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
“저!”
비명에 가까울 정도로 날카로운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키리가 어느 한 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저거!” 그녀가 소리쳤다.
“용이야! 저거 용이라고!”
“응?”
나르사도 놀라서 고개를 돌렸으나, 그 용은 어느새 빠른 속도로 지나가 버려서 꼬리 끝만 살짝 보이고 말았다. 하지만 분명 무언가 기다란 것임에는 틀림없어서, 그녀도 비록 키리만큼 겁에 질리진 않았지만, 눈이 휘둥그레져서 입을 열었다.
”슨우, 너 저거 봤어?”
“음,”
왠지 키리가 가리키기도 전에 이미 저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던 듯한 슨우는, 그럼에도 셋 중 유일하게 침착했다.
물론 그도 생전 처음 보는 것에 놀라기는 한 모양이지만, 최소한 겁먹은 얼굴은 아니었다고 할까.
아니면 혹시 모른다. 속은 벌벌 떨고 있을지– 라고 생각하는 순간, 엔시나가 그녀의 불필요한 잡생각을 탁 쳐냈다.
“정신 차려, 나르사.”
따끔하게 말하는 그녀에게 “네, 네,” 시큰둥한 반응을 보낸 나르사는 곧 슨우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
“용은 아닌 것 같아. 정말 크고 길긴 한데, 잘 보니까 안에 사람들이 있더군. 아무래도 일종의 운송 수단이 아닐까 싶은데.”
“으으응?”
안그래도 겁에 질린 키리는 그 말을 듣고 나르사와 슨우가 있는 쪽으로 후다닥 달려왔다.
“그, 그럼 이쪽 세계 사람들은 용을 타고 다니는 거야? 어떻게 그런 무서운 인간들이 다 있어?”
나르사가 입은 옷을 부여잡고 벌벌 떠는 키리에게 나르사는 머리를 툭툭 쳐주며 “용 아니래잖아.” 피식 웃어보이며 말했다. 하지만 몸을 떠는건 멈췄음에도 아직 손을 놓지 않은 채 꼭 들러붙는 그녀를 결국 가만 놔둔 채, 곧 아까 본 것을 떠올려봤다.
비록 그녀 혼자 저 기다란 것–둘의 말에 따르면 정말 용처럼 긴–의 꼬리 부분만 봤지만, 확실히 그건 용은 아니었다. 누가 봐도 웬 용이 그렇게 각이 지고 평평한 몸을 가졌을 리 없었다. 애초에 살아있는 생물이란 느낌도 별로 없었고.
그리고 이때 그녀는 처음에 창고 같은 곳에서 봤던 금속들이 떠올랐고, “아,” 혹시나 하는 생각에 목소리를 냈다.
“혹시 그거, 금속으로 만든 거 아냐? 아까 창고에서 본 거랑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아마도.”
슨우가 고개를 끄덕였고, 키리는 옆에서 “금속 용?” 자그마한 소리로 속삭이듯 중얼거리던, 마침내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곧 제정신을 차린 모양이었지만, 그녀 특유의 그 호기심에 가득 찬 눈을 아직 되찾지 못한 그녀는 “이상한 곳이야.” 중얼거렸다.
“저기,”
한편 슨우는 아무래도 짐작만으로는 뭔가 답이 나오지 않는지, 마침 길에서 지나가는 한 사람을 불러세웠다.
“방금 저쪽에 지나간 게 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응? 저쪽?”
행인은 슨우가 가리킨 쪽을 보더니, 지금은 그것이 지나가고 있지 않음에도 “전철이겠지.” 뻔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이어서 그는 마치, 이런걸 굳이 물어보는 사람이 정말 이상한 거라고 생각하며 그의 옷을 슥 훑어보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외국인이구나. 뭐, 관광 잘 하세요.”
말을 마친 뒤 고개를 한 번 끄덕여 인사하고는 제 갈 길을 가는 사람을 슨우는 빤히 쳐다보다가,
곧 주위의 네모난–정말로, 농담이 아니라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네모난–건물들을 불편한 얼굴로 바라보는 나르사, 그리고 어느새 자기가 언제 겁먹었냐는 듯, 다시 길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이며 옷이며 하나하나 다 뚫어져라 쳐다보는,
아니 쳐다보는 게 아니라 아예 무슨 분석이라도 하는 듯이 저러고 있는 키리를 번갈아 바라봤다. “너희 말야,” 그가 말했다.
“여기가 신기한 건 나도 인정하지만, 제발 그렇게 대놓고 이방인 티 내는 건 그만두지 않겠어? 지금 우리가…”
이어서 그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본 뒤, 아직까지는 딱히 자신들을 의심스럽게 바라보거나 하는 사람이 없는걸 확인하고 말을 이었다.
“아까 저 사람도 그렇고, 지금 우리가 그나마 외국인 취급을 받고 있어서 다행이지, 너네가 그렇게 아예 이 세상에 처음 왔다는 걸 다 드러내는 꼴이면 의심받거나 할 수도 있잖아.”
“의심할 게 뭐 있어?”
나르사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우리 여기 처음 온 거 맞잖아.”
뭐가 대수냐는 듯이 툭 던지는 그녀를 슨우는 답답해하는 얼굴로 보다가, “정말이지…” 머리를 긁적이더니 다시 말했다.
“어쨌든 옷이나 어떻게 갈아입으러 가 보자고. 어디서 구할 수나 있다면 좋으련만.”
그렇게 말하고 난 뒤 어느새 또 한눈을 팔고 있는 키리를 툭 친 그는 먼저 움직였다.
하지만 그렇게 셋이 이전의 이상한 금속 용, 아니 '전철'이란 것 때문에 멈췄던 발을 다시 발을 움직이기 시작한 뒤에도, 나르사는 어째서인지 죄다 똑같은 색으로 평평하게–아니, 조금은 울퉁불퉁하게– 다져진 길과, 사람들이 다니는 길 사이로 난 또다른 길,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만든 건지 온통 새까만 길, 또 사람 사는 집인지 아니면 다른 용도인지 뭔지는 몰라도, 온통 네모낳게 각지고 아주 높은 건물들,
그리고 무엇보다 새까만 길로 아주 빠르게 지나다니는 무언가, 이전의 그 '전철'과는 다르지만 역시 금속으로 만들어진 듯한, 하지만 길이는 사람 두세 명을 이은 정도만큼 짧고, 높이는 그녀의 머리에 닿지도 못할 무언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도대체 뭐 하는 동네지? 혹시 이쪽 세계는 아예 온 세상이 다 이런 모습인 걸까?
눈썹을 치켜세우고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면서 걷는 그녀와 함께, 엔시나 또한 눈앞에서 보이는 것들을 굉장히 흥미롭게 여겼다. “처음 보는 것들만 가득해.” 그녀의 호기심이 날을 세우는 게 느껴졌고, 나르사는 곧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 보니 길 중간중간–사람 다니는 길이든 저 이상한 게 다니는 새까만 길이든–에 웬 구멍이 나 있었던 것. 다만 대체 무슨 이유에서인지 꽤나 무거워보이는 금속 판으로 막아놓은 것을 보며, 나르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기껏 구멍을 내 놓고선 도로 막아 버린 거야?”
“사실 나도 그게 궁금하던 참이었어.”
슨우가 작은 소리로 대답하고는 모퉁이 하나–어째 길이 죄다 직선이어서 옆으로 돌 때도 홱 돌아야 했다–를 돌아선 순간,
툭,
“음?”
나르사는 누군가가 슨우와 살짝 부딪힌 것을 봤다. “아, 죄송합니다.” 그는 허리를 숙이고는 다시 걸어가는데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야,”
그리고 뒤를 돌아보는 슨우. 나르사는 그를 불러세운 사람이 굉장히 기분나빠하는 듯 거칠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렇게 쳐 놓고 미안하다고 하면 다냐? 꼴은 무슨 외국인같이 하고선 말야.”
“아?”
……
…..
….
…
..
.
“잠깐,”
제이미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저한테 별 이상이 없다고 하셨어요?”
“물론 자세한 건 뇌 활동을 검사하거나 해야 더 확실하지만, 적어도 지금까지의 검사로는 별 이상이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의사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하긴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애초에 숫자 외우는 거나 그림 맞추는 등등의 것들을 무슨 검사랍시고 하는 건지도 모를 정도로,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간 건 그녀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별 이상이 없다니… “선생님,” 제이미가 말했다.
“이런 말 어떻게 들으실지 모르겠지만, 전 오늘 아침에도 이상한 꿈이나 꾸다가 일어났다고요. 제가 여기를 무슨 '다른 세계' 취급하지를 않나, 이상한 옷을 입고서 돌아다니지를 않나, 거기서 저랑 같이 있던 여자는 뜬금없이 전철을 보면서 용이 어쩌구 할 정도로 이상한 꿈이었어요.”
“음,”
하지만 의사는 별 반응이 없었다.
“그건 아무래도, 앨리슨 씨가 요즘 너무 답답하다고 말씀하시는 것 때문인 듯 합니다만,”
“그거야 그렇지만,”
뭐, 그래. 세상 누구나 개꿈은 꿀 수도 있다. 하지만,
“환청은요? 환각도 한번 쯤인가 있었던 것 같고, 제가 알지도 못하던 걸 갑자기 알게 되거나 그런 건요? 다 말씀드렸잖아요.”
“네에,”
의사는 기록을 다시 보았다. “물론,” 몇 시간 전에 그녀가 한 말들을 정리한 걸 한 번 훑어보고서 입을 여는 그였으나,
“좀더 구체적인 검사를 해야 무언가가 나오는 경우도 없지는 않습니다만, 보통 앨리슨 씨께서 지금까지 말씀하신 증상은, 음, 그런 검사가 아니더라도, 방금 전의 비교적 간단한 것들에서부터 뭔가 이상이 나오는 경우가 대다수라 말이죠.”
“하긴,” 아무래도 맞는 말인 듯해 제이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네요.” 하지만 여전히 납득이 안된다는 그녀를 보며, 의사는 이번엔 손을 마우스로 가져가더니 몇 번 딸각거리면서 “무엇보다,” 무표정하던 얼굴이 조금 난감한 기색을 띄우며 말했다.
“구체적인 검사를 하신다고 해도, 지금 예약하신 분들이 좀 많은 상황이라… 적어도 일주일은 기다리서야 할 것 같습니다.”
“네.”
제이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일단 예약을 하겠냐는 의사의 말에도 고개를 끄덕였으나, 잠시 뒤 일어서서 인사를 하고 나가려던 그녀는 문득 생각나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뭐 때문에 그렇게 많이들 예약했어요?”
하긴 요즘 외적인 병보다는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게 문제되는 시대이니 별로 놀랄 것까진 없지만, 그래도 뇌 검사 같은 것까지 그렇게 많이 할 정도일 줄은 몰랐다고 할까. “그게,” 다만 의사의 대답은 다른 것이었다.
“실은, 요즘 그 '가위저주' 때문에 오시는 분들이 많이 계셔서 말입니다. 말씀하시는 걸 들어보니 다들 그렇더군요.”
“아,”
설마 정말로 그거 때문에 병원까지 가는 사람들이 있을 줄이야. “네에…” 제이미는 가만히 고개만 끄덕이고 나갔다.
띠릭,
문이 닫힘과 함께 자동으로 잠기는 소리가 나자마자, 집에 돌아온 제이미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제이미, 약속을…”
하지만 제이미는 입도 뻥끗하지 않은 채 손만 척 들어서 그것이 뭐라고 하는걸 막았다. “나 씻는다.” 그리고 마치 로봇마냥 딱딱하게 한 마디 던진 그녀는, 곧 욕실로 향했다.
그러나 몸을 한 번 싹 씻은 뒤에도 그녀는 묵묵히 거실로 향했고, 곧 핸드백을 뒤져서 약봉투 하나를 꺼냈다. “제이미,” 하얀 봉투 안의 조그마한 약들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녀에게 그것은 또다시 말을 걸어왔고, 그럼에도 아무런 대답 없이 병원에서 가볍게 처방해준 약만(십중팔구 안정제일 것 같다) 눈빛만으로 잘게 부술 듯 내려다보다가,
마침내 그녀는 약을 봉투에 도로 집어넣고는, 그걸 전화기 옆에 뒀다. “하아,” 소파에 주저앉으며 저절로 한숨이 나오는 그녀.
그래, 지금은 약을 먹을 때가 아니다. 눈을 감은 채, 제이미는 피곤한 머릿속에서 혼자 주고받았다.
도대체 뭔지도 모르는 거 따위랑 별 이상한 약속이나 해 가지고는, 내가 대체 뭐 때문에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 걸까. 하지만 됐다. 어차피 주말이고 하니. 그냥 어떻게 되겠지. 그녀는 절반쯤 포기한 심정으로, 몸을 일으켜세웠다.
지금은 약 같은 걸 먹을 때가 아니었다. 맥주, 아주 시원한 맥주를 좀 들이켜야만 할 것 같았다. 어차피 저게 뭐라고 지껄이든 분명 맨정신으로 들을 수 있는 건 아닐 게 뻔하니까. 그리고 이런 제이미에겐 아무런 반박도 들어오지 않았다.
얼마 후,
“흐흐흥~ 흠, 흐흠~”
꿀꺽, 꿀꺽,
잠시 뭐라고 흥얼거리던 그녀는 500cc 네 병째를 다 비웠다. “흐햐~” 이어서 한 차례 감탄을 내뱉는 그녀. 동시에 근처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며 자신의 인내심을 테스트하는 게 느껴져서, 마침내 제이미는 “그래,”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너가–”
“시작하기 전에,”
지금까지 자신에게 말 한 번 걸어주기를 기다렸다는 듯 바로 말부터 끊는 그것.
“앞으로의 네 태도에 대해서 좀 말해야겠어, 제이미 앨리슨.”
“엉?” 제이미가 고개를 높이 쳐들었다. “뭔 태도?” 이어서 뭐라고 더 말을 하려는 그녀였으나–
“먼저 첫번째, 넌 정말 성격이 지저분한 애야. 물론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그저 보기만 할 때는 이정도까진 아닌 줄 알았는데. 아무리 내가 네 생각에 헛것에 불과한다느니 뭐라느니 하지만, 넌 정말 뭐만 하면 바로 화부터 내고 보는 애야. 도대체 좀 차분하게 생각할 줄 모르고, 무슨 일만 나면 불판에라도 선 것처럼 이리저리 튀기만 하고, 가만히 들을 줄을 모른다고.”
“무슨,”
제이미는 슬슬 머리가 느려지고, 동시에 기분이 좀 좋아지려던 게 확 깰 뻔했다. “너가 뭔데 나한테–”
“일단 들어!”
순간 무언가가 확 몰려오는 것에 제이미는 정말로 술이 확 깼다. “흑–” 누군가가 자신의 목을 조르기라도 하듯, 그녀는 숨이 머리 끝까지 차오른 것처럼 그대로 멈췄다가, 곧 풀리면서 다시 소파에 늘어졌다. “두 번째,” 이어서 그것이 말했다.
“이건 나 뿐만 아니라 나와 같은 이들 모두에게 그렇지만, '미신'이라든가 하는 표현은 굉장히 모욕적인 말이야.마치 이쪽 세계의 인간들 중 피부가 어두운 이들에게 '깜둥이'라고 하는 것과 거의 같은 정도라고. 물론 이건 너가 몰랐던 거긴 하지만, 앞으로 그런 표현은 절대적으로 삼가야 해. 알았어?”
”……”
아무 말 없이 멍하니 벽만 쳐다보는 그녀였지만, 그것은 “세 번째,” 계속해서 그녀에게 훈계를 늘어놓았다.
“이건 네 기억을 조금 뒤져보고서 안 건데,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넌 너무 자기 입장만 생각하고 있어. 남들이 뭐라고 하든 넌 그 말을 항상 네 생각대로 해석하고, 네 입장에서만 바라보고, 네 기분대로만 대답한다고. 그 사람이 왜 저런 말을 할까,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하고 조금이라도 고려해보려는 노력이 없단 말야.”
그리고 여전히 말이 없는 제이미에게, “이해했어?” 하고 묻자 그녀는 아직도 멍한 얼굴로 고개만 조금 끄덕였다. 이에 “그래.” 자신도 고개를 끄덕이고는–그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항상 전해졌던 것처럼–조금 화를 거두는 그것.
“앞으로 말할 게 더 있지만 지금은 이정도만 해둘게. 일단은 이쪽 세계에서 그만 돌아가는 게 더 우선이니까.”
“그 '이쪽 세계' 어쩌구 하는 거 말인데,”
저게 화내던 게 멈추자–애초에 지가 뭘 잘했다고 나한테 성질을 내는 거냐고 막 들이붓고 싶었지만–다시 힘이 빠진 제이미는, 곧 자기가 술을 마신 이유가 저 무언가가 하는 소리를 맨정신으로 들을 수 없어서라는 것을 기억하고 물었다.
“그게 뭔 소리야? 꿈에서도 그러고. 무슨 다른 세계라도 있다는 소리야?”
“그래.”
그것이 고개를 다시 끄덕였다. “내가 살던 세계가 있어.” 이어서 한 마디를 덧붙이자, 제이미는 그 자리에서 한숨과 함께 고개를 푹 숙였다. 드디어 시작했군. 그녀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것은 “이곳은,” 말을 계속했다.
“일단 우리들은 인간계라 부르고 있어. 이쪽에는 인간은 있지만 나와 같은 혼령이 없거든.”
“혼령?”
그래 그래 일단 뭔 헛소리를 하든 일단 들어나 보자 하는 식으로 그녀가 묻자, 그것이 “응.” 바로 대답했다. 마치 지금까지 이런걸 말해주기를 오랫동안 참고 있었던 것처럼, 아니 진짜로 참고 있던 만큼 바로바로 말하는 모양이었다.
“그게 나와 같은 이들을 통틀어서 부르는 명칭이야, 제이미.”
“으응…”
일단 듣자. 제이미는 눈만 한 번 감았다 떴다 하고는 고개를 옆으로 축 늘어뜨렸다.
슬슬 머리가 다시 보이지 않는 빗자루질로 슥슥 치워지는 듯, 그러면서 다시 왠지 모를 안락에 빠지기 시작한 그녀. 또 쓸데없이 깨우지는 않겠지. 이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는 그녀에게 “깨우진 않아.” 굳이 대답을 하고서 계속하는 그것, 아니 혼령.
“어쨌든, 벌써 네 번째이지만 내 이름은 엔시나야. 앞으로는 제발 이것 저것 그것 하는 건 그만둬.”
“네에,” 제이미는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러죠, 혼령 엔시나.” 이어서 그녀는 이런 자신에 대한 한심함이 아직도 남아있어서, 그것마저 떨쳐내기 위해 냉장고로 가서 맥주를 한 병 더 꺼냈다. 톡, 곧 능숙한 손동작과 함께 뚜껑이 튕겨나가자, 제이미는 뚜껑을 주울 생각도 없이 병의 주둥이와 아주 긴 입맞춤을 했다. 목에 폭포가 쏟아지듯 하면서, 정말로 폭포 아래에 있는 것처럼 온 몸으로 퍼지는 상쾌함과 목을 손톱으로 툭툭 건드리고 긁는 듯한 찌릿함,
동시에 머릿속에서는 빗자루질이 계속 진행되고 있어, 이렇게 주말에 쭉쭉 마시면서 푹푹 늘어지는 게 최고의 즐거움 중 하나였다. 저기서 혼자 뭐라고 이상한 소리를 하는 누군가가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질 정도로.
“다음으로 너가 꿈에서 본 것들 말인데,”
한편 엔시나는 제이미의 이런 모습은 별로 상관하지 않는 듯, 말을 계속했다.
하긴 일단 얌전히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지금까지의 태도와는 굉장한 차이가 있으니까.
“전에도 말했지만 그건 내 예전 기억이야.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그리고 갑자기 말을 멈춘 엔시나. 동시에 제이미는 또다시 저 혼령–으으, 혼령이라니 진짜 무슨 애들도 아니고–의 행동, 지금까지 그게 느껴질 때마다 항상 그랬지만 마치 다른 사람이 뭘 하는 걸 눈으로 본 적도 없는데 그게 기척으로 느껴지는 식으로, 분명 주위에 아무도 없는 제이미에게 그대로 전해져 왔다. 그리고 이번의 동작은 뭐랄까,
마치 길 가다 가끔 보이는 길고양이가 인기척을 느끼고는 고개를 홱 돌릴 때의 그것과 굉장히 비슷한 그런 느낌.
즉, 경계심.
“제이미,”
엔시나가 그녀를 불렀다. “왜?” 갑자기 태도가 싹 바뀌면서, 지금 그녀를 쳐다보는 것도 아닌 채로 말하는 그녀.이어서 다음 순간 제이미는 아까 엔시나가 화를 낼 때의 그것이 다시 한 번 밀어닥쳤고, 마치 거대한 해일이 그녀의 머리를 한 번 휩쓸고 지나간 듯, 머릿속이 눈 깜짝할 사이에 맑아진 그녀는 “어어?” 눈이 동그래졌다.
그리고 이런 그녀를 “제이미,” 다시 부르는 엔시나. “맥주 치워. 당장.” “왜?” 뜬금없는 말에 눈썹이 올라가는 제이미. 또 뭔 소리를 하려고 저러나 하는 그녀를 엔시나는 “빨리.” 무슨 일인지 꽤나 다급해하면서 재촉했다.
“누가 오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