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븐스 게이트 전편
운명적인 만남, 그런 게 거리에 데굴데굴 굴러있으리라곤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기나긴 인생에서 그런 식으로 느끼는 만남 같은 게 과연 있을지조차 의심된다.
하지만,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만남이라는 건 있을지도 모른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 미묘하게 쌀쌀했던 바람도 꽤 온화해져서 기분 좋은 봄을 만끽하기에 딱 좋았던 어느 날. 후쿠자와 유키는 주택가를 걷고 있었다.
특별히 무슨 볼일이 있었던 건 아니고, 아무런 볼일도 없었기에 어슬렁거리다 보니 도착해 버렸다는 게 옳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중학교때 어깨를 망가뜨려, 추천진학 이야기도 사라진 바람에 하나데라 고등부에 진학해서, 야구부는 커녕 어느 동아리에도 들지 않아 짬을 주체 못하고 있다.
새로운 목표이나 취미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도, 그렇게 간단하게 빠질만한 게 생길 리도 없어서, 요즘은 타성에 젖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꼭 그래서는 아니지만, 방과후엔 이렇게 목적지도 없이 빈둥빈둥 모르는 곳을 돌아다니거나 하고 있는 거다.
평범하게 거리를 걷고 있는 것만으로 뭐가 일어날 리도 없고, 실제로 지금까지도 뭐가 일어날 느낌도 없지만, 오늘은 상황이 달랐다. 왜냐면 전방에서 수상한 사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시간은 저녁에서 밤으로 바뀌려 하는 경계가 되는 시간.
‘황혼’이라는 건 멋진 표현이어서, 저무는 태양 빛을 받아 사람의 모습은 애매한 형태로 녹아들려 하고 있다.
유키가 눈에 넣은 사람도, 각도의 문제일지도 모르겠지만 어떤 사람인지 뒤에서 본 것만으론 알아볼 수 없었다. 단지 움직임 자체는 확실히 이상했다.
전신주나 벽에 몸을 숨기며, 기묘한 발걸음으로 전진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앞쪽에선 또 다른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멀어서 그쪽도 확실히 보이진 않았지만, 치마를 입고 있으니까 여자애라는 건 예상이 간다.
변탠지 스토컨지 뭔가가 여자애의 뒤를 따르고 있는, 그런 구도로 보였다.
그림자는 길게 뻗어 있었지만, 반대쪽, 즉 유키 쪽을 향해 뻗고 있으니 그림자의 움직임으로 여자애가 깨닫는 건 무리겠지. 수상쩍은 기척을 느껴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여자애는 망설이지도 않고 위풍당당한 발걸음으로 척척 앞으로 나아간다.
우연인지 아니면 평소에도 그런건지는 모르겠지만, 주위에 다른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유키는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했다.
설령 남자에게 다가가서 주의를 준다고 해도, 뭐라고 말하면 괜찮은 걸까. 남자가 아직 변태같은 거라는 게 확실한 것도 아니고, 여자애한테 뭔가 한 것도 아니다. 잡아떼버리면 그걸로 끝이고, 역으로 유키 쪽한테 불만을 토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여자애에게 뭔가 일어난 뒤에는 늦다.
유키가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이에 앞을 걷던 여자애는 더더욱 좁고 어두운 길로 들어가서, 그 뒤를 쫓으려는 듯 남자도 골목으로 나아간다.
당황해서 쫓아가는 유키.
이런 식으로 고민하고 있어봐야 아무 도움도 안 된다. 사건이 일어나 버리면 이미 늦고,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유키한테 화를 낸다고 해도 문제는 없지 않나. 무리하게 변태취급을 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그냥 말을 거는 것만으로, 혹은 유키의 존재를 눈치채도록 하는 것만으로도 견제가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곤, 유키도 둘을 따라 골목으로 뛰어들려고 한 순간.
마침 그 골목에서 방금 전의 남자가 빠른 걸음으로 튀어나와, 유키의 어깨에 부딪혔다. 무슨 일인지 생각할 틈도 없이 남자는 뛰어가 버렸다.
남자에 대한 것도 신경 쓰였지만, 문제는 여자애 쪽이다. 과연 무사했는지를 확인하려 새삼스레 골목 안으로 발을 들인다.
그러자 그 여자애가 서 있었다.
하지만 그냥 서 있는 게 아니었다. 손에 뭔가 긴 봉 같은 걸 들고, 자세를 잡고 있었다.
“……잘도 돌아왔네요. 저를 어린애라고 생각하고 우습게 보고 있는 건가요?”
의미는 모르겠지만, 험악한 분위기라는 것만은 이해했다.
잘 보면 여자애가 손에 들고 있는 건 죽도고, 정안 자세로 유키를 노려보고 있었다. 죽도의 끝은 유키의 목덜미를 똑바로 향하고 있다.
“잠깐 기다려. 뭔가 착각하고 있지 않아?”
죽도는 흔들리지 않고 조용히 유키를 위압하고 있다. 확연히 유키보다도 작은 여자애인데, 기백만이라면 지금의 유키를 넘어선 거겠지.
소녀의 다리가 약간 움직인다. 미끄러지는 듯한 걸음은 틀림없는 검도 동작.
“알고 있어요. 저를 따라오고 있었던 거죠. 여기 올때까지 깨닫지 못했던 건, 제 불찰――.”
완전히 착각하고 있지만, 유키가 다음 말을 꺼내기도 전에 소녀쪽이 움직였다. 미끄러지는 듯한 걸음으로 간격을 좁혀, 사정거리 내에 들어왔다고 생각한 순간 손에 들고 있던 죽도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린다. 얼굴을 치려는 건가 했지만, 발을 디딤과 동시에 죽도의 궤도는 비스듬히 호를 그리듯 변화했다.
머리치기로 보이게 한 상태에서 몸통으로 들어온다고 머릿속으로 생각하기 직전, 몸은 자연스럽게 반응해서 팔에 힘을 넣어 옆구리를 가드하고 있었다. 중학교때 체육에서 배웠던 검도의 성관가 하는 걸 고민하면서도, 다음에 팔에 닥칠 충격과 고통에 대비하는 유키.
소녀의 목소리와 일격이 유키의 몸을 덮친다.
“――정강이이이――――――――!!!!”
“에, 저, 정강이이이?!”
놀라는 소리를 내는 순간, 예리하고 저리는 듯한 고통이 다리에서 뇌로 전해졌다.
소녀의 검극은 몸통은 커녕, 더욱 아래를 향해 유키의 정강이를 후려친 거다. 그건 정말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의 고통이었다. 예상도 하지 못했던 곳을 노린 타격, 살이 부족한 부분에 닥친 강한 충격, 그리고 정신적 대미지.
말도 나오지 않는 유키와는 대조적으로, 소녀는 잽싸게 거리를 벌려 다시 죽도를 고쳐쥔다.
“……자, 자, 잠깐, 기……다려.”
몸을 굽히면서도 어떻게든 넘어지는 건 면한 유키는, 필사적으로 소리를 냈다.
“저, 정강이라……니, 검도에, 그런 타격은 없……지?”
“이건 검도 시합이 아니고, 변태 상대로 제대로 대치하는 건 위험하니까요.”
소녀가 말하는 건 지당했고, 그게 혹시나 진짜 변태가 상대였다면 멈출 것도 없었겠지만, 자신의 몸에 닥치는 상황에서는 조용히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소녀는 유키가 고쳐서는 걸 기다려주지 않았다. 확실히 유키의 HP를 깎으려는 듯, 공격을 재개한다.
자그만 여자애가 몸을 지키기 위해서 약세에 빠진 변태에게 추격타를 가한다. 보고 있는 입장이라면 그런 위험한 짓은 하지 말고 후딱 도망가면 괜찮다고 말하고 싶은 참이지만, 소녀는 용감한 마음을 가진 모양이어서 곧은 눈동자로 죽도를 휘둘러 내린다.
순간적으로 팔을 들어 방어하려고 했지만.
“――보, 복사뼈어어――――――!!!”
“으갸아아아악?!!!”
다시금 궤도가 바뀌어 발을 덮쳤다. 미묘하게 복사뼈에서 벗어난 곳에 맞았지만, 농담으론 끝나지 않을 정도로 아프다. 이번에야말로 유키는 엉덩방아를 찧었다.
“하앗――!! 무릎――!! 대퇴부――!! 새끼발가락――!!”
“악! 아파!! 으악!!”
연속해서 펼쳐지는 소녀의 공격을 몸을 꼬며 어떻게든 최소한의 대미지로 누르려 한다.
다리만을 노려오는 건 너무 다가가면 위험하다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다리에 대미지가 있다면, 도망칠 때 쫓아올 수 없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기, 기다려 줘! 그러니까, 나는, 아니…….”
아직까지 결정적인 일격은 먹지 않았지만, 이대로 공격이 이어진다면 굉장히 위험하다. 유키는 손을 뻗어서 손바닥을 펼쳐, 소녀를 멈추려 한다.
“에에, 그게, 다음은.”
소녀는 약간 흐트러진 숨을 가다듬으며, 다음에 공격할 곳을 찾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다 이윽고 그 눈길이 고정된다.
검을 휘둘러 올림과 동시에, 발을 디디는 소녀.
“사타구니―――――――――!!!!”
“으갸아아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유키는 몸을 움직였다. 엉덩방아를 찧은 자세 그대로, 아직 무사한 손만으로 뒤쪽으로 약간 물러난다.
그 필사적인 움직임이 유키를 구했다.
소녀의 죽도 끝은 엉덩방아를 찧고 허벅지를 벌린 꼴을 한 유키의 샅 5센치쯤 앞부분을 내려치고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땅에 닿을지 닿지 않을지 하는 부분에서 멈추고 있어, 헛치는 것도 고려하고 있었나 싶었지만, 휘두르는 속도를 보면 허풍도 뭣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필살의 일격. 하마터면 지릴 뻔 했다.
주저도 하지 않고 휘둘러 내린, 훌륭한 일격이었다. 혹시나 제대로 먹었다면 유키는 며칠동안 악몽에 시달렸을지도 모른다.
“으, 피했네요. 그럼, 다시 일격――.”
“왁―――!! 잠깐 기다려, 그러니까 나는 변태가 아니라니까! 변태는 벌써 도망갔으니까!!”
모처럼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는데, 더 이상 목숨을 줄이는 경험은 하고 싶지 않다. 유키는 고통도 잊고, 소리를 질렀다.
“조잡한 거짓말로 발뺌할 셈인가요. 제 눈은 속일 수 없어요. 이 시기, 변태가 자주 나타난다는 건 들었습니다만, 설마 이 눈으로 보게 되리라곤…….”
“그러니까 기다리라니까. 너는 변태의 얼굴 봤어? 그랬다면 어떤 얼굴이었어?”
“어떻고 뭐고, 콧수염을 기르고 약간 머리카락이 부족한 중년 정도의…….”
“어, 어떤 차림이었어?”
“베이지색 재킷에 면바지 차림에, 약간 칠칠치못한 느낌의…….”
“아무리 봐도 내가 아니잖아?”
“……변장이라거나, 교대라거나?”
“거기까지 의심하는 거야?!”
“그럼 정말로……앗, 아니, 죄송했습니다.”
간신히 소녀는 검을 거두고 깊게 고개를 숙였다.
유키는 소녀를 걱정한 거라고 하는데 거꾸로 변태로 착각 당해 공격받아서 지독한 꼴을 당하게 됐었지만, 여기서 소녀한테 화낸다고 해봐야 도움도 안 된다고 생각하곤 크게 한숨을 내쉰 뒤에 체념하기로 했다.
아무 일도 없었으니 잘 된게 아닌가 하는 플러스 사고로 전환한다.
“어디 아픈 부분 없으세요?”
그 정도로 직접 때릴만큼 때려놓고선, 잘도 그런 소리를 물어볼 수 있구나 싶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소녀는 천천히 다가와서 신중하게 유키의 앞에 쭈그려 앉아, 자신의 타격을 잔뜩 두드려맞은 유키의 다리를 바라보고 있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면, 소녀가 꽤나 괜찮게 생겼다는 걸 깨달았다. 그와 동시에 릴리안의 학생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유미가 중학생 때 입고 있었던 것과 같은 교복이었으니까.
얼굴이 어려보이는 걸 보면, 아직 1학년이나 2학년 정도일까.
“미안해요, 멍이 들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아니, 뭐어……어떻게든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하지만……앗!”
갑자기 소녀가 숨을 삼켰다.
하지만 표정은 아까 전과 그리 바뀌지 않은 듯이 보인다. 약간 눈이 크게 뜨여있지만.
이번에는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약간 긴장하면서 소녀를 바라보자.
“이건 혹시나, 게임 같은 데서 자주 있는 만남의 이벤트라거나.”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고래로부터 진득하게 쓰인, 이런 전형적인 이벤트……확실히 주인공처럼 특징도 없고, 무난무난하고 우유부단해 보이는, 너구리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지만.”
“무, 무슨 일이려……나?”
혼잣말처럼 중얼중얼 말을 잇는 소녀. 그 중간에 은근슬쩍 지독한 소리를 들은 것 같은 기분도 들지만, 소녀는 중얼거리면서도 눈은 똑바로 유키를 정면에서 지켜보고 있어, 왠지 눈을 피할 수 없었다.
“으으……하지만.”
소녀는 벌떡 일어났다.
치맛자락이 펄럭 흔들린다.
저물어가는 저녁햇빛을 받은 소녀는, 빛과 그림자를 몸에 띄워서 어딘가 신비한, 그러면서 늠름한 분위기를 내보이고 있었다.
“이것만으론 뭐라고도 할 수 없겠네요. 그래, 혹시나 또 만나거나 하는 우연이 있다면 플래그가 선 걸지도 모르겠지만.”
여전히 소녀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를 하고 있다.
“그럼, 오늘은 실례할게요.”
그만큼 잔뜩 사람을 두드려놓고 시원스레 이걸로 끝인가 싶지만, 불만을 뱉을 기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깊게 고개를 숙이곤 소녀는 등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약간 어두워진 하늘, 어둑어둑한 골목. 그런데도 소녀의 뒷모습은 왠지 눈부신 빛을 내뿜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유키는 그런 소녀를 엉덩방아를 찧은 채로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게 유키와 소녀――나중에 “아리마 나나”라는 걸 알게되는 소녀――와의 만남이었다.
동시에, 자극적이기도 했다.
연하인 여자애가 변태(유키는 변태가 아니지만)에게 죽도로 맞서다니, 한걸음 잘못하면 만용이었겠지만, 그래도 그리 하기 쉬운 일은 아니다. 거기다, 다시금 떠올려 보면 여자애는 어려 보였지만 꽤나 귀여웠었다. 그대로 자란다면 장래는 꽤나 미소녀가 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얼굴은 됐었다.
“아니, 뭘 생각하고 있는 거야 난.”
계속 야구에 몰두하고 있었고, 남학교였어서 여자애와 놀거나 한 적이 없다. 더군다나, 애인같은 게 있을 리도 없다. 흥미가 없는 건 아니지만, 지금 당장 애인이 있으면 싶다거나, 연애를 하고 싶다거나 하는 기분은 아니다.
야구를 못하게 되었으니까 여자애로 바꾼다니, 그건 그것대로 있을법하긴 하지만 유키가 보기엔 너무 연약한 게 아닌가 싶은 기분도 든다.
“거기다, 척 봐도 어렸고.”
이 시기의 소년으로선 드물진 않지만, 유키도 굳이 말하자면 연상의 여성에게 동경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이 시점에서 소녀에 대한 마음이나 흥미는 그리 커다란 건 아니었고, 바로 잊어버리리라 생각했다.
실제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유키 자신의 기억에서도 그건 서서히 옅어져 갔다. 강렬한 인상을 남긴 소녀기는 했지만, 이름도 모르고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한 번 만나기만 한 소녀. 릴리안 중등부에 속해있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쳐도 범위가 너무 넓고 찾을 마음도 안 든다.
원래는 이대로 시간과 함께 완전히 잊어버리게 될 터였다.
하지만 현실이라는 건 재밌는 법이라, 잊을 무렵에 떠오르듯이 나타난다.
유키와 소녀의 재회는, 의외의 형태로 이루어지게 되는 거였다.
~추신~
이런 걸로, 2010년 첫번째 SS로 가져온 건 신년답게(?) 또 새로운 스타트라는 걸로 새로운 SS캐릭터 히로인, 나낫치가 되었습니다.
덧붙여서 제멋대로 가진 나나에 대한 이미지는, 실제로는 그렇지는 않겠지만, <어린 외견>입니다(폭발). 뭐어, 주역 캐릭터 중에서는 제일 연하 멤버라는 것도 이유겠지만요.
자, 이 뒤는 어떻게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