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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lmate


007


“엉?”
제이미는 피식 웃었다.
“갑자기 뭔 개소리야? 누가 여기 오는지 안오는지 너가 어떻게–”
“장난하는 게 아냐, 제이미!”
지금 이렇게 말하는 엔시나의 다급함은 뭐랄까, 마치 제이미 자신이 다급해지는 것처럼 정말 사실적으로 다가왔다.
정말로 농담이 아니라, 제이미는 왠지 자신도 무언가 마음이 급해지고, 지금 당장 어디론가 숨어야 할 것만 같았던 것. “으,” 무슨 최면에라도 걸리지 않고서 이럴 리 없다고 여기며, 제이미는 그럼에도 어느새 빈 맥주병들을 빨리빨리 치우고 있었다.
“뭐, 뭐야? 너 지금 뭐 한 거야?”
“얘기는 나중에.”
엔시나가 재촉했다. “일단은 숨어.” 제이미는 자리를 싹싹 치워 놓고는 “어디에?” 굉장히 불편한 얼굴로 물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완전히 두 갈래로 나뉘어져, 한 쪽에서는 내가 왜 이런 뜬금없는 요구를 들어줘야 하냐고 투덜대는 그녀와, 다른 한 편에서는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저 혼령이라는 것과 더불어 굉장히 불안해하는 그녀가 부딪히고 있었다. 때문에 비록 몸은 엔시나가 시키는 대로, 어느새 침실로 들어가고 있었으나 얼굴 표정은 이리저리 망가지고 있는 상태.
“침대 밑으로.”
혼령이 내리는 다음 지시에 제이미는 “뭐?” 안그래도 뒤죽박죽이던 머리에 바늘이 꽂히는 것 같았다. “더럽잖아!” 불평을 하는 그녀에게 엔시나는 대답 대신 또다시 무언가를 했고, 제이미는 저 망할 것이 머리에–뭐가 어쨌든 지금 머릿속에 대고 뭔 짓을 하는 건 대충 알 듯 했다–뭘 하는지도 모른 채, “으읏,” 이번에는 약간의 두통을 동반하면서 한 손으로 입과 코를 막고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너,”
아까는 반반이었다 쳐도 이번엔 거의 자기도 모르게 엔시나의 말에 따라야 했던 제이미는, 손으로 막았음에도 그 사이로 먼지를 조금씩 삼키며 켁켁거렸다. “너,” 그러면서도 계속 목소리를 내는 제이미.
“너 지금 나한테 뭔 짓 하고 있는 거야? 대체–”
“미안, 제이미.”
그리고 제이미는 엔시나가 대답할 때, 그녀 또한 무슨 마라톤이라도 한 듯 굉장히 힘에 겨워하고 있음을 알았다.
아니, 저게 힘들어하고 있다는 걸 내가 어떻게 알지? 제이미는 갈수록 복잡해지는 머리를 어떻게든 해보려고 애를 썼다. 도대체 저 느낌들은 어디서 전해져오는 걸까? 아까 그녀가 다급해할 때 제이미도 같이 허둥지둥 움직이게 된 것도 그렇고, 침대 밑에서 입과 코를 막은 채, 제이미는 여전히 엔시나의 영향으로 인해 불안해하는 사이에도 궁금함을 참지 못해, 그동안의 기억을 되짚어 보며 하나하나 정리했다. 자기가 어디 있는지는 스스로 알아내라 했던 엔시나의 말을 참고하며.
생전 알지도 못하던 지식의 갑작스런 유입, 어디서 들려오는지, 아니 지금 생각해보면 들려오는 것이 아니라, 마치 누군가가 뭐라고 말하는 게 전해지는 듯한, 입으로 나오기 전에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들이 전해지는 듯한 느낌, 거기다가 아예 손을 젓는다거나, 가까이 다가온다든가, 화를 낸다든가 하는 것까지 같은 식으로 전해져 오는…
침대 밑에서 제이미는 그렇게 퍼즐을 맞추듯 머리를 굴리다가, 자기가 중요한 논점을 놓치고 있음을 알고 다시 처음부터 생각했다. 애초에 저 모든 것들이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지, 분명 문자 날라오듯 어디선가 전해져 오는 것인데 그게 대체 어디서인지, 그렇게 계속 생각하다가, 마침내 퍼즐이 맞춰졌을 때 가장 그럴듯한 답은 단 하나 뿐이었다.
“그래, 제이미,”
한편 엔시나는 이런 제이미의 머리회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지켜본 모양인지, 잠시 조용하던 그녀가 말해줬다.
“난 애초에 네 주위의 어딘가에 있는 게 아냐. 너와 함께 있는 거지.”
”……”
잠시 조용히 있던 제이미. 그리고 곧 그녀는 입을 열었다. “기생충!?” 순간 겁에 질린 그녀를 보며, 엔시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이미,” 한심해보이는 사람을 보며 그러듯 고개를 천천히 젓는 그녀. 그리고 이런 그녀의 행동이 다시 전해지는 것을, 제이미는 이번엔 무시하지 않고 그대로 그 전해지는 느낌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확실히, 그건 밖에서 오는 느낌이 전혀 아니었다. 하지만 잘 파고들면, 분명 그녀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있었–
“아니, 아니,”
다만 그러다가 고개를 한 번 세게 저은 그녀였다. 어느새 그녀는 혼령이란 게 정말로 있는 것처럼, 알게 모르게 엔시나의 얘기를 받아들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서는 바닥을 짚고 있던 한 손으로 뺨을 툭 쳤다. 미끈한 얼굴에 먼지가 파우더처럼 푹 묻고, 제이미가 이에 한 번 크게 기침을 하자 엔시나가 “쉿!” 주의를 줬다.
“지금 들어오고 있어. 이제 기침도 최대한 참고, 아무 소리도 내지 마.”
“그러–”
“조용하라니까!”
엔시나가 다그침에 제이미는 결국 입을 다물었고, 도대체 자기가 지금 뭐 하는 짓거리인지 속으로 한탄했다. 한편 그녀는 동시에 저쪽 어딘가에서 왠지 모를 인기척을 느껴, 자기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가 헉 하고 짧게 토해냈다.
뭐야? 저쪽에 누가 있다는 걸 내가 어떻게 알지? 영문을 모르는 그녀의 머릿속에는 이틀 전 있었던 일, 수업 중 애들의 시선이 평소와 다르게 느껴졌던 일이 떠올랐다. “으읍,” 제이미는 고개를 저었다. 어쩌다 보니 그건 잊고 있었는데 갑자기 왜 생각이 나지? “내가 보여준 거야.” 이에 전해져 오는 엔시나의 대답.
“이제 조금은 알겠어? 난 기생충 같은 게 아냐. 하지만 지금은 더 신경써야 할 게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이어서 한 마디 덧붙이는 엔시나.
“하지만 넌 이런 일은 처음일 테니까, 굳이 신경쓰지 말고 방금 한 것처럼 계속 생각만 하고 있어줘. 그러다가 내가 말하는 게 있으면 바로바로 행동하고. 알았지?”
”……”
제이미는 다시 머리가 복잡해 지고 있었다. 바깥도 아니고 그렇다고 환청도 아니고 기생충도 아니고 어쩌구 하는 거에, 지금 저 바깥쪽에서 느껴지는 기이한 인기척에다가, 지금 저게 나한테 뭘 '보여줬다'고? 대체 뭐가 뭐란 말야?
게다가 아까 저 혼령이란 년 때문에 거의 반강제로 여기 기어들어왔을 때부터, 웬 놈의 두통까지 그녀를 괴롭히기 시작한 것이다.
누가 머리 한석을 쿡쿡 찌르는 듯한, 굉장히 아프면서도 짜증나는 그런걸 제이미는 정말 참기가 힘들다고 할까,그 느낌이 꼭 웬 어린애가 그녀에게 뭐 사달라고 떼쓰는 것 같아서, 안그래도 성질 급한 그녀가 전혀 좋아할 리 없었다.
그럼에도 제이미는 어쨌든 누군가가 진짜로 여기 오고 있으니 일단은 조용히 있자는, 나름대로 이성적인 판단을 내렸다.
물론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가 없지만. 그리고 엔시나는 이런 그녀에게서 잠시 멀어져, 무슨 감시라도 하려는 것인지–아까는 같이 있다고 하더니 다시 떨어질 수도 있는 걸까?–거실 쪽을 향해 온 신경을 돌렸다.
왜냐하면 그 침입자는 창문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제이미 또한 그걸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었다. 그리고 곧 눈이 동그래진 그녀. 혹시 저번에도– “아니,” 엔시나가 잠시 그녀를 의식하는 게 느껴졌다.
“그건 나였어, 너도 알다시피. 어쨌든 얘기는 나중에 하고, 조용히 있어. 뭐 묻지도 말고. 집중해야 하니까.”
이어서 창문이 아무 소리도 없이 열리는 것을 둘은 즉시 알아챘고, 엔시나는 다시 조용해졌다.
제이미는 도대체 어떻게 창문이 열리는걸 귀로 듣지도 않고서 알았는지, 아니 애초에 누가 저기 있는걸 어떻게 아는 건지, 또 방금 저게 머리에 무슨 짓을 했길래 자기도 모르는 사이 다급하게 움직이고, 지금은 두통만 남은 것인지,
아니, 아니, 정말로 지금까지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며, 왜 하필 그 대상이 자신인지, 지금 당장이라도 머리가 돌 것만 같은 상황을 가지고, 방금 했던 것처럼 어떻게 정리해보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그녀도 곧 창문이 다시 닫히고, 거실에 누군가가 서 있음이 확실해지자 그만 모든 생각이 정지하고 말았다.
뭘 썼길래 창문을 아무 소리도 없이 열 수 있었는지는 몰라도, 일단 침입자가 거실에 발을 들이는 것을 알자, 비록 그게 정상적인 감각을 통해서였든 아니든 누군가가 침입했다는 사실이 그녀의 정신을 깨운 것.
그리고 이런 상황이 되자 제이미는 정말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정말 이러기는 싫지만, 어쨌든 저 혼령 엔시나라는 여자의 말을 들을 수 밖에 없음을 인정했다.
한편 엔시나는 이런 상황에서 뭘 하는 건지, 침입자가 거실에서 몇 번 왔다갔다 했을 때 굉장히 못마땅해하는 투로 말했다.
“제법인데. 지금까지 본 몽마들보다 더 훈련이 됐어.”
몽마? 제이미가 눈썹을 치켜올렸으나, 엔시나는 이런 그녀의 생각에 대답하지 않은 채,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하더니 “제이미,” 곧 그녀를 불렀다.
“거기 모서리쪽에 손 좀 대지 않을래?”
“모–”
“말하지 말고!”
제이미가 무심코 입을 여는 것에 얼른 덧붙이는 그녀. 그리고 제이미는 갑작스럽게 소리치는 것에 잠시 움찔했다. 모서리는 왜 만지라는 걸까? 이유를 모르면서도 일단 상황이 상황인지라 한 손을 침대 모서리 쪽으로 뻗었다.
그러면서 제이미는, 뭐랄까, 지금 집에 모르는 사람이 침입했다는 위협 하나만으로 자기가 이런 짓까지 다 하고 있다는 사실에,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고 여기면서도 역시 한심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했다.
“거기서 조금만 왼쪽으로.”
한편 엔시나는 지금 제이미의 생각은 안중에도 없는 모양인지, 그녀가 손을 어디에 짚었는지 그 위치에만 신경쓰고 있었다. 제이미는 손을 조금 움직였고, 그러다가 곧 나무가 아닌 웬 금속이 손에 닿는 것 같아, 이게 뭐지 하는 생각에 눈이 동그래졌다. “눌러.” 이어서 엔시나가 말했고, 제이미는 그게 뭔지도 모른 채 꾹 눌렀다가 순간 놀라서 소리를 낼 뻔했다.
갑자기 제이미의 눈앞에서, 그리고 양옆에서 침대 모서리가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당황하지 마, 제이미.” 엔시나가 차분히 말했지만 지금 이게 당황하지 않을 상황인가.
침대 모서리가 무슨 셔터 혹은 스크린이라도 되는 마냥 천천히 내려오고 있어서, 그러니까 한 마디로 침대 밑에 갇히게 생겼는데!
하지만 저 밖에서 누가 돌아다니는 상황이라 딱히 뭘 하지도 못하고 가만히 바닥에 눌러붙어 꼼짝도 못하는 그녀에게, 엔시나는 “곧 켜질 거야.” 한 마디로 그녀를 진정시켰다. 하지만 뭐가 켜진다는–
그리고 제이미가 미처 속으로 불평하기도 전에, 밑바닥에 닿은 침대 모서리들은 정말로 스크린이 되었다. “읍!?” 입을 막은 채 제이미는 짧은 소리를 토해내며, 왼쪽부터 정면, 오른쪽까지 늘어서 있는 화면들을 둘러보았다.
침대 밑에 엎드린 제이미의 주위로 보여지는 건 다름아닌 그녀의 집안과 바깥 거리. TV에서 흔히 보이는 적외선 어쩌구 하는 것인지 온통 초록색 바탕의 화면이었지만, 저건 확실히 그녀의 집과 그 주변이었다.
제이미는 가느다란 손 안에서 떡 벌어진 입을 한 채, 아니 우리집에 이런 게 있었어!? 하고 얼굴로 말하는 중이었다.
“나중에 설명해줄게.”
한편 엔시나는 이런 경악스런(?) 상황을 한 마디로 처리해 버리고는, 이어서 “저기 거실.” 제이미에게 한 쪽을 가리켰다.
아니, 딱히 손가락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녀가 어느 쪽을 가리켰다는 걸 어떻게 알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제이미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과연, 거실에 누군가가 천천히 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 둘러보고 있었다.
”……”
하지만 세상에 별의 별 인간이 다 있다지만, 제이미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저런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분명 화면을 통해 보이는 바로는 그냥 사람, 정확히는 무슨 특수부대 요원이라도 되는 마냥 온통 새까만 옷을 입은 사람이지만, 웬 철판으로 얼굴 전체를 가려서–어떻게 앞을 보는 거지?–그런지는 몰라도, 굉장시 낯설면서도 희미한 기척.
그래, 지금 저렇게 거실에 있는 모습이 눈에 딱 보이고 있지만, 그럼에도 왠지 사실은 저기 없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이런걸 처음 보는 제이미에게 있어서는 아주 아이러니하면서도 생소한 느낌의 사람이었다.
“은신이야.”
엔시나가 그녀에게 설명해주었다. 방금 제법이라고 말한 뒤 어느새 다시 그녀에게 돌아온 그 혼령.
은신? 저게 어딜 봐서 은신이라고 할 수 있는지, 별로 감히 잡히지 않자 곧 설명을 계속하는 엔시나였다.
“말 그대로 몸을 숨기는 거야. 아니, '몸'을 숨긴다고 하는 건 그냥 피상적인 표현이고, 정확히는 자신의 '존재'를 숨기는 거라고 할 수 있어. 지금 네 눈에 보이고, 느껴지는 것처럼 말야.”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였다. 눈에는 보이지만 별로 느껴지진 않는 것.
그러나 한편으로는 저 누군가가 여기 들어오기 전부터 인기척을 느꼈을 텐데? “그건 내가 했어.” 이에 대답하는 엔시나.
“방금 전까지는 내 힘만으로도 충분히 포착할 수 있었지만, 불을 다 끄지 않은 게 실수였어. 여기 누가 깨어있는걸 알았는지, 자신을 더 철저히 숨겼거든. 때문에 나 혼자만으로는 조금 버거워.”
자신을 숨긴다고? 비록 엔시나가 하는 말처럼 저 사람이 별로 있지도 않은 것 같다고 느끼기는 한 그녀였으나, 다음 설명은 여전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리고 이런 그녀에게 엔시나가 덧붙여 말했다.
“지금 우리가 아닌 일반 사람을 기준으로 하면, 지금 저 정도의 은신을 쓰는 몽마를 그저 스치는 정도로는 아무것도 못 느낀다고. 적어도 바로 눈앞에 서 있지 않은 이상, 그 일반인은 자기 주변에 누가 있는지도 모를 거야. 눈에 보이든 안 보이든 말이지.”
그리고 제이미는 이 말을 듣고 나서야 지금 엔시나가 반쯤은 저 화면을 보고 있으며, 나머지 반은 그녀가 방금 '몽마'라고 부른 저 사람에게 집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애초에 어떻게 저런 게 가능하냐고? 눈에 떡하니 보이는데 정작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만드는 게 어떻게 가능해? 지금 그 일이 지금 이 집에서 벌어지고 있음에도, 제이미는 이런 말도 안되는 것에 거부감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엔시나는 “일단 가만히 있어.” 한 마디를 한 뒤, 이어서 생각나는 게 있어 “맞아,” 제이미에게 말했다.
“잊을 뻔했네. 아까 내가 너와 함께 있는 거라고 말했지? 너도 슬슬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를 하는 것 같고. 어쨌든 난 지금 네 눈을 통해서 무언가를 보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내가 말하는 쪽을 좀 봐줘.”
이 말에 제이미는 다시 기생충이 생각나 몸서리를 치다가 엔시나가 “제이미!” 또 다그치자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어느새 침입자는 거실에서 사라진 뒤였고, 이에 제이미는 얼른 그녀 주위로 켜진 화면들을 죽 둘러봤으나, 집에서 나가기라도 한 건지, 아니 아직 나가진 않은 것 같은데 어디 있는지 전혀 보이지가 않아 점점 당황하는 그녀였다.
“잠깐,”
한편 그런 제이미와는 달리 엔시나는 아주 침착하게, 그녀 주위의 것들 하나하나에 집중을 가하고 있다가, 곧 “주방이야.” 한 마디에 제이미가 옆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러자 정말로 침입자가 주방을 비추는 화면 속에 서 있었다.
믿을 수가 없어. 제이미는 계속 부엌 화면을 응시한 채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까 모든 화면을 둘러볼 때는 분명 보이지 않았는데… 아니, 사실 '보이지 않은' 게 아니었음을 그녀는 인정했다. 물론 엔시나가 다 설명해주기 전에도 한 번 깨달았지만, 이번에는 그녀 스스로도 확신하게 되었다고 할까,
그건 보이지 않은 게 아니었다. 정말로 '알지 못한' 거였다. 단순히 시각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보다 좀 더 오묘한 무언가.
너무나 확실하게 깨달은 탓에 그 제이미도 결국은 다시 부엌을 쳐다보며, 더이상 아무 질문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있었다.
아, 그것보다, 저 사람은 여길 왜 들어온 거지? “나도 몰라.” 엔시나는 짤막하게 대답을 했다가 곧 “아니,” 말을 고쳤다.
“알고는 있지만, 별로 중요한 건 아냐. 어차피 그쪽에서 하는 일종의 정밀검사 같은 거니까.”
정밀검사? 무슨 컴퓨터도 아니고 뭔 놈의 정밀– “조용.” 엔시나가 제이미의 생각을 탁 막아섰다.
마치 날아오던 화살을 한 손으로 막아내듯 그렇게 자신을 멈추는 것에, 제이미는 놀람과 짜증이 섞인 기분으로 다시 조용해졌고, 저 화면에서 침입자가 뭘 하는지에만 신경썼다. 엔시나가 그러는 것처럼. “다시 거실로.” 잠시 뒤 혼령이 말하자, 정말로 제이미는 그가 부엌에서 나가는 게 보였고, 다시 거실 화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곧 욕실, 이어서 창고, 그리고……
“으음,”
도대체 얼마나 지났을까, 이제보니 새벽 세 시가 넘어가고 있어, 점점 피곤해지는 제이미에게 엔시나가 말했다.
“이제 나가는 것 같아.”
과연 그녀의 말대로, 거실 화면에서 침입자가 들어왔을 때와 같이 창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 좀 나가도 돼?”
창문이 닫히는 걸 본 제이미가 지친 목소리를 내자 엔시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아까의 그 금속 부분을 다시 누르라고 했다. 제이미가 그 말대로 하자 곧 화면들이 꺼지면서 다시 침대 모서리로 느릿느릿 돌아갔고, 제이미는 마침내 침대 밑에서 벗어났다.
“으으,”
일단 불을 켜고서는 마치 길 가다가 뭐라도 밟은 얼굴로, 아니 그보다 더 불쾌해하는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제이미.
자정을 좀 지나서 갑자기 집안에 들어온 인간이 몇 시간 동안이나 집안을 서성이는 동안, 그녀의 몸은 먼지를 잔뜩 먹은 상태였고, 그렇게 완전히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꼴을 어떻게 하기 위해, 그녀는 당장 욕실로 들어갔다.
하지만 한 번 싹 씻고서 옷을 갈아입은 뒤에도 여전히 찝찝한 탓에, 그녀는 어차피 씻느라 잠도 싹 달아난 거, 집에 웬 놈이 들어오기 전에 하던 거나 마저 하자는 식으로 냉장고를 열고, 맥주 두 병을 꺼냈다.
탁,
잠은 깼지만 기운이 없어 병따개로 뚜껑을 튕겨낸 그녀는, 일단 한 번 쭉 들이켜 그동안 막혀있던 목 안에 산뜻함을 부어주었고, 다음으로 “이봐,” 어째 지금까지 아무 말 없이 조용한 엔시나를 불렀다. “혼령씨,” 나름대로 존칭도 쓰면서.
하지만 무슨 일인지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고, 이에 제이미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야! 기생충!” 곧바로 성질을 냈다.
“으…”
그제서야 반응을 보인 엔시나는 꼭 자다가 일어난 사람 같았다. “불렀어?” 아니, 같은 게 아니라 정말로 자다 일어난 건지, 제이미는 그녀가 굉장히 피곤해하는 게 느껴져서, “너 잤어?” 혹시나 하고 물어봤다. “응.” 엔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 씻는 동안 잠시 쉬려고 했는데, 깜빡 잤구나.”
“잠도 자?”
제이미의 눈썹이 올라갔다. “당연히 자야지.” 뭐가 그리 이상하냐는 듯 대답하는 엔시나.
“혼령이라고 하루 24시간동안 꾸준히 활동할 수 있는 게 아냐. 중간중간 휴식도 취해야지.”
“뭐어, 그렇지.”
하긴 당연한 말이니 휙 넘기는 제이미였다.
“어쨌든, 아까 말하던 거 계속해 보라고. 또 누구 오고 있는 거 아니지?”
이 말에 엔시나는 잠시 조용하더니 곧 “없어.” 하고는 다시 그녀에게서 조금 멀어지려 했다.
또 자려는 건가? “야,” 제이미는 조금 당황했다. 갑자기 왜 저러지?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잔소리를 막 하고서–
“방금 말했잖아, 제이미. 난 이만 쉬어야겠다고.”
엔시나가 딱딱하게 말했다. “그래,” 이어서 제이미에게 느릿느릿 설명해주는 그녀.
“넌 모르겠구나. 방금 전까지 내가 했던 거, 그렇게 은신하는 누군가를 추적하는 건 보통 일이 아냐. 무엇보다도 내가 지금까지 몽마들로부터 많이 숨고 도망치고 했지만, 저들은 갈수록 훈련이 되고 있어.”
“몽마라는 게 뭔데?”
제이미가 물었으나 엔시나는 어느새 사람이 꾸벅꾸벅 조는 것처럼, 정신이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내가 슬슬 궁금해지니까 이젠 너가 그러냐고 불평하려던 제이미도 다음 순간 그녀가 굉장히 지쳐있는 상태임을 깨달았고, “어휴,”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맥주를 한 번 더 들이킨 뒤 “알았어. 그럼 자.” 일단은 그녀를 놓아주었다.
“혹시 모르니,”
그리고 엔시나는 다시 조용해지기 전, 그녀에게 한 마디를 남겼다.
“내일 뉴스를 봐. 너가 방금 물어본 걸 바로 알게 될 거니까.”
“뉴스는 왜?”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걸까. 제이미는 더 묻고 싶었으나 엔시나는 이미 푹 꺼진 뒤였고, 제이미는 이런 그녀를 다시 깨울까 말까 하다가, 일단 자게 놔뒀으니 관두고 맥주 한 병을 싹 비웠다.
나도 잠이나 자야지. 이어서 두 병째를 마시다가, 아까 씻으면서 날라갔던 피로가 술기운에 다시 몰려오자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내일이 일요일임을 알고 딱히 일찍 일어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그대로 소파 위에 드러누운 그녀였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하여 지금까지와 같이 악몽과 함께 계속 원인불명의 인기척을 느꼈다는 증언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으,”
제이미는 몸을 한 번 뒤척였다. “으으…” 내가 TV를 켰던가? 아니, 일요일 아침마다 자동으로 켜지게 해놨지.
그녀가 나름 재밌게 보고 있는 드라마가 하필이면 일요일 아침에 하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 그녀가 정신이 들었을 때에는,
[그렇게 몇달 째 계속되고 있는 가위저주 현상은,]
”……”
가위저주. 제이미는 눈을 감은 채 속으로 이 한 단어를 떠올렸다.
[여전히 원인은 밝혀지지 않은 채 또다시 어딘가에서 일어날 것으로 보이며,]
“가위저주, 가위저주,”
뉴스에서 기자의 말이 이어짐과 함께 느린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그녀. “가위저주,” 정말이지 그놈의 가위저주,
술 마시고 자서 속이 좀 그렇다 하지만 그래도 일요일 아침은 자주 보는 드라마와 함께 상쾌한 시작이어야 하는데, 이제는 저딴걸 아침 속보랍시고 내놓는 지랄을 하고 있으니, “가위,” 그녀는 정말로 “저주,” 참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그거 가지고 떠들어야…”
소파에서 벌떡 일어난 그녀는 안 그래도 어제 일로, 아니 지금까지의 일로 쌓인 스트레스가 일요일 아침에 모두 뿜어져 나오면서,
“얼마나 지껄여야 좀 만족하겠냔 말야!!”
이성을 잃은 제이미는 다짜고짜 리모컨부터 던지려고 집어 들었다. “아주 그냥–”
[특히 이번 피해 지역인 릴리즈 타운은 그린라임 시 내에서도 가장 사건사고가 적은 지역으로 알려져 있어,]
”–어?”
순간 내던지려던 것을 딱 멈추고 그 자리에 얼어붙은 제이미.
방금 뭐의 어디라고? 그녀는 얼른 리모컨을 찾으려고 소파를 뒤적거리다가, 방금 그 리모컨을 집어던지려다 그대로 손에 들고 있음을 알고 “젠장,” 되감기 버튼을 누르는 그녀였다. 그러자 본방송으로 나오던 뉴스도 몇초 전으로 돌아갔고, 제이미는 방금 기자가 하던 말을 다시 들었다.
[수사에는 여전히 진전이 없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이번 피해 지역인 릴리즈 타운은 그린라임 시 내에서도–]
”……”
뭐로 한 대 맞은 듯 멍하니 있다가 다시 되감기를 눌러, 아예 기사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보는 제이미.
물론 항상 그렇듯 뭐 어떤 현상이네 어디서 일어났네 수사가 어떻네 하는, 정말 지긋지긋하기 짝이 없는 기사였지만, 그런 뻔한 내용 중에서도 제이미는 들을 건 전부 들었다. 바로 오늘 새벽에 또 있었다는 내용과, 정확한 시간은 0시에서 3시 사이쯤, 그리고 지역은 방금 들은 대로…
“야,”
제이미는 입을 열었다. “지금도 자?” “아니, 나도 보고 있었어.” 곧 대답해오는 엔시나.
지금 그녀가 사는 이 집은 릴리즈 타운의 5-3번지였기에, 갑자기 멍해져 있는 그녀에게 혼령은 조용히 말했다.
“이제 알겠지, 제이미. 저게 지금 여기서 벌어지는 일이야. 절대로 허상이 아니라고. 그러니 헛소리는 더이상 하지 말아줘. 전에도 말했지만, 너도 결국은 받아들여야 할 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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