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
바스락,
늙은 나뭇잎은 넓고 흰 버선바닥에 닿자마자 가루가 되어 버렸다.
“으얏,”
지금까지 너무 조용하기만 했어서 그런 걸까, 그런 소소한 소리마저 유난히 크게 들려옴에 아린은 흠칫했다. “깜짝야,” 발 밑을 본 그녀는 나지막한 소리로 중얼거리더니, 일단 한 번 멈춘 김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으야, 분명 처음엔 약초 찾으려고 들어왔었는디예…”
한쪽으로 삐뚤어진 입술과 함께 머리를 긁적이는 아린의 위로, 아직 생생한 나뭇잎들은 아주 조금의 살랑임도 없없다.
단지 묵묵히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 잎사귀들은 저 하늘을 향해, 그리고 서로를 향해 쭉 뻗은 가지 위에 모여앉아 있었고, 때문에 지금 아직 해가 멀쩡히 떠 있음을 그녀는 알고 있었음에도 주위가 썩 잘 보이지는 않았다.
한편 나무들의 밑바닥에는 녹빛 혹은 갈빛을 띈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 있어, 이곳이 인적이 드문 곳임을 바로 보여주었으며, 이는 곳곳에 다닥다닥 피어 있는 야생화와 버섯들, 그리고 지금 그녀의 발 밑에서 기어다니는 크고 작은 벌레들도 마찬가지였다.
“에이,”
아린은 어느새 자신의 발 위로 기어오르려고 하는 그것들을 가벼운 발길질과 함께 내던졌다. “저리 가얏!” 그리고는 잠시, 이렇게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 속에서 무언가를 찾는 듯 고개를 올려 주위를 한 번 더 둘러보았다.
사실 이 숲에는 저런 식물이나 곤충들, 혹은 이 사이에서 막막하게 서 있는 인간이나 혼령 말고 또 다른 생물 또한 있는 것이다. 애초에 오늘 약초를 캐기 위해 이곳에 들어왔던 아린이 자기가 원해서 이렇게 헤매고 다닐 리 없으니까.
아무리 일하다가 말고 혼자 나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는 그녀였지만, 설마 이렇게 깜깜한 곳에서 멍하니 서 있게 될 줄은.
그녀는 단지, 아주 영롱한 빛을 보고서 그걸 자기 머리에 달 생각을 했을 뿐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녀 집 근처에도 비슷한 게 몇 개 떠돌아다니고 있었지만, 그런 흔한 것들과 똑같이 생겼다면 보는 순간 눈이 동그래졌을까. 그냥 푸르딩딩한–물론 말이 그렇다는 거지 실제로는 언제 봐도 이쁘고 귀여운 것들이었다–빛 덩어리들 말고,
아니, 솜털처럼 허공에 가볍게 둥둥 떠다니는 건 똑같다고 해도, 아린이 본 건 단순히 푸른 빛만이 아니었다. 마치 어릴 적에 들었던 동화 속의 초롱불 정령을 연상시키듯, 푸르면서도 녹빛으로, 그리고 하얗게 빛나는 그런 것. 크기 또한 평소에 보던 것들에 비해 굉장히 소박하면서도, 아린의 눈에는 굉장히 예쁘게만 보였고, 그것 안에 내재된 특유의 무언가인지는 몰라도,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포근해지는 느낌도 들었다고 할까.
결국 그렇게 생전 본 적도 없는걸 따라, 약초고 뭐고 다 잊어먹은 채 이 끝이 없는 숲 속으로 깊게 들어오고 만 아린이었다.
다만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 빛도 놓치고 말아서, 곧 정신을 차리고 보니 완전히 뭐가 뭔지 모르는 상황이었고, 어떻게든 오던 길을 되짚어 돌아가려고도 했지만, 거의 몇 시간을 계속 그것만 쫓아다녔는데 그렇게 걸어온 길을 다 기억할 리가.
이후 그녀는 어떻게 누군가가 지나간 흔적이라도 찾으려고 했으나, 역시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지금 이러는 중이었다.
“어떡하쟈?”
다시 머리를 긁적이며, 그녀가 물었다. “리냐, 어떡해얘?” 하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 것에 그녀가 부르자, 지금까지 잠잠했던 혼령 하나가 아린에게 “아린,” 딱딱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난 분명 처음에 경고했어. 그 때 내 말을 들었어야지.”
혼령 리니아는 굉장히 화가 나기도 하고 안쓰러워하기도 하는 듯, 그렇게 말하고는 곧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편 아린은 “그러니까, 리냐,” 이런 그녀의 태도는 아랑곳않고, 흙바닥을 발로 툭툭 치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투로 물었다.
“이제부턴 말 들을 테니까, 좀 도와주얘. 나 혼자서는 너무 힘들야.”
이렇게 말하는 아린의 입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고, 오직 그녀의 머릿속에서만 말이 울리고 있었다.
물론 그녀도 처음에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어려웠지만, 결국 무엇이든 계속 하다보면 점점 익숙해지기 마련.
단순히 생각을 떠올리는 게 아니라, 정말로 머릿속에서 말을 꺼내 소통하는 것도 한 번 적응이 되면 아주 쉬웠다. 어쩌면 굳이 목소리를 내서 말하는 것보다 더 쉬운 일. 적어도 아린에게는 그랬다.
무엇보다, 그녀는 사람이든 혼령이든 누구든 다 편하게 대하는 식이라, 뭔 말을 하든 굳이 어려워할 것도 없었고.
“지금 생각중이잖아.”
리니아가 말했다.
“사실은 너가 내 말 안 듣고 그렇게 막 뛰어다닐 즈음에 길을 하나하나 다 기억하려고 했는데 실패했어. 하여간 너는 그렇게 제멋대로 움직여서는…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사는 거야, 너는?”
“우야,”
아린이 입을 쑥 내밀었다. 물론 그 입을 열지는 않았지만.
“그러는 리냐도 아까 그거 봤을때 진짜 신기해하지 않았으얘? 그래서 내가 그거 쫓아갈때도 어쨌든 나 냅뒀잖야.”
“그, 그건,”
잠시 당황하는 리니아였으나, 곧 “됐어.” 그녀의 투정을 탁 쳐냈다.
“너도 가만히 있지만 말고 누구 발자국이라도 계속 찾아.”
“지금까지 계속 찾았잖얘.”
아린이 투덜거렸다. “여기서 또 뭘 찾–” 이어서 말하던 그녀는 순간 눈망울 한구석에 무언가가 맺히면서 생각을 딱 멈추고는, 이런 어두컴컴한 곳에서 뭐가 저렇게 빛나는 건지 고개를 돌렸다. “야아?” 이어서 갑자기 얼굴이 확 밝아지는 그녀.
“리냐! 리냐!”
곧바로 한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그녀. “저거얘!” 언제 길을 잃고서 풀죽었냐는 듯, 그녀는 하늘을 찌를 듯 흥분하고 있었다.
“저거 아까 그거쟈? 맞쟈?”
“응.”
리니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맞네.” 과연, 그 영롱한 빛을 다시 보는 순간 어느새 둘의 마음은 편해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헤매고 있었다는 사실도 잊어버릴 만큼은 아니지만 약간은 덜 심각하게 느껴질 정도로.
한편 그 중 아린은 그러면서 저걸 가지고 자기 머리에 꽂은 꽃송이 대신 달면 어떨까 하는 상상에 빠져, 그렇게 저런 예쁜 빛을 머리에 장식한 자신을 부러워하는 친구들의 눈길 속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히히 웃었다. 이어서 지금 당장이라도 저걸 가져가기 위해 손을 뻗으려 하는 그녀였으나,
슥,
“얏?”
순간 무언가가 저 컴컴한 뒤편에 숨어있다가 갑자기 빠른 속도로 튀어나오자, 아린은 멈칫하고는 눈만 깜박였다.
온통 나무와 풀로 가려진 앞길만큼 어두운 그것은 다음 순간 어느새 저 쪽에서 무언가를 하는 중이었고, 너무나 빠르게 벌어진 일에 잠시 정신을 못차리던 아린이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그것은……
“으, 으야야!?”
아린이 지금까지 헤매면서 찾아다니던 그 아름다운 빛을, 냉큼 집어삼키고 있었다.
이어서 아린이 뭔가를 하기도 전에 그것은 마치 오랫동안 굶주렸던 들짐승마냥 단숨에 그 빛을 삼키고 말았으며, 이 갑작스런 광경을 보고 얼이 빠진 아린을 향해 몸의 한 부분을 돌리더니, 딱히 정해진 형체가 없는 그 몸이 묘하게 꿈틀거렸다.
“저거 혹시…”
비록 성인 한 명의 머리 크기만한 것이지만, 크기는 전혀 상관하지 않을만큼 충분히 불쾌한 기운을 두른 그것. 아린은 안그래도 그 빛이 사라지자 편해지던 기분도 다시 죽은 상황에, 저것의 정체를 곧 알아보고는 기겁하고 말았다.
10월 29일, 일요일.
“여기서 좌회전.”
사거리에 다다를 즈음 엔시나가 말하자 제이미는 잠시 뒤 핸들을 한 번 틀었다. “이대로 가.” 이어서 혼령이 다시 말했고, 제이미는 이 말에 고분고분 따르면서도,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게 많아 별로 좋은 얼굴은 아니었다.
그날 아침, 뉴스에서 하는 말을 보고 마침내 지금 자신 주위에 무언가가 벌어지고 있음을 조금은 인정한 그녀였으나, 조금은 조금일 뿐, 어딘가를 가야 한다고 말하는 엔시나의 말에 얌전히 따르면서도, 뭐라고 해야 할까,
그녀의 마음 한구석, 아니 이성의 한구석에서는 여전히 이게 말도 안되는 지랄이라고 경고하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아무리 별별 희안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고 쳐도, '다른 세계' 라니 대체 어이가 없어서–
“그래서 지금 가고 있는 거잖아, 제이미. 너는 직접 보고서 깨달아야만 하는 애니까.”
“칫.”
바로 저 말에 토를 달 수가 없었기에 저 혼령이라는 작자가 시키는 대로 밖에 나온 제이미였다. 물론 이 모든게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일단 한 번 그녀가 옳았음을 안 이상 그 전처럼 마냥 부정할 수만은 없었기에.
게다가 저 기집애–일단 여자인 건 확실하니까–가 잔소리하는 거, 그녀는 진짜로 듣기 싫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황금같은 일요일에, 그것도 아침부터 차를 몰고 생전 가본 적도 없는 곳으로 향한다니.
“으으…”
거기다가 지금 제이미에게는 굉장히 거슬리는, 아니 거슬리다 못해 꺼려지는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운전을 하다가 잠깐 고개를 돌려 옆좌석을 보면, 거기엔 그녀의 가방 대신 은빛으로 빛나는 작은 물건 하나가 놓여있기 때문에.
TV 혹은 컴퓨터 화면에서나 보던 권총이 지금 그녀의 옆자리에 놓여있다니,
정말이지 도저히 믿을 수가 없… 아니, 비정상적인 일은 이미 충분히 일어났으니 그렇다 치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람 죽이는 무기를 자기 옆자리에 놓고 드라이브나 하는 건, 적어도 스물 일곱의 여교사가 할 짓은 아니었다.
“혹시 모르니까 어쩔 수 없어.”
이런 제이미의 기분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대답하는 엔시나 덕분에, 총 뿐만 아니라 지금 그녀의 허리춤에는 나이프 하나가 숨겨져 있기도 했다. “진짜 싫어.” 제이미가 중얼거렸다.
“난 그냥 내친김에 바람이나 쐬자 하는 기분으로 나오려 했는데, 이런 흉기를 두 개 씩이나 가지고 나오는 게 말이 돼?”
그리고는 엔시나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자, 작은 한숨이 제이미의 입에서 저절로 새어나왔다.
뭐, 그래, 어쩌다가 총 좀 잡을 수 있다고 치자. 어쩌다가 칼… 그러니까 저런 칼 좀 잡을 수 있다고 치자. 문제는 저게 왜 내 집에서 나온 거냐 이거야. 제이미는 불평을 계속 늘어놓으며, 머릿속 시계를 조금 앞으로 돌려봤다.
“아, 제이미,”
그렇게 옷을 다 갈아입고 차 열쇠를 챙긴 제이미에게, 엔시나는 무언가가 생각난 듯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
“주방으로 좀 가줘. 챙길 게 있어.”
“뭘?”
도시락이라도 만들라는 걸까. 눈썹을 치켜세운 제이미는 일단 부엌으로 걸어갔다. “으음,” 엔시나는 주위를 둘러보는, 그러니까 지금 제이미의 시야 안에 들어온 부엌을 둘러보는 듯 하더니, “저쪽으로.” 어느 방향을 가리켰다.
누가 무언가를 가리키는 게 눈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저 머릿속으로 전해지는 것에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느낌을 받으며, 제이미는 그녀의 말대로 싱크대 옆에 섰다. “야,” 그리고 입을 여는 제이미.
“챙길 거 있으면 뭘 챙겨야 하는지 말을 하면 될 거 아냐. 이제 나를 무슨 리모컨으로 조종하듯이 하려고?”
“그게 아냐.”
엔시나가 고개를 저었다.
“거기 두 번째 서랍을 열어.”
'아니 그러니까–”
“일단 열어, 제이미.”
따끔하게 말하는, 아니 정말로 그녀의 엄한 말투에 어딘가 따끔한 것처럼 얼굴을 찡그린 제이미는 곧 서랍을 열었고, 이어서 엔시나가 “손을 뒤쪽으로 좀 넣어.” 계속 지시하는 대로 일단은 별 소리 없이 따라했다.
하지만 서랍 뒤쪽엔 아무것도 없을 텐데, 그 안에서 손을 좀 움직여 보라고 말하더니 다음 순간 무언가가 손끝에 닿자
“방금 그거. 그 나사를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리면 돼.”
라고 말하는 엔시나였고, 제이미는 “응?” 약간 미심쩍어하며, 아니 왜 이런 구석에 나사 하나가 덩그러니 있는지는 몰라도, 최소한 불필요하게 있는 건 아닐테니 이걸 빼내기라도 했다간 그대로 서랍이 주저앉을 수 있다는 생각에 별로 내키지가 않았다.
“괜찮으니까 어서 해.” 하지만 절대로 해할 생각이 없다고 전에 말했으니, 설마 무슨 일 있겠어 하는 생각으로 돌린 그녀.
드르륵,
“응? 으, 으왁!?”
그리고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났다. “뭐야 이게!?” 입을 다물지 못하는 제이미.
나사를 돌린 순간, 갑자기 그 서랍 의 바닥이 갈라지더니 무슨 추리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숨겨진 공간이 드러난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제이미에게 충격을 준 건 숨겨진 공간 자체라기보단 그 안의 내용물이었으니,
“이거, 칼이야? 칼 맞네. 그런데 뭐, 뭐가 이렇게 생겼어?”
나름 영화를 즐겨보는 제이미도 생전 본 적도 없을 정도로, 정말 갖가지 모양과 길이의 칼들이 그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제이미는 그것들을 본 순간 당장 손을 서랍 안에서 홱 빼냈고, 다음 순간 자기가 너무 놀라서 무언가를 그냥 지나쳤음을, 자기가 방금 소리를 지르는 사이 이 서랍 뿐만 아니라 주위의 여러 곳에서 이상한 소리들이 났음을 알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런 씨–”
욕이 절로 나올 정도로 충격에 휩싸여, 제이미는 마치 봐서는 안될 걸 본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녀의 당장이라도 터질 듯한 눈은 먼저 식탁 아래에 숨겨져있던 듯한 서랍장과, 그 안에 담긴 또다른 나이프들로 향했다.
몇 개는 영화에서 본 적이 있지만, 역시 나머지는 너무나 생소하기 짝이 없는 것들.
아니, 애초에 저런걸 영화나 게임 같은 데서만 봤다는 건, 지금 그녀의 집엔 저런 살인무기가 한두 개도 아니고…
“말도 안돼.”
제이미는 고개를 세게 저었다. “진짜로 이건, 저, 정말…” 이어서 그녀는 식탁 반대쪽의 벽이 그대로 벌어져, 마치 간이 식탁처럼 내려온 것을, 그리고 저 위에 올려져 있는 수많은 종류의 총들을 쳐다봤다.
정말 뭐라고 해야 할까, 총에 대해서 아는게 없는 제이미였지만 최소한 저것들이 가짜 총일 리는 없다는 건 바로 눈치챘다. 자루가 짧고 긴 것, 왠지 자동으로 보이는 것과 아닌 것 등, 정말 수많은 종류의 총들이 있었다.
“세상에,”
또 제이미는 거실로 시선을 옮긴 순간, 어느새 그쪽에도 별 괴상한 위치에 숨겨진 공간이 열리면서 그 안에 있던 것들, 누가 봐도 수류탄임에 틀림없는 작은 것들과, 그 옆으로 늘어선 또다른 총들을 발견하고서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
한편 엔시나는 그녀와는 달리 이런 광경에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저기 있구나.” 그녀는 한 쪽을 가리켰고, 충격으로 머리가 새하얘진 제이미가 그 쪽을 보자, 그곳엔 은빛 혹은 금빛으로 빛나는 권총들이 놓여 있었다.
“저 중에 세번째 걸 가져가, 제이미.”
태연하게 말하는 엔시나. 하지만 제이미는 거기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채 다시 고개만 저었다. “어떻게,” 그녀가 말했다.
“어떻게, 아, 아니 왜 이런게 집에, 그, 그러니까, 도대체 뭔, 이건, 허, 허어, 허…“
우우웅–
청신호가 켜짐과 동시에 엑셀을 밟자 차가 앞으로 나아갔고, 동시에 제이미는 입을 열었다. “혼령씨,” 엔시나를 부르는 그녀.
“이제 그만 좀 말해주지, 응? 그 이상한 감시카메라도 그렇고, 왜 저런게 내 집에 잔뜩 있는 거야?”
”……”
아무래도 엔시나는 그걸 설명해줘야 한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리고 이걸 대충 눈치챈–이번엔 느낌으로 전해지는 게 아니라 단순히 추측으로–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 그녀가 말했다.
“정말 뭐가 그리 급하다고 이렇게 사람 정신없게 만드는지, 나중에 말해줄 때 꽤나 그럴듯해야 할 거야. 알았어?”
“으음,” 엔시나도 조금 난처한 모양이었다. “많이 놀랐다면 미안해.” 이에 제이미는 다시 한 번 한숨을 푹 내쉬–
“아?”
순간, 제이미는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기라도 하듯, 무언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머릿속에서 번쩍였다. “잠깐,” 입을 연 그녀. 지금 무언가가 그녀의 머릿속에, 뭐랄까 별로 확신이 들 만한 건 아니었지만,
“엄마가 그거랑 무슨 관련이 있는데?”
“앗,”
엔시나는 깜짝 놀라서 얼른 무언가를 했고, 제이미는 그녀가 자신에게서 멀찍이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뭐지? 눈썹을 치켜세운 그녀였으나 혼령은 아무 말이 없었고, 마치 어제의 그 '몽마'라는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아니 자신의 존재를 숨겼다는 그들과는 달리, 그녀는 자신의 생각이나 기분 등을 제이미로부터 숨기는 것 같았다.
제이미는 이런 그녀에게 뭐냐고 물어보려다가, 왠지 대답해줄 것 같지 않아서 관뒀다. “그것보다,” 이어서 고개를 돌리는 그녀.
“여기 원래부터 이렇게 사람 없는 곳이었어?”
조금 답답해서 창문을 열으며 주위를 둘러보며, 그녀는 이거 영 아니라는 얼굴로 “처음 와보지만 별로네, 여기.” 한 마디 했다.
비록 겉모습은 그녀가 사는 동네와 크게 다른 건 없었지만, 이상하게 사람들이 별로 지나다니 않았다. 도로에 차도 지금 제이미의 차 한 대 뿐이었고. “거의 없지.” 어느새 다시 그녀에게 다가온 엔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방사능 오염구역으로 의심받던 곳이니까. 아주 오래 전 일이지만.”
“뭐!?”
제이미가 소리를 질렀다.
“미쳤냐!? 이런데 날 데려오면 어쩌자는–”
“진정해, 제이미.”
손을 젓는 엔시나. “오래 전 일이야.” 그러나 제이미가 여전히 성난 얼굴로 유턴을 해 돌아갈 생각을 하자 덧붙이는 그녀.
“애초에 방사능과는 전혀 다른 거라고. 다만 당시 시대가 시대였는지라 그렇게 의심할 수 밖에 없었던 거 뿐이야.”
“정확히 뭐길래 그래?”
하지만 한 번 생긴 의심이 가실 리 없는 제이미였다. 도대체 뭐가 있길래 하고많은 것들 중 방사능이라고 의심을 한 걸까. 엔시나는 이런 그의 물음에 “곧 알 거야.” 한 마디로 끝내 버리고는, 잠시 조용히 있는 듯 싶더니 그녀에게 말했다.
“거의 다 왔어… 거의 수백 년 만이구나.”
탁,
아린은 돌 하나를 밟았다가 그 자리에서 튀어올라, 눈앞의 웅덩이를 빠르게 넘어갔다. 그러자 눈앞에서 길이 갈라졌고, 이를 그녀가 어떻게 볼 새도 없이 리니아가 먼저 “왼쪽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이에 아린은 땅에 닿자마자 다시 왼쪽으로 뛰었다.
“이쪽 맞얘?”
그러면서 묻는 말에 리니아는 “그나마 낫겠지.” 굉장히 난처해하면서 대답했다.
“다른 쪽에는 사령 하나가 더 있었다고!”
“야?”
겁을 잔뜩 먹은 아린이 뒤를 돌아보자, 과연, 그녀를 쫓아오고 있는 것들 중 하나가 더 늘어 있었다. “안좋으얘.” 나무 하나를 비켜가며 아린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너무 안좋으야.” 당장이라도 터질 듯한 울상과 함께.
“약초 좀 캐러 왔다가 이게 뭔 꼴이얘! 오늘 너무 안좋으야, 너무–”
“시끄럽고 뛰기나 해! 저 사령들, 아무래도 처음부터 이걸 노린 것 같다고!”
“으야야,” 아린은 끙끙거렸다. “그럼 더 싫어야!” 그리고 낮게 뻗은 나뭇가지 하나를 향해 손을 뻗어, 그게 잡히는 즉시 몸을 날린 아린은 곧 착지하자마자 다시 고양이 산불에 도망치듯 날랜 속도로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