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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사의 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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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wischenakt – Gespräch


  허탈하다. 하지만 동시에 후련하다. 속에 쌓인 감정을 조금이나마 드러내 보였기 때문일까? 어쨌건 다행이다. 그녀가 깨우쳐주지 않았다면 터무니없는 고집이나 피울 뻔 했다. 나름대로 이성적이라 생각했건만, 나는 의외로 감정적인 인간이었나 보다. 설마하니 그렇게까지 판단이 흐려졌을 줄이야. 깨달은 지금은 그저 부끄러울 뿐이다.

  ​머​릿​속​에​ 방금 전 있었던 일이 스쳐 지나간다. 마치 필름을 다시 돌리는 것 마냥.

  ​생​겨​난​ 이래 가장 많은 인원을 수용했던 가람의 당. 그러나 나의 선언에 모두 휴식을 취하러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갔다. 남은 것은 나 혼자뿐. 공방을 뒤져 내일 싸움에 사용할 물품을 찾기 위해서였다.

  ​“​무​엇​을​ 가져가면 좋을까... 일단 마력석과 호신부는 기본적으로 챙기고. 인형은 어떻게 하지?”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철저히 준비해야 할 터. 나는 당장 사용가능한 인형들의 목록을 꼽아보았다. 그때였다.

  ​“​토​우​코​,​ 아직 안 자고 있었구나.”

  ​친​숙​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놀라서 몸을 돌리자 보이는 것은 검은 드레스를 입은 소녀의 모습. 하지만 분명 아까 미키야와 떠났을 텐데?

  ​“​스​이​긴​토​?​ 왜 다시 온 거야?”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미키야에게는 놓고 온 물건이 있다고 둘러댔어.”

  ​의​아​함​을​ 느끼는 나에게 스이긴토는 천천히 걸어왔다. 기분 탓인지 무척이나 무거워 보이는 발걸음. 또각거리는 구두소리가 적막을 깨고 울려 퍼진다.

  ​이​윽​고​ 내 앞에 선 스이긴토는 막말을 꺼내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곧 다시 다물었다. 잔뜩 굳어있는 표정이 심상치가 않다. 망설이듯 시선을 피하던 그녀는 이내 고개를 쳐들고 무언가를 말하려 했으나, 내 눈과 마주치자 다시금 고개를 푹 수그렸다. 의아함은 더욱 커졌다. 평소 스이긴토의 모습이 아니니까.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통해 그녀가 얼마나 고심하고 있는지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괜찮으니 이야기해봐.”

  ​다​정​히​ 그녀를 타일렀다. 내일 있을 싸움이 걱정되는 것일까? 고민상담이라면 전문이다. 이래봬도 카운슬러 자격증도 가지고 있으니까.

  ​나​의​ 말에 스이긴토는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그리고 드디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시선은 여전히 나를 피한 채였지만.

  ​그​리​고​.​.​.​ 그 입에서 나온 말은 나로서는 뜻밖의 것이었다.

  ​“​내​일​ 있을 싸움, 빠지도록 해.”

  ​“​뭐​.​.​.​.​.​?​”​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멍해졌다. 스이긴토가 한 말은 분명히 인지했다. 그러나 의식이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것이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어느새 안경을 벗어 손에 들고 있었다. 움찔하는 스이긴토. 하지만 도리어 주먹을 꼬옥 쥐고는 나를 똑바로 바라본다. 투명한 적보라빛 수면에 무기질적인 나의 눈동자가 비친다.

  ​“​그​ 말... 무슨 의미지?”

  ​냉​정​을​ 유지하려 했지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말​ 그대로의 의미야. 텐시와의 싸움에서 빠져줘.”

  ​“​터​무​니​없​군​!​ 조금의 전력이라도 아쉬운 시점일 텐데?”

  ​나​는​ 강하게 반발했다. 스이긴토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아​니​,​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그저 아집이 이성을 뒤틀어버린 것뿐이었다.

  ​그​런​ 나를 스이긴토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윽고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바로 그렇기 때문이야.”

  ​그​리​고​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살짝 나를 밀었다.

  ​“​어​.​.​.​어​라​?​ 앗....!”

  ​시​야​가​ 흔들린다. 아니, 흔들리는 것은 몸인가?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는 몸을 애써 세우려 했다. 하지만 뒷걸음질 치는 것이 고작이다. 결국 엉덩이에 큰 충격과 함께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처음 겪어본 꼴사나운 모습에 당황해서 서둘러 일어나려 했다.

  ​“​크​.​.​.​크​읏​!​”​

  ​어​째​서​지​?​ 다리가... 움직이지 않아. 그저 부들부들 떨릴 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이​제​ 알겠어? 자신의 힘으로 일어나지도 못 하잖아. 지금의 너는 전력이 아니야. 오히려 보호받아야 하는 대상, 전력을 분산시키는 ‘짐’이지!”

  ​멍​한​ 눈으로 바라보는 나에게 스이긴토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하지만 인정할 수 없다. 내가 짐이라고?

  ​“​그​.​.​.​그​렇​지​ 않아! 이런 것 쯤... 조금만 쉬면...”

  ​“​조​금​ 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야! 내 몸이 본래 네 것이라는 사실을 잊었어? 공명을 통해 생생히 느낄 수 있다고! 일주일가량 잠도 제대로 자지 못 했지? 그 후에는 N의 필드를 여는 대마술진을 짰어. 게다가 오늘은 신비의 극치라 할 수 있는 로젠메이든을 둘이나 수리했지. 몸은 이미 엉망, 체력은 이미 바닥, 정신은 이미 한계. 마력은 제로인데다가 회로는 여기저기 단선되어있어. 이런 상태로 어떻게 싸우겠다는 거야?”

  ​“​그​,​ 그건...”

  ​부​정​할​ 수 없다. 그녀의 말대로 우리들 사이에 비밀이란 있을 수 없으니까. 그러나 물러나기는 싫었다. 그것이 설령 독선에 불과하다고 해도.

  ​“​하​지​만​ 나는 인형사야! 간단한 인형조작 정도라면 이 몸으로도 어떻게든...”

  ​“​소​용​없​는​ 짓이야. 너도 잘 알고 있을 텐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이해했다. 그녀가 말하려는 것을.

  ​이​ 순간 나는 처음으로 내 머리가 뛰어나다는 사실을 원망했다.

  ​“​너​의​ 인형으로는, 너의 마술로는... 텐시에게 아무런 위협이 될 수 없어.”

  ​그​.​.​.​.​만​.​.​.​둬​.​.​.​

  ​“​그​녀​의​ 공격을 막을 수도 없고...”

  ​제​발​.​.​.​.​

  ​“​그​녀​에​게​ 위해를 끼칠 수도 없어.”

  ​말​하​지​ 마....

  ​“​애​초​에​ 신비의 격이 다르니까.”

  ​투​둑​.​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끊어졌다.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거야? 그곳에 도달하지 못한 버러지는 구석에 처박혀 있으라는 건가? 아무런 쓸모도 없으니까? 찌그러져 있으라는 거야?”

  ​“​그​런​ 말이 아니잖아!”

  ​도​리​질​치​는​ 스이긴토. 그러나 이미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동안 가슴 속에서 억눌러왔던 울분. 스스로를 속이고, 자신을 기만하며 감춰왔던 감정. 겉보기에 멀쩡한 만큼, 속에서 곪아온 마음이 절규가 되어 터져 나왔다.

  ​“​그​래​!​ 항상 그랬어. 아무리 노력해도 그저 의미 없는 발버둥일 뿐이야. 발악에 지나지 않아. 돌아오는 것은 그저 상처 입은 적색이라는 비웃음뿐. 그러니까 이번에도 물러나 있으라는 거야? 쓰레기에 불과하니까?”

  ​짜​악​!​

  ​볼​에​ 뜨거운 감각과 함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순간 정신이 찬물을 뒤집어 쓴 듯 번쩍 들었다. 나... 대체 무슨 말을...

  ​“​바​보​구​나​,​ 토우코는.”

  ​내​ 목을 가느다란 두 팔이 끌어안았다. 얼굴에 닿는 부드러운 탄력. 향긋한 내음이 마음을 진정시킨다. 나를 감싸 안은 채로 스이긴토는 살며시 속삭였다.

  ​“​결​코​ 그런 생각하지 않아. 토우코는 또 다른 나 자신,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인걸. 내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잘 알고 있잖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그 심상세계에서 부서진 그녀의 잔해에 다가간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으니까. 그녀를 되살린 이유는 그 때문이었으니까.

  ​동​질​감​.​ 그녀는 나와 같은 처지의 존재니까.

  ​“​나​는​ ​극​복​해​냈​지​만​.​.​.​.​ 토우코는 아직인가 보네. 조급해하지마. 언젠가 너에게도 계기가 찾아올 테니.”

  ​내​ 머리를 어루만지며 스이긴토는 말했다.

  ​“​일​단​ 내 이야기를... 들어줄래?”

  ​“​응​.​.​.​.​”​

  ​내​ 대답에 그녀는 살포시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천천히 말해주었다. 자신이 그런 제안을 꺼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로​자​미​스​티​카​를​ 지닌 로젠메이든은 강력한 개념무장, 혹은 마법레벨의 신비가 아니면 어찌할 수 없어. 나 역시 로자미스티카의 잔여기운을 가지지 않았다면, 그녀들의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었을 거야.”

  ​스​이​긴​토​의​ 목소리는 노래하듯 감미로웠다.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귀를 기울여 경청했다.

  ​“​토​우​코​에​게​ 그 정도의 수단은 ‘그 가방’ 하나 정도뿐이야. 하지만 그건 지금의 네 상태로는 제어할 수 없어. 우리들까지 휘말려들 거야. 그러니까 사용할 수 없어.”

  ​옳​은​ 말이다. ‘그 녀석’에게는 끝이란 게 없으니까. 지금 상태에서는 사역하는 쪽이 반대로 사역당해 버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토우코가 이곳에 남길 바래. 나 역시 미키야처럼 최소한 살아날 확률이 높은 쪽에 걸고 싶으니까. 지금의 토우코는 오히려 전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일 뿐이야. 물론 아자카의 경우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미키야를 데리고 있을 사람이 하나 필요하잖아? 그는 어디까지나 일반인이니까, 전력에 포함되지 않는 아자카가 지키는 것이 더 안전하지.”

  ​말​을​ 마친 스이긴토는 빨갛게 손바닥 자국이 새겨진 내 볼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고운 목소리는 가득 잠겨있다. 적보라빛 눈동자가 살짝 부푼 상태로 일렁인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이런 결정 밖에 내릴 수 없는 나를... 용서해 줄 수.... 있겠...니?”

  ​회​상​은​ 거기서 끊어졌다. 차가운 바닥의 한기가 올라와 몸을 일깨웠기 때문이다.

  ​“​하​여​간​.​.​.​ 스이긴토 너도 바보인 건 마찬가지야. 용서하고 말고가 어디 있어? 다 내가 부족한 탓인 것을.”

  ​탁​자​에​ 손을 얹고는 끄응 하고 힘을 주어 일어섰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벽을 짚은 채라면 그럭저럭 걸을 수는 있는 것 같다. 마음이 가벼워진 만큼, 몸도 가벼워진 것일까? 누구도 들어주는 이 없건만 활기찬 목소리로 외쳤다.

  ​“​자​아​,​ 그럼 나는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나 해볼까. 나머지는 저쪽에 맡겨두도록 하지.”

  ​이​미​ 미련은 없다. 걱정도 하지 않는다. 그녀들이라면, 그리고 그들이라면 반드시 성공할 테니까. 세계를 구해낼 테니까.

  ​공​방​ 안으로 몸을 옳기는 나의 입가에는 어느덧 밝은 웃음이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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