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zen
부아아앙~
검은색 자동차가 새벽 안개를 뚫고 달려간다. 이른 시각인지라 도로 위에 다른 차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거칠 것 없이 달려가는 그 앞을 가로막는 것은 오직 어둠뿐. 해가 떠오를 때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만이라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는 듯 어둠은 차 앞을 덮친다. 그러나 그조차 자동차 헤드라이트 빛에 밀려 속절없이 사라져갈 뿐이다.
정적 속. 들리는 것은 오직 차 옆을 스쳐가는 바람소리뿐. 그 속에서 소녀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미키야. 정말..... 아버님은 만날 수 있을까?”
운전하고 있던 미키야는 고개를 돌려 스이긴토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가는 속눈썹은 파르르 떨리고 있다. 그 아래서 일렁이는 적보라빛 눈동자와 더불어.
두려움과 걱정. 동시에 기쁨과 기대가 섞인 눈.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며 미키야는 자신의 의견을 솔직히 말했다.
“나도 확신할 수는 없어. 그가, 너의 아버지 로젠이 그 곳에 있을지. 혹은 설령 있더라도 만나주려 할지는 말이야.”
실망하는 기색이 보이는 스이긴토를 보고, 미키야는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지금 가려는 곳이 로젠과 관계 있는 곳이라는 것만큼은 틀림없어. 최소한 행방을 알 수 있는 단서는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럴까?”
희망이 담긴 목소리. 그에 응하여 미키야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물론이야. 아까 이야기했지? 구체관절인형의 탄생에 대해서.”
“응.”
“너희 로젠메이든은 구체관절인형임에도 불구하고, 구체관절인형이 탄생하기 전부터 존재했어. 나는 이것에 의문을 품고 조사했지. 그 결과 놀라운 사실을 알 수 있었어.”
그 것을 알아냈을 때 얼마나 환희 했던가. 그 때의 감격을 상기하며, 미키야는 말을 이었다.
“구체관절인형의 시조, 한스 벨머. 조사한 바에 따르면 슬럼프에 빠져있던 그는 휴양차 독일의 한 고성을 방문했다 돌아온 후, 미친 듯이 작품에 탐닉했다고 해. 그렇게 해서 현대 구체관절인형의 원형이 되는 그의 작품군이 탄생하게 되지.”
“고성....?”
“그래. 그리고 현대적인 개념의 구체관절인형을 만든 요츠야 시몬 역시 마찬가지야. 우리들이 지금 가려는 곳, 그 성은 일본의 성 양식이 아니야. 중세서양의 양식을 따르고 있지. 요츠야 시몬은 그 곳을 방문했다가 돌아온 후, 구체관절인형을 만들어내게 돼.”
“하지만.... 우연일 수도 있잖아?”
“그래, 맞아. 우연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말이야. 독일과 일본. 서로 다른 나라에 있는 두 성은 모두 동일가문의 소유였어.”
“그런.... 설마!”
“그래. 우연 같은 것이 아니야.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것은 지금 가고 있는 곳의 홀 천정에 있던 문양이야. 이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어. 너의 가방에 있는 것과 동일한 로젠메이든의 문장을!”
“그렇네..... 그 것 이상으로 확실한 증거는 없어.”
안도의 한숨을 쉬며, 스이긴토는 의자에 고개를 기댔다. 그 모습을 보며 미키야는 난처하게 웃었다.
“아하하~ 사실은 로젠 본인을 직접 데려와서, 스이긴토를 깜짝 놀라게 하려 했는데 무리더라고. 불러도 안에서 대답은 없지, 며칠이 지나도 사람 출입은 없지, 정문 외의 곳으로 들어가볼까 해서 설계도를 입수했는데도 비밀통로 같은 곳 있지도 않고, 문은 분명 자물쇠를 땄는데도 안 열리지, 창문은 유리 자르는 칼로 그었는데도 흠집도 안 나지.... 아마도 마술 때문인 것 같아. 마술사가 아닌 나로서는 여기까지가 한계였어. 그러니까 이 다음부터는 스이긴토의 몫. 미안해, 이렇게 밖에 못 해주어서.”
미키야의 사과에 스이긴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은빛 머리카락이 찰랑인다.
“으응, 아니야. 이것만으로도 고마워. 나, 전혀 기대도 하지 않았으니까. 아버님에 대한 것은..... 그러니까 지금도 충분히 기뻐.”
미키야를 보며 살며시 미소 지어준 스이긴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버님, 부디 그 곳에 있어 주세요. 당신의 딸이 지금 당신을 만나기 위해 가고 있으니까요.’
오늘도 기회를 보아 집을 빠져 나왔다. 나로서는 집 안에 감도는 무거운 분위기를 견딜 수 없었으니까.
“후우~”
목적지도 없이 그저 거리를 걷던 나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온다. 가슴 속의 답답함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저 가만히 왼 손을 들어올릴 뿐.
“.....”
아무 말 없이 손을 바라본다. 그 손가락에 끼어있는 것은 장미의 반지. 로젠메이든과의 계약의 증표. 그러나 며칠 전과는 생긴 것이 전혀 다르다. 무식할 정도로 커진 반지의 모습.
그 날, 스이세이세키는 반광란 상태였다. 끊임없이 울며, 소우세이세키의 이름을 불러댈 뿐. 결국 신쿠가 강제로 잠재울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스이세이세키와 계약했다. 반지가 커진 것은 그 때문이다.
사라진 것은 소우세이세키 하나. 하지만 느껴지는 빈 자리는 그 이상이었다. 집 안에는 아무도 없는 듯 정적만이 맴돌고 있으니까.
항상 깔보는 말투의 시끄러운 스이세이세는 그 날 이후로 말을 잃어버렸다.
신쿠는 본래 필요한 말 밖에 하지 않는 성격이었지만 그 날 이후로 더욱 말이 줄었다.
히나이치고마저 침울한 분위기에 덩달아 입을 닫아버렸다.
나와 누나가 애써 주위를 환기시키려 했지만 무리였다. 맛있는 요리도, 재미있는 TV프로도, 웃기는 농담도 분위기를 띄울 수 없었다. 모두 소용없는 짓이었다.
만약에..... 만약에 내가 진작 스이세이세키와 계약했더라면, 이런 일을 막을 수 있었을까?
신쿠는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지만, 죄책감은 지울 수 없다. 최소한 최악의 사태는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후회가 밀려오기 때문이다.
“젠장..... 젠장젠장젠장!”
도대체 뭐야, 그 녀석은. 로젠메이든은 모두 일곱 아니었나? 어디서 8번째가 튀어나온 거냐!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대체 뭐냐, 그 로젠이란 자식은. 이런 싸움에, 자매들끼리 서로를 죽여야만 하는 싸움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거냐!
툭!
“핫, 죄송합니다.”
너무 생각에 잠긴 나머지, 앞에서 걸어오는 사람을 보지 못 하고 부딪히고 말았다. 서둘러 고개를 숙여 사과하는 나에게 그 사람이 말을 걸었다.
“아니, 괜찮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사쿠라다 준.”
“에....? 저기, 어떻게 제 이름을.....?”
의아한 마음에 시선을 올려 눈 앞의 사람을 바라보았다. 무척 아름다운 여성이다. 나이는 20대 정도일가. 안경을 쓴 정장차림이 마치 어딘가의 OL처럼 보인다. 단발로 자른 머리카락은 염색이라도 했는지 파란 색이다.
하지만 이상하다. 이렇게 뚜렷한 존재감을 가진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기억에 없다. 어떻게 나를 알고 있는 거지? 마치 나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그 사람이 말했다.
“그렇게 고민할 필요 없어. 우리는 이 번이 초면이니까. 나는 전에 먼 발치에서 한 번 사쿠라다군을 본 적이 있지만.”
“저.... 실례지만 누구시죠?”
나의 질문에 그 여성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도톰한 붉은 입술을 열어 말을 꺼냈다.
“로젠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나?”
“아직 멀었어?”
“글세. 얼마 남지 않았을 거야.”
깊은 숲 속. 주변을 둘러보아도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오직 빼곡히 들어찬 나무들뿐. 성은 커녕, 집 한 채도 보이지 않는다. 국도 옆에 차를 세우고 이 곳에 들어온지 벌써 3시간 째. 그저 걸은 것 뿐이지만, 슬슬 다리가 아파올 정도의 시간이다. 특히 작은 키의 스이긴토는 그만큼 보폭도 좁기에, 같은 거리를 걸어도 미키야보다 더욱 힘들었다. 미키야가 그녀에게 맞추어 같이 걸었지만 역부족. 결국 지금 그녀는 그의 품에 안긴 상태였다. 미키야가 그녀를 안아든 것이다.
“현대에도 이 정도 숲이 있을 줄이야. 수해(樹海)라고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네.”
“아무래도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니까 무리도 아니지. 아, 다 왔다.”
그들이 향하는 앞에 드디어 나무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텅 빈 그 곳으로 아침햇살이 쏟아져 들어온다. 그 눈부신 빛에 눈을 찌푸리며, 둘은 나무 사이로 빠져 나왔다.
“이 곳은.....”
울창한 숲 한 가운데 이런 곳이 있을 줄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빛이 익숙해지자 시야에 들어온 것은 고풍스런 중세 고성의 모습이었다.
“여기가 바로 목적지야.”
“.....내려줘, 미키야.”
한참 성을 바라보던 스이긴토는 미키야에게 부탁했다. 미키야는 조심스레 그녀를 땅에 내려놓았다. 스이긴토의 발이 푹신한 잔디 위를 밟았다. 하지만 한 손은 미키야의 손을 꼬옥 잡은 채였다. 긴장한 듯, 그녀의 손바닥에서 땀이 배어 나온다.
천천히 그들은 눈 앞의 성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은 문 앞에 설 수 있었다. 스이긴토의 다른 한 손이 조심스레 문의 손잡이를 쓰다듬는다.
“이 기운... 친근해. 그래, 이 것은 우리들 로젠메이든의 느낌. 그리고 아버님의 느낌.”
우웅~
성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결계가 마치 그녀와 공명하듯 떨리며 울음을 토했다. 곧이어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저절로 문이 열린다.
또각또각!
미키야도 스이긴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대리석 바닥을 걷는 스이긴토의 구두 소리만이 넓은 홀 안에 울려 퍼질 뿐. 이윽고 스이긴토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홀 한가운데, 그 곳에서 그녀는 고개를 들어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저 것이구나. 미키야가 말한 것이.”
“응, 그래.”
스이긴토의 목소리에는 그녀 자신도 알 수 없는 벅찬 감정이 배어있었다.
찬란한 금십자가. 그 곳에 피어난 한 송이 장미꽃.
로젠의 문장. 로젠메이든의 문장이었다.
“전설 속의 인형사, 로젠. 그는 모든 것이 베일에 가려진 인물이야. 출신, 국적, 나이, 성별..... 그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지. 심지어는 실존인물인지조차도!”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난데없는 여성의 말에 몸이 굳어버렸다. 어쩌면 다른 로젠메이든의 마스터, 적일지도 모른다. 이미 소우세이세키를 잃었지 않은가. 더 이상 소중한 것을 빼앗길 수는 없다. 긴장으로 침이 꼴깍 넘어갔다.
“그는 앨리스를 찾고 있다고 해. 아주 오랫동안.....”
또각또각!
눈 앞의 여성이 다가왔다. 나는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뒷걸음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어느새 주변에 인적이란 사라져 있다는 사실을. 사람으로 붐비던 거리는 텅 비어있었다. 마치 자신과 정체불명의 여성, 둘만이 다른 세계에 들어온 듯.
“앨리스. 그 것은 어떤 꽃보다도 기품 있고, 어떤 보석보다도 순수하며, 한 점의 더러움 없는, 이 세상 어떤 소녀도 이길 수 없는 지고지순한 아름다움을 가진 소녀. 단 하나뿐인 완전한 소녀.”
또각!
여성의 걸음이 멈추었다. 그녀에 입가에 차가운 웃음이 그려졌다.
“웃기지 않나? 애초에 불가능해, 그런 것은. 아름다움이란 상대적인 거야. 제 아무리 아름다운 인간이라도 물고기나 새의 눈에도 아름다워 보일까? 굳이 다른 생물을 따질 필요도 없어. 인간의 입장에서 따져도 아름다움의 기준은 인종마다, 나라마다, 지방마다, 사람 하나하나마다 다 달라. 기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바로 아름다움. 따라서 아름다움은 그 기준만큼 많이 존재해. 절대적인 미(美)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아.”
한껏 조소한 여성은 계속 말을 이었다.
“완전 역시 마찬가지야. 무엇이 완전한가, 무엇이 불완전 한가. 상황에 따라 기준은 다르지. 제아무리 완전하게 만들어진 비행기라도 바다 속에서는 무용지물, 불완전하지. 완전이란 어디까지나 그 기준에 한해서의 완전. 어떤 상황에 있어 완전이란 다른 상황에서의 불완전을 의미해. 따라서 절대적인 완전(完全)이란 존재하지 않아.”
그리고 그녀는 나직이 선언했다.
“하지만 존재하지.”
“무슨...?”
뭐지, 이 사람은? 방금 전까지 자신이 했던 말을 또 부정하다니.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간단해. 각각의 기준에 따른 아름다움과 완전이 있다면 그 것을 거슬러 올라가면 돼. 애초에 모든 것은 하나로부터 파생된 것. 따라서 그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태초의 하나, 「 」에 도달하는 거다. 그 곳에는 아무 것도 없어. 그 어떤 기준도 존재하지 않아. 아름다움과 추함, 완전과 불완전의 경계마저 무의미한 절대의 허무(虛無). 그래, 그러므로 그 곳에 도달한 존재야 말로 지고의 아름다움을 가진 소녀. 진정으로 완전한 소녀, 앨리스(Alice)."
이해할 수 없다. 이 여성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혼란스러운 나를 보며 여성은 살풋 웃음 지었다. 찾아헤매던 것을 마침내 찾아내었을 대의 득의의 웃음을.
“어떻게 불러드릴까요. 전설 속의 인형사 로젠? 장미십자회의 창시자 로젠크로이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눈 앞의 여성은 우아하게 허리를 숙였다. 부드럽게 한 손을 굽혀 최상의 예를 취한다.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제3법의 마법사(魔法師), 로젠 폰 아인츠베룬.”
그리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
힘없이 눈이 감기고, 온 세상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나야말로 영광이오. 아오자키 토우코, 봉인지정의 인형사여.”
마침내 이루어진 것이다.
과거의 인형사와 현대의 인형사. 정점에 이른 두 존재의 만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