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kle wolken
“후우, 간신히 끝난 건가.”
토우코는 손에 낀 수술용 장갑을 벗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시계를 보니 이미 날짜는 다음 날로 넘어가 있었다. 장장 열 시간이 넘는 대작업이었던 것이다. 정점에 이른 인형사인 그녀로서는 유례없이 긴 시간이 걸린 작업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그녀로서도 그만큼 힘든 작업이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행히도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그 결과물인 소녀는 지금 테이블 위에서 눈을 감고 누워있다. 피범벅이던 소녀는 깨끗이 씻기어져 하얀 나신을 드러낸 채다. 죽은 듯이 미동도 없지만 단순히 잠든 것일 뿐, 생명의 증거인 맥박은 분명히 뛰고 있다.
소녀는 살아있었다. 망신창이가 되었던 몸은 지금은 상처 하나 없이 온전한 모습니다.
단 한 군데를 제외하고.
그녀의 어깨죽지 부위. 뜯겨나간 날개는 토우코로서도 어찌할 수 없었다. 스이긴토의 날개는 그녀의 혼의 형상에 맞추어 육체가 새로 만들어져 생겨난 것. 본래 인간에게는 없는 구조이다. 어디까지나 인간의 형(形)을 추구해 온 토우코로서는 그 이상은 무리였다. 결국 스이긴토의 등에는 흉측한 상처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솔직히 이렇게 스이긴토를 살려낸 것도 기적에 가까웠다. 토우코 자신도 성공할 수 있을 거란 확신이 거의 없을 정도였으니까. 그녀의 뇌리에는 아직도 선명했다. 처참하게 망가진 소녀의 모습이.
로젠으로부터 충격적인 사실을 전해들은 토우코는 반쯤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사무소로 돌아왔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후 그녀가 처음 한 행동은 스이긴토를 찾는 것이었다.
토우코로서도 소녀에게 진실을 말해줄 용기는 없었다. 사실을 알게 된 소녀가 느낄 절망을 쉽게 예상할 수 있었기에. 단순히 계획이 좌절된 그녀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심적충격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단지 스이긴토를 만나 마음을 진정시키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굳이 소녀를 찾을 필요는 없었다. 곧바로 문이 벌컥 열리며 미키야가 들어온 것이다. 그의 안경은 반쯤 부서진 채 간신히 코 위에 얹혀 있었다. 그의 검은 옷은 그의 것이 아닌 무언가로 축축이 젖어 검붉은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런 미키야의 품에는 마찬가지로 검붉은 색으로 물든 소녀가 안겨 있었다. 하얀 얼굴과 하얀 머리카락을 적신 선명한 붉은 색으로 인해 간신히 그 것이 피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처참한 모습이었다. 한쪽 날개가 뜯겨나간 자리에는 아직 채 응고되지 않은 피가 끈적하게 묻어났다. 완벽하게 부서져 덜렁거리는 팔다리는 두 번 다시 제구실을 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차갑게 식어버린 몸은 심장박동조차도 미약했다. 정신은 이미 오래 전에 놓아버린 상태. 푸들거리며 경련하는 남은 한쪽 날개만이 소녀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동시에 소녀가 거의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곧바로 스이긴토를 살리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진실을 알기 전이었다면 단지 여분의 육체로 교체하는 것만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알게 된 지금 그 방법을 쓸 수는 없었다. 그 것은 스이긴토가 영혼으로서 로자미스티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방법. 그녀에게 로자미스티카가 없다는 것이 밝혀진 이상 작업은 지극히 정론적인 방법, 즉 지금의 육체를 직접 고치는 방법으로 진행될 수 밖에 없었다.
성공가능성이 낮은 작업이었지만, 운이 좋게도 성공. 지금은 마취로 인해 잠들어 있지만 머지않아 의식도 돌아올 것이다. 혹사당한 육체는 한동안 안정을 취해야겠지만.
“하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육체 쪽이 아니지.”
가운을 벗고 소독한 토우코는 조심스레 스이긴토를 안아 올렸다. 그리고 새삼스레 깨달았다. 소녀가 이토록이나 가벼웠다는 것을. 제아무리 작은 여자아이 정도의 체구라지만 여자인 토우코의 힘으로도 쉬이 들어 올릴 정도였다.
한숨을 쉰 토우코는 스이긴토를 옆방으로 안고 갔다. 간혹 사무소에서 밤샘작업을 할 때 쉬기 위한 작은 방이었다. 한쪽 구석에 놓인 침대에 소녀를 눕힌 토우코는 살며시 이불을 끌어올려 소녀의 나신을 덮었다.
새근거리는 소녀의 숨소리를 들으며 다시금 토우코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도... 너는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을 테지.”
토우코가 걱정하는 것은 소녀의 정신 쪽이었다.
미키야는 말했다. 스스로를 일곱 번째 로젠메이든이라고 밝힌 소녀, 스이긴토와 꼭 닮은 소녀가 공격해왔다고.
그렇다면 스이긴토는 진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내가 너에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소녀는 그녀에게 있어 단순히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그저 수단에 불과했다면 이렇게 소녀를 살리려 애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저 수단일 뿐이었다면 이미 그 수단이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된 지금에 와서 이렇게 소녀를 살리려 매달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건 그녀가 소녀에게 자신의 육체를 내어줄 때부터 정해져 있었다. 그녀는 소녀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소녀에게서 동질감을 느꼈다.
그녀는 선택 받지 못 했다. 마법사가 되지 못 했다.
소녀는 선택 받지 못 했다. 앨리스가 되지 못 했다.
마술각인도 물려받지 못 한 몸. 끝없는 자괴감 속에서 그저 「 」를 추구해왔다. 「 」에 도달하여 자신이 쓸모 없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허리조차 존재하지 않는 몸. 끝없는 자괴감 속에서 그저 앨리스를 추구해왔다. 앨리스가 되어서 자신이 정크(Junk)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같은 처지의 둘. 그들은 같은 육체를 가지게 된 이후 더 이상 둘이 아니었다. 마치 거울을 보듯 한 쌍으로 묶인 존재.
그렇기에 토우코는 안타까웠다. 그녀가 소녀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다는 것이. 그녀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단지 육체적인 것 뿐. 망가진 몸을 고쳐주는 것뿐이다.
그 어떤 마술로도, 극에 이른 인형술로도 소녀의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해줄 수는 없었다.
“차라리 네가 모든 것을 잊어버린 채 깨어났으면 좋겠구나.”
진심으로 마음을 담아 토우코는 기원했다. 그 것이 비록 가능성이 없는 소망이라 할지라도. 그 것이 비록 거짓위안에 불과한 것일지라도.
딸깍.
드디어 작업실 문이 열리고 토우코가 걸어 나왔다.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난 세 사람이 그녀를 주시했다.
“뭐야, 너희들도 와 있었던 거냐.”
“오라버니가 한밤중이 되도록 들어오시지 않았으니까요.”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싶어 와 보았다. 와보니 이런 상황이더군.”
미키야의 모습은 여전히 엉망이었다. 토우코가 작업실에 들어가기 전 그대로의 옷차림. 아직 씻지도 못 한 몸은 여전히 피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비록 방금 전까지 피비린내로 가득한 곳에서 나온 토우코는 알아차릴 수 없었지만.
금이 간 안경알 너머로 간절한 바람을 담은 눈이 토우코를 바라보았다. 걱정으로 일렁이는 눈이었다. 목이 잠긴 탁한 목소리가 그녀를 향한다.
“스이긴토는... 어떻게 되었나요?”
“무사해. 생명에 지장은 없어. 아직 의식이 깨어나지는 않았지만.”
“다행이다... 다행이야....”
긴장이 풀린 듯 미키야는 그대로 털썩 하고 쇼파에 주저앉았다.
“미키야, 너는 어때? 다친 곳은 없나?”
토우코는 조심스레 미키야에게 물어보았다. 스이긴토의 상세가 위중하여 미처 신경을 쓰지 못 했지만, 미키야 역시 공격을 받았던 것이다.
“당연히 있지요! 가슴에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고요!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토우코씨?”
대답은 아자카에게서 나왔다. 날카로운 목소리가 토우코를 힐난한다.
“나 역시 궁금하군. 미키야의 말을 들어보면 스이긴토와 관계있는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시키 역시 토우코를 추궁했다. 단호한 어조로 그녀를 다그친다.
“ 그 것은.....”
토우코는 난감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녀들에게 있어서 미키야가 다친 것은 세상에 다시없을 심각한 문제였다. 어떤 변명을 해도 통하지 않을 터였다.
그때였다.
“저도 사정을 알고 싶습니다, 토우코씨.”
계속 가만히 있던 미키야가 끼어들었다.
“제가 다친 것은 상관없습니다. 저는 다만....”
의지를 담은 눈동자가 토우코를 똑바로 응시한다.
“스이긴토가 어째서 그렇게 되어야 했는지 알고 싶습니다. 성에서 만난 소녀는 누구인지, 어째서 싸움을 걸어온 것인지, 어째서 스이긴토를 그렇게 만든 것인지.”
탁한 목소리로 그러나 굳건한 목소리로 미키야는 말했다.
“말씀해 주십시오. 스이긴토가 왜 그렇게 다쳐야만 했는지.”
토우코는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검은 눈동자에서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군. 하긴 미키야 너는 그녀의 미디엄이기도 하지 충분히 들을 자격이 있어. 일단 모두 앉아. 서서 듣기에는 무척 긴 이야기가 될 테니까.”
사각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네 사람이 빙 둘러 앉았다.
한숨을 내쉰 토우코는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전설 속의 인형사 로젠과 그가 만든 로젠메이든, 로자미스티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앨리스게임. 그리고 스이긴토의 진실에 대해서.
“그랬...군요....”
미키야는 신음을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모두는 침묵에 빠져든 채 입을 열지 않았다. 스이긴토와는 어느새 깊은 정이 든 사이였다. 한 가족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시키도 아자카도 비록 스이긴토와 투닥거리긴 했지만, 그녀를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만큼 모두에게 토우코의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미키야가 받은 충격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랬던... 거군요....”
미키야는 한심한 자신이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웠다. 그동안 언뜻언뜻 느낄 수 있었다. 스이긴토의 밝은 웃음 뒤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는 기분을.
하지만 애써 부인해왔다. 그럴 리가 없다며 쉬이 생각을 흘려버렸다. 그랬던 자신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결국 그녀가 어떤 존재인지... 일단 짐작은 해볼 수 있어. 로자미스티카를 통한 여러 번의 시뮬레이션으로 인해 그녀에게도 제3법이 영향을 끼쳤겠지. 자석을 가까이한 쇠붙이가 자성을 띠는 것과 마찬가지야. 그 다음은 간단해. 수백년의 세월이 조금씩 그녀의 정신을 만들어 갔겠지. 하지만 이런 것을 따지는 것도 의미 없는 짓이야.”
토우코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되었든 그녀가 거짓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으니까.”
스이긴토가 어떻게 탄생했건 그녀가 여태까지 인식해왔던 자신이 자신이 아니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녀가 로젠이 의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녀가 거짓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녀는 로젠메이든이 아닌 것이다.
“미키야가 다친 것은 변명할 말이 없구나. 의도한 바가 아니었어. 앨리스게임은 어디까지나 로젠메이든 간의 싸움. 힘의 매개체인 미디엄이 곁에 있다면 유리한 것은 사실이지만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지. 나도 스이긴토도 너희들을 끌어들이는 것은 원하지 않았어.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비밀로 한 것이고.”
씁쓸한 어조로 토우코는 말을 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앞으로 미키야가 공격받을 일은 없다는 거네. 로젠메이든이 아닌 스이긴토는 더 이상 앨리스게임과는 관계가 없으니까.”
긍정적으로 여길 수 있는 사안은 그것 하나뿐이었다. 비록 그 것이 비극으로 인한 것일지라도, 애써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나 처참한 현실과 마주하게 되니까.
그 말을 들은 미키야의 얼굴은 울음을 참으려는 듯 일그러져 있었다.
“제 탓입니다. 제가 그런 곳에 데려가지만 않았어도 스이긴토도 그런 일은....”
“자학은 그만둬, 미키야.”
토우코는 단호한 어조로 미키야의 말을 끊었다. 미키야는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의 잘못이 아니야. 어차피 그녀가 계속 앨리스게임을 해나갔다면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어. 다만 그 시기가 조금 일찍 찾아왔을 뿐이야. 그리고 그 일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을 뿐이지.”
토우코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들어서 몇 번째의 한숨인지 그녀도 알 수 없었다.
“그래. 모든 건 나 때문이야. 그녀가 로젠메이든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지 못 했어. 깨닫지 못 하고 그녀를 되살리고 말았어. 그로 인해 미키야도 스이긴토도 다치고 말았어. 뿐만 아니라 스이긴토는.....”
토우코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 알아차리지 못 했을까? 생각해보면 근거는 충분했다.
스이긴토가 만들어진 것은 최소한 1614년 이전. 그러나 수은등(水銀燈, 스이긴토)이 발명된 것은 1901년. 따라서 그녀는 로젠메이든일 수가 없다.
첫 번째 로젠메이든임에도 미완성이었던 것, 허리가 없던 것. 그 것은 그 부위가 본래 나누어지기 전 완전한 하나의 로자미스티카가 들어갈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그 것은 그녀가 사실 로젠메이든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로젠메이든은 누군가가 태엽을 감아주어야만 눈을 뜨고, 이후로도 주기적으로 태엽을 감아주어야 한다. 그러나 스이긴토는 독자적으로 활동해 왔다. 한 번도 태엽을 감아주는 이 없이. 그 것은 그녀가 사실 로젠메이든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미디엄이 없음에도 다른 자매들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것. 그 것은 그녀가 처음부터 완성된 앨리스를 목표로 하여 만들어졌기 때문. 그렇기에 앨리스로의 진화(進化)를 목표로 하여 만들어진 로젠메이든에 비해 애초에 출력이 높았던 것. 다시 말해 그녀가 사실 로젠메이든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눈치 채지 못한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확고한 근거들. 순전히 그녀 자신의 실책으로 밖에 볼 수 없었다. 「 」에 이른다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미처 다른 곳에 눈을 돌리지 못한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은 그녀 탓이나 다름없었다. 그녀가 스이긴토를 되살리지 않았다면 미키야가 다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스이긴토 역시 자신이 로젠메이든이라고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로 인해 소녀는 되살아났다. 그리고 지울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입고 말았다. 자신의 존재가 거짓이라는 것을 알아버렸다.
“시간이 늦었어. 모두 이만 돌아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토우코는 말했다. 그런 그녀를 미키야가 붙잡았다.
“토우코씨, 저도 남겠습니다.”
“오라버니!”
“미키야!”
하지만 토우코는 고개를 저었다.
“안돼! 지금의 너는 안정이 필요해. 대마술급의 공격을 받고도 겨우 그 정도로 끝난 것은 기적이나 다름없어. 더 이상 무리하지 마.”
“하지만!”
“스이긴토가 깨어나면 그런 모습을 보여줄 생각이야? 가뜩이나 힘들 아이에게 자신으로 인해 네가 다쳤다는 죄책감을 들게 할 생각이야?”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미키야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후 사무소 안은 텅 비어버렸다. 모두가 떠난 자리에는 토우코 혼자만이 서있었다.
토우코는 씁쓸히 작업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곧 스이긴토의 마취가 풀릴 시간이었다. 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진 존재는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그러니 옆에 있어주어야 했다.
“바라는 것은 다만 네가 자신을 부정하지 않는 것 뿐.”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고, 이제껏 알아온 자신이 모두 거짓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소녀.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소녀가 스스로에게마저 버림받는다면, 소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마음이 죽어버린 몸은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인형에 불과할 뿐.
마음이 죽어버린 소녀는 껍데기만 남기고 평범한 인형이 되어버릴 것이다.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못 하는 인형으로.
토우코는 부디 그렇게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딸각.
문을 여는 것과 함께 토우코는 상념을 지워버렸다. 아무리 걱정해보았자 현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스이긴토의 간호에 전념해야 할 때였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선 토우코는 그대로 굳어버릴 수 밖에 없었다.
“스이....긴토?”
아무도 없는 침상 위. 흐트러진 이불과 남아있는 온기만이 방금 전까지 누군가 그 곳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소녀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한쪽 벽에 걸린 거울만이 아직 가라앉지 않은 파문으로 인해 일렁이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