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tschluss
도심에서 떨어진 장소에 자리 잡은 폐빌딩. 아는 이들에게는 ‘가람의 당’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곳. 한밤과 새벽의 사이에 위치한 시각은 본래라면 하루의 일을 모두 정리하고 휘프노스의 품에 몸을 맡겨야할 때. 하지만 요 며칠간 가람의 당의 불빛은 꺼질 줄을 몰랐고, 그것은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이제는 익숙한 장면이 펼쳐져 있다. 초조한 마음으로 공방문을 응시하는 인영들. 저 문이 닫히고 벌써 수시간이 지났건만, 모두의 시선은 그쪽에 고정된 채 움직일 줄 몰랐다. 그러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마침내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금 문이 열렸다. 제일 먼저 밖으로 걸어 나온 사람은 축 늘어진 상태의 토우코였다.
“후우... 겨우 끝냈어.”
평소 같지 않은 기운 없는 목소리. 무리도 아니다. 그녀는 일주일 가까이 제대로 잠든 적이 없으니까. 퀭한 눈 그리고 그 밑의 짙은 다크써클이 그녀의 피로도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그런 그녀의 뒤를 따라 채 허리에도 못 미치는 작은 키의 두 소녀가 나란히 걸어 나왔다. 한쪽 구석에 앉아있던 소년이 그녀들을 발견하고 벌떡 일어섰다.
“신쿠! 스이세이세키!”
“준? 여긴 어떻게.....?”
소년은 바로 그녀들의 미디엄인 준이었다. 뜻밖의 만남에 놀란 그녀들에게 스이긴토가 다가왔다.
“내가 데려왔어. 그에게는 너희들에 대한 권리와 책임이 있으니까.”
“사정은 스이긴토에게 들었어. 히나...이치고의 이야기도.”
바로 어제 일어난 비극을 다시금 떠올리며 좌중은 다시금 숙연해졌다.
“...그래도 다행이야. 너희들이라도 무사해서. 몸은... 괜찮아?”
“응, 그래. 모두 고쳐졌어.”
두 팔을 들어 올려 보이며 신쿠는 준을 안심시켰다. 그녀뿐만이 아니다. 스이세이세키 역시 멀쩡한 양손을 꼼지락거리고 있다. 부서졌던 그녀들의 몸은 그렇게 되기 이전의 상태로 완벽히 돌아가 있었다. 그 모든 것은 눈앞의 인형사, 아오자키 토우코의 위업. 스이긴토가 둘을 데리고 오자, 토우코는 채 설명을 듣기 전에 막무가내로 공방 안으로 끌고 들어가 수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신쿠도 스이세이세키도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녀는 전설로 일컬어지는 인형사의 최고걸작 둘을 불과 수시간 만에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모습으로 수리해낸 것이다. 신쿠 등으로서는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것은 그녀가 최소한 인형이란 분야에 있어서 만큼은 로젠 이상이라는 증명이기도 했다.
“토우코라고 했지?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하도록 할게. 그대의 호의 잊지 않겠어.”
“고...고마워예요.”
“아아... 인사는 됐어. 인형사로서 부서진 인형을 두고 보지 못한 것뿐이니까. 그보다 나를 찾아온 목적은 따로 있을 텐데? ‘그 곳’에 관해 알고 싶다고 했지?”
신쿠와 스이세이세키 그리고 스이긴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그녀들이 토우코를 찾은 이유는 그 때문이었으니까. 텐시가 언급한 의미를 알 수 없는 단어들. ‘그 곳’, ‘문’ 그리고 ‘독(毒)’. 스이긴토는 굳게 믿었다. 앨리스 게임의 ‘룰’에 있어서 자신보다 더 세세히 알고 있던 토우코라면 필시 텐시의 말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 거라고.
“좋아! 알려주도록 하지. 미키야, 시키, 아자카. 너희들도 잘 들어둬. 이런 상황까지 온 이상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니까.”
머릿속을 정리하려는 듯 한차례 심호흡을 한 토우코는 말을 이었다.
“그럼 이야기해보도록 할까. 이백년 전 세 가문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원대한 계획을. 그리고 그 뒤에 감춰진 진실에 대해서.”
“...결국 모든 것은 억지력을 막기 위해서야. 탄생한 앨리스는 근원의 일부이니만큼 억지력으로도 어찌할 수 없을 거야. 그러나 문제는 미디엄. 본래 미디엄은 로젠메이든의 억지력을 대신 받는 존재. 로젠메이든이 앨리스가 되는 순간 억지력은 이전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증가한다. 그 힘을 고스란히 받게 된다면, 미디엄은 그대로 짓눌려 버리겠지. 뿐만이 아니야. 앨리스를 따라 세계를 벗어나려하면 미디엄 자신에 대한 억지력 또한 작용하게 돼. 배가된 억지력을 견딜 수 있을 리 없어. 물론 앨리스가 억지력을 막아줄 수도 있을 테지. 하지만 앨리스의 능력은 미지수. 로젠도 앨리스가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게 될 지 알 수 없었을 거야. 그조차 도달하지 못한 경지의 존재니까. 운이 좋으면 미디엄에게 작용하는 억지력 정도는 상쇄시킬 수도 있지만, 그러지 못할 수도 있어. 그래서 만들어진 안전장치가 바로 대성배. 대성배의 진정한 기능은 두 가지. 첫째는 그 안에 충만한 마력을 이용해 미디엄이 받게 될 앨리스에 대한 억지력을 감쇄시킨다. 둘째는 앨리스가 빠져나간 구멍을 고정시켜 미디엄이 통과할 문을 만들어서 미디엄 자신에 대한 억지력을 작용하지 않게 한다. 자아, 이것이 바로 마지막 앨리스 게임이 대성배에서 치러져야 하는 이유야.”
기나긴 이야기가 끝났다. 수백년에 걸친 비화의 무게에 모두들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직접 관련되어 있는 로젠메이든들의 놀라움은 특히 컸다.
“...몰랐어. 설마 그런 것이 있을 줄이야. 앨리스의 탄생만이 전부가 아니었구나.”
“모르는 것이 당연해. 만약 너희들이 미리 알고 있었다면 앨리스 게임은 처음부터 후유키시에서 이루어졌을 거야. 그렇게 되면 성배전쟁과 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어. 무엇보다도 세 가문에게 자신들이 이용당한 사실이 알려져서는 안 되니까. 로젠은 그런 상황이 벌어지는 것을 막고자, 일정 개수 이상의 로자미스티카를 얻어야만 진실을 알 수 있도록 하는 식으로 프로텍터를 걸었을 거야.
“아아, 그런가.”
신쿠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올바른 말이었다. 그녀 자신이라 할지라도 후유키시에 몸을 두었을 것이다. 로젠메이든들에게 있어 가장 머무르고 싶은 곳은 앨리스가 부화할 장소인 그곳일 테니까. 그뿐이 아니다. 최후의 싸움이 벌어질 그곳을 미리 거점으로 잡는 것이 승리하기에도 유리할 터.
“그리고 ‘독(毒)’이라는 것은 성배 안에 들어있는 ‘이 세상 모든 악’이라는 거지?”
“그래. 순수한 백(白)이었던 성배는 3차 성배전쟁 때의 사건으로 인해 순수한 악(惡)으로 변질되어 버렸어. 그렇게 되어버린 이상 성배가 열리는 순간 그것이 쏟아져 나와 버려. 세상은 악으로 물들어버리게 되겠지.”
“과연... 세상이 썩어버린다는 것은 그런 뜻이구나.”
스이긴토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신이 아득해질 따름이었다. 단순히 궁극의 소녀를 탄생시키기 위한 의식, 앨리스 게임은 어느새 세계의 운명을 결정짓는 스케일이 되어버리고 말았으니까.
“하지만 알 수 없는 것은... 과연 성배를 기동시킬 수 있느냐의 여부야. 영령 등의 역할을 앨리스가 대신하기 때문에 앨리스 게임에 필요한 마력은 성배 전쟁의 절반 수준. 하지만 그렇다 해도 4차 성배전쟁이 끝난 지 십년도 되지 않았어. 필요한 마력을 모으려면 앞으로 이십여년은 더 있어야 해. 그래서 나는 한가할 때 시키를 시켜 후유키시의 영맥을 끊어버리는 것으로 만일의 사태를 막으려했었는데... 그 텐시라는 아이는 어쩔 생각이지? 그녀의 말대로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문’을 여는 것이 가능하다는 뜻이잖아?”
제 아무리 토우코라 해도 알 리가 없었다. 전회의 성배전쟁은 불완전하게 종결되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로 인해 지금 후유키시의 대성배에는 앨리스 게임을 완성하는 데에 충분하고도 남을 마력이 가득하다는 것을.
“그녀의 말의 진위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겠죠. 다만...”
지금까지 침착하게 경청하고 있던 미키야가 말을 꺼냈다. 그리고 스이긴토를 바라보며 물었다.
“스이긴토. 너는 어떻게 할 거야? 엄밀히 따지면 너는 로젠메이든이 아니잖아. 앨리스 게임이란 의식의 당사자가 아니야. 굳이 텐시라는 아이와 싸울 필요는 없어.”
“미키야, 나는...”
스이긴토는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들어 주변을 돌아보았다. 자신에게 새 생명을 준 인형사. 차가운 얼굴이지만 따듯한 마음을 가진 기모노 아가씨. 투덜거리지만 배려 깊은 소녀. 그리고...
스이긴토는 마음을 가다듬는 듯 살며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는 미키야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 텐시를 막고 싶어. 물론 나는 앨리스 게임과는 관계없어. 그 아이의 말이 거짓일지도 몰라. 하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미키야의 검은 눈을 응시하는 스이긴토의 적보라빛 눈동자는 결의로 가득 차 있었다.
“나... 지키고 싶어. 미키야가 있는 이 세계를. 시키, 아자카, 토우코가 있는 세상을. 모두를... 지키고 싶어. 나에게 너희들은 너무나 소중한 존재인걸.”
스이긴토의 대답에 미키야는 빙그레 웃었다.
“알았어. 그럼 나도 도울게. 같이 후유키시로 가자.”
뜻밖의 말에 스이긴토는 잠시 이해를 못한 듯 두 눈을 깜박였다. 하지만 이내 그 말의 의미를 깨닫고는 경악의 비명을 질렀다.
“미키야! 그게 무슨 소리야?!”
“하지만... 그렇잖아? 세계가 멸망할지도 모른다며. 그렇다면 나는 최소한 살아날 확률이 더 높은 쪽에 걸고 싶어. 비록 나 자신은 아무런 힘이 없지만... 스이긴토는 미디엄인 내가 가까이에 있어야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 있으니까.”
“하, 하지만!”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적이는 미키야를 스이긴토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확실히 그가 이야기하는 것은 정론. 그러나 동시에 그 자신에게 위험이 따르는 방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남자는 따라가겠다고 하는 것이다.
“오라버니, 아무리 그렇다 해도...”
“좋아! 그럼 나도 함께 간다.”
“시키!”
만류하려는 아자카의 말을 끊고 시키가 끼어들었다. 말리기는커녕 부채질하는 시키의 말. 스이긴토와 아자카는 그런 그녀를 기가 막힌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확실히 터무니없다는 것은 나도 알아. 하지만 아자카. 잘 알고 있잖아? 아, 스이긴토는 아직 잘 모르려나. 미키야는 말야. 한 번 마음먹은 일은 어떻게 해서든 해버리고 만다고. 설령 두 다리를 부러뜨려 놓아도 따라가고 말걸. 그럴 바에야 보디가드로 누군가가 함께 가는 편이 훨씬 나아.”
“하아... 어쩔 수 없군요. 그럼 저도 가도록 하지요.”
아자카는 시키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그 동안의 경험으로 인해 이미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한심할 정도로 느긋한 그녀의 오라버니가 일단 결심한 일에는 얼마나 저돌적이 되는지를. 말리지 못 한다면 따라줄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미키야를 지키는 역할에 빠지고 싶지 않으니까.
두 여성이 이렇게 나오는 마당에 스이긴토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은 감사를 표하는 것 뿐.
“모두들... 고마워.”
“그런 인사를 받을 이유는 없어요. 모두 오라버니를 위해서니까.”
“게다가 세계의 위기라는데 큰일이잖아? 우리들이 살기 위해 싸우는 셈이기도 해.”
별 것 아니라는 투로 대답하는 시키와 아자카. 결코 짧지 않은 동거생활이 가져다 준 정(情)은 지금 이 순간 네 명을 하나로 묶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신쿠가 나섰다.
“스이긴토, 고마워. 본래 우리들의 싸움인데도 협력해주어서.”
절대적으로 전력이 부족한 지금 상황에서 스이긴토의 참가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녀는 로젠메이든 넷을 상대로 우세한 싸움을 펼친 적이 있는 존재니까. 비록 그 중 셋이 정상적인 힘을 내지 못 하는 상황이었지만, 그녀가 강한 힘을 지녔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신쿠는 과거의 적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그러나 스이긴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어.”
“.....?”
의아한 표정의 신쿠를 스이긴토는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너희들은 어떻게 할 거지?”
“무슨 소리지, 그건?”
“앨리스 게임의 엔딩은 앨리스가 미디엄과 함께 문을 열고 근원으로 돌아가는 거야. 나에게는 불가능해. 나는 로젠메이든이 아니니까. 앨리스가 될 수 없어. 하지만 너희들은 다르지.”
스이긴토는 신쿠와 스이세이세키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냉정한 이야기지만 스이긴토는 거침없었다.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하는 사항이었기에.
“싸움이 앨리스 게임의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이상, 텐시를 쓰러뜨린다는 것은 곧 너희 중 하나가 앨리스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해. 텐시에게 하나가 당한 상황이라면 남은 하나가 자동적으로 앨리스가 되겠지. 둘 모두 남은 상태라 해도 로자미스티카의 개수는 6:1이야. 만약 6개를 가진 이가 나머지 하나도 빼앗아 앨리스가 되어 문을 열고자 한다면, 막는 것은 불가능해. 텐시보다 강할 터인 상대를 막 싸움을 끝낸 우리들이 막아낼 수 있을 리 없어.”
“당신, 설마 우리들을 의심하는 건가요?”
스이세이세키가 화를 내려했지만, 신쿠는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를 제지했다. 그런 스이세이세키를 스이긴토는 터무니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의심? 그런 복잡한 게 아니야.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뿐이지. 너희들은 모두 앨리스가 되기를 바라고 있어. 그것은 얼마 전까지 스스로를 로젠메이든이라 착각하고 있던 내가 아주 잘 알고 있어. 너희들이 그 소망을 버릴 수 있겠어? 태어날 때부터 각인된 소망. 존재 그 자체의 의의인 그것을 버리고 세계를 택할 수 있어? 너희들이 제2, 제3의 텐시가 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어!”
잔혹한 가정이지만 사실이다. 세계를 그리고 소중한 이들을 지키길 바라는 스이긴토로서는 최악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스이긴토의 추궁이 끝나자 신쿠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녀는 고운 아미를 찡그리며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준.”
“앗, 왜... 왜 그래?”
분홍빛 입술이 열리며 가만히 소년을 불렀다. 무거워진 분위기에 몸이 굳어있던 준은 갑작스러운 부름에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그런 소년을 신쿠는 그윽한 푸른 눈동자로 응시했다.
“준... 어떻게 하기를 원해?”
“에? 그... 그건...”
뜻밖의 질문에 준은 말을 더듬거렸다. 그로서는 솔직히 지금의 상황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다만 한 가지.
“으음... 어쨌건 앨리스 게임이 세계를 멸망시킬 수 있다는 거지?”
신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앨리스가 과연 무엇인지, 근원이라는 것은 또 무엇인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주저하며 그러나 단호하게 준은 말했다.
"그런 것이 그렇게 중요한 거야? 함께 식사를 하고, 그 후에는 다 같이 TV로 킁킁을 보고... 그런 일상을 버릴 만큼? 누나도 토모에도 모두 없어져버려도 좋을 만큼? 나는 그런 건 싫어!“
준은 얼마 전에야 평범한 생활의 행복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을 감싼 껍질을 깨고 나온 후에야 그 껍질이 실은 자신을 보호하고 있던 것이 아니라 가두고 있던 우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 만큼 그는 일상의 소중함을 이 자리의 누구보다 절실히 알고 있었다.
“그렇구나. 그러면 나 역시 앨리스가 되는 것을 포기하겠어.”
선선한 신쿠의 말에 오히려 준과 스이긴토가 놀랐다. 그녀가 얼마나 앨리스가 되기를 소망하는지 둘은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
“너... 그거 진심이야?”
“어머? 하인이 이렇게까지 곤란해 하잖아. 아랫사람을 배려하는 것은 주인된 자의 기본소양이라고.”
“누가 하인이냣! 아, 아니 이게 아니라... 정말 그래도 괜찮은 거야?”
순간 발끈하려던 준은 자신이 휘말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얼른 본론으로 돌아왔다. 다시 도도한 표정이 된 신쿠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물론이야. 게다가 알고 있잖아? 내가 추구하는 앨리스는 지금 이야기하는 앨리스와는 다르다는 것을.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앨리스가 되어 보이겠어!”
“훗... 너 답구나, 신쿠.”
스이긴토는 피식 웃었다. 생각해보면 눈앞의 소녀는 아무것도 몰랐던 시절에조차 멋대로 앨리스 게임의 룰을 어길 정도의 존재. 스스로 자기만의 앨리스 게임을 이끌어 온 존재인 것이다. 혹시나하고 우려했던 것이 허탈해질 뿐이다.
“그럼 스이세이세키. 너는 어떻게 할 거지?”
모두의 시선이 마지막 한 명에게 향했다. 갑작스럽게 주목받은 스이세이세키는 움찔 몸을 떨다가 주먹을 꼭 쥐고 외쳤다.
“스...스이세이세키도 오래 전에 결심했어요! 소중한 이들을 해치면서까지 앨리스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그 말대로야. 오래 전에 스이세이세키는 자신의 결의를 우리에게 말해준 바가 있어.
신쿠까지 보증하자, 스이긴토는 마지막 걱정을 풀어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이로써 두 집단의 화합을 가로막는 장벽은 사라졌다. 토우코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뼉을 짝 쳤다.
“자아, 이걸로 동맹성립인가. 텐시가 준 기한이 언제까지인지는 모르지만, 일단 오늘은 푹 쉬도록 해. 컨디션이 다들 엉망일 테니까. 결전의 날은 내일이다. 만반의 각오를 다지도록!”
토우코의 선언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가장 먼저 손을 내민 것은 미키야였다. 무릎을 굽히고 내민 그의 손에 스이긴토는 자신의 작은 손을 포갰다.
시키와 아자카도. 신쿠와 스이세이세키 그리고 준 역시 손을 포갰다. 모두는 입을 모아 소리쳤다.
“세계를 지키자!”
지금 조용히 멸망의 위험이 도래하고 있다.
누구 하나 알아주는 이 없건만, 그들은 뭉쳐 일어섰다. 재앙을 막기 위하여.
동방의 작은 땅, 낡은 폐건물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저기.”
“왜 그러지, 스이긴토?”
“..미...”
“응? 방금 뭐라고 했어?”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래도 큰일을 앞둔 지금 꺼낼 이야기는 아닌 것 같네.”
“무슨 말인데 그래예요?”
“....다음에 이야기해 줄게.”
“흥! 역시 스이긴토는 이상해예요!”
‘그래... 다음에 이야기해 줄게.’
‘이 싸움이 끝나고... 모두 살아 돌아오게 되면... 그때는 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