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ügel
“용서 못 해...”
작은 손이 꼬옥 쥐였다. 손톱이 파고 들어갈 정도로.
“용서 못 해...”
부르르 떨리는 주먹. 그 안에 깃든 것은 폭발 직전의 분노.
“용서 못 해!”
마침내 응축된 노기를 터트리는 외침과 함께 한 줄기 붉은 번개가 허공을 가로질렀다.
“큿!”
텐시는 순간적이나마 당황했다. 방금 전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빠르기로 자신의 눈앞에 다가온 금발의 소녀. 불끈 쥔 주먹이 얼굴을 가격하기 직전, 텐시는 황급히 몸을 틀어 거리를 벌렸다. 그러나 신쿠의 주먹은 비상식적인 각도로 휘어지며 계속 그녀를 쫒아왔다.
덜컥.
이번에도 역시 신쿠의 몸은 공격하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텐시의 하얀 깃털들이 그녀의 몸을 붙들었다.
“히나이치고를...”
그러나 이전과는 상황이 약간 달랐다.
“히나이치고를 돌려줘!”
폭발하듯 뿜어져 나오는 붉은 빛. 그 힘으로 깃털들을 떨쳐낸 신쿠는 다시금 텐시를 향해 돌진했다.
“건방진 녀석!”
하지만 비웃는 텐시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린 순간, 그녀는 등에 강한 충격을 받고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속이 뒤집히는 감각에 신쿠는 제대로 균형조차 잡을 수 없었다. 하얀 날개가 주욱 늘어나며 그런 그녀를 노리고 뻗어나갔다. 신쿠는 정신 없는 와중에도 본능적으로 막으려 했다. 멀쩡한 단 하나의 팔을 앞으로 내밀어 붉은 방패를 만들어냈다.
콰가가가!
하얀 빛과 붉은 빛이 맞부딪쳤다. 신쿠는 팔이 저릿저릿하는 것을 느꼈지만, 이를 악물고 버티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도달해있었다.
콰앙!
“아아아악!”
굉음과 함께 꽃잎들은 짓이겨지듯 사그라지고, 방패를 받치던 신쿠의 팔이 산산이 터져나갔다. 파편들은 다시는 모을 수 없을 만큼 사방으로 흩어졌다.
“크...크윽...”
“신쿠!”
떨어지는 그녀를 스이세이세키가 얼른 품에 받았다. 신쿠의 모습은 양손이 잘려나간 스이세이세키보다 더 참혹했다. 부러진 채 덜렁거리는 오른팔. 어깻죽지만 남은 왼팔. 두 팔을 모두 잃은 신쿠는 오기만이 남겨진 눈빛으로 위를 노려보았다.
그곳에는 하얀 날개를 활짝 펼친 소녀가 의외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놀라운걸. 죽은 그 녀석에게 보내고 있던 힘을 다시 자신에게 되돌린 것만으로 이전보다 빠르기는 세 배 이상, 출력은 두 배 이상. 과연... 비록 수준미달이라 해도 아버님이 만드신 인형인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소녀는 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그 녀석을 부수어버릴 것을 그랬잖아? 그럼 그나마 조금은 시시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어쩌면 너희가 나를 쓰러뜨릴 확률이 0.0001%라도 되었을지도?”
“크윽...”
칭찬인지 조롱인지 알 수 없는 텐시의 말에 신쿠는 한이 서린 신음을 토해냈다.
“뭐, 좋아. 어째서 패배한 상대를 살려두는 바보짓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긴 하지만... 그런 자신의 어리석음이나 후회하라고!”
한차례 광폭한 날개짓과 함께 텐시의 앞에 무수한 흰색깃털들이 나타났다. 깃털들은 폭우처럼 신쿠와 스이세이세키를 노리고 쏟아졌다. 절체절명의 상황. 두 자매에게 막을 수 있는 상황은 더 이상 없다. 그저 할 수 있는 것은 두 눈을 꼬옥 감고 마지막을 받아들이는 것뿐.
바로 그 순간이었다.
펄럭!
봄바람이 산들거리듯 가벼운 날갯짓. 부드럽게 감싸는, 그러나 휘몰아치는 바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피부에 닿는 날카로운 감촉도. 몸을 꿰뚫는 격심한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두 자매는 의아함을 느끼며, 아직까지 불안으로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살며시 들어올렸다. 그러나 시야에 비치는 것은 눈을 감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어둠뿐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 밤보다 짙은 검은색. 한참 후에야 두 자매는 그 어둠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스이긴토!”
검은 드레스의 소녀는 하나뿐인 검은 날개를 활짝 펼쳐 모두를 감싸고 있었다. 순백의 색은 어둠에 가로막혀 아무것도 물들이지 못 했다. 두 자매의 눈에 소녀의 가녀린 등이 비쳐졌다. 그 뒷모습은 비록 자그마했지만 그 무엇보다 굳건해 보였다.
하지만 그녀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소녀는 분명 그녀들과 서로 적이었을 터. 어째서 도와주는 것인가?
“스이긴토, 왜.....?”
“히나이치고는?”
스이긴토는 스이세이세키의 의문에 답하지 않았다.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시선을 앞에 고정시킨 상태로, 지금은 보이지 않는 자매의 안부를 물었다.
“히...히나는...히나는...”
스이세이세키가 울먹이자, 스이긴토는 말을 잘랐다.
“그만. 이야기하지 않아도 알겠어. 내가 늦어버린 거구나.”
스이긴토가 준의 집에 도착했을 때 그 곳은 이미 텅 비어있었다. 발견한 것은 오직 하나. 바닥에 이리저리 흩어져있는 하얀 깃털들. 이미 늦어버린 것을 깨달았지만 최악의 상황만은 아니기를 바라며, 최대한 빨리 N의 필드로의 흔적을 쫒았다. 그러나 그녀의 능력으로는 시간을 맞출 수 없었던 것이다. 무한의 세계 속에서 가보지도 않은 특정한 하나의 세계를 추적한다는 것은 그녀로서도 벅찬 일이었다. 오히려 지금이나마 온 것도 천운이 아니었다면 힘들었으리라.
“이런, 이런... 이게 뭐야?”
상념을 깨고 비웃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봤더니 실패작 아냐? 그대로 죽어버릴 줄 알았는데, 근처에 솜씨 좋은 인형사라도 있었나보지? 쓰레기 주제에 목숨 한 번 질기네.”
모욕적인 언사에도 스이긴토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살아났으면 그대로 구석에라도 숨어있을 것이지. 그랬다면 최소한 ‘문’이 열리는 때까지 만이라도 구차한 명을 더 이어갈 수 있었을 것을. 날개도 한쪽밖에 없는 추한 몰골로 무슨 낯짝으로 나타난 거야?”
‘문.....?’
알 수 없는 텐시의 말에 신쿠는 속으로 의문을 삼켰다.
“설마 실패작 주제에 신성한 앨리스 게임에 끼어들 생각? 뻔뻔스러운 녀석 같으니! 너 따위가 고귀한 소녀, 앨리스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앨리스 같은 건... 관계 없어.”
“뭐.....?”
마침내 잠자코 있던 스이긴토의 입이 열렸다. 의외의 말에 텐시는 눈을 치켜떴다.
“나는 다만... 이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해야 할 말이 있을 뿐이야. 확실히 네 말대로야. 나에게 앨리스 게임에 끼어들 자격은 없어. 하지만... 최소한 이 아이들에게 그 말을 하기 전까지는...”
칠흑의 날개가 활짝 펼쳐졌다. 비록 한쪽뿐 이었지만.
“그 누구도 이 아이들에게 위해를 끼칠 수 없어!”
강인한 의지를 담아 외치는 스이긴토의 목소리. 그러나 그것을 듣는 텐시의 반응은 냉담했다.
“....하! 어이가 없군. 아직까지 주제파악을 하지 못 한 거야?”
텐시는 기가 찰 수밖에 없었다. 상대는 이미 그녀에게 일방적으로 패한 존재. 더군다나 지금의 그녀는 그 당시보다 훨씬 강하다. 설령 다시 싸운다 해도 결과는 불변. 달라질 것은 상대가 더욱 처참하게 박살날 것이라는 사항 .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그녀를 막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어리석기 짝이 없는 반응에 분노조차 나지 않았다.
“어디 한 번 받아봐. 내 공격을!”
순백의 날개가 펼쳐지며 깃털들이 폭사되었다. 그에 응하듯 스이긴토는 자신의 앞에 검은 장막을 펼쳤다. 막 흑과 백이 하나로 충돌하려는 순간이었다.
“그만둘래.”
바로 그 직전, 하얀 깃털들은 덧없이 사그라졌다.
“무슨.....?”
“뭐어, 지금 여기서 너희 모두를 끝장내도 상관은 없지만... 그래서는 곤란하지.”
의문을 담은 세 쌍의 눈동자가 모두 한 소녀를 주시했다.
“이 곳은 앨리스가 부화하기 위한 성지(聖地)가 아니야. 최후의 앨리스 게임이 펼쳐질 장소로는 적당하지 못 해. 마지막 싸움은 곧이어 탄생할 완전한 소녀, 앨리스를 축복하기 위한 의식. 그에 어울리는 곳에서 행해져야만 하지.”
순백의 소녀는 천천히 날개를 접었다.
“본래는 한 녀석만 살려두고 ‘그곳’에서 마지막을 장식할 생각이었지만... 생각이 바뀌었어. 그래서는 너무 시시하니까. 마지막은 그에 어울리게 화려해야지. 새로운 시작, 앨리스의 탄생은 화려해야만 해.”
주변공간에 금이 가며 부서져 내리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너희 모두를 살려둘게. ‘그 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단단히 준비해서 오도록 해. 너희 모두를 상대해서, 철저히 모두를 짓밟아서, 너희들이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해줄 테니까. 나야말로 진정한 앨리스라는 것을 보여주겠어!”
그녀의 뒤쪽에 하얀 구멍이 생겨났다. 소녀는 그 안으로 천천히 몸을 디밀었다.
“너무 늦지 않도록 해. 기다리다 지루해져서 먼저 ‘문’을 열어버릴지도 몰라. ‘독(毒)’이 흘러넘쳐서 세상을 썩게 만들어 버릴 거야!”
파아아아앗!
순백의 날개 끝자락조차 사라지고, 소녀는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남겨진 세 인형의 머리 위로 하얀색 파편들이 눈처럼 떨어져 내린다.
그리고 눈이 그쳤을 때, 세 인형은 준의 집 거실에 서 있었다.
“......”
모두들 아무런 말이 없었다. 신쿠도 스이세이세키도 스이긴토도. 모두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지 않고 침묵할 뿐이다.
터벅터벅.
그 때 무언가를 발견한 신쿠가 한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무릎을 굽혀 바닥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그것은 분홍색 천조각이었다. 본래라면 누군가의 머리를 묶는 리본의 일부였을 천조각.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자매의 흔적.
두 팔이 모두 망가진 소녀는 차마 줍지도 못 하고, ‘유품’이 되어버린 그 천조각을 그저 하염없이 바라만 보았다.
“당신 때문에... 당신이 조금만 더 일찍 왔더라면!”
그 때 들리는 원망석인 외침. 스이세이세키는 남아있는 손목만으로 스이긴토의 몸을 흔들어댔다.
“어째서 좀 더 일찍 오지 않은 거예요? 그랬다면, 그랬다면 히나이치고는!”
억지라는 것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스이세이세키는 누군가를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참혹한 현실에서 조금이나마 눈을 돌리기 위하여.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스이긴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원망을 받아주었다.
“그랬다면... 그랬다면...”
“그만둬, 스이세이세키.”
흐느끼는 스이세이세키의 말을 단호한 목소리가 끊었다.
“어차피 달라지는 건 없었을 거야. 우리는... 그래. 인간의 손에 잡혔다가 순간적인 변덕에 의해 살아난 나비 정도에 지나지 않아. 무엇보다도 도와주러 온 이에게 그게 무슨 태도야? 그녀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마. 우리들이 약했을 뿐이니까.”
“신...쿠...”
뒷모습만 보이는 신쿠의 어깨는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이내 감정을 추스르듯 고개를 좌우로 잠시 흔들고는 몸을 앞으로 돌렸다.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어.”
푸른 눈동자는 비록 살짝 부풀어있었지만 냉정을 되찾고 있었다.
“텐시는 말했어. ‘그 곳’으로 오라고. 그리고 만약 오지 않으면 ‘문’을 열어버린다고. 세상을 썩게 만들 거라고 했어. 하지만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어. 혹시 누구 알고 있어?”
“모...몰라요. 스이세이세키는 그런 거...”
스이세이세키는 시선을 피했다. 신쿠의 눈이 다음에는 스이긴토를 향했다. 그러나 스이긴토 역시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 나 역시 아는 바가 없어.”
“그런가...”
신쿠는 고개를 수그렸다. 하지만 그 순간 스이긴토는 주저하며 말을 꺼냈다.
“하지만...”
“.....?”
“알고 있을 만한 사람이 하나 있어.”
선명한 오렌지빛을 떠올리며 스이긴토는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