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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안을 비추는 햇살을 느낌과 동시에 눈을 떴다. 누웠던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자 몸 구석구석마다 힘찬 활기가 들어온다. 모처럼 맑은 정신으로 시작하는 하루인 것 같다.
“드디어 오늘이구나.”
스이긴토가 모습을 감춘지도 벌써 닷새. 그동안 그녀가 또 다시 무슨 해를 당했을지 모른다는 걱정에 제대로 잠도 잘 수 없었다. 혹여 밤중에 돌아오지 않을까 싶어 창문을 열어둔 채 잠자리에 눕고, 아침에는 그녀가 두고 간 가방을 열어본다. 그리고는 텅 빈 그 안을 확인하고 힘없이 도로 닫을 뿐이었다. 그것이 바로 어제까지의 하루였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오늘은 그녀가 오기를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그녀를 찾으러 갈 테니까.
“기다려줘, 스이긴토. 곧 만날 수 있을 거야.”
모든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서며, 나는 굳게 결의를 다졌다.
나, 아자카, 시키는 모두 사무소 쇼파에 둘러앉아 토우코씨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래지 않아 딸깍하고 문이 열리며 피곤한 모습의 토우코씨가 나타났다. 모두들 그녀에게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시선을 집중했다.
“모든 방법이 실패했군. 지금까지 시도한 수단들로는 스이긴토의 행방을 찾지 못 했어.”
토우코씨는 한숨을 내쉬며 결론을 내렸다. 그 말에 모두들 침울해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별로 도움이 되지 못 한 나의 자괴감은 더욱 컸다. 마술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사라진 스이긴토. 따라서 그녀를 찾는 수단은 마찬가지로 마술적인 방법이어야만 했다. 자료를 뒤지고 사람들로부터 정보를 얻어내는 나의 방식은 통용되지 않는 것이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토우코씨와 아자카가 마술을 시도하는데 필요한 재료나 참고가 될 만한 서적을 구해오는 것이 고작이었다.
“포기할 수... 밖에 없을까요...”
입술을 깨물며 말하는 아자카. 비록 스이긴토와 티격태격 많이 다투었던 아자카지만 그것은 그만큼 둘이 서로를 친근하게 여긴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실제로 아직 상식이 부족한 스이긴토를 가장 많이 챙겨주었던 사람은 다름아닌 아자카였던 것이다. 그런만큼 지금 자기 입으로 포기의 말을 내뱉는 심정은 나 못지않게 참담할 것이다.
그때 토우코씨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아니. 아직 방법은 남아있어.”
그 말에 모두들 의외인 듯 고개를 들어 토우코씨를 바라보았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할 수 있는 방법은 모두 시도해 보았을 텐데...
모두의 의문 섞인 시선에 토우코씨는 쓴웃음을 지으며 답해주었다.
“지금까지 시도한 방법 중에는 미디엄과의 링크를 역추적하는 것이 있었어. 그러나 실패하고 말았지. 이 때 생각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은 두 가지야. 첫째, 링크가 끊어져있다. 하지만 미키야의 ‘반지’가 그대로인 것으로 보아 이건 아니야. 결국 남은 것은 하나뿐이지.”
잠시 말을 멈추고 모두를 돌아본 토우코씨는 말을 이었다.
“대상이 이쪽의 방법으로는 추적할 수 없는 곳에 있을 것!”
하지만 아자카가 곧바로 반박했다.
“설마요. 미디엄과의 링크는 본래 근원의 소용돌이를 통과하기 위한 것. 너무나 강고하고 분명한 연결이예요. 이 세계에 있는 한 추적을 못할 리는 없어요.”
“그래, 아자카의 말은 맞아. 그러니까 말한 거야. ‘이쪽의 방법’으로는 추적할 수 없다고. 다시 말해 이 세계의 법칙이 통용되지 않는 곳, 다른 세계에 있을 거라고 말야.”
“??!!”
그제서야 깨달은 듯 아자카는 눈을 부릅떴다. 머리를 크게 한 방 얻어맞은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저... 토우코씨.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다른 세계라니요?”
“말 그대로야. 로젠메이든은 이 세계와 별개이면서도 동시에 같은 세계. 이 세계와 연결된 다른 세계. 이른바 ‘N의 필드’라는 곳에 드나들 수 있지. 그녀들의 원형인 스이긴토 역시 마찬가지야. 그 곳은 이 세계와는 다른 법칙이 지배하는 곳이야. 이 세계의 방법으로는 추적이 불가능해.”
“하지만 방법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희망을 담아 토우코씨에게 물었다. 나의 물음에 토우코씨는 곤란하다는 듯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일단... 그 곳으로 통하는 문을 열 수는 있어. 스이긴토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계속 연구해왔으니까. 물론 마법의 역에 가까운 마술이라서 통상적으로는 어렵지만, 이쪽에는 네가 있어. 두 세계에 걸쳐진 미디엄의 링크를 통해 입구를 열면 돼. 하지만...”
눈썹을 찡그리면서 잠시 시키와 아자카의 눈치를 살피는 토우코씨. 그러더니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늘어뜨리고는 입을 열었다.
“만약 누군가 그 곳에 가서 스이긴토를 데려온다고 한다면... 미키야 너 밖에 갈 수가 없어.”
“에에에에~~?!”
“뭐라고?”
뜻밖의 대답에 시키와 아자카가 경악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당황한 탓에 몸이 굳어 소리로 나오지 않았을 뿐.
이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토우코씨는 고개를 푹 숙였다. 시키는 그런 토우코씨에게 차가운 목소리로 캐물었다. 몹시 거친 어조였다.
“해명을 들어도 될까? 어째서 미키야라는 거지?”
“후우~ 이럴 줄 알았다니까. 그래서 말을 안 했던 건데.... 좋아, 잘 들어. N의 필드는 무수한 세계가 중첩된 곳이야. 다른 시각에서 바라본 현실세계, 과거의 기억을 간직한 세계, 누군가의 심상세계, 무의식의 바다 등등... 그 수는 무한이나 마찬가지. 따라서 다른 사람이 들어가면 그대로 미아가 되어버려. 오직 스이긴토와 연결된 미키야만이 그 무한의 세계 속에서 그녀가 있는 단 하나의 세계를 찾아갈 수 있어. 다만...”
“다만?”
“일단 N의 필드에 들어가게 되면 미키야가 다시 이쪽 세계에 돌아올 수 있는 ‘문’을 열 수 있는 것은 스이긴토뿐. 만약 그녀를 찾지 못 하거나, 혹은 그녀가 ‘문’을 여는 것을 거부하면... 즉 그녀가 다시 돌아올 수 있게끔 설득하는 것을 실패하면... 미키야는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어. N의 필드에서 평생 갇혀있게 되는 거지.”
“너! 그런 위험한 방법을...”
“하겠습니다!”
나는 힘차게 대답했다. 중간에 시키가 토우코씨에게 무언가 말을 하려는 것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오라버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자칫하면 영영 미아가 되는 거라고요!”
깜짝 놀란 아자카가 내게 다가와 팔을 붙잡았지만, 나는 조용히 그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는 잠시 눈을 감았다. 자신을 돌이켜 생각해보았다.
그래, 지금 이 마음에 의심은 없다. 품고 있는 생각은 오직 하나뿐.
다시 눈을 뜬 나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비록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1년도 채 되지 않은 세월. 생각해보면 겨우 몇 달에 지나지 않는다.
“모두와 함께 지냈습니다.”
결코 크다고 할 수 없는 집에 넷이 모여 웃고, 떠들고... 즐거운 나날. 평온한 일상.
“그녀는 이제 가족이나 다름없어요.”
더 이상 그녀가 없는 생활은 생각할 수 없다. 누구 한 사람 빠진 생활은 생각할 수 없다.
“잃어버린 가족을 찾는 것에... 다른 사항을 고려할 수 있을까요?”
활짝 웃는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며, 나 역시 빙그레 웃음 지었다.
그 것이 바로 어제의 일이다. 그 후로 모든 것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나에게는 오늘을 위해 집에 가서 푹 쉬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토우코씨와 아자카는 사무소에 남아서 마술의 준비를 한다고 했다. 시키의 경우는 비록 자신이 하는 일은 없지만 중요한 작업을 하는 사람의 머리 속이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게 둘 수 없다는 이해 안 가는 말을 하고는 역시 사무소에 남았다.
회상을 끝내고 의식을 현실로 되돌리니, 어느새 가람의 당에 도착해 있었다. 나는 힘찬 발걸음으로 안으로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어서 와.”
“어서 오세요, 오라버니.”
“드디어 왔구나.”
이미 준비가 모두 끝난 듯 세 명의 여성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토우코씨, 이것은...”
솔직히 말해 놀랐다. 사무실에 있던 가구들은 모두 어딘가로 치워져 보이지 않는다. 텅 비어버린 그 안에는 바닥이며 천정, 벽이고 가릴 것 없이 이상한 도형과 문자로 빼곡히 채워져 있다. 마술에 관해서는 잘 모르지만, 예사 수준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 곳에 존재하는 가구는 단 하나. 바닥에 그려진 커다란 원 한가운데 서 있는 거울 하나뿐이다.
“아, 이거? 아무래도 그 정도의 마술행사를 하기 위해서는 이 정도는 되어야 하니까. 신비의 질이 낮으면 양으로라도 해결할 수밖에.”
어려운 말을 한 토우코씨는 이윽고 나를 바라보았다.
“마음의 준비는 되었나? 지금 당장 시작해도 될까?”
“예! 문제 없습니다.”
진지해진 토우코씨의 표정에 나도 모르게 긴장하여 침이 꼴깍 넘어간다.
“그럼 이쪽으로 오도록 해.”
토우코씨의 인도를 따라 거울로 다가갔다. 가까이서 본 거울은 내 키보다도 훨씬 컸다. 내 전신이 그대로 비치고도 남을 정도다.
그래, 마치 ‘문’처럼.
“오라버니!”
갑작스런 아자카의 외침에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다가온 아자카가 내 손을 꼬옥 붙잡았다.
“부디... 부디 무사히 돌아오세요. 기다릴 테니까.”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목소리가 떨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나는 조용히 아자카의 어깨를 짚었다. 그리고는 귀에 속삭여 주었다.
“걱정하지마. 나는 여동생을 울리는 못된 오빠는 되지 않을 테니까.”
그 말에 아자카는 고개를 들어 나를 마주보았다. 안심한 듯 혹은 아쉬운 듯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던 그녀는 이내 미소 지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이제는 자기 차례라는 듯 시키가 다가와 내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나는 걱정하지 않을 거야. 미키야, 너는 ‘찾기’라면 전문이잖아? 이번에도 유감없이 실력을 발휘해보라고.”
남자 같은 말투와는 달리 시키의 입가에는 더할 나위 없이 여성적인 미소가 머금어져 있다. 눈에는 신뢰의 빛이 담겨있다. 그에 보답하기 위해 나 역시 자신감 넘치는 웃음을 지어주었다.
“자자, 이젠 시작하도록 하자. 시키, 마법진의 밖으로 물러나. 아자카, 정해진 위치로!”
거울과 나를 사이에 두고 토우코씨와 아자카가 마주 섰다. 시키는 저만치 멀리 떨어져 손을 흔들고 있다.
“그럼 시작한다!”
토우코씨의 외침이 울려 퍼짐과 동시에 영창이 시작되었다. 두 명의 마법사, 아니 아직은 마술사인 두 사람은 낭랑한 목소리로 내가 처음 듣는 언어를 내뱉었다. 그에 따라 사무실에 그려진 문양에서 빛이 뿜어져 나온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자카와 토우코씨의 얼굴에 땀방울이 맺혀 흘러내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쉬지 않고, 오히려 더욱 소리 높여 영창을 하고 있다. 그에 따라 진식 또한 더욱 빛을 발하며 떨리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절정에 달했을 때.
거울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조용한 호수에 물결이 치듯 일렁이는 거울의 표면. 그 곳에 비치던 나의 모습이 파문에 의해 점점 지워진다. 그리고 완전히 알아볼 수 없게 되었을 때, 마침내 거울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지금이야! 닫히기 전에 서둘러!”
토우코씨의 외침과 나는 무작정 앞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거울이 부딪힐 정도로 가까워졌지만 주저하지 않았다. 빨려드는 것 같은 감각을 느끼며, 그대로 몸을 거울 속으로 내던졌다.
의식이 멍하다.
제어를 상실한 몸은 축 늘어져있다.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없는 것이 아니다.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없는 것이 아니다.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이 있다.
하얀 색? 혹은 검은 색? 유(有)이자 무(無)인 이곳은 무슨 색이지?
여기는... 어디지?
아아, 그래. 알 것 같다.
정(正)과 부정(不正). 참과 거짓. 그 모든 것이 혼재하는 곳.
혼돈의 바다.
나는 그 속에서 그저 떠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이 모호한 그 곳에서 분명하게 인지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 뿐.
‘나’라고 하는 하나의 생명.
내 안에 들어찬 무수한 생명.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것들은 내 안에서 흔들리고 있다.
그대로 아무 생각 없이 그 흔들림을 느끼고 있는 나.
하지만... 하지만...
이런 것을 느끼는 나는... 뭐지?
나는... 무엇을 하려했지?
찾으러? 무엇을? 아니, 누구를?
나는 대체...
나는... 나는... 누구지.....?
나의 이름은...
“나는 코쿠토 미키야.”
그 말과 함께 눈을 떴다.
“하아... 하아...”
후우~ 위험했다. 하마터면 자신을 잃어버렸을지도...
주변을 둘러보자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아마도 이곳은 아직 ‘9초 전의 백(白)’이라는 곳인 것 같다.
토우코씨의 말에 의하면 여기서는 자신의 이미지가 애매하면 형태를 취할 수 없다고 한다. 자칫하면 처음부터 실패할 뻔 했다. 정신을 잃고, 몸을 얻지 못 하고, 마침내는 자기 자신조차 잊어버렸을 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뒤늦게나마 스스로를 ‘코쿠토 미키야’라는 존재로 이미지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지금 나는 아까와는 달리 평상시 모습 그대로 검은 뿔테안경에 검은 옷을 입고 있다.
“그럼... 이제 할 일은...”
안타깝지만 나는 스이긴토와의 링크를 볼 수 없다. 나는 마술사가 아니니까. 결국 막연한 느낌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무작정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
토우코씨의 말에 의하면 N의 필드에 혼재하는 무수한 세계는 각각 문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문을 찾는 방법은 역시 마찬가지로 이미지하는 것 뿐. 마음속에서 가고 싶어 하는 방향에 시선을 고정하여 힘 있게 외쳤다.
“문을... 연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눈 앞에 문이 생겨났다. 텅 빈 허공에서 문짝만 있는 모습은 무척 기이했다. 하지만 그래도 문은 문. 손잡이를 잡아 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
얼마나 지났을까?
지나온 문의 개수를 세는 것도 이제는 잊어버렸다. 그동안 이 세계에서 움직이는 법도 많이 익숙해진 듯하다. 처음에는 마치 수영이라도 하듯 팔다리를 버둥거려야 했지만 이제는 의식만으로 날아가는 수준이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이긴토가 있는 세계는 찾지 못 했다. 스이긴토는 커녕 그녀의 깃털 하나 발견할 수 없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다.
이곳은 생각한대로 이끌 수 있는 세계. 확신을 갖지 못 하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반대로 의지가 강하면 강할수록 소망은 이루어진다. 체념하지 않고 다시금 각오를 다지며, 날아가는 속력을 더욱 높였다.
그때였다.
“응? 저건...”
저 멀리서 무언가 반짝이는 것들이 보였다. 마치 보석들이 모여 있는 양. 혹시나 하는 생각에 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오래지 않아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거울... 인가?”
하지만 곧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 있는 것은 그저 부서진 거울의 파편들이었기 때문이다. 산산조각난 거울조각들이 무중력의 공간에서 무리를 짓고는 떠다니고 있었다. 결국 안타까운 마음을 접고 다시 길을 재촉하려 했다.
“어라.....?”
하지만 그 순간 나는 멈춰 설 수 밖에 없었다. 부서진 거울 표면에서 익숙한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스이긴토.....?”
한 뼘도 되지 않은 그 표면에 비치는 것은 너무도 익숙한 소녀의 모습. 하얀 머리카락. 검은 날개. 검은 드레스. 그녀는 틀림없이 내가 아는 스이긴토였다. 놀란 마음을 추스르며 다시금 주위를 살핀 나는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스이긴토. 스이긴토. 스이긴토. 스이긴토. 스이긴토. 스이긴토.
무수한 거울조각들은 한결같이 그녀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배경이 되는 장소나 같이 있는 인물은 모두 달랐지만.
“이것은... 설마 스이긴토의 기억?”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토우코씨가 말했으니까. N의 필드는 무수한 세계가 혼재하는 곳, 그리고 그중에는 과거의 기억을 간직한 세계도 있다고.
내가 모르는 스이긴토의 모습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일까? 나는 뭐라 표현하기 힘든 아련한 느낌에 취해 조각들을 향해 손을 가져갔다.
“아얏!”
하지만 이내 신음소리와 함께 손을 부여잡고 말았다. 거울의 날카로운 끝에 찔리고만 것이다. 깨진 거울을 만지려 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붉은 피가 손을 타고 흐른다. 거울조각에도 붉은 피가 맺혀 흘러내린다. 그때였다.
찌이잉!
귀를 멍하게 만드는 공명음이 울려 퍼진다. 그와 함께 거울조각들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다. 사람도 아닌 무생물에 지나지 않건만 그렇게 느껴졌다.
그리고 미처 몸을 피할 틈도 없이 그것들은 나를 덮쳐왔다.
“커...커헉!”
숨조차 나오지 않는다. 날카로운 파편이 온몸을 찌르고는 파고들어온다. 고통에 머리 속이 새하얗게 변해버린다. 그리고 비어버린 그 속으로 마치 해일처럼 기억들이 밀려들어온다.
인형들이서로놀고있다그들은나를인지하지못한다나는구석에있으므로보지못한다몸에알수없는선이연결되고이상한힘이들어온다움직이지못한채그저누워있다나를만든사람이보인다내가그사람의얼굴을보는것은이런때뿐이다그외에는등만보일뿐이다누간가나를발견한다이아이는왜안움직여누군가말한다그아이는미완성이야인형들이완성된다노란인형초록인형파란인형붉은인형나는그저어둠속에서그모습을바라본다인형들이나를만든사람을아버님이라고부른다그녀들과나는만든사람이같다저아이들과나의다른점이뭐지알았다나는허리가없어인형들이움직인다걷고팔을흔들고말하고웃는다나는그저구석에놓여있다어째서미완성일까누군가묻는다불량품일까누군가말한다상자속에놓인다상자가닫힌다아무것도보이지않는다붉은인형을껴안는다붉은인형에게미소짓는다그는나에게웃어준적이없다어째서빛은항상저아이들만비추지어째서나는어둠속에만있는거지왜저이아들만안아주지나는왜안아주지않지이아이허리가없어이상해왜이럴까아버님이만들다만것이라서그래저아이들에게는웃어줘나에게는왜웃어주지않아상자가열린다누군가말한다에쁜인형이다가방에서꺼낸다하지만나온것은상체뿐하반신은바닥에툭떨어진다우아아앙왜그러니망가진걸까아니야나는망가지지않았어쳇로젠의작품이라길래기대했더니이게뭐야이런게그전설의인형사가만든인형일리가없잖아아니야나의아버님은로젠나는긍지높은로젠메이든어째서나는미완성인거지상자가닫힌다다시어둠이가득찬다깊은잠꿈조차꾸지않는깊은잠에든다이런건어디서났니버리렴엄마가제대로된인형사줄게왜모두들나를싫어하지나는아무런잘못도없는데나는나쁘지않아아무짓도안했어그런데왜모두덜렁거린다다리만잡혀서덜렁거린다상체는바닥에널부러져있다이리저리흔들리는다리를아래에서바라본다비틀거리면서도일어선다처음이라어색하지만허리가없어서힘들지만그래도일어선다
“크...크윽....”
고통스럽다. 시간도 장소도 구분 없이 뒤죽박죽으로 몰려들어오는 기억들에 나 자신을 잃어버릴 것만 같다.
얼레리꼴레리병신인형이래요병신인형이래요병신을가지고논데요나도사랑받고싶어따스함을느끼고싶어싫어이런건더이상싫어나는정크가아니야빨간인형을찾아간다가장아버님께사랑받던그아이를찾아간다놀랍구나완성되지않은네가움직일수있다니아버님은어디가신거지나를만들다말고어딜가신거지기분나빠저주인형이라도되나불완전한것만큼추악한건없지나는추하지않아나는불완전하지않아어째서나는사랑받지못하지그래저빛저빛이야말로나의이름스이긴토그것이나의이름아니야나는정크가아니야나를그렇게부르지말아줘뭐야이건어디서이런쓰레기를주워온거야어째서게임의패자가여기있는거지히나이치고패자는정크잖아나는버림받았는데왜너는버림받지않은거야앨리스게임나도앨리스가될수있을까앨리스가되면사랑받을수있을까아버님은나를안아주실까꼴좋구나패자에게어울리는흉한모습나는불완전한것을용납하지않아나는완전하니까그러니까망가져버려렘피카를빼앗긴인형따위는쓰레기에불과해그래소우세이세키이제너도나와같이된거야586920시간37분만이구나신쿠불완전한건없애버려야해아니야나도불완전한걸나와같은저아이들을부수겠다는거야아니야나는불완전하지않아그러니까부술수있어잔혹해질수있어이런바보같은애를위해서역시넌진짜바보구나신쿠정크를어째서도우려는거야안돼이아이를쓰레기로만들수는없어나와같이만들수는없어완전한것은모두부수어버리자그러면불완전한것도사랑받을수있을거야앨리스가되려면로자미스티카를뺏어야해하지만정크로만들기는싫어그럴수는없어그러니까정령만인공정령만가져갈게
하지만 가장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은 그런 고통이 아니었다.
스이긴토가 간직한 슬픔. 웃음 뒤에 감추고는 보여주지 않았던 내면.
지금 나는 그녀의 기억을 받아들이며, 그녀가 느껴온 감정 역시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있다.
한 번도 사랑받지 못 했다. 오히려 정크라며 버림받았다.
그녀가 느껴야만 했던 괴로움은 그대로 나에게 전해지고 있다.
고통 따위는 그 괴로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완전한존재그러니까불완전한것들을추한그것들을없애야만해인정할수없어나는버림받았는데어째서너희들은할아버지아무리소중히여겨봐야그애는당신곁에서도망갈거예요당신은영원한외톨이완전한그아이가불완전한당신을소중히여길리없어잘들어신쿠확실히말해둘게나는망가진애같은게아니야쓰레기같은게아니야내가사랑받지못한것은불완전하기때문그러니까나도불완전한것을사랑하지않아그러니까사라져싫어항상사랑받아온주제에네가무얼안다는거야죽어버려신쿠어째서지기회는많았잖아히나이치고스이세이세키소우세이세키모두없앨수있었어로자미스스티카를얻을수있었어앨리스가되려면모든로자미스티카를모아야만하잖아왜그러지않은거야그래신쿠아직망가지면안돼내가쓰레기로만들어주겠어있지신쿠나말이야딱한번이라도좋으니까해보고싶은것이있어뭔지알겠어그건인형놀이자기인형을마음대로움직이게하고자기가좋아하는말을하게하고망가지면버리는거야그래그들이나에게했던것처럼내가불완전하다는것을알자마자버린것처럼싫어망가뜨리기싫어불완전해도부서진인형이라도이세상에존재하고싶다고꼴좋구나신쿠패자에게어울리는모습이야그래내가이겼어내가신쿠보다완전해그러니까나도아버님이사랑해주실거야쓰레기로만들어주겠어나만정크로있을수는없어모두모두망가지는거야아니야나는정크가아니야그러니까그럴이유가없어로젠메이든은인간을괴롭히거나상처받게하는존재가아니라고그렇게아버님께서말씀하셨다고했니웃기지마아버님은나에게그런말하신적이없어아버님은나에게한번도말을건넨적이없어그러니까나는아버님의말씀을지키지않는것이아니야나는쓰레기같은게아니야그래신쿠너만쓰러뜨리면돼너를쓰러뜨려서아버님에게너보다내가뛰어나다는것을보여드리겠어망가뜨릴거야망가뜨리면안돼망가뜨릴거야망가뜨리면안돼팔이없는신쿠허리가없는나그래너도이제나와같이되었어이제는아버님이나를너처럼사랑해주실거야
이 얼마나 모순적인가.
자신이 불완전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기에 자신이 불완전한 존재가 아님을 증명하려 한다.
완전한 몸을 가진 다른 존재들을 질시한다. 그들을 망가뜨리기를 원한다. 동시에 그들을 동경한다. 동경하는 대상이 망가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불완전한 것을 경멸한다. 부정하고자 하는 것, 자신이 불완전한 존재라는 사실을 끄집어내는 것 같기에. 그렇기에 자신을 내버린 사람들이 했듯이 그들을 대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을 동정한다. 그들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기에. 그들을 내치는 것은 자신을 내치는 것과 다름없기에.
스이긴토의 마음은 모순으로 점철되어있다. 상반된 생각이 서로 꼬이고 뒤엉켜 기괴하게 일그러져있다.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을 만큼 뒤틀려있다.
다만 한 가지.
하나만은 결코 변하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의 시작이 된 그 마음은 홀로 올곧이, 더할 바 없이 순수하게 남아있다.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마음. 따스함을 그리워하는 마음.
그 마음만은 줄곧 그대로.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그런 마음을 잊어버렸다.
그 순수한 마음은 그녀가 받은 상처에 가려져, 그녀의 뒤틀린 감정에 밀려나
그녀 자신도 깨닫지 못 한 채로 가장 깊은 곳에 묻혀 버렸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이 기억들은 어디까지나 과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만약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 것은...
...그리고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이 기억의 파도에도 어느덧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었다.
몸이 불타고 있다. 스이긴토의 몸은 푸른 불길에 휩싸여 타들어가고 있다. 마치 그녀 마음 속의 모순을 나타내듯, 그녀가 내뿜은 불길은 도로 그녀에게 돌아와 그녀를 태워버린다.
아버님... 어째서...
어째서 저를...
저는 아버님을...
이렇게나 사랑하는데....
애타게 호소하는 스이긴토.
맹렬한 불길 속에서 은빛으로 흐르는 두 줄기 눈물만이 그녀의 몸을 적신다.
나는 알고 있다. 그녀의 마음이 보답 받지 못 한 이유를. 그녀가 창조자에게조차 버림 받은 이유를.
탄생조차 축복받지 못 하고, 줄곧 외톨이였던 그녀.
그것이 너무나 서글퍼, 너무나 안타까워 마치 눈물이 나올 것만 같다.
그리고... 그녀의 의식이 사라짐과 함께 나 또한 정신을 잃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금 살며시 눈을 떠보았다.
“......”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검은 하늘. 먹구름이 잔뜩 껴서 햇살이라고는 한줌도 들어오지 않는 새까만 하늘이다. 낮인지 밤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나는 땅바닥에 누워있었던 모양이다.
툭.
바닥을 짚은 손에 딱딱한 무언가가 만져졌다. 고개를 돌려 그것을 바라보았다.
부서진 인형.
머리와 다리가 떨어져나가 몸통만 남아있는 인형이었다. 그마저도 이곳저곳 금이 가 있다.
남아있는 몸이라도 부서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다른 땅을 짚고는 자리에서 마저 일어났다.
“이 곳은.....?”
을씨년스러운 광경. 텅 비어버린 벌판. 풀 한 포기조차 나 있지 않은 곳.
다만 과거에 집이 있던 흔적인 듯 황량한 돌무더기가 여기저기 흩어져있다. 말라비틀어진 나무는 밑동부터 동강난 채 바닥에 쓰러져있다.
“나... 여기에 와본 적이 있어.”
이 장소. 기억하고 있다.
그나마 형태를 갖추고 있던 마을의 폐허는 이제 그저 잔해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나마 간신히 뻗어있던 나무들은 부러져 나뒹굴고 있지만.
모든 것이 스러져 비어버린 벌판이지만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이토록 애절히 느껴지는 외로움을. 쓸쓸함을. 그리고... 슬픔을.
결코 꿈이 아니었던 거다. 이 장소도. 그 소녀도.
그래. 이곳은...
“내가 스이긴토에게 처음으로 말을 건넨 장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