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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3: ◆GULJi96aoSzS 2013/09/15(日) 02:18:18.88 ID:uhzeDYYe0
옆에서 누군가 보면 틀림없이 닭살이 돋을 대화지만 우리에게 이건 소중한 커뮤니케이션이다.
지금까지 이렇게 해서 둘의 시간을 만들어 왔다.
이건 확실히 시간을 내서 오늘 일을 벌충해야겠군.
「마스터, 커피 두 잔 더!」
이런 쓸데없는 대화를 계속하기 위해 일부러 커피를 한 잔 더 주문했다.
524: ◆GULJi96aoSzS 2013/09/15(日) 02:20:42.62 ID:uhzeDYYe0
× × × ×
「어머, 하치코(八公). 개 주제에 주인님을 이런 곳에 기다리게 하다니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뭐야, 그거. 너 그걸 인사라고 하는 거냐.
동기강습도 중간날인 3일째를 끝내고 이제 2일만 더 열심히 하자고 시원하게 결의를 다졌는데 갑자기 이러는 건 아니잖아.
뭐냐 그, 내가 주제에도 안 맞게 시원하게 해서 벌이라도 내린 건가.
뭐, 어제 유키노시타의 매도는 평소보다 적었으니 말이지.
오늘은 그 반동으로 이렇게 된 거겠지.
이것만은 하는 수 없으니 포기했다.
525: ◆GULJi96aoSzS 2013/09/15(日) 02:22:04.38 ID:uhzeDYYe0
「시끄러, 개 같이 아무나 보고 기쁜 듯이 꼬리를 흔드는 짓을 할 수 있다면 외톨이 따윈 못해먹는다고.」
유키노시타는 이마에 손을 얹는 상투적인 포즈를 하더니,
「이누가야 군은 역시 내가 조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네.」
하고 시원스레 지껄였다.
그런데 「역시」는 뭐냐고.
아무렇지도 않게 어필하면 부끄럽잖아.
526: ◆GULJi96aoSzS 2013/09/15(日) 02:25:37.23 ID:uhzeDYYe0
나는 반격을 한 마디 더하고 싶었지만 그 말에 필요 이상으로 의미를 부여한 나머지 허둥대고 말았다.
말하고자 했던 말을 잊어버리고, 입을 열고는,
「아, 앞으로도 나한테……그, 수, 수학을 가르쳐 주세요.」
같이 이성을 잃은 말을 뺨을 붉히며 말하고 말았다.
유키노시타에게도 금세 전염되었다.
「아, 으응……, 이, 이런 나라도 좋다면 자, 잘 부, 부탁합니다……」
하고 손을 꼬물꼬물하며 점점 목소리가 기어들어가는 것이었다.
527: ◆GULJi96aoSzS 2013/09/15(日) 02:26:51.82 ID:uhzeDYYe0
둘이서 서로를 마주한 채 고개를 숙이고, 서로 애써 이을 말을 찾으려 했다.
「너희들 바보 아니야……」
카와사키가 불쾌한 듯 이렇게 내뱉고는 역 방향으로 떠났다.
532: ◆GULJi96aoSzS 2013/09/15(日) 10:25:24.94 ID:uhzeDYYe0
× × × ×
그건 그렇고 문과 수학 강의에서는 매일매일 이런저런 이해도 못할 것들이 등장한다.
오늘은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수열과 씨름했다.
뭐냐고, 이 Σ란 건!
위에도 밑에도 왼쪽에도 a나 n이나 k 같은 의미불명의 문자열로 얽혀있다.
덕지덕지 이해도 못할 장식을 붙이고는, 너 *데코토라냐!?
(역주 : 화려하게 장식을 한 트럭(장거리용 트럭에 많음). 출처 : 네이버 사전)
이 의미불명의 수열이란 것에 절망한 나머지 결국에는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533: ◆GULJi96aoSzS 2013/09/15(日) 10:27:10.70 ID:uhzeDYYe0
「이렇게까지 깔끔하게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하면 솔직히 말해 손 쓸 길이 없네.」
그렇게만 말하고 잠시 이마에 손을 얹은 유키노시타를 보자, 나까지 풀이 죽어버렸다.
그런 나를 본 유키노시타는 실컷 매도할지 아니면 힘을 북돋아 줄지 고민하더니,
「히키가야 군……, 꼭 너를 국립……이과에 합격시켜 보이겠어.」
그렇게 말하고 내 손에 가만히 자기 손을 겹쳤다.
「자, 잠깐만……, 나, 나, 난 국립 문과야.」
너무나도 뜻밖인 발언과 유키노시타의 따뜻한 손길에 완전히 허둥대고 말았다.
534: ◆GULJi96aoSzS 2013/09/15(日) 10:28:46.42 ID:uhzeDYYe0
유키노시타는 가늘고 낭창낭창한 손가락을 입가에 가져가고는 킥하고 웃었다.
「히키가야 군, 너 방금 국립 문과라고 말했지. 그런 마음이 있으면 어떻게든 될 거야……」
아니, 어떻게든 되지는 않는다니까.
마음만으로 수열을 풀 수 있게 되지도 않고 이건 해결책이 아니잖아.
의기만으로도 그렇고.
이쪽에 와서는 점점 해결책에서 멀어지고 있다고.
뭐가 뭔지 알 수 없어 눈을 희번덕거리며 유키노시타를 봤다.
535: ◆GULJi96aoSzS 2013/09/15(日) 10:31:14.09 ID:uhzeDYYe0
「그렇지만 나, 허언은 하지 않는 걸……」
유키노시타는 그런 나를 금방 달래는 몸짓이 뭔지 알고 있었다.
장난스럽게 미소 지으며 윙크하고는 고개를 갸웃한다.
안 돼……, 이런 시추에이션에서 그런 걸 당하면…….
내 얼굴은 곧 순간온수기와 같이 뜨거워져, 수증기가 자욱해지고 말았다.
유키노시타도 그 열에 직격 당했는지 얼굴을 붉히며,
「……그러니까 나를 믿어. 하, 하, 하치, ……하치가야 군」
하고 나를 괴롭게 죽이기에 충분하고도 넘치는 주문을 외웠다.
539: ◆GULJi96aoSzS 2013/09/15(日) 16:13:20.39 ID:uhzeDYYe0
× × × ×
여운(余韻)이라고 할지 여열(余熱)이라고 할지 나는 물론 유키노시타도 방금 일이 신경 쓰여 서로 사소한 실수를 반복하면서 참고서에서 초보적인 수열부터 공부했다.
교과서 문제는 해법을 설명하는 정도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3패턴의 수열을 빠짐없이 반복했다.
「이다음은 나중에 시간을 넉넉히 가지고 가르쳐 줄 테니까 그때까지 오늘 한 부분은 꼭 외워두도록 해.」
이쯤에서 오늘 분의 복습이라기보다는 유키노시타의 수열초보자강의를 끝마치고 티타임을 가지기로 했다.
컵에 손을 뻗어보니 재스민 티가 비어 있었다.
유키노시타는 그걸 눈치채고는 드링크 바에 가지러 갔다 와 주었다.
유키노시타가 가지고 와준 컵에는 허브티가 들어 있었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머리를 쓴 까닭에 허브향이 묘하게 몸으로 스며든다.
540: ◆GULJi96aoSzS 2013/09/15(日) 16:14:42.89 ID:uhzeDYYe0
내 정면에 다시 앉은 유키노시타는 허브티를 한 모금 마시고 후하고 한숨 쉬는 나를 보고 만족스레 미소 지었다.
나도 내가 원하는 걸 눈치만으로 알아준 유키노시타에게 감사의 뜻을 담아 미소를 보냈다.
오늘 복습은 기본 중의 기본에만 초점을 두고 빨리 끝냈지만 느긋하게 서로를 바라보거나 쑥스러워 고개를 숙이거나 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541: ◆GULJi96aoSzS 2013/09/15(日) 16:17:22.43 ID:uhzeDYYe0
「그런데 내일 선물 교환할 거 샀어?」
내일은 유이가하마가 기획한 크리스마스 파티다.
봉사부 3명과 코마치, 히라츠카 선생님, 토츠카까지 6명이서 할 예정이다.
6명이서 하는 거다.
결코 7명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자이모쿠자는 오지 말라고.
아니, 예정이라기보다 유이가하마가 억지로 기정사실로 만들었다고 하는 편이 옳겠지.
유이가하마한테 선물 교환할 테니 500엔 이내의 선물을 준비하라는 메일을 어젯밤에 받았다.
「죽 히키가야 군하고 함께 있었는걸……. 그래서 못 샀어.」
표현하는 게 다 귀엽다.
아무렇지도 않게 나와 죽 같이 있던 걸 어필하는 모습이 어쨌든 귀엽다.
아까 한 「하치가야 군」이란 말이 내 하트를 완전히 꿰뚫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