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n
딩동댕동~
"그럼 오늘은 이것으로 끝마치겠어요."
"차려~ 경례~!"
"수고하셨습니다."
여느 때와 같이 종례가 끝나고 학생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 교실문을 나서려던 교사는 뒤돌아보더니 한 학생을 불렀다.
"사쿠라다군, 잠시 볼 수 있을까?"
"아, 네."
사쿠라다라고 불린 소년은 즉시 대답하고는 가방을 챙기던 손길을 멈추고 교사를 따라 나섰다. 검은 뿔테안경을 낀 약간 작은 키의 소년이었다. 걸어가는 동안 교복이 어색한지 연신 옷깃을 만지작거린다.
"자, 이쪽으로."
휴게실이란 팻말이 달린 문을 열고,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섰다. 휴게실이라고는 하지만 학교 구석에 있는데다가, 교무실과도 멀리 떨어져 있어 사용하는 교사들은 거의 없었다. 특히 지금 시간은 사람들 왕래가 거의 없는 곳이라 안은 비어있었다. 교사와 소년은 한가운데 놓인 쇼파에 서로 마주보고 앉았다.
"그래, 학교생활에 어려움은 없나요?"
"예, 별 다른 불편은 없습니다."
"새학년이 시작된 탓에 서로들 많이 어색할 거예요. 언제라도 고민되는 일이 있으면 찾아오도록 해요."
"예, 알겠습니다."
그 후로도 두 사람 사이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오고갔다. 주로 교사가 묻고 소년이 대답하는 식이었다. 한참 후에야 소년은 녹초가 된 얼굴로 휴게실을 빠져 나왔다.
'차라리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면 좋을 텐데. 이리저리 돌려 물으면 이 쪽도 피곤하단 말이야."
한숨을 쉬며 복도를 걸어가는 소년에게 한 소녀가 다가왔다.
"준, 지금 가는 거야?"
"아아. 토모에, 너는?"
"학급위원일 때문에 교무실에 볼 일이 있어서. 지금 막 집에 가려던 참이야."
옅은 갈색머리를 목 언저리에서 자른 단발의 제법 귀여운 얼굴의 소녀였다. 하지만 얼핏 병약하게 보일 정도로 하얀 얼굴과 차분한 표정은 성숙하고도 조용한 느낌을 주었다. 잠시 망설이듯 머뭇거리던 소녀는 입을 열었다.
"저기, 준. 괜찮다면 같이 가지 않을래?"
"상관없어. 잠깐 기다려. 가방 가지고 올 테니까."
소년의 대답에 소녀의 얼굴에 순간 밝은 표정이 스쳐갔지만, 몸을 돌린 소년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소녀는 그저 묵묵히 소년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하교시간보다 늦은 시각이라 그런지 거리에 다른 학생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한적한 길 위를 준과 토모에는 나란히 걸어갔다.
"저기, 준. 학교생활은 이제 익숙해졌어?"
"정말이지... 너까지 그 소리냐. 오늘만 해도 여러번이라고."
"미, 미안해...."
"별로, 아무렇지도 않아. 어차피 그런 애기 들을 각오는 했었으니까."
잠시간의 정적. 방금 전의 대화로 둘 다 어색해져 버린 듯 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의외로 소년이었다.
"뭐어... 몇 달을 휴학한 거니까 말야. 솔직히 아직은 적응하기 힘들어. 반 아이들 얼굴 보기도 어색하고."
"준....."
".....하지만, 하지만 말이야."
문득 걸음이 멈추었다. 소년은 고개를 돌려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년의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다.
"여러가지 일이 있었어.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움직이는 인형이라니, 보통 사람들은 평생 겪어보지 못 할 일이잖아?"
소년은 키득~ 하고 장난스런 웃음을 지었다.
"모든 것의 시작은 그 녀석과 만나고부터였지. 그 녀석, 여왕님처럼 도도하지만 무척이나 여린 녀석이야. 그런데도 녀석은 싸워왔어. 그 작은 몸으로, 오랜 시간 동안 계속 싸워왔지."
소년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회상에 젖은 듯 아득한 시선이다.
"덕분에 깨달았어. 내가 얼마나 한심한 놈이었는지."
"틀려, 준은....!!"
"아니야, 토모에. 과거를 부정할 생각은 없어. 다만..... 결심했어. 그 녀석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싸우겠다고. 그러니 이제부터는 도망치지 않을 꺼야. 그러니까..... 괜찮아."
"준....."
토모에는 놀란 눈으로 준을 바라보았다. 세상과의 문을 닫아걸고 스스로에게 침전하던 소년은 어느새 과거의 밝은 웃음을 되찾은 모습이었다.
"아, 그러고보니 딸기 찹쌀떡이나 사갈까나."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준은 길가의 찹쌀떡 가게로 걸어갔다.
찹쌀떡 봉지를 들고 가게를 나왔다. 잠깐 사이에 거리는 저녁 노을로 붉게 물들어 있다. 석양을 등 뒤로 받으며 우리들은 걸음을 재촉했다.
"저기, 히나이치고는 잘 지내?"
"아아. 변함없이 단 걸 좋아해. 이 것도 아침에 나가는데 계속 사달라고 떼를 쓰더라고."
사실 그 정도가 아니다. 거의 징징대는 수준이었지만. 역시 꼬맹이다. 토모에가 걱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내 대답에 토모에는 푸훗~하고 숨죽여 웃는다.
"후후.. 히나는 준을 정말로 좋아하나 보네."
"끄응.... 단순한 놀이상대일 뿐이야."
정말이다. 가뜩이나 인형들로 북적이는데, 더 이상의 소란은 질색이다.
"그럼 난 이마 들어갈게. 내일 봐."
"그래, 안녕~"
토모에와 헤어지고 홀로 거리를 걷는다. 문득 생각해본다. 예전의 나라면, 이전의 나라면 이렇게 혼자 당당히 거리를 걷지 못 했을 것이다. 모자를 눌러써서 얼굴을 가리고, 행여 누가 알아볼까봐 사람들을 피해 다니겠지.
그런 내가 변하게 된 계기. 그것은 그 녀석과 만나게 되면서부터였다. 비록 '하인' 이라 부르며 이런 저런 잔소리를 늘어놓지만, 그래서 듣기 싫었을 때도 있지만.....
그 녀석의 말 하나 하나에는 나에 대한 배려와 염려가 담겨있었다. 내가 올바르게 걸어가도록, 때론 엄하게 때론 자상하게 나를 이끌어주었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어렸을 때부터 항상 옆에 있어주었던, 바보 같지만 나를 사랑하는 누나. 퉁명스러운 내 태도에도 불구하고 나를 걱정해주던 토모에.
그리고 비록 사람은 아니지만 함께 있어준 인형들. 투정 부리지만 웃음이 많은 히나이치고. 말투는 험악하지만 사실은 부끄럼쟁이인 스이세이세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에게 그것을 깨닫게 해주었던 나의 자그마한 장미 아가씨, 신쿠.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집에 도착했다.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다녀왔습니다."
"와아~ 준이다~~!!"
히나이치고가 환호를 지르며 달려왔다. 그런 그녀에게 들고 온 봉지를 내밀었다.
"자, 선물이야.":
"부드러운 거다! 와아~ 고마워, 준!"
쪼옥~ 하고 내 볼에 입을 맞추고는 그대로 봉지를 들고 거실로 달려간다. 크흠, 그래봤자 인형이라고. 인형의 입술 따위에 빨개질 리가 없잖아.
신발을 벗고 거실로 따라 들어가려고 막 발을 내딛었을 때였다.
"어서 와, 준."
귓가에 들리는 부드러운 목소리. 그녀는 예의 붉은 드레스를 차려입고는 문 앞에 서 있었다. 입가에는 살짝 미소를 띄우고, 보석과도 같은 푸른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녀는 말했다. 싸운다는 것은 살아간다는 것이라고. 앞으로 내가 가는 길에 어떤 어려움이 닥칠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제 두 번 다시는 도망치지 않아. 어떤 어려움이라도, 어떤 시련이라도 싸워 나가겠다. 그것이야말로 살아간다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그녀와 함께 언제까지라도. 계속 그녀와 함께 싸워나가겠다고, 계속 함께 살아가겠다고.
"돌아왔어."
나는 그녀의 미디엄이니까.
낡은 가옥의 정원. 노부부는 정원의 마루에 앉아 다도를 즐기고 있었다. 두 노인의 얼굴에는 세월의 흐름이 배인 인자함과 여유로움이 가득하다. 잘 가꾼 뜰은 노을로 붉게 물들어 아름답게 채색되어있다.
"크앗~! 이 꼬맹이가!! 바닥에다가 그림 그리지 말란 말야!!"
"우아아앙~ 신쿠. 준이 무서워."
"시끄럽네. 내 하인들이라면 좀 더 품위를 유지해주지 않겠어?"
"누가 하인이냐!"
챙그랑~
"크아아악, 이 짝눈인형! 또 창문을 깨는거냐! 올려면 현관으로 들어오라고~!!"
"시끄러워입니다, 꼬마인간. 이 몸이 행차한 것만으로 황송한 줄 알아라예요!"
"이.... 이 녀석들.... 당장 나가아아아앗~~!!!!"
노부부는 조용히 차를 들었다.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있다.
"홀홀홀.... 오늘도 사쿠라다댁 아이들은 활기차네요."
"젊다는 건 좋은 게지...."
세월은 사람을 느긋하게 만드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