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
“켁,”
손을 입으로 가렸으나 그럼에도 코와 입으로 들어오는 먼지에 아린은 “켁, 켁,” 작은 소리로 기침을 연발했다.
도대체 얼마나 먼지가 쌓여있었길래, 또 그만큼 얼마나 오래된 곳이길래 상자 쌓인 거 한 번 엎었다고 이 정도인 걸까. 다른 세상에 대해서 얘기를 듣기는 했었지만, 설마 이렇게 지저분한 곳인 줄은 생각도 못했다고 여기며, 아린도 리니아도 계속되는 기침 속에서 벽에 바짝 붙어있기만 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먼지가 흩날리지만은 않았기에, 이윽고 깨끗하지 않은 황색과 회색이 난무하던 풍경이 가라앉자 그걸 느낀 아린은 눈을 떴다.
그러자 아린의 앞에는 방금 전의 남자가 칼을 꽉 쥐고서, 그녀를 단번에 찌를 듯이 팔을 휘두르고 있었다.
“으얏!?”
정말 털끝 차이로 몸을 홱 숙인 아린은 그렇게 빗나간 칼이 벽에 닿기도 전에 얼른 옆으로 몸을 날렸다. 이어서 바닥에서 한 바퀴 구르고는 발을 탁 튕기면서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 “깜짝야,”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약간 남아있는 먼지 속에 풀빛으로 반짝이는 눈망을로 그녀는 저 남자를 빤히 쳐다봤다.
분명 저 상자들에 깔리긴 한 듯, 옷에 여기저기 긁히거나 한 흔적은 있는데 그럼에도 저렇게 멀쩡히 움직이는 모습이라니.
상자들이 보기에만 무겁지 실은 텅 비어있던 걸까? 아린은 그것들이 널부러져 있는 쪽을 흘끗 보았다가 다시 남자를 쳐다봤고, 순간 그가 무언가 달라졌음을 직감했다. 저 남자는 더이상 괴로워하며 신음하지도 몸을 비틀지도 않는 것.
“완전히 빙의됐어.”
리니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사령이 한둘이 아니다보니 자아가 더 빨리 죽었나봐. 아니면 저 인간이 정신적으로 약하든가.”
그리고 아린은 저 공격자의 모습, 비록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몸을 마구 꼬아대지도 않았지만, 역시 정상적인 상태는 아님을 증명하듯 마치 술에 취한 사람처럼 제자리에 선 채로 축 늘어져 있는 그를 잠깐동안 관찰했다.
마치 무언가에 매달린 듯 힘없이 쳐진 두 팔 밑으로는 오직 손 하나만이 칼을 꽉 잡은 채 유일하게 힘을 유지했고, 두 다리는 아예 다리라기보단 삐딱한 나무토막 두 개를 세워 놓은 듯, 옆으로 기울어져서는 한 치의 굽힘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이런 그녀의 시선을 마주하는 두 눈에는 이미 생기가 싹 가셔서, 무슨 꽁꽁 얼려뒀다가 꺼낸 생선과도 같다고 할까.
“죽은 사람 같으야.”
아린은 이 모든 느낌을 한 마디로 일축했다. 확실히 저렇게 완전히 빙의된 희생자의 꼬락서니에는 충분히 어울리는 표현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중얼거림을 들은 것인지, 순간 그가 한 번 가볍게 경련을 일으키더니 순간 그녀에게 돌진을 해왔고, 그 속도가 너무나 빨라서 돌진한다기보단 무언가에 의해 튕겨져 나온 듯한 매서움을, 아린은 그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라 피했다.
일부러 타이밍을 맞춰 공중으로 몸을 휙 날린 그녀는 곧 떨어지면서 자신을 지나쳐 가는 그의 등을 팍 차며 뒤로 나갔다.
그렇게 다시 뛰어서 곧 착지를 하기 전 그녀는 저 뒤에서 쿵 하고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를 들었고, 발이 닿음과 동시에 뒤를 돌아보자 저 뒤의 커다란 금속의 무언가에 머리를 부딪힌 듯, 그가 잠시 비틀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사령이라 그런지 좀 무식한 모앙이얘.”
아린이 리니아에게 말하자 그녀도 고개를 끄덕였고, 이어서 “잘 됐잖아.” 한 마디에 아린도 살짝 미소지었다.
이어서 그녀는 잠시 비틀거리다가 다시 아까처럼 제자리에 서서 늘어지고는,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있다가 갑자기 확, 또다시 사납게 달려오는 그것을 피해 뒤쪽으로 달아나다가, 눈앞에 아까의 그것과 같은 상자들이 쌓여있는 게 보이자 속도를 냈다.
탁, 잠시 뒤 거의 따라잡힐 듯 하자 그녀는 그 자리에서 발을 튕겼고, 곧 몸이 떠오르자마자 상자들을 발로 차냈다.
온 힘으로 차낸 덕분인지 상자들은 아린이 뒤로 밀려나며 착지를 하기도 전에 그대로 무너지기 시작했고, 뭣도 모르고 돌진해오던 가짜 경찰은 다시 한 번, 우르르 쏟아지는 것들에 아무 대처도 못하고 깔려 버렸다.
“야야얏,”
아린은 발이 딱딱한 바닥에 닿자마자 멀찍이 물러나며 입을 막았다. “먼지얘,” 이번엔 어디 숨지 않고 계속 물러난 덕분에, 수백 년 묵은 먼지들이 또다시 그녀를 덮쳐오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대신 저기 깔린 누군가가 언제 또 달려올지 몰랐기에, 그녀는 동그랬던 눈이 경계심에 살짝 가늘어짐과 함께, 리니아도 그 사령들로부터 느껴질 수 있는 걸 재빨리 잡아내려 했다.
그리고 잠시 뒤, 아직 저 뿌연 먼지 속에 있음을 알고 가만히 있는 사이 다시 한 번, 짙은 장애물을 뚫고 그가 달려왔고, 아린은 이에 방금 전처럼 뛰어올랐으나 이번엔 그가 손에 잡고 있던 칼을 그대로 던지자, “야!?” 당황해서 순간 중심을 잃었다.
다행히 칼은 살짝 옆쪽으로 비껴가는 아린의 옷소매만 찢고 끝났으나, 아린은 그게 곧바로 저 뒤에 꽂히는 소리를 들었다. “위험했으야.” 곧 착지하면서 리니아에게 말한 그녀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며, 무언가 또 쓸만한 게 없는지 찾기 시작했다.
제이미는 지금 자신의 몸에 벌어진 일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 것도 움직이지 못하고, 아무 말도 꺼내지를 못하고… 분명 평소의 자기 몸과 다를 게 없을 텐데.
분명 똑바로 보이고, 똑바로 듣고 있는데 그 보는 눈을 깜빡일 수 없고, 가끔 들려오는 소리를 무시하거나 하는걸 지금은 못했다.
한마디로, 지금 그녀는 바로 몇초 전까지와 다를 게 전혀 없었지만, 단 한 가지, 몸의 어느 것도 움직일 수 없다는 게 달랐다. 마치 온 몸이 저리거나 가위에 눌린 때처럼. 물론 그런 경우에 느끼는 심각한 불편함은 없었지만, 어쨌든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뭐야, 대체 뭐야 이거, 어? 왜 몸이 말을 안 들어?”
이렇게 아까부터 계속 자신의 상태에 대해 중얼거리는 말도, 입 밖으로는 나오지 않은 채 그녀의 머릿속에서만 맴돌았다.
마치, 저 혼령 엔시나가 그녀에게 말해주는 목소리가 귀에는 들리지 않고 그저 어디선가 전해져오는 그것처럼.
“그래, 제이미.”
엔시나는 맞장구를 쳐 주었으나, 그녀는 곧 “지금은 가만히 있어.” 짤막한 한 마디와 함께 다시 눈앞의 상황에 집중했다.
제이미는 그녀가 이렇게 평소처럼 자신과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그리고 목소리를 내지 않은 채 말을 전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다른 게 있다면, 아무래도 지금 그녀의 몸은 저 혼령 기집애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거였으니, 그것도 단순히 자기 몸을 움직이는 게 아니라, 그녀가 움직이는 게 자기가 움직이는 때와 똑같이 느껴졌다고 할까,
“후우,”
예를 들자면 지금 그녀가 짧은 숨을 돌리며 저 남자의 손을 빠르게 피하는 중에, 그렇게 입에서 숨을 내뱉는 행동이 평소에 자기 스스로 숨을 내뱉는 것과 전혀 다른 게 없었고,
몸을 뒤로 내빼는 동작도, 물론 평소에는 이렇게 뭘 피하거나 그러진 않았지만 어쨌든 그녀 스스로가 하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정말로 이 모든 게 단지 다른 누군가의 의사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 빼면, 정말 아무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휙, 타악,
“읏,”
아니, 사실 이상한 게 하나 더 있긴 했다.
지금 이렇게 움직이는 몸이 그녀가 생전 시도해본 적도 없는, 빠르고 정확한 동작들로 무언가를 피하고 막아내고 있다는 거.
정말 제이미는 부모님, 아니 이 세상에 대고 맹세하건데 지금 자신의 몸이, 생전 누구랑 싸워 본 적도 없는 그 몸이, 현재 자신에게 손이나 발을 휘두르기에 바쁜 저 남자를 척척 막아내거나 피하고 있다는 사실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도대체 지금 자신의 몸을 조종하는–분명 자기 몸처럼 느껴지지만 지금 그녀가 움직인다는 건 확실히 느껴졌다–엔시나가, 저 혼령이라는 작자가 대체 뭘 배우고 살았는지 지금 저 남자가 그녀에게 주먹과 함께 팔까지 휘두르면,
탓, 푸욱–
그걸 재빨리 두 손으로 막아내고서는 그 자세로 발을 마치 칼로 찌르는 것처럼 뻗어 저 남자의 몸을 뒤로 밀어냈는지, 그리고 잠시 주춤하던 그가 이번에는 다리를 휘둘러 오자, 그게 자신의 머리 쪽으로 온다는 걸 어떻게 그 짧은 순간에 알아채고는, 곧바로 몸을 숙였다가 그 경찰복을 입은 다리가 머리 위를 다 지나가기도 전에 그대로 몸을–
“우와아!?”
순간 이 동작을 그대로 느끼는 제이미가 잠시 어지러워할 정도로, 손을 땅에 짚은 채 그대로 몸을 거꾸로 세워, 아니 거꾸로 세우는 게 아니라 몸 전체를 옆으로 휙 넘기며 동시에 다리를 뻗어, 그 남자의 다리를 세게 쳐냈는지 영문을 몰랐다.
한편 그 반격에 다리가 휙 돌아간 그는 중심을 잃고서는 곧바로 나자빠졌고, 이에 제이미는, 아니 엔시나는 재빨리 권총을 들었다.
“자, 잠깐!”
탕, 탕,
“흐익!”
멍하니 있던 제이미가 자신의 손이 다시 총을 잡는 걸 알고서 뭐라 해보기도 전에, 엔시나는 아무 주저없이 바닥에 엎어진 남자의 이마 한가운데를 정확히 쐈다.
마치 악기를 연주할 때 박자를 또박또박 맞추듯, 전혀 흔들림이 없는 두 번의 총질에 그 가짜 경찰의 머리에는 곧바로 두 개의 구멍이 생기며, 동시에 아까는 다리에서 철철 쏟아지던 피가 이번엔 머리에서 팍 솟았고, 그 붉은 방울들이 도로 머리에 떨어지는 걸 보며 제이미는
“죽였어…”
지금까지 총을 몇 번이나 쏜 반동이 슬슬 아프게 느껴지는 것도 무시한 채, 그대로 정신을 놓고 “하,” 실가닥 같은 웃음을 흘렸다.
“하하, 하, 흐흐흐…”
몸은 여전히 엔시나에게 있었기에 제이미의 얼굴에는 아무 미동도 없었으나, 그 안의 이성은 이미 저 멀리 날아가고 있었다.
“내가 사람을 죽였구나. 하, 내가, 하하하핫, 내가 사람을 죽였어. 흐, 흐하하,”
마치 죽은 사람이 입에서 피를 흘리듯, 혹은 기절한 사람 입에서 침이 새어나오듯 그렇게 죽은 웃음소리를 흘려보내다가, 그렇게 종이배 하나 먼 강에 띄워 보내듯 이성을 떠나보내던 제이미에게 엔시나가 “제이미,” 그녀를 부르고는
“어쩔 수 없었던 걸 알잖아. 아니면 너가 죽었을 테니까.”
한 마디를 하자 이에 제이미는 갑자기 심한 경련을–몸은 가만히 있지만 어쨌든 그녀는–일으켰다. “뭐?” 그녀가 말했다.
“너 지금, 내 손으로 사람을, 살아있는 사람을 죽여놓고, 응? 너, 정말로, 지금 그게 나한테 할 소리야?”
“하아,”
엔시나는 가만히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역시 제이미의 입은 가만히 있는 채 속으로만. 그리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그녀였고, 이어서 몇 발짝 가까이 다가가, 곧 머리에서 출혈이 멈춘 그 남자의 쓰러진 모습을 보며 다시 입을 열지 않은 채 말소리를 냈다.
“어쨌든 완전히 빙의하기 전에 처리해서 다행이야. 만일 그랬다면 아마–”
부스럭,
“음?”
순간, 바닥에 쓰러져 있던 몸이 무언가에 감전이라도 된 듯, 갑자기 한 번 크게 들썩였다.
이에 흠칫한 엔시나는 “설마,” 얼른 총을 다시 꺼내려고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는데,
파앗!
분명 머리에 총을 두 방이나 맞고 죽어야 했을 텐데, 그가 갑자기 몸을 일으킴과 동시에 그녀의 손을 발로 쳐냈다. 그것도 마치, 사람이 스스로 일어날 때의 그런 동작이 아닌, 마치 누군가가 강제로 일으켜 세운듯 부자연스럽게 일어나면서.
이 모습을 본 제이미는 “뭐야!?” 충격에 제정신으로 돌아오며, 엔시나 또한 굉장히 놀랐음을 느꼈다.
한편 그렇게 휘두른 발 탓에 권총은 저 멀리 날아가 크레인 옆에 떨어졌고, 이를 엔시나가 쳐다보기도 전에 그만 발목을 잡혔다.
”……”
쓰러지기 전까지는 그녀를 공격하면서도 계속 괴로워하며 신음하던 그는 이젠 더이상 아무 말 없이, 아주 조용하게 그러나 굉장히 빠르고 거세게 엔시나의 팔, 제이미의 팔을 잡은 채 그대로 내던지고 말았다. “흐앗,” 갑작스런 괴력에 엔시나는 당황할 새도 없이 그냥 조약돌 날아가듯 저 뒤로 휙 떨어져서는 그대로 바닥에 뒹굴었고, 곧 그녀는 벌떡 일어서서 이를 악물고 “내가 실수했어.” 제이미에게 말했다. “뭘?” 제이미가 묻자 일단 뛰기 시작하는 그녀.
“애초에 사령이 저렇게나 많이 빙의했다는 걸 너무 가볍게 생각했어. 그냥 총만 쏜다고 될 게 아니었는데.”
“뭔 소리야?”
방금 전까진 무슨 어쩔 수 없이 죽였네 뭐네 말해놓고서는, 이제와서 또 무슨 말이냐는 그녀에게 엔시나는 대답이 없었고, 대신 어째서인지 축 쳐진 몸으로, 그러나 아무런 신음도 괴로움도 없이 저 쪽으로 가는 남자를 향해 전력으로 달렸다.
분명 피를 뚝뚝 흘리면서도 멀쩡히 가던 그는 엔시나가 거의 근접한 순간 몸을 한 바퀴 돌리더니 발로 그녀를 차내려 했고, 그 속도가 쓰러지기 전보다 더 빨라진 것을 엔시나는 막는 대신 고개를 살짝 숙여 피하고, 그 다리를 그대로 잡아 확 비틀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엎어졌음에도 남자는 또다시, 꼭 누가 강제로 일으키는 것처럼 기괴한 동작으로 일어나더니 그대로 주먹을 날려, 그리고 이를 간신히 피한 엔시나를 다른 손으로 내려쳤다. “으흑!” 일단 손으로 막아낸 그녀였으나 그 충격에 고통을 호소했고, 이는 그대로 제이미에게도 전해져서 “아악! 아파!” 곧바로 소리를 지르게 만들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공격자는 다시 손을 휘둘러 그녀를 쳐내려 했고, 엔시나는 고통을 꾹 누른 채 그걸 다시 막았다.
이어서 날아오는 발도 막아내고, 또 주먹, 다시 발, 그리고 양손이 동시에 날라오는 걸 옆으로 피하고…
엔시나는 사령이 완전히 빙의된, 웬만한 사람의 것보다 더 빠르고 강한 공격 하나하나를 어떻게 다 막아내거나 피했고, 이를 지켜보며, 아니 자신의 몸이 아까부터 이런 빠르고 정확한 동작들을 소화해내고 있는 당사자가 직접 된 제이미는, 도대체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 엔시나라는 애가 굉장히 잘 싸운다는 건 확실한 듯 해서 자기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그녀가 아직 잘 움직일 때의 얘기일 뿐, 제이미는 곧 자기 몸에서 다른 게 느껴지고 있음을 알았다.
“후아, 하,”
이미 엔시나가 제이미의 입을 통해 거칠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걸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지만, 그건 옆에서 누군가가 지켜본다면의 경우고, 지금 그 몸의 주인인 제이미는 서서히 손이며 다리며 점점 무거워지고 있음을, 점점 근육이 꽉 조여오고 있어, 갈수록 움직이기가 힘들어지고 있음을 직접 느끼고 있는 것이다.
애초에 운동 한 번 제대로 하지 않은 몸을 가지고 그렇게 휙휙 움직여댔으니 금방 지칠 수밖에.
하지만 저 남자는 아무래도 남자라서 그런지, 아니면 아까 이상한 동작으로 일어선 것도 그렇고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점점 지쳐가는 제이미의 몸과는 달리 아직도 매서운 공격을 그대로 반복하기만 했고, 곧 엔시나가 날아오던 그의 팔을 잡아낸 순간,
휘익… 퍼억!
“어허윽!”
이어지는 발에 복부를 그대로 맞은 엔시나는 자신도 모르게 몸이 쭈그러들었고, 이렇게 무방비 상태의 그녀를 남자는 다시 내던졌다.
곧 몸이 붕 뜨고, 저 벽에 부딪히며 엔시나는 잠시 눈앞이, 제이미의 시야가 흐릿해지며 머리가 텅 비는 것 같았으나, 이를 느낀 제이미가 자신도 정신없는 중에 “야!!” 소리를 지르자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그녀였다. “고마워.”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몸을 일으킨 그녀가 앞을 보자 저 가짜 경찰은 어느새 저 크레인에 거의 다다른 상태였고, 그걸 보자마자 엔시나는 지친 몸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전력을 짜내듯 기를 쓰고 달려갔다.
이러진 않으려고 했는데. 제이미는 엔시나가 뛰어가면서 생각하는 것을 보았다. 이것만큼은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 목숨이 중요한 거지, 들키는 게 문제가 아니었기에. 그리고 제이미는 이걸 보고서 “응?” 했으나, 엔시나는 제이미가 그렇게 반응했을 때 이미 무언가 다른 걸 하는 중이었고, 제이미는 곧 그것이–
“우와아!? 너 뭐 하는 거야!”
지금 엔시나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녀로서는 차마 뭐라고 설명할 방법이 없었으나,
분명 아주 비정상적인 짓을 하고 있다는 건 확실했다. 한쪽 손에 힘을 가볍게 주고서는, 그 주위에 무언가를, 눈에 보이지도 않고 바람이나 온기처럼 느껴지는 것도 아니었지만 분명 무언가가 그 손 근처로 모인다고 할까,
마치 별사탕 만들 때 결정들이 한 곳으로 모이는 것처럼, 무언가가 아주 조금씩, 서서히 그녀의 손으로 모이고 있었다.
“야!”
제이미가 소리를 질렀다. “뭐하냐니까!” “쉿,” 엔시나는 지금 이렇게 하나둘씩 조금씩 모이는 그것에 굉장한 집중을 가하는 듯, 그렇게 뛰어가면서 뭘 하는지 전혀 알 수 없는 것을 손에 모으던 그녀는, 일순간 손에 한 번 힘을 꽉 주었다.
이에 그렇게 작은 알맹이로써 제이미의 손 주위에 맴돌던 것들은 갑자기 안쪽으로, 그러니까 그녀의 손으로 스며들어갔고, 전혀 정체를 모르는 것들이 마치 수십, 수백 개의 주사기로 한 번에 흘러넣어지는 느낌에 제이미는 순간 오싹해졌다.
그리고 마침 그녀가 또 뛰어오는걸 알고 있는지, 저 가짜 경찰이 뒤를 돌아보고는 그녀를 공격하려 할 때,
“흐어압!”
재빨리 그의 다리를 피한 엔시나는, 한 차례 기합과 함께 주먹을 내질렀다.
그녀의 공격은 정말로 무슨 약물을 투여한 것인지,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날아가 그가 미처 방어하지 못한 옆구리를 쳤다.
이에 남자는 비명소리는 내지 않았으나 옆으로 고꾸라졌고,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엔시나는 재빨리 몸을 날려, 곧 바닥에서 한 바퀴 구르며 그동안 우두커니 앉아있던 권총을 집어들었다. “흡,” 이어서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아까 그랬던 것처럼 다시 온 신경을 집중해, 은빛으로 빛나는 권총을 미묘한 세기로 쥐었다.
이에 곧 아까처럼 무언가가 그녀의 손 주위로 몰려들어, 이번에는 손이 아닌 손에 들린 총 근처에서 맴돌기 시작했다. “우와와,” 제이미는 눈에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고 그저 느껴지기만 하는 것들이 코앞에 모여들자 당황해서는, 엔시나가 그녀의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계속 집중하는 모습을 봤다. 그리고 잠시 뒤,
“온다!”
어느새 옆으로 쓰러졌던 그가 거의 몇 발짝을 남겨두고 펄쩍 뛰어올랐을 때 제이미가 소리쳤고, 그 순간 엔시나는 다시한 번 두 손에 힘을 주어, 이번에는 그 무언가가 저 총으로 스며들어가게 했다.
동시에 그녀는 총을 들어 재빨리 한 번 쏘았고, 이에 축 처진 모습으로 우스꽝스럽게 뛰어올랐던 그 남자는 그대로 탕, 이마에 세 번째 구멍이 나며 피가 튀고 두 발이 땅이 닿기도 전에 한 번, 아까 쓰러졌다가 일어설 때처럼 크게 경련을 일으켰다.
공중에서 뜬 상태로 머리에 세 번째 총알이 박힌 남자는 다시 땅에 쓰러졌고, 엔시나는 엎어진 뒷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곧, 천천히 손을 뻗어 남자의 머리에 대어 보았다. “죽었어.” 그녀가 한 마디를 하자 제이미는 이를 가만히 듣고만 있다가, 이제 정말로 죽었다는 생각에 안도함과 동시에 자기가 정말로 살인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섬뜩함이 동시에 몰아닥쳤고,
동시에 엔시나가 방금 대체 무엇을 한 것인지에 대해 의문도 생겨, 그 모든 게 한꺼번에 겹치며 굉장히 혼란스러워졌다.
“원래는 쓰지 말았어야 했어.”
그리고 이런 그녀에게 엔시나는 아까 뛰어가면서 생각했던 것을 말로 전했다.
“이제 곧 들키겠지. 아주 운이 좋다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지금 목숨이 더 중요하니까.”
들켜? 제이미는 누구한테 들키는 게 문제라는 건지 물어보려다가, 순간 옆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돌렸다.
이어서 “어?” 하고는 눈을 깜박인 그녀. 어느새 몸이 다시 그녀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었기에.
동시에 엔시나는 평소처럼 그녀로부터 조금 거리를 두고 있는 게 느껴졌고, 제이미는 방금 전까지 벌어진 일이 마치 꿈만 같아서, 자기가 뭐 잘못된 게 있나 하고 멍하니 서 있다가, 곧 입맛을 쩝 다시며 생각을 그만뒀고, 일단 저쪽에서 뭔 소리가 났는지 보았다.
“우야–앗!”
아까 제이미와 머리를 부딪혔던 그 여자가 공중으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제이미는 무슨 사람이 저렇게 가볍게, 마치 운동선수마냥 날아오를 수 있는지 놀라서 입이 벌어지는데, 순간 그녀의 옆으로 웬 나무상자들이 우르르 무너지는 게 보였고,
다음 순간 먼지가 사방으로 흩날리는 광경에 제이미는 거의 반사적으로 코와 입을 막았다.
“아주 그냥 깽판을 치네.”
그리고 저 상자뿐만 아니라 그 검은 머리 여자의 주위로 별 게 다 무너지고 흐트러지고 한 꼴이 난 것을 보며 그녀가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상자들 밑에는 또다른 가짜 경찰이 깔려 있겠지. 아까 저 여자가 그와 싸우는 걸 봤기에 대충 그럴 것이라 보고는, 잠시 뒤 뿌옇던 게 조금 가라앉자, 일단 약간은 경계하면서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 “저기,” 일단 조심스럽게 말을 거는 그녀.
“너 괜찮아?”
물론 한 눈에 봐도 이 여자는 멀쩡해 보였지만. 지금 다리도 긁힌 채 몇 대 얻어맞고 굴러다닌 제이미와는 달리, 지금까지 방금 보여준 것처럼 날아다녔는지는 몰라도 옷소매 살짝 찢어진 거, 그리고 먼지투성이인 거 빼고는 아무 흠이 없었다.
대체 뭐하는 여자일까. 제이미는 일단 자기보다는 어려 보이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야?” 그리고 곧 대답하는 아린.
“괜찮으얘. 그런데 언니는 보니까 많이 굴러다닌 모양이얘.”
별 괴이한 말투를 쓰며 제이미를 한 번 쭉 훑어본 그녀였고, 제이미는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는 기분으로 한숨만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