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log - 인형아가씨들
얼마나 걸었을까? 다리가 조금 아픈 것 같다. 아마도 동네를 몇 바퀴는 돌았을 것이다. 생각에 빠져있다 보니 미처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아아, 그렇다. 요 며칠째 나의 아침산책은 이렇게 하염없이 걷기만할 뿐이다. 그래도 시간은 남아도니 문제될 것은 없다. 다만 의욕 없이 다람쥐 쳇바퀴 돌듯 자동으로 반복할 뿐.
어차피 일찍 집에 들어가 봐야 아무도 없으니까.
신쿠도. 히나이치고도. 스이세이세키도.
몰랐다. 그 녀석들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가 이렇게 클 줄은. 예전이라면 방에 혼자 틀어박혀 통신판매사이트나 뒤적이면 되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조차 없다. 집 안을 가득 매운 적막을, 그 쓸쓸함을 견딜 수가 없다.
왼손을 들어본다. 햇빛에 이리저리 비추어보아도 이 손에 더 이상 장미의 반지는 없다. 쓸데없이 화려하긴 했지만 어느새 내 몸의 일부가 된 것이었는데, 이제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때 당시. 신쿠가 스이긴토에게 자신의 로자미스티카를 건넨 그 순간. 힘을 잃고 쓰러지던 그 순간. 나의 반지 역시 사라진 것이다.
지금의 나에게 더 이상 그녀들과의 연결은 없다. 혼을 잃어버린 몸체는 토우코씨에게 맡겼다. 최소한 겉모습만이라도 원래대로 고쳐달라는 부탁과 함께.
신쿠도 스이세이세키도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부서진 상태였다. 이리저리 흩어진 파편들을 찾는 것조차 스이긴토가 대신 해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나마 그녀들의 경우는 사정이 나은 편이다. 히나이치고는 작은 파편 하나조차 남기지 못 했으니까. 스스로를 희생하여 자매들을 구하려한 그녀의 노력은 보상 받지 못 했고, 그녀의 몸은 흔적도 없이 산화되었다.
후우, 그만두자. 이런 생각해보았자 뭐할까. 지나간 일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을. 이런다고 그녀들이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상념의 와중에 어느덧 집에 도착해있었다. 다시금 텅 빈 집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한숨을 내쉬며 나는 문을 열었다.
“이것으로 모든 게 밝혀졌어. 범인은 바로 빨강팬더 남작 당신이야!”
“이...이럴수가! 과연 킁킁! 내 계획을 알아차리다니.”
문을 열자 들려온 유치찬란한 대사. 모두가 함께 있었을 때 종종 같이 보곤 했던 인형극. 하지만 녀석들이 사라지고 나서, 저걸 볼 사람은 이제 이 집에 없을텐데….?
설마하는 생각에 우당탕 소리를 내며 거실로 달려갔다. 발에서 빠져나간 신발이 뒤로 날아갔지만 미처 신경 쓰지 못 했다.
“아.....!”
몸이 굳어버렸다.
“흥! 하지만 잡힐 것 같으냐? 보아라, 이 최신탈출용 휴대로켓 Mk.IX의 위용을!”
평소보다 큰 TV소리였지만, 내 귀는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 했다.
“너...너희들...”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는 조그만 얼굴. 밝게 빛나는 황금색 머리카락이 아른거린다. 가을하늘처럼 깊고도 푸른 눈동자가 깜박인다. 기억 속 그대로의 모습. 몇번이고 되새겨 추억했던 그리운 모습. 머리 안이 하얗게 탈색된 것처럼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눈앞의 신기루가 혹여 사라질까 두려워하며, 덜덜 떨리는 몸을 억누르며 다가갔다.
“늦었구나, 준.”
부드럽고 달콤한 목소리가 귀 안을 맴돈다. 홀린 듯 다가가던 나에게 그것은 결정타였다. 가슴속을 가득 채우는 안도감. 팽팽하게 당겨졌던 긴장감이 순간적으로 사라지며, 그만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고 말았다.
“신...쿠....?”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차마 기쁨을 표현할 수조차 없었다. 혹시 꿈이 아닌가 싶어 볼을 꼬집어보았다가 따끔한 통증에 황급히 손을 떼었다.
꿈이... 아닌 거야.....?
“와아, 준이다!”
와락 하고 분홍색 인영이 안긴다. 히나이치고다. 품에 들어오는 이 사이즈. 어리광부리는 목소리. 틀림없는 히나이치고다.
“에이잇!”
콱 하고 누가 내 옆구리를 걷어찬다.
“정말이지... 한참을 기다렸어예요! 이 몸이 이렇게 친히 반기려 했건만!”
이 발길질의 강도. 이 뻔뻔한 말투. 옆구리에 손을 얹고 콧대를 세우는 태도. 스이세이세키다. 정말로 스이세이세키다.
“너...너희들 어떻게.....?”
“스이긴토와 그녀의 미디엄. 그리고 그 때의 인형사 덕분이야.”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신쿠는 말했다. 스이긴토... 미키야형... 그리고 토우코씨?
“스이긴토는.... 놀랍게도 그녀에게 앨리스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어. 그녀의 미디엄도 마찬가지야. 「 」에 도달하는 것을 거절했지. 그래서 우리들의 로자미스티카를 도로 나누어준 거야.”
“그런....”
“그 뒤는 그야말로 일사천리. 토우코라는 인형사는 정말 대단해. 부서진 나와 스이세이세키의 몸을 삽시간에 고치고, 히나이치고의 몸을 새로 만들었지. 그리고 거기에 로자미스티카를 넣어서 우리들을 되살린 거야.”
“그렇...구나....”
아아, 그렇구나. 그렇게 된 거구나. 다시금 그때의 장면이 떠오른다. 필요 없어, 라고 답하는 담담한 목소리. 입가에 머금은 담백한 미소.
그래. 그 세 사람 덕분이었구나. 뭐라 감사를 표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고마운 마음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어떻게 보답을 해야 할지.
“우리들만이 아니라 아니라 소우세이세키도 살아났어예요! 비록 지금은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가 있지만.”
“뿐만 아니라 카나리아라는 아이와... 그때의 키라키쇼라는 아이도 살려냈더군. 키라키쇼는 자기 미디엄을 찾으러 갔어. 조금 불안하긴 하지만, 앨리스게임이 종결된 지금은 안심해도 되겠지.”
옆에서 뭐라고 하는 것 같지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지금의 내 머릿속은 온통 환희로 가득 차 있으니까. 고개를 숙이고 참으려 해도 킥킥거리는 웃음이 새어 나온다. 급기야는 완전히 터트리고 말았다.
“아하하핫~ 아하하하하하하핫~”
기쁘다. 정말 기쁘다. 모두 돌아온 것이다. 다시금 함께 지낼 수 있다. 이제는... 두 번 다시 볼 수 없게 될 줄 알았는데.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지팡이가 머리를 가격했다. 맞은 곳을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쓰읍, 아프잖아!
“시끄러워, 준. 킁킁의 대사를 들을 수가 없잖아!”
흥 하고 도도한 얼굴을 돌리는 신쿠. 그 옆으로 흘러내린 금빛 실타래 사이로 드러난 볼이 발갛게 물들어있다. 부...부끄러워하는 건가? 우웃~ 귀여워라!
참지 못 하고 와락 하고 모두를 끌어안았다. 신쿠도, 스이세이세키도, 히나이치고도 모두. 셋 다 인형사이즈여서 이렇게 해도 품에 쏙 들어온다.
“꺄악! 뭐예욧!”
“수...숨 막혀어~”
“이잇, 준! 머리에 가려서 킁킁이 안 보이잖아!”
뭐라고 마구 떠들어대는 것 같지만 상관없다. 더욱 힘차게 보듬어 안으며 그녀들의 향기를 맡는다.
“모두... 모두 잘 돌아왔어. 그리고...”
아아, 너무너무 행복해서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이어서 불쑥 튀어나온 목소리는 분명 내가 내는 것임에도 이상하게 어른스러웠던 것 같다.
“잘 자라주어서.... 고맙구나.”
“준.....?”
의아함에 고개를 치켜드는 신쿠. 아아, 괜찮아. 아무래도 좋아. 다만 이 기쁨을 좀 더 느끼고 싶을 뿐. 이 행복을 좀 더 느끼고 싶을 뿐.
“킁킁이 안 보인다고 했잖아!”
다시금 퍼억 하는 소리. 하지만 아까보다 훨씬 크다.
그와 함께 나는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