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hlachtfeld
숨이 막힐 듯 무거운 공기가 거실을 짓눌렀다. 마치 진공 속에 있는 것 같은 답답함 속에서 신쿠는 가까스로 자신을 바로 잡았다. 하지만 목소리가 떨리는 것만은 어찌할 수 없었다.
“너는..... 너는 불타버렸을 텐데......”
“그런 건 중요하지 않잖아? 중요한 것은 내가 여기 있다는 것. 그리고 앨리스 게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야.”
스이긴토는 신쿠의 말을 끊으며 틀린 점을 친절히 지적해주었다. 앨리스 게임의 승부는 상대방의 로자 미스티카를 자신의 것으로 함으로써 결정된다. 그러나 신쿠는 스이긴토의 로자 미스티카를 뺏지 않았다. 따라서 스이긴토는 앨리스 게임에서 패배하지 않았으며, 신쿠와 스이긴토의 싸움은 지금도 계속되는 중인 것이다.
“한 번 시작된 게임은 엔딩을 보지 않으면 안 돼. 승패는 마지막에야 결정되는 거야. 그러니까....”
스이긴토는 신쿠에게 우아한 동작으로 손을 내밀었다. 정중한 초대의 예우.
“어서 와, 신쿠. 다시 한 번 우리들의 전장에.”
“신쿠.....”
히나이치고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눈 앞의 소녀를 불렀다.
“히나이치고!”
“으, 으응!!”
“너는 이 곳에 있도록 해. 준이 오기를 기다려.”
“에에? 하지만 혼자서는....”
우물거리는 소녀를 뒤돌아보는 신쿠. 이미 그 눈동자에 흔들림은 없다. 그 곳에 담겨 있는 것은 강인한 의지.
“걱정하지마. 저녁식사 전에는 돌아올 테니까.”
아직 어리기만한 자신의 자매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각오를 다지기 위해서 신쿠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검은 날개의 소녀와 붉은 장미의 소녀는 태어날 때부터 약속된 숙명의 싸움을 위해 다시금 그녀들의 전장으로 향했다.
9초전의 백(白). 현실세계와 연결되는 ‘N의 필드’의 입구. 아직 세계의 문으로 들어서기 전의 그 곳은 본래대로라면 아무도 없는 순백의 공간. 그러나 지금 그 곳에서 격렬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신쿠의 조그마한 주먹이 스이긴토를 향해 내질러졌다. 얼핏 보기에는 그저 솜방망이 같이 무해할 듯한 공격. 하지만 스이긴토는 황급히 날개를 펼쳐 자신의 몸을 감쌌다.
퍼어어억!!!
엄청난 폭음과 함께 터지는 강타! 날개의 저릿한 감각과 함께 스이긴토는 뒤로 튕겨졌다.
“여전히 무식한 주먹이구나, 신쿠. 숙녀에게는 어울리지 않잖아?”
“천만에. 무례한 상대에게는 예의를 가르치는 것도 숙녀의 소양인걸.”
“그래..... 이런 식으로 말이지?”
순간적으로 스이긴토의 날개에서 검은 깃털이 폭사되었다. 미리 예상한 듯 장미꽃잎들을 둥글게 펼쳐서 막아내는 신쿠. 그러나 스이긴토는 깃털들 뒤의 사각을 통해 이미 신쿠의 바로 앞까지 이동해 있었다. 방어한 후 생기는 작은 틈을 노리고 스이긴토의 날개가 덮쳐갔다.
“홀리에!”
하지만 간발의 차이로 자신의 인공정령을 부르는데 성공한 신쿠. 홀리에의 공격에 스이긴토는 뒤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그 뒤를 장미꽃잎들이 모인 로즈테일(Rose tail)이 쫓았다.
“제법 요령이 늘었잖아? 하지만.....약해!”
크게 펼쳐진 날개에서 일어난 광풍은 꽃잎들을 산산이 흩어버렸다.
“역시, 저 번의 그 것은 미디엄의 힘이었구나. 이래서야 시시하잖아? 좀 더 재미있게 놀아주지 않을래?”
“착각하지마, 스이긴토. 너 정도는 준이 없어도 쓰러뜨릴 수 있으니까.”
“우후훗~ 그럼 나를 더 즐겁게 해줘야 할거야. 메이메이!”
스이긴토의 외침과 함께 그녀의 인공정령 메이메이가 보랏빛 광채를 내뿜으며 신쿠에게 날아들었다. 그에 호응하여 홀리에 또한 이전보다 붉은 빛을 발산하며 부딪혀갔다. 마치 한여름밤의 불꽃놀이를 보는 듯. 치열한 싸움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빛을 내며 두 인공정령이 격돌했다.
그 아래로 다시 한 번 스이긴토와 신쿠가 서로에게 돌진했다. 신쿠의 손에 감긴 붉은 꽃잎이 채찍처럼 늘어나며 스이긴토를 노렸다. 그러나 스이긴토는 한쪽 날개로 막아내며, 다른 쪽 날개로 신쿠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이 모든 것은 둘이 스쳐 지나간 찰나에 벌어진 일. 둘은 아까와는 반대의 위치에서 서로를 마주보았다.
“걸려들었구나, 신쿠.”
“??!!”
그동안 스이긴토가 날린 깃털들. 신쿠의 주위 하얀 공간에 남아있던 깃털들이 갑작스레 움직여서 그녀를 덮쳤다. 순식간에 진홍의 소녀는 검은 색으로 뒤덮여 버렸다.
“아하하~ 조금은 볼만하게 되었는걸. 새까매서 굉장히 아름다워.”
“크읏, 깃털들을 날린 것은 모두 이 것을 위해서?”
“어머? 별로 그럴 생각은 없었어. 그저 네가 멍청해서 걸려든 것 뿐이니까. 여전히 바보구나, 신쿠.”
깃털들 사이로 얼굴만 내민 채 신쿠는 스이긴토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스이긴토는 매서운 눈빛에도 굴하지 않고, 손을 들어 신쿠의 볼을 쓰다듬었다. 매끄러운 볼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쓰다듬으며 밑으로 내려가다가 신쿠의 턱을 움켜잡아 치켜들었다.
“자아.... 어떻게 해주길 바라니, 신쿠? 저번처럼 한쪽 팔을 뽑아줄까? 아니면 내가 당했던 것처럼 불에 태워줄까?”
얼굴을 바싹 들이대고 위협하는 스이긴토에게도 굴하지 않고, 신쿠는 아무 말 없이 굳건한 눈으로 그녀를 마주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스이긴토는 한 쪽 손을 그녀의 눈가로 가져갔다.
“하아? 아직까지 입장을 파악하지 못 한 거야? 보기 거슬리잖아, 이런 눈초리. 그래, 이건 어때? 두 눈을 뽑아줄게. 파란색 구슬로 만들어 버리는 거야. 꿰어서 목걸이를 만들면 예쁘겠지?”
천천히 스이긴토의 가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는 신쿠의 눈을 덮어갔다. 반사작용만은 어쩔 수 없었는지 신쿠의 두 눈이 질끈 감겼다. 하지만 느껴진 것은 구속되었던 몸의 해방감이었다. 의아해진 그녀는 눈꺼풀을 살며시 들어올렸다.
“스이긴토, 어째서.....?”
“시시해, 재미없어. 이래서야 로자 미스티카를 빼앗아도 의미가 없잖아?”
스이긴토는 뒤돌아선 채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음에는 좀 더 나를 즐겁게 해줘야해. 그 미디엄도 함께 말이야.”
날개를 펼치고 떠나가는 스이긴토.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신쿠는 당혹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딘지 모르게 달라진 그녀의 태도에 의문을 품은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