 ID:uhzeDYYe0
오늘 하루 일을 되돌아보니 오늘은 아직 유키노시타에게 매도당하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유키노시타와 만난 지 수개월 지났지만 지금까지 이런 날은 없었다.
그런가……, 그래선 유키노시타의 상태가 이상해질 만도 하다.
공부에 신경을 빼앗긴 나머지 그런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게 아니잖아.
아까 유키노시타가 한 말은 뭐지?
오늘은 그건가……, 공부에 꽤 집중하고 있어서 생선 썩은 눈을 하지 않았다는 건가.
그걸 보고 당황하다니 어찌 된 일이야?
뭔가 내 인격을 부정당한 것 같은 쇼크를 받고 말았다.
아니, 조금 슬프지만 그건 놔두고 우선 이쪽을 해결해야지.
521: ◆GULJi96aoSzS 2013/09/15(日) 02:15:26.58 ID:uhzeDYYe0
「너 왜 그런 빗속에서 오도카니 서 있었어. 시부야 역 앞에 앉은 개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침묵을 깨고 평소와 같은 유키노시타가 돌아왔다.
「어머, 개는 네가 아닐까. 봐, 네 이름……개 이름 같잖아. 하치코(八公)」
평소보다 50% 증가한 미소로 밉살스러운 말을 던진다.
아, 이 녀석 평소처럼 이렇게 하고 싶었구나.
무척이나 즐거운 듯 신이 난 말투로 말한다.
나는 스스로도 차츰차츰 원래의 눈으로 돌아가는 게 느껴졌다.
억울한가. 이런 눈이 아니면 안 된다니 뭐냐고.
그래도 그쪽이 좋다면 나도 여기에 맞춰야지.
522: ◆GULJi96aoSzS 2013/09/15(日) 02:17:24.66 ID:uhzeDYYe0
「너, 사람 이름 비틀어서 갖고 놀지 말아 줄래? 사람 이름 가지고 놀리면 안 된다고 배우지 않았어?」
뭔가 나도 즐거운 듯이 반격해버렸군, 아…….
유키노시타가 더 만개한 미소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박해 온다.
「버릇이 없는 개네. 개 주제에 사람에게 말대답하다니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목줄이라도 채워서 조교할 필요가 있겠네.」
생기가 넘치게 나를 매도하는 유키노시타는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이런 순간을 칭찬해도 본인은 기뻐하지 않겠지만 이런 유키노시타 유키노도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