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lösung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그때마다 메마른 땅이 푸석거린다. 얕게 먼지가 피어 오른다.
어디로 가야 할지는 이미 알고 있다.
그 때 그녀가 울고 있던 곳. 이 세계의 중심. 이 부서진 세계에서 그나마 가장 온전한 장소. 구원을, 그리고 안식을 갈구하는 장소.
오래지 않아 도착할 수 있었다. 과거 교회였던 곳에. 이 역시 무너져 내려 건물의 잔해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폐허의 한가운데에 검은 인영이 있었다. 뒷모습만으로도 알 수 있는 자그마하고 가녀린 체구. 잔뜩 웅크린 모습이 더더욱 그녀를 작게 보이게 한다.
조용히 그녀를 불러보았다.
“스이긴토.....?”
그러자 흠칫 놀라는 소녀의 몸. 이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하얀 머리카락이 스르륵 흘러내린다.
“미...키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스이긴토.
“여긴... 어떻게.....?”
의아함과 불신을 담은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향해 천천히 다가가려 했다. 그러나 막 발걸음을 내딛은 순간이었다.
“오지 마!”
날카로운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는 스이긴토. 나는 멈추어 설 수 밖에 없었다.
“여긴 왜 온 거야.....? 나를... 나를 비웃으러 왔어?”
스이긴토의 얼굴은 참혹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나... 로젠메이든이 아니야. 이제는 너도 알고 있겠지? 나는 가짜에 불과했어. 그런 주제에 멋대로 착각하고 있던 거라고!”
흐느끼며 오열하는 스이긴토. 비록 눈물은 없지만, 울고 있지도 않지만 그렇게 보였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한걸음 앞으로 내딛었다. 그러나
“싫어!”
파앗!
그녀에게서 날아온 깃털이 나의 어깨에 틀어박혔다. 날카로운 아픔이 머리 속을 하얗게 만들었다. 신음소리조차 내지 못 하고 상처를 감싸 쥐며 몸을 웅크렸다.
“너도... 너도 나를 버리려는 거지? 그들처럼, 이제껏 그래온 것처럼.”
아니야, 라고 말하려 했지만 통증에 입을 열 수 없었다. 그저 간신히 후들거리는 두 다리에 힘을 주어 몸을 앞으로 내밀 뿐이었다.
파악!
이번에는 무릎이었다. 걸음을 내딛던 몸은 중심을 잃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래! 나는 쓰레기야. 불완전하다고! 그저, 그저 정크...”
스스로를 비하한다.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다. 그런 그녀가 안타까워 나는 고개를 들어 다시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피잉!
볼을 스쳐 지나간 깃털에 의해 주르륵 피가 새어 나온다. 위험했다. 급히 고개를 틀지 않았다면 그것이 노렸던 것은 하나밖에 남지 않은 내 눈이었을 테니까.
“아... 아아...”
그런데 스이긴토의 반응이 이상했다. 내 피를 보더니 부들부들 떨며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다.
“인간을 상처 입혔어.... 역시... 역시 나는 쓰레기....”
그렇구나. 그렇게 또 자책하는 거니? 안주할 곳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채로. 흔들리는 마음으로.
하지만... 하지만 말이야, 스이긴토.
나는 힘주어 몸을 일으켰다. 이전부터 온전치 않았던 다리는 이제 한쪽이 완전히 상해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손으로 바닥을 짚고 있는 힘껏 일어섰다.
그리고 그대로 스이긴토에게 걸음을 옮겼다.
“오... 오지 마!”
앞에서 거센 바람이 불어온다. 검은 깃털들이 흩날린다.
퍽! 퍼퍽! 파앗!
깃털들은 그대로 나에게 내리 꽂힌다. 그때마다 몸은 그 충격에 비틀거린다. 간혹 스쳐 지나간 깃털들은 옷을 가르고 피부를 찢어놓는다.
“그만둬! 다가오지 마!”
하지만 아프지 않다. 어찌 아프다고 할 수 있을까?
눈 앞의 소녀는 훨씬 큰 아픔을 겪고 있는 걸.
“시, 싫어... 싫어!!”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치는 스이긴토. 깃털의 기세가 순간적으로 한풀 꺾였다.
그리고...
나는 그대로 달려가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아.....?!”
놀람에 찬 스이긴토의 외마디 소리.
나는 더더욱 그녀를 으스러져라 끌어안았다.
내 품 안에 꼬옥 들어오고도 남는 스이긴토의 몸.
바들바들 떠는 몸은 힘을 잃고 축 늘어져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녀의 몸은 따스했다.
“어...째서.....?”
스이긴토가 가득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그 목소리를 채우고 있는 감정은,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그 감정은 무엇일까?
“바보구나, 스이긴토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두 눈은 놀람으로 인해 크게 뜨여있다. 적보라빛 아름다운 눈동자가 파르르 떨린다.
“나는 너를 동정하지 않아. 불쌍히 여기지도 않아.”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에게 말해주었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너는 강하니까. 지금껏 싸워왔잖아? 자신의 운명과. 그리고 자기 자신과.”
이렇게나 작은 몸으로. 이렇게나 가녀린 몸으로.
그녀는 계속 싸워왔다. 포기하지 않고, 주저앉지 않고 계속해서.
설령 다른 이들이 그녀를 업신여긴다 해도
그에 굴하지 않고 계속 싸워왔다.
“그렇지만... 다만 내가 안타까운 것은...”
하지만 그 와중에 그녀는...
“스이긴토. 너는 무엇을 바라는 거니?”
흠칫 하고 스이긴토는 몸을 굳혔다.
“너는 무엇을 얻기 위해 싸워온 거지?”
그래. 내가 진정 안타까운 것은 바로 이것이다.
곁에 있음에도 그녀가 알아주지 않은 것.
그래서 결국 그녀에게 힘이 되지 못한 것.
“네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무엇이지.....?”
그렇기 때문에 안타까운 것이다.
나의 마음이, 그리고 우리들의 마음이 그녀에게 전해지지 않았다는 것이.
“나는... 나는....”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앨리스가 되는 것? 정크가 아니게 되는 것? 아버님을 만나는 것?
아니야... 그게 아니야.
이미 알고 있잖아? 그것은...
나를 감싸 안아주는 다정함.
그래, 지금 내가 안긴 이 품처럼.
살결을 통해 전해지는 온기.
지금 느껴지는 따스한 체온처럼.
나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 그 넓고도 깊은 마음.
인간은 올 수 없는 이곳에까지 와 나를 찾아준 이 사람처럼.
눈빛만으로 알 수 있는,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는 그 마음.
알 수 있어. 지금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 아아... 아....”
다른 자매들처럼 웃고 떠들고.
넷이서 지낸 즐거운 나날.
같이 식사를 하고.
하루 세 번, 모두 모여 식탁에 둘러앉는다.
함께 생활을 영위하고.
일이 끝나면 서로 손을 잡고 집으로 향하거나, 혹은 옷을 사러 다 같이 밖에 나가거나.
“아아... 아... 아....”
그래. 내가 바란 것은 바로...
진실로 원한 것은 바로...
“아... 아흑.... 흐윽!”
내가 아플 때 부드럽게 이마를 짚어 열을 살피는 손길. 나를 걱정스레 바라보는 눈빛.
그 따스함. 그 다정함.
나는... 나는...
“흑... 흐윽... 흑.... 우아아아아아앙~”
그토록 애타게 갈구하던 그 사랑을 이미 받고 있었던 건가.
소리죽여 흐느끼던 울음소리는 이내 크게 터져 나왔다.
“으흐흐흑.... 으아앙~”
나는 그녀를 더욱 꼬옥 끌어안았다. 가슴이 촉촉이 젖어온다. 따스한 물기가 옷을 적시고는 내 가슴 속으로 스며든다.
“으아아아아앙~ 흐윽.., 흐아아앙~”
그동안 억눌러왔던 감정을 한꺼번에 토해내는 그녀의 울음은 그칠 줄을 몰랐다. 나는 그런 그녀를 부드럽게 안아줄 뿐이었다.
투욱. 투둑.
빗방울이 떨어져 내린다. 하늘을 가득 매운 먹구름이 비로 변해 내리기 시작한다.
스이긴토의 눈물이 그녀를 적시듯, 그녀의 마음을 투영한 이 세계에 비가 내리고 있다.
빗방울은 내게도 역시 떨어지고 있다.
눈가에 떨어진 빗방울이 물줄기가 되어 두 볼을 타고 흐른다.
흘러내린 물방울이 스이긴토의 얼굴에 뚝뚝 떨어진다.
마치... 눈물처럼.
쏴아아아.
비는 아직도 내리고 있다. 그만큼 그녀의 마음에 들어차있던 먹구름이 많다는 의미인 걸까. 그러나 정겨울 뿐이다. 마치 봄비처럼.
하지만 계속 비를 맞고 있을 수도 없는 일. 나와 스이긴토는 건물 잔해 속에서 비를 피하고 있다. 무너진 벽은 서로 맞대어져 훌륭한 안식처를 만들고 있었다.
젖은 옷을 벗어 말린다. 스이긴토에게 입었던 상처는 어느새 사라져 있다. 그녀의 심상이 변했기 때문이겠지.
그리고 우리들은 서로의 몸을 안고 체온을 함께 나누고 있다.
충분히 따듯해지자 스이긴토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잔잔한 목소리로 천천히 자신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녀의 탄생. 보아온 것. 들어온 말. 그녀가 가져온 감정.
처음으로 몸을 움직이게 되었을 때의 일. 처음으로 날개를 펄럭여 날아올랐을 때의 일.
그녀의 아버님. 자매들. 이제껏 만나온 사람들.
그녀가 행한 일. 그것이 좋은 것이건 나쁜 것이건 모두.
나는 이미 스이긴토의 기억과 조우하여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차분히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위로의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듣기만 할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만족하는 것인지 그녀는 은은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렇게 살아왔구나, 스이긴토는.”
모든 이야기가 끝났을 때 나는 그 말 한 마디를 했을 뿐이었다.
“응. 그렇게 살아왔어.”
스이긴토는 이 말 한 마디로 답했다. 다른 말은 없었다. 모든 것을 다 털어버린 후련한 표정을 지었을 뿐.
밖으로 나오자 어느새 비는 그쳐있었다. 맑고 푸른 하늘이 우리를 반겼다. 밝은 햇살이 내리쬐고 있다.
무너진 건물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러나 더 이상 폐허가 아니다. 잔해의 이곳저곳을 비집고 새싹들이 돋아나고 있으니까. 생명으로 가득 차 있으니까.
벌판은 싱그러운 초록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나는 스이긴토를 바라보았다. 스이긴토도 나를 바라보았다.
밝게 웃으면서 그녀에게 손을 내민다.
“그럼 돌아갈까?”
잠시 그 손을 내려다보던 스이긴토는 이내 그 하얗고 매끄러운 손을 들어 마주 잡아왔다.
“응! 돌아가자.”
스이긴토는 활짝 웃었다.
무척 눈부시고 아름다운 웃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