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log – 스이긴토
소녀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가장 먼저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별빛을 녹여 만든 듯 반짝이는 은발. 허리까지 길게 기른 머리카락은 비단실보다도 매끄러워 보였다. 천사같이 예쁜 얼굴과 매끈하게 뻗은 팔다리. 옷 밖으로 노출된 피부는 백자처럼 희고 투명했다. 반면에 뭐가 불만인지 살짝 베어 문 입술은 장미꽃잎과 같은 붉음을 머금고 있었다.
얼핏 보아서는 십대 중반처럼 보이는 소녀. 하지만 밤하늘의 어둠처럼 소녀를 감싼 단아한 검은 원피스로 드러나는 몸매는 매우 늘씬하면서도 이상적인 비율을 보여주고 있어, 쉽게 나이를 짐작할 수 없게 만들었다. 특히 한껏 성숙함을 과시하고 있는 흉부의 부드러운 곡선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여기에 소녀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이 예쁜 꽃이나 액세서리 혹은 반짝이는 보석 같은 것이었다면 더할 나위 없는 그림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가 연신 뒤적이고 있는 물품들은, 그 아름다운 적보라빛 눈동자가 찾고 있는 것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소녀와는 너무 위화감이 느껴지는 물품이었다.
유아복 매장
팻말에 쓰여있는 글자가 이곳이 어디인지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 있던 직원들에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비록 예비부모들이 주고객인 매장이라고 해도, 간혹 태어날 동생에게 줄 선물을 위해 들리는 여자아이들도 있곤 하니까. 정말 곤란한 것은 소녀가 영 마음에 드는 물건이 없는지, 진열대를 뒤적이기 시작한지 이미 한참이 지났다는 것이다. 더 곤란한 것은 소녀의 외국인 같은 용모 때문에 직원들 누구 하나 선뜻 도우러 나서지 못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곳 직원들 중에 외국어 소통능력이 있는 사람은 없었고, 그로 인해 그들은 소녀를 접대해야 한다는 직업의식과 외국인 공포증 사이에서 줄곧 갈등해야만 했다.
그때였다. 고뇌하던 그들의 시야에 소녀에게 다가가는 한 청년의 모습이 비쳤다. 마치 소녀와 서로 맞춘 듯 똑같이 검은색 일색의 옷을 차려 입고 있었다.. 호감을 주는 인상이긴 해도 평범한 얼굴의 청년이었지만, 직원들에게는 그 뒤에 후광이 비쳐 보이는 듯 했다. 그리고 드디어 소녀 뒤에 다가선 그는 마침내 소녀에게 말을 건넸다.
“스이긴토? 여긴 어쩐 일이야?”
“흐꺄악?!”
한껏 기대하고 있던 직원들로선 맥이 빠지게도 그 입에서 나온 것은 평범한 자국어. 더 맥이 빠지는 것은 그들의 그동안의 갈등이 무색하게도 소녀가 분명 청년의 그 말을 알아들었다는 것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이상한 비명을 지르며 굳어버린 소녀. 그리고 그대로 딱딱거리는 고장난 톱니바퀴처럼 고개만을 돌려서 청년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화들짝 놀라고 만다.
“미, 미키야?! 여긴 어떻게…..?”
“소장님이 부탁한 물건을 사오는 길이었어. 그러는 너야말로 뭘 고르고 있었던 거야?”
미키야는 손에 든 쇼핑백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매장을 주욱 둘러본 그의 시선이 다시금 스이긴토에게로 향한다. 스이긴토는 애써 태연한 채 하려 했지만, 그녀의 하얀 얼굴은 부끄러움을 마저 감추지 못하고 발갛게 달아올랐다. 게다가 매장이라는 장소가 명확한 이상, 숨기는 것도 무의미할 터. 결국 단념하고 진실을 토로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너무나 쑥쓰러워 고개를 돌려 살짝 시선을 피한 채로 말을 꺼냈다.
“선물… 사주고 싶어서.”
“선물?”
“응… 아기에게.”
아직은 호의를 받는 것만큼이나 호의를 주는 것 역시 익숙하지 않은 소녀는 수줍게 고백했다. 그제야 알아들었다는 듯이 미키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마나에게 주는 선물이구나? 이거 고마운걸.”
코쿠토 미키야와 료우기 시키의 아기, 마나(末那). 아직은 시키의 뱃속에서 태어날 날만을 기다리는 여자아이의 이름이다.
후유키시에서 벌어진 최후의 앨리스게임이 끝난 후, 료우기 시키는 말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몇 달 후 홀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부푼 배를 안고 나타난 것이다.
나중에야 밝혀진 사실이지만, 앨리스게임 당시 이미 임신중이었다고 한다. 모습을 감추었던 것은 그로 인해 벌어진 료우기가의 후계문제를 일단락 짓기 위해서. 그리고 모두를 깜짝 놀래켜주기 위해서.
그로 인해 한동안은 큰일이었다. 다행히 시키의 추진력으로 료우기가쪽 문제는 해결된 모양이지만, 두 사람의 결혼문제라던가 아직 해결해야 할 것이 산더미였다. 특히 미키야의 여동생 아자카는 큰 충격을 받았다가, 최근에야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던가.
그리고 남아있는 문제에는 육아준비도 있었다. 아기를 키우기 위해서는 이것저것 필요한 물품이 많은 것이다.
“흥! 여고생을 임신시켜 미혼모로 만든 믿음직스럽지 못한 남자의 준비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으니까… 조금 보태주려는 것뿐이야!”
“그, 그런 말을 할 것 까진…”
솔직하지 못하고 새침 떠는 스이긴토의 대꾸에 미키야는 곤란한 웃음을 지었다. 오해를 부를 것 같은 말이지만 사실은 사실이니 반박할 수도 없다. 료우기 시키는 비록 성년의 나이지만 모종의 이유로 아직은 당당한 현역 여고생이니까. 게다가 결혼식은 시키의 졸업 이후 하기로 했기에 지금은 엄연한 미혼모다. 심지어 이번 임신 때문에 다시 휴학까지 해야 했기에, 지은 죄가 있는 미키야는 얌전히 매도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뭘 선물해주려 했던 거야?”
“딱히 정한 것은 없고… 그냥 고르던 중이었어.”
“그런 것치고는 뭔가 불만인 표정이었는데?”
“그냥… 색상이 마음에 드는 게 없어서.”
미키야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노란색, 분홍색, 파란색 등등… 유아에게 어울릴법한 다양한 색상의 아기옷들이 잔뜩 있었다.
“이렇게 여러 색이 많은데…..? 무슨 색을 찾길래 그래?”
“…검은색.”
입술을 깨물며 내뱉은 스이긴토의 말. 하지만 미키야는 순간 이해하지 못해 눈만 깜박였다. 답답하다는 듯이 스이긴토가 소리를 높였다.
“그러니까 검은색이라고! 다른 색은 다 있는데 검은 색만 없어. 이 매장은 왜 이리 물건이 빈약한 걸까?”
“잠깐만 스이긴토… 왜 굳이 검은색을 찾는 거야?”
“그야 당연히 검은색이 가장 예쁘잖아?”
미키야의 질문에 스이긴토는 도리어 무슨 그런 당연한 것을 물어보냐는 듯 반문했다. 미키야는 곤란함을 느끼며 머리를 긁적였다.
확실히 검은색은 그도 좋아하는 색이다. 무엇보다도 그가 지금 입고 있는 옷부터가 검은색이다. 스이긴토가 주로 입는 옷도 검은색이니, 당연히 그녀도 검은색을 좋아하리라 쉽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보통 아기에게 검은 옷을 입힐까? 대답은 ‘아니다’. 아기에게 입히는 옷은 정서함양 등의 이유로 주로 밝고 따스한 색상을 주로 쓴다. 특히 면역력이 약한 아기에게는 청결함이 요구되는데, 이물질이 묻어도 알기 어려운 검은색은 그런 의미에서 불합격이다.
태어날 때부터 검은 옷을 입어왔을 소녀에게, 아기로서의 삶을 겪어보지 않았을 그녀에게, 어떻게 그런 점을 기분이 상하지 않게 설명해야 할지… 미키야는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어느덧 서쪽으로 지고 있는 태양이 흩뿌리는 황금빛 노을을 받으며, 스이긴토와 미키야는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과거의 그녀를 아는 이들이라면 상당도 할 수 없는, 싱글벙글 웃는 얼굴을 하고 있는 스이긴토의 품 안에는 곱게 포장된 상자 하나가 들려있었다.
“그게 그렇게 마음에 들어?”
“응! 인간들도 제법 센스 있는걸. 이렇게 훌륭한 의상을 제작하다니!”
즉답에 이어 터져 나오는 찬사. 매장에서 그것을 발견한 이래 지칠 줄 모르고 계속되는 칭찬이다. 미키야로서는 그게 왜 그렇게 대단하게 평가 받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매장 안에서, 검은색이 아기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어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던 미키야에게는 참으로 무색하게도, 문제는 매우 간단히 해결되었다. 이리저리 매장을 살피던 스이긴토의 시야에 우연히 그것이 포착된 것이다.
그것은 겉보기에는 평범한 유아용 옷이었다. 아니, 좀 특이하긴 했다. 후드를 씌울 수 있는 구조로 된 그 옷은 동물캐릭터의 외양으로 꾸며져 있었으니까. 그런 형태의 옷 자체는 드문 게 아니다. 귀여운 동물을 디폴메한 디자인을 사랑스러운 아기에게 입히고 싶은 부모들은 많이 있으니까. 하지만 미키야가 보기에 그 옷의 캐릭터는 아무리 생각해도 우스꽝스럽게 생긴 ‘개’로 밖에 안 보였다.
그리고 시작된 스이긴토의 감탄사. 그야말로 호들갑을 떠는 수준이었다. 그 못생긴 개 캐릭터가 어째서 그렇게 그녀의 마음에 들었는지 미키야는 알 수 없었다. 점원으로부터 ‘동물탐정 킁킁’ 이라는 인형극의 주인공이라고 들었을 뿐.
“뭐어, 그래도 검은색보다는 나으니까.”
결국 그렇게 해서 그 인형옷은 지금 얌전히 포장되어 소중히 스이긴토의 손에 들려있는 것이다. 그 옷의 가치를 알지 못 하는 미키야에게는 차라리 지금 싱글벙글 웃고 있는 스이긴토의 드문 표정을 바라보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선물이었다.
그러다가 미키야는 문득 눈치챘다.
“어라? 스이긴토, 그새 또 키가 자란 거 같네?”
“아, 그런가? 흐음… 정말이잖아.”
미키야의 물음에 고개를 갸웃한 스이긴토는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서로간에 키를 비교해보더니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확실히 며칠 사이에 또 키가 자라있었다.
미키야는 보지 못했지만, 과거 로젠이 만들었던 스이긴토의 본래 육체는 고작 다른 자매들보다 약간 큰 정도였다. 아오자키 토우코에 의해 다시 태어난 지금의 육체는 평범한 사람처럼 자라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었지만, 정작 그 성장 정도는 미미했다. 토우코는 이를 육체의 형상이 혼에 얽매여있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후유키시에서 앨리스로 각성하여 최후의 싸움이 종료된 이래, 그녀의 성장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특히 근래에 들어서는 하루가 다르게 커지고 있다. 지금 와서는 평범한 10대 소녀라고 생각될 정도의 신장이다. 아무도 그녀가 본래 인간이 아닌 인형이었다고는 알아차릴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며칠 전까지만 해도 미키야의 가슴높이에 달했던 키는 이젠 어깨 높이로 자라 있었다. 미키야와는 겨우 머리 하나 차이밖에 나지 않게 된 것이다.
“토우코는 앨리스로 각성한 나의 소망이 반영되고 있는 것이라 했지만… 과연 어디까지 성장하는 걸까?”
“이러다가 훌쩍 거인이 되어 버릴지도?”
“그, 그런… 절대 그럴 리가 없잖아? 왜, 왜냐하면…”
장난기 있는 미소를 머금은 미키야의 놀림에 발끈하며 반론하려던 스이긴토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화악 붉어진 볼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미처 눈치채지 못한 듯, 미키야는 그저 스이긴토를 대견스럽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킥킥댔다.
“뭐, 뭐야? 그 웃음은?!”
“아니, 뭐랄까… 키가 커지고 싶다는 소망이라니. 귀엽다고 할까, 기특하다고 할까…”
명백하게 어른을 동경하는 어린아이를 바라보는 표정이다. 스이긴토의 몸이 분노로 바들바들 떨렸다. 애써 화를 참기 위해 아랫입술을 깨문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몸에 힘을 빼고는 미키야에게 다가선다. 찡그렸던 얼굴이 어느새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웃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우후훗~ 감히 나를 애 취급한다는 걸까…..? 그렇다면 이 몸이 어린애가 아니라는 것을, 미키야에게 확실히 깨닫게 해주어야겠는걸!”
스이긴토는 미키야의 팔을 와락 안았다. 그리고는 찰싹 달라붙으며 더욱 꼭 껴안았다. 한껏 부드러움이 느껴지는 여체와 진하게 풍겨오는 향기.
“자, 잠깐만?! 스이긴토!”
단순히 신장만 높아진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성숙한 조형이었던 스이긴토의 몸은, 자라나면서 여성스러움을 가득 머금게 되었다. 나올 곳은 나오고 들어갈 곳은 들어간 육체는 더욱 급격하고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게 되었다. 그 치명적인 매력은 어린 소녀 같은 얼굴과 어우러지며 배덕적인 유혹을 풍기게 되었다.
“흐응~ 이 몸의 어디가 어린애 같다는 걸까? 설마 이 부위는 아니겠지?”
그 중에서도 정점은 한껏 부풀어올라 자기자신을 주장하는 가슴. 그 부피감은 이미 시키나 아자카, 토우코조차 상대가 되지 않는다. 크기만이 아니라 그 모양과 탄력 그리고 부드러움은 이미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영역을 초월한 이상향에 도달해 있다. 과연 전설의 인형사가 꿈꾸던 지고이자 환상의 소녀, 앨리스다운 아름다움의 극치였다.
“잠깐만! 닿아! 닿는다니까 지금!”
그리고 미키야의 팔은 그 풍만한 두 언덕에 파묻혀 있었다. 완벽했던 곡선이 찌그러지면서, 역설적으로 더욱 매력을 가중시킨다. 피부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오직 두 장의 천. 얇디 얇은 원피스는 방해조차 되지 않는다. 패드 따윈 붙어있지 않은 어른스러운 브래지어는 오히려 두 언덕을 모아서 볼륨감을 증대시키고 있을 뿐이다.
“키가 커지는 건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거라고! 내 소망이 무엇인지 뻔히 알고 있는 주제에,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걸까?”
스이긴토는 더더욱 달라붙으며, 미키야에게 몸을 더욱더 비벼대려 했다. 하지만 그런 움직임은 그리 길게 가지 못 했다.
“스이긴토의 소망이라니… 키가 커지는 게 아니었어?”
당혹해 하는 미키야의 목소리. 그 때문에 흥이 깨져버렸다. 스이긴토는 어처구니가 없어, 움직임을 멈추고 미키야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진지 그 자체였다.
“자, 잠깐만!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그럼 아닌 거야? 스이긴토의 소망이라니… 뭘까?”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듯 반문하는 미키야의 태도에 스이긴토는 인상을 찡그리며 이마를 짚었다. 이건 한숨을 내쉴 수 밖에 없었다.
“후우~ 뭐, 됐어. 당신이라는 사람이 그런 남자라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미키야를 바라보며, 스이긴토는 눈을 살짝 치켜 뜨며 말했다. 노을빛을 받아서인지 그 얼굴이 살짝 상기되어 보인다.
“미키야. 한번만 말할 테니까 잘 들어. 내 소망은…”
스이긴토는 살짝 발돋움을 했다. 미키야도 살짝 몸을 숙여 응한다. 미키야의 귓가에 스이긴토의 붉은 입술이 가까워진다.
“지금의 내가 바라고 있는 소망은…”
스이긴토의 눈이 사르르 감긴다. 은색 속눈썹이 긴장한 듯 파르르 떨린다. 그리고 마침내 스이긴토는 미키야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건 비밀이야.”
당혹감에 동그랗게 눈을 뜨는 미키야. 스이긴토는 그의 귓가에 가져다 댔던 얼굴을 떼어냈다. 그러면서 실수인 듯 그녀의 도톰한 입술이 그의 볼을 살짝 스쳤다.
“에? 알려줄 것처럼 하더니, 갑자기 그건 뭐야?”
“우후훗~ 비밀은 여자를 아름답게 한다는 말도 있잖아? 게다가… 분명 미키야는 이미 알고 있을 테니까.”
아리송한 소리를 남기며, 스이긴토는 다시금 미키야에게 팔짱을 꼈다. 그러나 아까처럼 유혹하는 몸짓은 아니다. 그저 살포시 미키야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자아, 늦었잖아? 서두르자, 미키야.”
“아, 아아. 그래.”
갈 길을 재촉하는 스이긴토에게 이끌려, 두 사람은 다시 걸음을 옮긴다. 단단한 미키야의 몸을 느끼며, 스이긴토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다. 두 사람의 뒤로 석양빛을 받아 늘어난 그림자가 하나가 되어 뻗어있다.
‘내가 태어난 이래 줄곧 갈구해왔던 것… 그것은 오직 하나였어.'
완전한 몸도, 아버님에게 인정받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한 때 모두 수중에 넣었던 로자미스티카 역시 망설임 없이 다른 자매들을 살리는데 써버릴 수 있었다. 비록 마지막 하나의 로자미스티카는 아직 그녀의 몸 속에 남아있지만, 그것은 그저 지금은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그것 역시 내보내게 되리라.
'내가 진실로 원하던 것. 내가 바래온 단 하나의 소망.’
그것은 앨리스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앨리스 따위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에 불과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여러 방편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건 바로 너야, 미키야. 텅 비어있던 나의 가슴을 채워준 사람. 얼어붙어있던 나의 마음을 녹여준 사람.'
자신을 진정으로 아껴주는 존재. 그런 이와 함께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바래온 단 하나의 소망.
그러니까 그녀의 소망은 분명 이루어졌다.
‘하지만 나는 욕심쟁이인 것 같아. 더 바라는 것이 생겨버렸어.'
정말로 사소한 것들. 그와 함께 대등하게 거리를 거닐고 싶다던가, 어느 한쪽이 몸을 굽히거나 날지를 않아도 얼굴을 마주볼 수 있으면 한다던가.
시작은 그런 소박한 바램이었다. 하지만 그와 그의 연인, 료우기 시키와의 사이가 달달해짐에 따라, 스이긴토의 소망은 점점 많아졌다. 확대되기 시작했다.
‘나도 너와 입맞춤을 나누고 싶어. 서로 껴안고 싶어. 그리고 더 깊은 행위까지도…’
그때부터였다. 스이긴토가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것은. 부디 그의 옆에 있을 수 있는 ‘여자’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나날이 여성스러움이 더해가는 몸. 얼마 전에는 드디어 달마다 한번씩 찾아온다는 그날을 경험하게 되었다. 한때 만들어진 인형에 불과했던 그녀가 마침내 새 생명을 품을 수 있는 몸이 되었다는 증거였다. 그녀가 피와 살로 이루어진 육체로 다시 태어난 것에 가장 감격을 느낀 순간이었다.
‘문제는 이 남자의 완고함이네.’
스이긴토가 바라는 소망은 분명 일반적인 윤리관에서 벗어난 것이다. 이미 짝이 있는 이를 노리다니. 그러나 그 소망은 최소한 한 가지에서만큼은 자유로웠다.
미키야의 반려, 뱃속에 그의 아이를 잉태하고 있는 여성, 료우기 시키. 그녀는 스이긴토와 동류였다. 텅 비어있는 자신을 코쿠토 미키야라는 존재로 채우고 있다. 그의 존재야말로 살아가는 의미. 그가 없다면 살아갈 수조차 없다. 꿈 같은 지금의 나날을 알아버린 이상, 텅 빈 자신에게는 이미 돌아갈 수 없을 테니까.
그렇게 그에게 의지하고 있기에, 오히려 그녀들이 그에게 바라는 것은 소소하다. 그저 그가 있어서, 웃어주는 것만으로 행복을 느낀다. 그가 있어서, 걷고 있는 것만으로 기쁘다. 그와 같은 곳에 있는 것만으로 만족한다. 그것만으로도 그녀들은 그를 통해서, 스스로는 가질 수 없는 생의 실감을 찾을 수 있으니까.
그를 해하거나 데려가려고 하지만 않는다면, 그를 잃어버리지만 않는다면, 그녀들은 다른 누군가가 그녀들과 함께 그의 옆에 있는 것을 얼마든지 용인할 것이다. 그녀들이 그와 함께 하기만 한다면.
게다가 스이긴토 그녀는 본래 인간이 아닌 인형이었다. 인간들이 멋대로 만든 윤리관 따윈 알 바 아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하나뿐이다.
‘언젠가 반드시 나의 매력에 넘어오게 해주겠어. 각오해, 미키야!’
스이긴토의 소망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소망은 지금 현재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