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e miteinander
잔잔한 수면 위에 파문이 일듯, 거울 표면이 물결치기 시작했다. 이윽고 터져 나오는 환한 빛과 함께 소녀는 모습을 드러냈다. 천천히 소녀의 두 발이 땅을 내딛었다.
“다녀왔어.”
“어서 와. 홍차 한 잔?”
가람의 당의 오너, 아오자키 토우코는 미리 끓여둔 홍차를 잔에 따라 내밀었다. 사양하지 않고 스이긴토는 호의를 받아들였다.
“흐음. 싸움 뒤의 홍차라. 좀 이상하긴 하지만 나쁘지는 않은걸.”
“사무실에 다른 음료는 없어서 말이야. 그보다 어땠지? 새로운 몸은 쓸만하던가?”
안경 너머로 눈을 빛내며 토우코가 물었다. 하기야 인형사인 그녀에게 있어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야말로, 이렇게 도착하자마자 호의를 베푸는 이유일 것이다.“
“아아. 쓸만한 정도가 아니야. 힘의 순환, 방출, 안정성. 어느 것 하나 부족하지 않아. 아버님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는걸. 설마하니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전설 속의 인형사 로젠과 비교될 줄이야. 인형을 만드는 입장에서 상당히 뿌듯한걸.”
“자부심을 가져도 좋아. 토우코는 분명히 ‘마에스트로’의 칭호를 지닐 자격이 되니까.”
전설 속의 인형사 로젠. 인형사들에게 있어 거의 마법사에 준하는 경외의 대상이 되는 존재. 그가 직접 만든 인형에게 그와 동등한 수준으로 인정받았다는 것에 대해 내심 기쁜지 토우코는 자신도 모르게 빙긋 웃음 짓고 있었다. 그녀의 지인들이 그 모습을 보았다면 결코 토우코 본인이라고 믿지 못했을 것이다. 차라리 그녀가 만든, 그녀와 똑같은 얼굴을 한 웃는 표정의 인형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물론 반쯤은 진실이기도 하지만.
“그럼 상대측은 어땠나?”
“확실히 이전보다 강해졌어. 미디엄이 각성한 영향이겠지. 하지만 결국 겨우 그 정도일 뿐이야. 미디엄의 직접적인 힘의 공급이 없는 한, 결코 나의 상대는 되지 못해.”
“흐음, 그런가. 그렇다면 왜 이번에 끝을 보지 않았지? 다음에 그 미디엄이 함께 있으면 곤란하잖아?”
“바라는 바야. 그때는 정말로 끝을 내주지. 이전의 원한도 갚아야 하니까 말이야.”
단호하게 말하는 스이긴토. 토우코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슬쩍 미끼를 던져보았다.
“그렇다면 그 때는 미키야도 함께인 건가.”
작은 소리로 스치듯 꺼낸 말. 그 말에 스이긴토는 정색한 채 토우코를 바라보았다.
“무슨 의미야?”
“그 로젠메이든 제5돌이 미디엄과 함께 싸운다면, 너 혼자서는 무리잖아?”
“.......”
“비록 미키야가 훌륭한 미디엄은 아니지만, 없는 것 보다는 낫겠지. 안 그래?”
“.....혼자서도 충분해. 굳이 미키야의 도움은 필요 없어.”
주먹을 꼬옥 쥐고는 고개를 돌린 채로 답하는 스이긴토. 하지만 방금 전까지와는 달리 시선을 피하는 두 눈과 자신이 없는 듯 한 목소리는 설득력을 낮게 만들었다.
“설마 아직까지 이야기하지 않은 거야? 앨리스게임에 대해서.”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던 것 뿐이야.”
더욱 더 작아진 목소리. 토우코는 안경을 벗어 닦으며, 사람 좋은 얼굴의 부하직원을 떠올렸다.
‘료우기, 후죠우, 아사가미, 시라즈미.... 이제는 스이긴토인가. 역시 예상대로군.’
안경을 다시 쓰며, 토우코는 짐짓 밝게 말했다.
“뭐, 그 이야기는 됐어. 일단 미키야가 돌아올 때까지 시간이나 때워볼까?”
“다녀왔습니다~”
달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검은 옷을 입은 청년이 들어왔다. 그의 이름은 코쿠토 미키야. 두 아가씨(?)를 여태까지 기다리게 한 도저히 신사라고 할 수 없는 인물이다.
“어서와, 미키야.”
“어? 스이긴토도 와 있었던 거야?”
“응. 시키도 아자카도 모두 어디 가버려서 말이야. 토우코와 놀러왔어.”
어떻게 토우코씨 같이 무뚝뚝한 사람과 놀 생각을 다 했을까-라는 사소한 의문이 문득 떠올랐지만, 그래도 순진한 청년 미키야는 스이긴토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주었다.
“슬슬 저녁시간인데, 토우코씨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난 여기서 해결하겠어. 처리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았거든.”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스이긴토, 가자.”
“응!”
손을 내미는 미키야와 기쁜 듯이 그 손을 마주 잡는 스이긴토. 키 차이가 상당히 나는 둘이기에 뒷모습만 보면 마치 아빠 손을 잡고 따라나서는 딸아이 같다. 그렇게 언밸런스한 한 쌍이 떠난 사무실에서 토우코는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아직 저쪽의 움직임은 없는 건가. 뭐, 상관없어. 변수를 고려해도 충분히 예상오차범위 안이야.’
벗어두었던 안경을 다시 쓰는 토우코의 입가에 작은 웃음이 걸렷다.
“자아, 그럼 슬슬 다음 단계로 넘어가볼까.”
창문을 통해 비치는 석양이 마술사의 몸을 붉게 물들였다. 마치 그녀의 칭호처럼.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소녀의 자그마한 손. 그 감촉은 아기처럼 부드럽지만, 가늘고 긴 손가락은 소녀의 성숙함을 보여준다. 가녀린 그 손을 행여 부서질라 조심스레 잡고서 걸어가는 미키야. 무척 다정한 모습이다. 하지만.....
수군수군
“어머, 저 것 좀 봐요.”
“저 총각, 그렇게 안 봤는데.....”
“저래서 사람은 겉만 보고는 모른다니까요.”
거리를 지날 때마다 사람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이쪽을 바라본다. 힐끔거리는 눈빛들. 수근대는 소리. 행여 고개를 그 쪽으로 돌리면, 화들짝 놀라며 다시 자신들의 일에 전념한다.
‘아....하하....’
아무 말도 못 하고 미키야는 속으로 난처한 웃음을 흘렸다. 입가를 경련하며, 자신을 붙잡고 옆에서 걸어가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마치 은으로 뽑아낸 듯 눈부신 머리카락. 그 머리를 감싼 검은색 헤드드레스. 새하얗게 빛나는 피부. 그 몸을 감싼 것은 고풍스러운 검은색 고딕드레스. 흑백의 강력한 대조가 소녀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가슴의 장미장식. 소매의 풍성한 프릴. 곳곳에 달려있는 귀여우면서도 우아한 리본들. 품이 넓지만 딱 맞춰 만들어진 옷은 소녀의 가녀린 몸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허리밖에 오지 않는 작은 키.
완벽한 고스로리의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옆에서 그런 소녀를 데리고 걷고 있는 자신은 무엇이 되는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 미키야였지만, 차마 대답을 하기 두려운 듯 황급히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냈다.
“왜 그러는 거야, 미키야?”
그 모습이 이상했던지, 스이긴토는 고개를 들어 미키야를 바라보았다. 빼꼼이 올려다보는 자그마한 얼굴. 방금 전에 떠올렸던 생각이 다시 떠오른 미키야는 당황하며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아, 저기. 스이긴토는 저녁으로 뭐 먹고 싶어?”
“하아? 말했잖아. 나에게 음식섭취 같은 건 필요 없다고. 설마 또 잊어버린 거야?”
“그, 그런가? 그럼 요구르트라도 사가지고 갈까?”
“정말? 우후훗~ 좋아. 이번에는 무엇을 먹어볼까~”
스이긴토는 기쁜 마음을 숨기지 않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미키야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결국 역효과. 사람들의 눈초리만 더욱 이상해지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심해질 뿐이었다. 미키야의 뒤통수에 커다란 땀방울이 맺혔다.
‘우웃~ 실수였어. 이런 옷차림의 스이긴토를 데리고 나와 버리다니. 가만, 옷이라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은 미키야는 서둘러 스이긴토에게 말했다.
“저기 스이긴토. 내일 옷이나 사러가지 않을래?”
“옷이라니?”
“스이긴토의 옷은 그 것 하나뿐이잖아? 다른 옷이 더 필요하지 않아?”
“이 옷은 아버님이 직접 만들어 주신거야. 비록 토우코가 다시 형태를 만들어주긴 하지만, 이 옷은 나의 영격(靈格)의 일부. 우리들 로젠메이든에게 있어 아버님이 만들어주신 옷은 우리의 일부나 마찬가지야. 다른 옷을 입을 생각은 없어.”
의외로 정색하는 스이긴토. 강력한 방어였다. 하지만 미키야는 포기하지 않았다. 더 이상 억울한 오해를 받는 일은 없어야 했기에.
“하지만 때로는 빨래도 해야 하잖아. 지난 번처럼 요구르트를 흘리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아버님이 만들어 주신 소중한 옷이니까 더욱 아껴야지.”
“으음....확실히 그건 그래. 하지만 나, 다 다른 옷은 입어본 적이 없는걸.”
“맡겨줘. 스이긴토에게 어울리는 예쁜 옷을 골라 줄 테니까.”
자신하는 미키야. 시도가 성공했음이 기쁜지 한껏 웃음 짓는 얼굴이다.
하지만 그는 알까?
아무리 보아도 지금의 대화는 데이트 신청이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