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
<지난 수요일 새벽, 이른바 '가위저주' 현상이 실버 거리의 한 단지에서 또다시 발생했습니다.
지금까지와 같이 해당 지역의 주민들은 모두들 악몽에 시달리고, 잠을 설치는 내내 자신 주위에 원인불명의 인기척을 느꼈으며,이는 아침 해가 밝을 때까지 지속되었다고 합니다. 경찰은 주민들의 증언에 따라 이번에도 '가위저주'가 정말로 발생했다는 결론을 내렸고,현재 계속되는 추가 증언과 지금까지의 자료를 참고로 하여 곧 본격적인 수사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경찰과 주민들 대다수를 포함한 사람들은 이 현상을 아직도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특정한 용의자가 있을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해당 현상을 연구하는 학계에서는 지금도 여러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은 아직 회의적입니다.>
……
…..
….
…
..
.
또각,
“자, 그래서,”
분필이 기분좋게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넓은 칠판 한가운데 마침표가 딱 찍혔다.
“3차대전의 의미 같은걸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받아들이고 있다 이거야. 물론 다른 의견이나 잡소리야 얼마든지 있지만, 뭐 어차피 그런건 다들 사이비종교 같은 쓰레기 취급하고, 무엇보다 시험에 나오지도 않으니 혹시 궁금하면 개인적으로 질문하라고.”
분필이 부러지면서 흩날리는 하얀 가루는 이어서 교실에 울려퍼지는 청량하고 또렷한 목소리에 의해 그대로 떠밀려 나갔고, 그렇게 햇빛 속에서 다시 먼지만이 반짝일 때, 아이들은 이미 제이미에게서 시선을 떼고 열심히 필기를 하는 중이었다.
“다 적어.” 언제나 그렇듯 당당하게 어깨를 편, 때문에 다소 드세게 보이기도 하는 그녀가 한 마디 짧게 덧붙였다.
사실 얼핏 보면 그녀는 꼭 선생님이 발표를 시켜서 나온 반장과도 같은 이미지였다.
일단 꽤나 젊은 나이라는 것이 첫번째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래서인지 아이들과 금방 뒤섞인다고 할까, 그래봐야 아직 대학생 정도밖에 되지 않은 듯한 앳됨과, 어른답지 않을 정도의 당당함이 그녀를 금방 애들과 어울리게 해줬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들 또한, 자신보다 언니 누나쯤 되어보이면서도 굉장히 강단있게 자신들을 책임져 주는 그녀를 싫어할 리 없었고, 거기에 남학생들 사이에서의 폭발적인 인기는 덤이요, 그녀를 이른바 '왕언니'로 대하는 여학생들의 신뢰 또한 높았다.
다만 한 명의 젊은 금발의 아가씨로서의 제이미는 뭐랄까, 어떻게 보면 굉장히 접근하기조차 힘든 한 명이기도 했다.
여느 아름다운 여성들이 그렇듯 그 매끄러운 머리를 어깨 밑까지 길게 늘어뜨렸지만, 그리고 단정한 옷차림 또한 언제나 그녀를 꾸며주었지만,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는 저 당당하다 못해 폭발적인 기세, 마치 이 세상에 홀로 우뚝 선 탑과도 같은 그녀의 모습이 있기 때문.
물론 그녀가 딱히 누구에게 화를 잘 내는 건 아니지만, 가끔씩 보면 저렇게 어깨를 피고 있는 모습만 봐도 약간은 무서워질 정도였다.
“야!”
적어도, 그녀는 거리낌이 없는 여자였다.
“너 책상 밑에 뭐야? 또 이상한 거 가져와서 쳐보고 있어? 그런 지랄은 좀 쉬는시간에 하라고.”
물론 애들 또한 그녀의 저런 성질 앞에서 제법 익숙해졌지만, 그녀가 한 번 소리를 지를 때마다 어깨가 조금이라도 움츠러들 수밖에. 남자애들 몇몇이 얼른 보던 것을 집어넣고 다시 펜을 들자, 그녀의 얼굴도 누그러짐과 함께 애들 또한 언제 기죽었냐는 듯 조그맣게 웃음을 터뜨렸다.
제이미 또한 그렇게 입에서 거칠게 말을 내뱉었다가도 거의 몇초만에, 긴머리를 시원하게 흔들며 휙 돌아서서는 다시 칠판을 분필로 가볍게 두드렸다.
“그래, 어디까지 했더라…” 그녀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며, 아니 흥얼거리며 머릿속 책장을 빨리빨리 넘겼다.
“다 적었어? 그럼– 아니, 내가 거기에 뭐 좀 덧붙이면 말야…“
똑,
뚜껑을 딴 제이미는 사이다를 쭉 들이키고 “하–” 묵은 숨을 토해내며 의자에 늘어졌다.
오늘은 총 5시간의 수업이 있었다. “아이구,” 그녀는 몸을 쭉 폈다. “죽네, 죽어.” 지친 눈썹 위로 맺힌 식은땀을 닦아내며, 그녀는 사이다를 한 번 더 들이키고는 기록부를 휙휙 넘기며 중간중간 펜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체크했다.
내일은 목요일이니 그나마 3시간. 그리고 일찍 끝나는 날은 이런 밋밋한 사이다 말고 시원한 맥주를 쭉 들이키고는, 항상 다음 순서로 침대에 퍼져 자는 게으름을 즐길 수 있다. 물론 주말에도 어디 놀러 가고는 하지만,
어쨌든 사실상 그녀가 정말로 좋아해서 하는 일은 아닌 만큼, 그렇게 몸도 마음도 쉴 시간은 항상 필요하니까.
적어도 지금은 젊으니까 이렇게 자기합리화도 할 수 있다는 것을 그녀 나름대로 시원하게 받아들이며,
곧 기록부를 덮은 제이미는 곧있으면 시작될 애들의 질문 시간을 위해, 미리 엎드려서 잠깐 눈을 감았다.
“지금 이래도 언젠간 알 거야.”
그녀의 엄마는 항상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반항할 때마다, 심드렁한 얼굴로 맥주를 들이키면서. 하지만 그러면서 제이미는 저 뒤에 있는 아빠의 낯이 조금 굳어지는 것을 항상 보곤 했다. 그의 대답은 그걸로 충분했다.
물론 제이미는 엄마도 아빠도,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녀가 식칼 한 번 못 잡게 하셨던 것에 대해 이해를 할 리가 없었지만, 일단 저 둘이서 동시에 저러면 항상 입을 다물어야 했던 것이다. “언젠간 말야.” 엄마는 맥주캔을 쓰레기통에 던지며 그렇게 덧붙였다.
“뭐가 '언젠간'이라는 거야…”
그리고 셋이서 그렇게 냉전을 벌인 날 밤이면, 제이미는 베개 밑에 대고 항상 투덜대곤 했다.
다들 언젠간 언젠간, 말만 언젠간 하면서… 결국 그녀가 평생 그렇게 갇혀 살기를 원하는 게 아닌가?
아빠는 그렇다 쳐도, 대체 엄마는 뭔 일을 하길래 아빠보다 더 한숨을 짓는 것인지 그녀는 아직까지도 알 턱이 없었다.
다만 설령 엄마가 무슨 일을 한다고 해도, 제이미는 결국 끝까지 불만을 던질 게 뻔함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
자신은 이렇게 갇혀 사는 건 질색이니까. 맨날 책만 읽게 시키고 말야. 제이미는 그렇게 속으로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아, 그나마 요즘은 거의 집에 혼자서 있는 시간이 대부분이니 그나마 다행인 거지.
새장 속의 조그마한 자유랄까, 함부로 밖에 나가거나 누구를 집안에 들여오지 않으면, 그 외에는 뭔 짓을 하든 상관없던 것이다.
그래도 답답할 때는, 최소한 마실 건 잔뜩 있으니 기분전환을 싹 하고 그대로 퍼자면 그만이었다.
애초에 애들 가르친다는 것도 최소한 그녀가 싫어하는 건 아니었고. 물론 그 일은 수많은 목록 중에 그녀가 이것만큼은 싫다 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빼고서 남은 거였지만, 어쨌든 예전보단 불만이 적었다.
아니, 정확히는 한 번 일을 시작하고 나니까 불만을 할 틈도 없어졌다고 해야겠지.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이해가 안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 나이가 되어서도 맨날 밖에서–
”–생님,”
툭툭툭,
“선생님,”
”…아, 어어?”
제이미는 눈을 뜨기가 무섭게 벌떡 일어났다. “뭐, 뭐야?” 조금 풀린 눈으로 중얼거리다 곧 정신을 차리자, 반장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제서야 제이미는 시계를 보고서 “아!” 하고 얼른 침을 닦아내고는, “먼저 가있어.” 자료를 허둥지둥 챙긴 뒤 교실을 나갔다.
“어우, 뭘 그렇게 잔 거지. 커피나 마실걸.”
그녀는 투덜거리며 상담실로 향했다. “선생님,” 먼저 가던 반장 아이가 그녀의 옆에서 발을 맞춰왔다.
“선생님 진짜 막 자던데, 요즘 피곤해요?”
“난 맨날 피곤해.”
딱히 애들한테 뭘 숨길 것도 없는 그녀였다. “몰라서 물어?” 솔직한 말들이 툭툭 튀어나오는 것에 익숙한지 반장은 작은 소리로 쿡쿡거렸다. 워낙에 같이 어울리는 사람이 극히 적다보니, 어느새 이런 애들 하나하나를 다 편하게 대하기 시작한 그녀였기에.
“오늘은 몇 명이야?”
요즘 교사들에게 있어서는 하루의 끝이나 다름없는 상담 시간.
상담을 원하는 애들이 몇 명이냐에 따라 최종적인 퇴근시간이 항상 다르게 정해진다.
어떻게 보면 그건 교사로서 하루 일과의 마지막 책임이자, 동시에 퇴근의 가장 마지막 장애물이기도 해서 그걸 교사마다 어떻게 취급하는지가 항상 다를 수밖에.
누구는 (일부러 혹은 그냥 사람이 원래 그런 건지)애들에게 그다지 좋게 대하진 않아서, 말을 트는 애들이 거의 없는 덕에 일찍 퇴근하는가 하면, 다른 선생들은 자기 퇴근보다는 애들을 더 중요시해서(그리고 그게 보편적으로 좋은 태도이고) 자신의 휴식시간을 희생해서라도 애들과 얘기를 많이 한다.
그리고 제이미의 경우는,
“어어, 오늘은 없어요.”
이미 하루종일 애들과 수다를 떨어댄 탓에, 아예 상담시간이란 게 따로 필요가 없는 케이스.
물론 늦은 시간에라도 뭔가 말할 게 생각나는 애들도 있지만, 그런 애들이 있어봐야 언제 얼마나 있겠는가.
“아, 그래?”
그리고 상담실로 가던 제이미는 그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이 딱 멈춰섰다.
“그런데 넌 집에 안가고 뭐해?”
“그게…”
반장은 머뭇거렸다. “선생님,” 그리고 곧 입을 열었을 때 그 애는 약간 미안해하는 태도로,
“저어, 혹시 요즘 애들이 그… 선생님이랑 전처럼 얘기 많이 하진 않는 거, 잘 못 느끼셨어요?”
“엉?”
제이미의 눈썹이 올라갔다. “그랬나?” 눈을 껌벅이는 그녀를 보며 반장은 말을 이었다.
“사실 요즘, 어어, 저도 좀 나중에서야 알았는데 애들이 어째 하나같이 말하는 게…”
“말하는 게 뭐?”
계속 질질 끄는 반장에게 곧바로 대답을 요구하는 그녀였고, 이에 반장은 속으로 한숨을 쉬는 듯 어깨가 살짝 들썩이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요즘, 다들 '가위저주' 얘기만 하고 있어서요. 선생님이 저번에 막 욕하던 그거… 어… 네, 그게 좀 많이 뜨고 있잖아요.”
“그거?”
가위저주라. 그러고 보니 그때는 아무 생각이 없던 그녀였다.
설마 요즘 애들이 그걸 주제로 삼고 있을 줄이야.
하지만 아까 반장의 말이 마음에 걸릴 수밖에 없었다. 전처럼 얘기 많이 하진 않는다니…
“어,”
제이미는 잠시 입만 뻥끗하다가 곧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 그걸 아직도 신경쓰고 그래? 너네 은근히 소심하구나?”
“네?”
그게 의외의 대답이었는지 반장의 눈이 동그래지는 것에, 제이미는 “야,” 그 '소심쟁이'의 어깨를 탁 쳤다.
“내가 언제 성질낸 게 한두번이야? 그걸 아직까지 기억해가지고… 그냥 뭔 얘기든 하려면 하고 그러는 거지.”
“아, 네에.”
반장은 시원스럽게 말하는 제이미의 앞에 고개를 끄덕였고, “어쨌든,” 제이미는 시계를 흘끗 보고는 다시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오늘 상담 없으면 빨리 집에 가. 애들한테 잘 전하고. 알았지?”
“네에.”
다만 아직까지도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지 허리를 숙이고 돌아가는 그 애를 향해, 제이미는 가볍게 손만 흔들어 주었다. 평소라면 애들이 그냥 친한 누나 언니같은 그녀에게 허리숙여 인사할 일은 없으니까.
애초에 그녀는 애들이 저러는걸 보고 싶지 않았다. 전처럼 얘기를 하지 않는다니 그런 것도 좋아할 리 없고.
그래서 일단은 무슨 얘기를 하든 상관없다고 말은 했지만,
“흥,”
그건 어디까지나 그거고, 사실 애들이 그녀 앞에서 그 주제를 꺼내기 힘들어할 만도 했다.
“하긴, 애들이니까 저런 거에도 관심이 가겠지.”
<-었습니다. 사망자는 손발이 밧줄로 묶여있었기에 타살일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이며, 호수 근처에는 아직까지 별다른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점심 먹으면서 애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그 주제가 나왔을 때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정색하고 말았으니까. 그 제이미가 그런 얼굴을 하는걸 처음 보는 애들이 다시는 그 얘기를 꺼내지 않고 있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현재 신원 확인에 들어갔습니다. 다음 뉴스입니다. 최근들어 점점 자주 일어나는 이른바 '가위저주' 현상이 어제도–>
딸깍. 제이미는 라디오를 껐다. “하여간,” 혀를 차면서.
물론 저거에 대해 처음 들었을 때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 그냥 세상 살다보면 이런저런 기사들 많은 게 정상이니까.
아니, 그런데 적어도 그녀의 입장에서는, 예를 들어 <**타운 주민 길가다 UFO 목격에 놀라 심장마비로 사망> 같은 기사와 다를 게 없는 것이다.
솔직히 차이가 뭔가? 갑자기 무슨 원인도 이유도 없이 한 단지 내에서 모든 사람들이 악몽이 어쩌구 인기척이 어쩌구…
처음에는 그냥 별 헛소리겠거니 하고 넘어간 것이, 지금까지 몇달 동안이나 계속해서 기사화되는걸 보며 슬슬 짜증이 났으니까. 게다가 그게 터질 때마다 정작 무언가 도둑맞거나 하는 건 하나도 없다면서 말이다. 무슨 사이비종교라도 유행하는 건지. 아니면 보험금 타는 새로운 수법이거나. 저 가위저주 현상 중에는 가짜로 밝혀졌다는(뭐가 가짜이고 진짜인지도 모르지만) 경우도 있으니,
아마도 무슨 사이비 종교이거나, 요즘 점점 보험이 바뀌면서 그걸 이용해 돈 타려는 수작이거나 그러겠지 하고 제이미는 간단히 결론지었다.
경찰들이 저걸 수사할 의욕이 영 없는 것도 당연했다.
그냥 어쩌다가 한 번 기사로 뜨는 거라면 가벼운 이야깃거리로 넘어가고 끝날 것이, 벌써 몇 달째 저러고 있는 탓에 억지로 떠밀려 수사를 해야 하니 과연 할 맛이 날까.
하여간 세상 참 이상하다니까. 제이미는 핸들을 돌리며 이쯤이면 끝났겠지 하고 라디오를 다시 켰다.
다만 그 가위저주 어쩌구 하는 거에 대해 말들이 점점 많아지는지, 뉴스는 이제서야 끝난 것 같았다.
철컹,
“다녀왔습니다아–”
물론 집에는 아무도 없지만.
제이미는 가방을 소파에 휙 던지고는 그대로 자기 몸도 내던졌다. “하아,” 누운 채로 몸을 쭉 피고서 TV를 켠 그녀.
“아이고, 우리 애기 어떡해!”
역시나. 이런 시간에 그녀를 맞이해주는 게 드라마 말고 뭐가 있을까.
나름 싫어하지만은 않았다. 최소한, 아무 생각 없이 보기에는 딱 좋은 게 드라마 말고는 거의 없다는 게 그녀의 의견인지라,
무엇보다 교사로 살면서 거의 하루종일 머리를 쓴 날에는 중간중간 찬물을 끼얹을 시간이 필요하니까.
현재로서는 그 몇 안되는 방법 중 하나가 저런 거였다. 복잡한 것들로부터 벗어나 잠깐 단순한 걸 보면서 누워있는 시간. 물론 사람이 일정 깊이 이상 빠져들만한 건 절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렇게 일 끝나고 지친 시간에는 저런걸 보면서 멍때리는 것도 충분히 좋고 생각하는 그녀였다.
다만 이렇게 혼자서가 아니라 엄마랑 아빠도 여기서 같이 봤다면 이렇게 멍하니 있는 대신 무슨 말이라도 오갔을 텐데. 어느새 그녀의 생각은 또다시 그런 쪽으로 가고 있었다. 친구도 별로 없이 자란 그녀에게 엄마와 아빠는 거의 유일한 '편함'의 대상.
그러나 최근 들어 집에 잘 오지 않고, 그렇다고 심심해서 밖으로 뛰쳐나가거나 하면 그걸 또 귀신같이 알아채고 막 뭐라고 하니,
생각해 보면 도대체 뭐가 무서워서 애를 그렇게 가두고 키우는 걸까. 대체 뭐 때문에–
달그락, 띡,
“음?”
띡, 띡, 띡,
어느새 피곤해서 눈이 저절로 감겨있음을 그제서야 안 제이미는, 눈은 그대로 감은 채 현관 쪽에서 나는 소리에 귀만 기울였다.
자기가 누르는게 아닌 현관 번호 소리를 듣는 것도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한 달 혹은 두 달 됐던가?
아니, 그것보다 누구일까. 엄마일까? 아니면 아빠… 아니, 그녀는 입을 열어 둘 중 한 명을 부르려던 것을 멈췄다.
알 게 뭐야. 나를 이렇게 두 달 동안이나 가둬놓고서는. 이런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채웠기에.
안그래도 오늘 갑자기 애들이 나랑 전처럼 얘기하지 않는다느니 하는 소리까지 들었겠다, 아주 좋은 타이밍에도 돌아오시는구만.
그녀는 일부러 눈을 더 꼭 감고서, 아예 소파에 누운 채로 등을 돌렸다. 오면 오든가. 어디 뭐라고 입을 여나 보자. 갑자기 어디서 이런 배짱이 나오는지는 몰라도, 저렇게 문 소리를 들으니 순간 그녀는 이번에 좀 뭐라고 하고 싶어졌던 것이다.
피곤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너무나 뜬금없었지만, 갑자기 뭔가가 확 치솟는다고 할까.
어쨌든, 그녀는 어디 들어오려면 들어오라지 하고 있다가,
좀 더 나아가서는 아예 아직 문이 열리지 않은 틈에 얼른 가서, 현관문을 싹 다 잠가 버릴까 하며 두 입술까지 쭈욱 삐뚤어졌으나, 그러면서 동시에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한 것도 서서히 인지하기 시작했다. 뭐지 이건? 그녀는 아직 눈을 감은 채 고개만 살짝 돌렸다.
이때 문이 열렸고, 이어서 도대체 뭐라 할 수 없는 이상한 느낌, 마치 누군가가 저 쪽 어딘가에 있다는 이상한 인기척 같은 것이 느껴져, 게다가 문을 열면서 아무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기에 제이미는 그제서야 눈을 떴다. “누구세요?” 엄마도, 아빠도 아님을 그녀는 직감했다.
도대체 어떻게 그걸 직감할 수 있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그녀는 벌떡 일어나서 문 쪽을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났는데, 이상하게 발소리는 들리지 않으면서 누군가가 온 듯한 느낌은 있었다니. 무엇보다 누군가가 들어왔다 싶은 것 치고는 이상하게 인기척이 났다. 보통은 누가 오든 말든 무언가가 느껴진다거나 하지 않았는데.
도대체 이 생소한 건 뭐란 말인가. 제이미는 묘하게 오싹해지며 일단 부엌으로 갔다. 혹시 모르니 칼이라도 들어야 할까.
아니, 그런데 그 느낌은 어디로 간 거지? 지금 보니 그녀가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언제 그랬냐는 듯 집 안에는 다시 그녀 혼자였던 것이다.
문도 다시 닫혀있는데, 곧 나간 걸까? 아니, 애초에 집 번호를 어떻게 알고서 들어올 정도면, 그냥 나갈 리는 없겠지.
제이미는 날랜 움직임으로 부엌에 들어갔다. “으음,” 이어서 그녀가 선반 위를 빠른 눈으로 둘러보는 중에,
갑자기 무언가가 확 밀려오는 것에 그녀는 등골이 서늘해지며, 마치 누군가가 그녀를 건드리기라도 한 듯 몸이 쭈뼛 서면서 그만 앞으로 넘어질 뻔했다.
잠깐 정신이 멍해지려던 찰나 제이미는 갑자기 주위가 밝아지는 것에 정신을 차려, 곧 부엌 안을 서서히 비추어 가는 기이한 빛에 뒤돌아섰다.
그리고 다음 순간, 제이미는 두 번째로 정신이 아득해질 뻔했다. “힉–” 그녀의 눈이 동그래지며 그대로 뒷걸음질을 쳤다.
거대한 빛. 회색빛인지 은빛인지, 아니 이게 빛인지 물결인지 안개인지도 모를 것이 그녀의 바로 코앞에 서있… 아니 서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대체 이건 뭐라고 해야–
“잠깐–”
하지만 제이미가 입을 열 새도 없이, 그것은 제이미에게 곧장 달려들었다. 달려들었는지 날아들었는지 뭐라고 해야할지도 모르지만, 제이미는 입을 열었으나 열린 입에선 비명조차 새어나오지 않았고, 그렇게 저것이 대체 뭔지에 대해서도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이어서 그게 그녀에게 달려든 순간 그녀의 눈앞에서, 그리고 동시에 다른 어딘가에서 번쩍인 빛이 정확히 어떤 색이었는지도 감지하지 못한 채, 다음 순간 그녀는 또다시 눈앞이 흐릿해지는 것을 느꼈고, 이번에는 정말로 몸이 쓰러지는 것을 느끼며 그대로 눈이 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