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
딩–
“아! 여기까지!”
동–
“그럼 너희 모두 적당히 공부하고, 쳐 놀고, 쳐 자고, 그럼 바바–이!”
교탁에 책을 탁 내리쳤다가 도로 집어들고 얼른 교실을 나간 제이미는 “으하아~” 기분좋은 소리와 함께 얼른 가방을 챙기러 갔다.
“아, 앨리슨, 수고하셨어요.”
“네에~”
10월 27일 금요일, 어제부터 시작된 자기암시가 그런대로 효과를 봤는지,
오늘 수업을 정말로 아무 탈 없이 보낸 제이미는 그야말로 저 하늘 끝까지 날아오르고 있었다.
역시 아무 일도 아니었던 거야. 정말로 날아가기라도 하듯, 어느새 어린애처럼 두 팔을 벌린 그녀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
단 한 가지, 어제처럼 애들의 시선이 굉장히 가깝게, 아니 뚜렷하면서도 미묘하게 느껴졌지만 뭐,
아마도 요즘 예민해서 그런 거겠지. 십중팔구 요즘 피곤해서 그런 것이라 생각하고, 주말에 푹 쉬면 나아지겠거니 하는 그녀였다.
“수고하셨습니다아!”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외치는 소리에, 안에 있던 교사들의 반은 역시 그녀답다는 표정을 지으며 웃어 보였고, 다른 반은 젊으면서도 대체로 자유롭게 사는 그녀가 부러운지, 약간은 시샘하는 눈빛으로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딱히 이 학교 안에 절친하게 지내는 사람도 없는지라 겨우 이런 거 가지고 신경을 곤두세울 사람이 아니었다.
세상 뭔 지랄 난장판이 있었든 주말은 기분좋게. 이것이 바로 제이미 헌법 제 1조항이니까.
손이 안 보일 정도의 속도로 가방을 싹싹 챙긴 그녀는 어깨에 탁 매고는 문을 다시 기세좋게 열고서 나갔다.
“자,”
어느새 주차장까지 냉큼 뛰어나온 제이미는 차 문이 다 열리기도 전에 그 안으로 몸을 쏙 집어넣었다.
“가자 애기야! 가자아!”
재촉하듯 아직 시동도 켜지지 않은 차를 자기고 시끄럽게 경적을 울려대다가, 시동이 켜지자 마자 얼른 팍 밟는 그녀였다.
<And– they did cried for nothing, though– couldn't do any seeing>
(그리고 그들은 아무 의미없는 울음을 터뜨렸지, 생전 본 적도 없으면서 말야)
마치 누군가에게 설명을 해주거나 일상적인 시를 읊어주듯 무미건조하게 노래하는 소리.
하지만 제이미는 이걸 또 자기 식대로 받아 부르며, 고개를 까딱거림과 함께 핸들은 손끝으로 툭툭 치고 있었다.
금요일의 힘이란 건 정말 대단한 거였다.
세상에 프라이데이 갓(Friday God)이란 게 있다면, 그분이 곧 이 시대의 진정한 구원자이니라.
일상에 찌들어 사는 중생들을 위해 몸소 빛을 발하사, 인간들을 '주말'이라는 극락으로 인도하실지어니, 그렇게 구원받은 중생들은 48시간동안 온 몸을 늦잠, 음주, 노래방 소소한 깽판 등의 거룩한 축복으로 씻어내리며,
이후 다시 지옥의 4대 악마 중 첫째인 먼데이(Monday)의 손에 프라이데이 갓이 빛을 잃으실 즈음이면, 모두들 다시 중생의 삶으로 돌아가 며칠동안 지옥의 밑바닥에서 수행을 해야 하느니라.
“그래,”
어느새 스스로 종교 하나를 창시하며 제이미는 혼자 낄낄거렸다. “금요천국 월요지옥이야.” 이어서 핸들을 돌린 그녀.
<So it eventually comes for me, whether I accept it or not…>
(그리고 그건 결국 내게 찾아와, 내가 그걸 인정하든 말든…>
“그런데 대체 누가 들어왔었지?”
하지만 곧 적신호 앞에서 자리에 드러눕듯 하며, 핸들 위에서는 두 손이 가볍게 장난을 치고 있을 때, 그녀는 혼자 중얼거렸다.
좋아, 환청은 환청이라 치자. 애들 시선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도 좀 피곤해서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 그녀의 집에는 누군가가 들어왔었다. 것도 그녀가 들었던 걸 기억하면, 집 번호 한 번 안 틀리고서 곧바로. 하지만 그녀의 가족이었다면 들어와서 그녀를 깨웠을 것이고, 아니면 최소한 그녀에게 뭐라도 덮어주든가 하겠지.
적어도 그녀가 낯선 느낌에 다시 눈을 뜨기까지의 그 몇초 사이에 어디론가 사라지진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사람이 어디론가 사라진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되잖아? 제이미는 흥얼거리던 것을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래, 지금 정신상태가 생각보다 더 최악이라는 걸 전제로, 그녀가 환상을 봤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제 수업중에 있던 건 뭐란 말인가? 생전 알지도 못하던 것을 갑자기 알게 되어서는…
아니, 알게 된 것이 아니다. 분명 그 당시에도 느꼈지만, 마치 누군가 알고 있던 것을 그녀가 엿본 듯한 그런 느낌. 남의 일기장 뒤져볼 때와 비슷하지만, 글로 써읽는걸 보는 게 아니라 뭐라고 할까, 생각? 도대체 그게 뭔지 그녀가 잘 알 리 없었다. 평소에 전혀 모르던 느낌이니까. 하지만 어쨌든 책을 읽는 느낌은 아니었다.
“일단 운전할 때는 딴생각하지 말고, 제이미, 불 켜졌어.”
“아,”
그나마 지금은 뒤에 차가 없는 게 다행이었다. 제이미는 얼른 엑셀을 밟으며 축 처진 몸을 끌어당겼다.
그래, 일단은 집에 가고 보자. 그렇게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멈칫한 제이미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좋아.” 제이미는 이번엔 얼굴을 찡그리는 대신,
아니, 얼굴만 찡그리고서 별 행동은 안한 때와 달리 이제 겉으로는 이만 악물고서 속으로는 정말로 결심했다.
“이제 정말로 못 참아.”
띠릭,
“여보세요?”
차에서 내리자마자 폰부터 꺼낸 제이미. 차 안에서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그녀는 누가 응답하자마자 본론부터 꺼내고는, 곧바로 시간 예약 순서로 옮겨 버려서 일단 날부터 잡고 보자는 태도로 딱딱하게 말했다.
“제이미 앨리슨. 네? 네, 앨리슨이요 앨리슨. 마크… 아니, 어쨌든, 내일 오후에 가면 될까요? 다섯 시쯤에.”
담당원은 웬 환자가, 그것도 신경정신과 상담을 본인이 아주 적극적일 정도로 직접 예약하는 건지, 꽤나 놀란 모양이었다.
하지만 알 게 뭐야. 지금 그녀는 환청에 환각까지 아주 멋대로 판을 치고 있는 꼴인데.
마침 스트레스 누적치가 최고조에 달한 금요일이겠다, 지금 당장이라도 저걸 어떻게 하지 않았다간 그대로 폭발할 것 같았다.
“네, 그럼 내일 다섯 시요. 네, 그때 갈게요. 수고하세요.”
그래도 아직 의사를 직접 만난 건 아닌데 자기 증상을 다 말하기는 좀 그래서, 일단 상담이 필요하다고만 하고 끝낸 그녀였다. 이어서 길다란 손가락으로 번호를 띡띡 누른 그녀는 문고리를 홱 돌렸고, 안에 들어서자마자 “정말…” 주먹을 꽉 쥔 채 소리쳤다.
“대체 뭐가 그렇게 바빠서 집에도 안 들어오고 있는 거냐고!”
아직까지도 누구 하나 없는 곳에, 거의 온 집안을 때려부수기라도 할 듯 날카로운 폭풍이 몰아쳤다.
하지만 들을 사람이 있을 리 없다. 목소리가 너무 커서 이웃집에 들릴 수는 있겠지만 지금 그녀는 그런걸 신경쓸 기분이 아니었다.
제이미는 당장 주머니에서 폰을 다시 꺼냈다. 그리고 화면이 켜지는 즉시 그녀는 미친듯이 키를 눌러댔다.
[나 참을만큼 참았어. 지금까지 친구 한 명 사귀는 것도 아주 지랄같이 간섭을 해놓고선,
꼭 지금처럼 주위에 누가 필요할 땐 도대체 망할 답장 한 번 안 해? 정말 그러고 싶어?
오늘 병원 예약했어. 지금 내 주위에 뭐가 막 보이고 들리고 해서 진짜 미치기 직전이야.
이대로 당신 딸 미친년 되거나, 이대로 짐 싸서 나가는 거 보고 싶으면 알아서 해.]
두 명에게 문자를 길게도 보낸 그녀는 그래도 참지를 못하겠는지 폰을 핸드백과 함께 확 소파에 내던지고 부엌으로 갔다.
“제이미,” 한편 안그래도 인내심 폭발한 그녀에게 또다시 환청이 들려왔고, 어쨌든 다시 무시하는 그녀에게 그것이 다시 말했다.
“너무 심했어. 아무리 그래도–”
하지만 다음 순간 그녀는 지금까지 부모가 자신을 어떻게 키워야 했는지를 떠올리는 중이었고, 이에 그것의 말도 뚝 끊겼다.
도대체 뭐가 무서워서 그랬던 걸까. 애인은 커녕 친구 사귀는 일에조차 이것저것 캐묻는 탓에, 결국 모두들 그녀를 떠났다.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그녀는 그냥 달리기나 사이클 같은 게 아닌, 복싱이나 사격 같은 것을 하고 싶었지만 결국 금지당했다.
뭐야? 그녀는 따질 때마다 항상 “넌 좀 얌전히 살아.” 따위의 소리들이나 들었던 것을 떠올리며, 얼굴을 사납게 일그러뜨렸다.
무엇보다, 일부러 별 거지같은 목록을 만들어, 그나마 그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일을 고르게 해놓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 일이 유난히 피곤해서 이제는 환청에 환상까지 보이는 꼴인데 그 전부터, 무려 두 달에 가깝게 연락 한 번 없다.
도대체 누구한테서 자식을 그따위로 키우라고 배운 건지, 그러다 못참고 그녀가 밖으로 뛰쳐나가기라도 하면 곧바로 알아채, 별 거지같은 소리들을 다 늘어놓고 했던 것을. 뭐야 대체? 애초에 요즘… 아니 지금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는데. 지금 그녀의 나이가 되기도 훨씬 전에 스스로 집을 나가서 자유롭게 살지 않던가? 그런데 난 왜 이 꼴이야?
“제이미…”
어느새 점점 열이 뻗쳐가는 그녀에게, 또다시 환청이 들려왔다. “으음,” 하지만 뭐랄까, 이번엔 조금 다른 느낌과 함께. 제이미는 짜증스런 회상 속에서 벗어나, 고개를 살짝 들었다. 뭐야, 저게 지금 나한테 동정심 같은걸 보이는 거야?
아무리 환청이든 환상이든 뭐라고 하든, 누가 지금 상태의 그녀에게 저렇게 딱하다는 의사를 보내면 그냥 넘길 수 없었던 것이다.
“조금 미안한 마음이 생겼다면,”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화가 풀릴 리는 없었지만. 적어도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좀 닥치고 있으란 말야. 넌 어차피 내일이나 며칠 이내로 곧 꺼질 거라고.”
”……”
어째서인지 대답은 없었다. “알아들어!?” 지금까지 실컷 끼어들어놓고선 정작 대답은 잘 하지도 않네. 꼭 엄마나 아빠처럼 말야. 제이미의 얼굴이 다시 구겨졌다. “제이미,” 그러다가 잠시 뒤 다시 그녀를 부르는 그것.
“그래, 알았어. 네가 어떤지 이해했으니, 적어도 내일 너가 병원에 갈 때까지는 조용히 있을게.”
“으응?”
의외의 대답. 이에 제이미도 그동안 무시하던 태도를 조금 버리고, “그러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난 거짓말은 하지 않아. 그리고 전에도 말했다시피, 언젠간 내가 이렇게 맹세를 하기 전에도 너가 먼저 스스로 알 거고.”
“언젠간이고 뭐고 간에, 갑자기 뭔 꿍꿍이야?”
“악의 같은 건 없어.”
그것–몇 번이고 말하지만 대체 무엇이든 간에–이 고개를 젓는 동작이 그녀에게 전해졌다.
“적어도 이제 너가 어떤 상태인지 알 것 같으니, 나도 한 발짝 뒤로 물러서겠다는 거야.”
“흥,” 제이미가 코웃음을 쳤다. “고마워 죽겠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녀는 갑자기 밀어닥쳐오는 어떤 느낌에 흠칫했다.
아까 저게 고개를 젓는 게 느껴졌을 때처럼, 이번에는 뭐라고 할까, 비록 저건 눈에 보이지도 않는 헛것에 불과했지만, 마치 저 앞에서 그녀를 향해 좀더 다가온 것 같은, 그렇게 해서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는 듯한 그런 기분, 아니 느낌, 아니…
“으으,”
제이미는 묘한 부담감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고, 이런 그녀에게 환청이 또 들려왔다.
“너도 약속을 해줬으면 좋겠어.”
갑자기 진심어린, 그리고 굉장히 가깝게 전해지는 것에 제이미는 “약속?” 구겨진 얼굴이 흐트러지며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이렇게라도 하면 조금은 부담감이 줄어들 것처럼. 하지만 여전히 그것은 지금 그녀의 눈앞에 똑바로 서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런 떨칠 수 없는 감각, 아니 그것과 비슷한 어떤 무언가와 함께, 그것은 그녀에게 이어서 말했다.
“내일 병원에 갔다와도 별다른 게 없다면, 그때부터는 나를 조금은 믿고 말을 들어줬으면 해.”
“뭔,”
제이미는 어림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뭔 지랄이야?” 당장 험한 소리부터 늘어놓는 그녀.
그런데 다음 순간, 그녀는 마치 누군가가 머리 위에 쇳덩이를 올려놓기라도 한 것처럼,
아니 머리뿐만 아니라 아예 온 몸이 무언가에 짓눌리는 듯한 느낌에 몸이 휘청였다. “아–” 그녀는 간신히 중심을 잡았고, 순간 멍해진 정신을 다잡은 그녀에게 그것이 말했다. “제이미 앨리슨,” 꽤나 단호한 말투를 섞으며.
“나는 네 입장을 이해했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언제까지 기다려줄 수 있는 건 아냐.”
하지만 잠깐동안 몸을 뭘로 짓눌렀다고–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는 몰라도–기죽을 그녀가 아니었다. “흥,” 다시 코웃음치는 그녀.
“기다리지 못하면 어쩔건데? 날 죽이기라도 하겠다 이거야? 환청에 불과한 게–”
“너도 나중에는 분명 이해할 거야. 하지만 지금은 그걸 설명하기엔 별로 좋은 때가 아냐, 제이미.”
“뭘 설명해?”
제이미가 물었으나 그것은 이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어쨌든,” 손을 휘휘 저으며 계속했다.
“나도 분명 해야만 할 일이 있어. 그리고 빨리 할수록 좋은 일이야. 나중에는 다 설명해 준다고 약속할게. 그러니 부탁이야,”
부탁? 이제는 약속에서 부탁으로 바뀌는 것에 대체 뭐가 그리 문제냐고 비꼬는 태도의 제이미에게, 또다시 그것으로부터 전해져 온 것인지–물론 그녀는 지금도 저게 헛것이라 여기지만–다시 한 번 무언가가 그녀를 세게 때렸다.
아까만큼이나 무거운 것. 하지만 이건 단순히 무거울 뿐만이 아니라 뭐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듯한…
“채,” 제이미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책임? 뭘 책임지고 있는–” “거기까지.” 그리고 그 무거움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정말이야, 제이미. 나는 내 약속을 지킬 테니까, 너도 내게 약속해 주면 되는 거야.”
“너가 대체 뭔데 그래? 설령 너가…”
말을 하다가 잠시 멈춘 제이미는, 마치 목에 가시라도 걸린 마냥 굉장히 불쾌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애초에 저런게 헛것이 아니라 실제하는 무언가라고 생각하는 거 자체가 그녀에게는 심한 거부반응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너가 그, 무슨 이상한 미시– 아니, 정말로 너가 뭐든 간에,”
'미신'이라는 단어를 꺼내려던 순간 그것이 지금 제이미가 느끼는 것만큼이나 심한 불쾌감을 드러냈던 것이다. “아, 진짜,” 제이미는 성질이 나서 머리를 박박 긁었다. 도대체 내가 이게 뭐하는 짓거리야.
“그러니까 너가 정말로 있는 거라고 해도, 그렇다면 너가 내 집에 멋대로 들어와서 날 기절시킨 거 맞지?”
“그래. 너가 기절한 건 내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그랬잖아.” 제이미가 딱 잘라 말했다.
“애초에 왜 내가 니 말을 들어야 하는데? 남의 집에 멋대로 들어와서 사람 때려눕히고, 보이지도 않는데서 자꾸 꿍얼거리고, 이상한 거나 전하고 그러는 거를? 난 니가 콩밥 먹는 꼴을 먼저 봐야겠는데?”
”……”
그것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제이미는 굳이 저게 또 자기 기분 같은 걸 전하지 않더라도,
지금 저 무언가가 좀 어이없어하고 있음을 그저 예상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럼에도 대답을 재촉하는 제이미.
“그런데도 계속 나한테 뭐라고 그럴 거야?”
”…나는,”
난처함과 함께 그것이 말을 아까보다는 느릿느릿 말을 했다.
“나중에는 다 이해할 거라고 말해주는게 전부인 것 같아, 지금은. 미안해, 제이미. 하지만 지금은 그래.”
“하,”
제이미는 이제 더이상 얘기할 가치도 없다는 듯, 슬슬 씻기 위해 욕실 쪽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그러면서 계속 누군가가 자신의 옆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느낌을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그녀였고, 그렇다고 지금 또 욕을 퍼부어봤자 이번만큼은 전혀 들을 것 같지를 않아, 마침내 옷을 벗기 전 그녀는 더이상 못 참고
“으, 알았어! 진짜! 어차피 곧 없어질 거… 아악, 좀 떨어지라고! 제기랄!”
욕실이 울릴 만큼 크게 한 번 터뜨렸다. 이에 그 이상한 것이 마침내 그녀에게서 조금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후우,” 동시에 어깨에 힘이 탁 풀린 제이미였고, 이어서 옷을 마저 벗으려는 그녀에게 마지막 한 마디가 전해져 왔다.
“그리고 이걸 잊을 뻔했는데, 오늘도 꿈에서 어제의 그걸 보게 될 거야. 한 번 풀어진 건 어쩔 수 없으니까.”
“응?”
......
.....
....
...
..
.
“헤에,”
키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사람들이야?” 그녀의 눈망울은 조금 우습게도, 자신들의 눈앞에서 무표정으로 시큰둥하게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이리저리 훑어보고 있었다.
“정말 특이하네.”
“음,”
한편 슨우는 조금 불안한 듯, 그렇게 다 똑같은 얼굴을 하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약간은 불안한 시선으로 보는 중이었다. “이거,” 그가 도대체 뭔 불안감에 휩싸였는지는 알 턱이 없지만, 그게 무엇이든 더이상 참지 못했는지 곧 입을 여는 그였다.
“아무래도 우리, 어디선가 옷을 갈아입어야 하지 않을까.”
“응?”
자기 주위로 지나다니는 사람들보단 그 사람들을 이리저리 뜯어보는 키리를 지켜보던 나르사가 고개를 돌렸다. “왜?” 뭔 문제라도 있냐는 듯, 그녀는 슨우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렇게 예민한 애였나?
“나르사, 그리고 키리 너도,”
그렇게 말하며 슨우는 왠지 점점 사람들 틈에 빠져들 것만 같은 키리를 잡아 끌었다. “와앗–” 키리가 비틀거렸다.
“남들 쳐다보지만 말고 우리를 좀 보라고. 저 사람들 눈에는 우리가 가장 특이하게 보일 거란 생각은 안 해?”
“뭐가 특이하다는…”
하지만 나르사도 고개를 한 번 내리자, “아,” 하고 그만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키리도 그제서야 자기가 이런 옷을 입고서도 오히려 '평범한' 사람들을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었다는 사실에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이런 둘을 슨우는 정말 한심하다는 듯이 한 번 눈치를 주고서, “가자.” 일단 인적이 좀 드문 곳을 찾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