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프린세스·나이트 두 번째
“평안하세요.”
“평안하세요.”
아침의 산뜻한 분위기에 학생들의 상쾌한 인사가 메아리친다. 학원 축제를 가깝게 앞둬, 릴리안 여학원 안도 날마다 분위기가 뜨거워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한때의 나는, 이런 분위기 안에서도 즐겁게 보낼 수 없었다. 그래도 친구가 생기고, 동료가 생겨서, 지금의 나는 자연스레 축제 전의 분위기를 어딘가 설레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마리아상 앞에서 평소대로 손을 맞대고 기도를 한다.
문득, 갑자기 왠지 어제 있었던 일이 떠오른다.
그건 마치 언젠가 누군가에게서 들었던 만화 세상의 사건 같았다. 달려가서, 길모퉁이에서 우연히 부딪치고.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운 실태를 저질러 버렸지만, 어째선지 웃음이 배기도 한다. 자신이 설마 그런 체험을 해 버릴 거라곤 생각한 적도 없었으니까.
확실히 들었던 이야기에서는, 그런 사태에 빠진 남녀는 처음에는 서로 반발하면서도 서로를 의식하게 되어, 최종적으로는 사랑에 빠지는 게 일반적이라고――
“………….”
거기까지 생각하고, 고개를 흔든다.
대체 무슨 바보같은 걸 생각하고 있는 걸까. 그리도 동화 같은 일이 현실에 있을 리가 없다.
애초에, ‘사랑’이라는 게 뭔지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때때로 나는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환경에 놓여있는지를 잊어버릴 것만 같다. 주지의 딸로 태어났기에, 언제 릴리안을 떠나도 괜찮도록 살아왔다. 얽매이는 것 없이, 할 수 있는 한 몸을 가볍게 해서 날아오를 수 있도록.
하지만 현실의 나는 날개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아서, 혼자서 날아오르는 건 불가능해서. 그런 자신인데도, 멋진 선배가, 친구가, 언니가, 여동생이 생겨서, 얻을 수 없으리라 생각하고 있던 게 이렇게나 주변에 흘러넘쳐서, 자칫하다간 행복에 짖눌릴 것 같은데, 그 행복마저도 일상 속에서 잊어버릴 것 같아져서.
그것들에 더해 ‘사랑’ 같은 걸 내가 하는 게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일까. 나는 ‘사랑’에 대한 희망보다 먼저 나락과도 같은 절망을 떠올려 버린다.
아니, 추가로 말하자면 자신 이상으로 아마 상대 쪽이야 말로 잔혹한 일일 터다.
그게.
처음부터 헤어지리라고 알고 있는 사랑이라니, 어찌 그리 잔혹한 걸까―――
릴리안 여학원의 학원 축제는 성황 속에 끝났다.
하나데라의 학원 축제, 체육제, 수학여행과 이어진 이벤트도 이걸로 일단락 된 거다.
하지만 나는 아직 끝내지 못한 일이 있었다.
물론 검도의 교류시합은 아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레이 님과 요시노 씨의 이벤트고, 우리들은 응원이라는 입장으로 밖에서 관련될 뿐이니까.
봉우리의 여동생 문제도 이미 노리코라는 여동생이 있는 내게 직접적인 영향이 있는 건 아니고, 요시노 양과 유미 양 쪽이 여러모로 큰일이겠지.
학원 축제가 끝을 맞이하기 직전, 캠프파이어의 춤까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나는 그에게 불려서 인기척이 적은 교사 뒤편으로 이끌려 갔다. 그렇다고는 해도 사람의 기척은 여기저기서 나고, 목소리나 교내방송도 귀에 들려온다. 소란 속의 공백지점이라고 할 법한 곳에서 나와 그는 마주본다.
“무사히 끝났네요.”
“예. 하나데라 여러분의 덕분이에요.”
“토도 양 등, 릴리안 여학원 여러분의 힘이에요. 우리들은 뭐어, 조금이나마 웃음을 더할 수 있었다면 괜찮았으려나요.”
약간 멋쩍어하면서 머리를 긁는 유키 군.
학원 축제가 성공리에 끝났으니, 아마 나도 유키 군도 충족감을 느끼고 있겠지. 산백합회에서 주최한 연극도 예년과 다르게 굉장히 친밀한 느낌이 아니었을까. 그만치 웃음을 부른 산백합회의 연극은 처음으로 봤다고 선생님들도 말씀하셨었다.
릴리안, 하나데라, 두 학교의 협력 없이는 불가능했던 일일 것이다.
나는 다시금 감사의 뜻을 담아 고개를 숙인다.
“그러실 필요는, 그만둬 주세요……아 그래, 천천히 이야기하고 싶은 건 잔뜩 있지만, 오늘은 다른 용건이 있어서.”
캠프파이어 준비를 알리는 방송을 듣고, 유키 군은 당황한 듯 이야기를 바꾼다. 이미 릴리안의 학생과 선생님 외의 내방객은 돌아가셨다. 도움을 주신 하나데라 학원의 여러분에도 돌려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나도 샛길로 새는 건 그만두고, 용건을 물어보았다. 그러자.
“저기, 얼마 전의 약속, 기억하고 있나요?”
“약속―――.”
물론 기억하고 있다. 오히려 유키 군 쪽이 잊어버린 건 아닐까 걱정될 정도였다. 그만큼 지금까지는 유키 군으로부터 아무런 액션도 없었던 거다. 아무리 학원 축제가 끝난 다음이라고 말했다고 해도.
“그, 답례라고 할까, 저는 그다지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지만.”
“그런 건 안돼요.”
“응, 그래서 한 가지 부탁할까 생각해서.”
“아, 예.”
안심한다.
아무래도 빚을 느껴 버리니까. 상대인 유키 군이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하는 거니까 혹시나 단순한 자기만족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고 끝낼 순 없는 거다.
유키 군은 교복의 안주머니에 손을 넣고 무언가를 찾고 있다. 서두르고 있는 탓인지, 꽤나 생각하는 걸 찾기 힘든 모양이다.
아무리 시간이 촉박하다고는 해도 그렇게까지 서두를 건 없는데 하고 고개를 갸웃거려 버린다.
한동안 지나서 간신히 유키 군은 생각하던 걸 찾아낸 모양이다.
“저기, 그, 굉장히 뻔뻔하다고는 생각하는데……괜찮다면 이곳에 함께 가 주지 않을래요?”
내민 종이를 조건반사적으로 받아든다.
종이에 쓰여 있는 문자를 읽자, 그건.
“―――입장권?”
어디의, 무슨 입장권인지 확인하려고 다시 잘 살핀다. 그러자 그건, 전국적으로 유명한 테마파크의 입장권이었다.
그렇다는 건 유키 군은 이 테마파크에, 나와 함께 가고 싶다는 걸까.
“예……저기, 저, 저 외의 사람은.”
“……에?”
“아뇨, 그러니까 유미 양이라거나 유시노 양에게는 저로부터 이야기 해 두면 괜찮을까요?”
“아니아니아니, 티켓은 두 장 밖에 없으니까.”
“그 이야기는…….”
“저기, 저와, 토도 양.”
손가락으로 차례차례 유키 군 자신과 나를 가리킨다.
나는 다시 한번 티켓에 눈을 옮겨서, 5초쯤 생각한 뒤, 간신히 이해했다. 이해는 했지만.
“둘이서, 말인가요?”
“아―, 역시 그런 건 그만두는 게 괜찮겠지요. 미안해요, 이, 이 이야기는 듣지 않았던 걸로.”
당황한 듯 몸 앞에서 손을 좌우로 흔든다.
나는 잠시 손가락을 턱에 대고 생각한다.
―――어째서 이렇게나 당황하고 있는 걸까.
“다, 다른 걸 생각하는 편이 괜찮겠지요?”
“아니요, 그다지 상관은 없는데요…….”
“그렇지요, 역시……어, 에?”
“아, 아니요, 저로 좋다면 괜찮은.”
티켓을 슬쩍 보인다.
그보다 오히려, 답례라고 하면서 티켓을 받아서 외출한다니 미안한 일은 아닐까. 어느 쪽이 옳은가 하면, 내가 티켓값을 내야 하는 게 아닐가 싶은데.
“아, 이 입장권은 어쩌다 신문사에서 받은 것뿐이니까. 거기에, 입장권뿐이고.”
“그 말씀은?”
“입장권으론 입장할 수 있을 뿐이고, 입장한 뒤에 놀이기구를 즐기려면 또 다른 티켓이 필요해요.”
“아아, 과연.”
그래서 티켓에 쓰여있던 가격이 상당히 쌌던 거구나 싶다. 한순간 유명한 테마 파크인 것치고는 양심적이라고 생각했었지만, 그렇다면 납득할 수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런 일은 거의 모르는 나 자신이 약간 부끄럽다.
“그럼, 그 놀이기구용 티켓은 제가 내면 괜찮지요?”
“그럴 필요는 없어요.”
“그래도, 제가 답례하는 건데.”
“아니요, 같이 와 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토도 양이 납득하지 못하신다면, 적어도 더치페이로.”
물론 반론이 있을 리가 없다. 그보다, 그걸로 괜찮을지 고민해 버린다. 이래서는 유키 군에게 플러스가 되는게 너무나 적다. 안에 들어가면 적어도 밥값 정도는 내가 내는 편이 좋은 걸까.
“……덧붙여서, 이 일은 유미를 포함한 다른 분들에게는 부디 비밀로.”
“어째선가요?”
“아니, 어째서냐고 해도…….”
곤란한 표정을 짓는 유키씨.
혹시나 다른 사람을 불렀었는데 사정이 나빴었다거나? 이유는 잘 알 수 없었지만, 그 이상 곤란하게 해도 미안하고 특별한 문제가 있는 것 같지도 않아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이러는 동안, 슬슬 댄스가 시작되려는 시간이 다가왔다. 유키 군에게는 미안하지만, 정말로 돌아가 달라고 부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유키 군은 가방도 들고 나온 상태여서, 그대로 교문까지 배웅하기로 했다. 일반 내빈객들은 모두 돌아갔고, 릴리안 학생들은 후야제를 위해서 교정에 모여있으니까 교문까지의 길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후야제를 맞이하여 화려함과 끝을 앞둔 축제의 쓸쓸함을 동시에 겸비한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천천히 걷는다.
여름이 끝나고 가을도 순조롭게 지나가, 서서히 바람도 쌀쌀해져 가고 있다. 외출할 때에는 약간 따뜻한 모습으로 가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그런 두서없는 것들을 생각하고 있는 동안, 정문에 도착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여기까지로 충분해요. 그럼, 그 저기, 세세한 일은 나중에……아아, 학원 축제도 끝났으니까 만날 기회도 없나. 어떡하지…….”
“유미 양에게 전언을 부탁하는 건…….”
“아아아, 안돼요, 안돼! 그건.”
힘껏 부정하는 유키 군.
“그럼……집 쪽으로 전화를 넣어 주실래요? 번호는, 에에.”
뭔가 메모장과 필기구를 찾으려고 하다가, 지금은 맨손으로 나왔다는 걸 떠올린다. 내 모습을 본 유키 군이 가방을 열어 안을 뒤져 찾은 걸 꺼내려 하다―――떨어뜨려 버렸다.
뭐에 걸린 건지, 사방으로 흩어진 펜, 지우개, 자 등등. 급히 주저앉아 주워담으려 한다. 나도 그 자리에 쭈그려서, 굴러가려고 하고 있던 지우개를 주웠다.
“죄, 죄송해요.”
“아뇨……아, 이거.”
필기구들과 함께 땅에 떨어진 건 어디선가 본 적 있는 필통. 그 날 유키 군이 잊어버려 내가 전해준 거였다.
무심코 웃음이 흘러나온다.
“토도, 양?”
“죄송해요. 단지, 굉장히 이 필통과 연이 있다 싶어서요.”
단순한, 장식 없는 검은 필통을 손에 들고 주워든 지우개를 안에 넣는다.
“음―, 혹시나 이 필통, 토도 씨가 마음에 드는 거려나.”
“어머.”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는 못했다. 찬찬히 손에 든 필통을 바라본다. 들은 이야기대로 생각해 보면 왠지 애착이 생기는 것 같은 기분이 드니까, 사람의 기분이라는 건 신기한 거다.
나는 추가로 자를 주워서 안에 넣고, 유키 군에게 건넨다.
“전부 있나요?”
“에에―……볼펜이 없는데.”
이미 해는 저물어, 가로등이 있다고는 해도 어둑어둑한 길이어서 한 번 잃어버리면 찾기 힘들다. 둘이서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둘러보며 찾는다.
그러자, 우연히 손끝에 닿는 땅이 아닌 무언가를 느꼈다.
“아, 미안.”
떨어져가는 감촉.
아무래도 유키 군의 손끝이었던 모양이니, 찾는 동안 몸이 굉장히 가까이 다가갔었던 모양이다.
당황한 듯 몸을 돌리는 유키 군.
학원 축제의 준비 등으로 손이 닿을 때는 몇 번이나 있었기에, 사과받을 정도의 일은 아니겠지만 어쩐지 유키 군의 행동에 이끌린 듯, 나도 사과해 버렸다.
“에에……아아, 있다 있다.”
일어선 유키 군은 허둥지둥 필통을 가방에 담는다.
“저기, 모처럼 꺼냈는데.”
“아, 미, 미안!”
다시 서둘러 꺼낸다.
그 모습이 조금 웃겨서, 나는 웃음이 북받쳐 오르는 걸 참으면서 메모용지에 집의 전화번호를 써서 건넨다.
“그럼, 제 집의 전화번호도.”
“알고 있어요.”
“에엣? 가르쳤었나?”
“그게, 유미 양과 똑같지요?”
“그, 그런가, 그야 그렇지요.”
휙휙 바뀌는 표정은 역시 유미 양과 비슷하다.
“죄송해요, 길게 잡아둬서.”
정신이 들자 교정 쪽에서 댄스의 음악이 울려 퍼지는 게 들려온다. 아무래도 시작되어 버린 모양이다.
“아니요. 그럼 전화, 기다리고 있을게요.”
“예. 그럼, 수고하셨어요.”
“수고하셨어요. 오늘은 감사했어요.”
다시금 감사를 전한다. 유키 군은 가볍게 손을 흔들고 걸어나간다.
문득 생각이 떠올라, 나는 입을 열었다.
“――기대하고 있을게요. 실은 저, 그런 데 가는 거 처음이에요.”
저번에는 모습이 사라진 뒤에 이야기 했었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하지만, 유키 군는.
“에, 뭔가 말했어요?”
이미 수 미터쯤 걸어간 뒤인데다, 거기에 더해 후야제 회장인 교정에서 흘러나오는 잡음이 내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를 지워 버린 모양이어서.
그래서 나는.
“……안녕히 주무세요.”
하고, 부드럽게 답할 뿐이었다.
전화는 다음날 밤에 걸려왔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손을 뗄 수 없는 상태였기에 딱 내가 전화를 받게 되었지만, 유키 군은 처음에 긴장하고 있었는지 목소리가 굳어있었고, 말투도 지나치게 공손했다. 뭐어, 나중에 생각해 보면 누가 나올지 알지 못하니 정중한 말투를 쓰게 되는 것도 당연했겠지만, 그 때의 나는 왠지 그런 유키 군의 모습이 공연히 우스워서 목소리를 들으며 무심코 웃어 버렸다.
전화를 받은 게 나라는 걸 눈치챘는지, 아니면 상대가 웃은 걸 듣고 역으로 힘이 빠졌는지, 금방 평소대로의 유키 군으로 돌아간다.
그 뒤의 이야기는 저번에 끝난 학원 축제 이야기, 각자의 학생회의 이야기, 학생회 임원의 이야기, 유미 양의 이야기.
잠시밖에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데, 정신을 차려보자 전화를 시작하고 30분 가깝게 지나 있었다. 지금까지 친구와 길게 전화를 해 본 경험이 없는 나는 꾸밈없이 놀라 버렸다.
‘……아, 벌써 이런 시간이구나. 미안해요, 늦어져 버렸네요.’
“아뇨, 저도 즐거웠으니까요.”
‘너무 길게 전화해도 실례겠지요.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예, 안녕히 주무세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수화기를 내려둔다.
시계를 보고 시간을 확인한 뒤, 천천히 발을 움직여 자신의 방 앞까지 돌아왔을 때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결국, 유키 군은 뭘 위해서 전화를 걸어 온 걸까, 하고.
그때, 다시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발을 돌려 전화기 쪽을 향했지만, 이번에는 어머니 쪽이 빨랐다. 왠지 굉장히 정중한 인사를 한다고 생각하고 있자, 수화구를 손으로 막으면서 내 쪽을 돌아본다.
약간의 예감을 느끼며 수화기를 귀에 대 보자.
‘미, 미안, 토도 양. 약속의 이야기를 하는 걸 잊었어…….’
당황한 느낌이 전화 저편에서 떠올라 보이는 것 같아서, 나는.
무심코 소리를 내며 웃어 버린 거였다.
이번은 10분 정도로 통화를 마쳤다.
약간의 여운을 느끼면서, 조용히 수화기를 내려놓자.
“친구니?”
“아, 예. 하나데라 학생회장이고, 문화제때 협력해 주셔서.”
“그래. 그래도 안심했어.”
“에?”
어머니가 생긋 미소를 지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시마코도 그런 식의 목소리를, 표정을 지을 수 있구나.”
오직 그 한 마디가, 나를 멈춰 서게 하였다.
맞아,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나는 놀라울 정도로 자연스럽게 소리를 내며 웃고 있었고, 즐겁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거기다,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건 거의 유키 군 쪽이었고, 나는 끄덕이거나 맞장구를 치는 게 대부분이었는데.
유미 양이나 요시노 양, 그리고 노리코와도 평범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들과 이야기 하고 있을 때와는 다른 무언가가 마음 속에 생겨난 듯한, 그런 기분이.
“길게 전화 하는 건 여자애의 특권 같은 거니까,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단다.”
움직임을 멈춰버린 나를 보고 어머니는 묘한 배려를 보이며 거실로 돌아갔다.
그러고 보면.
유미 양과도, 요시노 양과도.
여동생인 노리코와 마저, 그렇게 전화로 오랫동안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는 걸 새삼스레 떠올린다.
TV의 소리도, 자동차의 소음도,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는 조용한 집 안에서 나는 말 없이 별다를 바 없는 전화기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세 번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