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
아린은 난생 처음보는 이 금발머리 언니가 한숨을 푹 내쉬는 모습을 동그란 눈으로 바라봤다.
그런데 이제보니 그녀는 웬 금속으로 만든 듯한 무언가를 들고 있었고, 이에 곧바로 그걸 가리키며
“그건 무얘?”
하고 묻자, 제이미는 그제서야 아직도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총을 보고는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흐익,” 그것을 떨어뜨렸다. 이런 그녀의 반응을 빤히 쳐다본 아린은 허리를 숙여 총을 주워들었고, 두 손에 쥔 채 이리저리 살펴보며 “으야,” 입을 열었다.
“신기하게 생겼으야. 이 쬐그만 게 정말 인간계 무기얘? 우야.”
그리고는 그걸 이리저리 뜯어보던 행동을 멈추고 고개를 아래로 내린 그녀. “죽었느얘.” 그녀가 말하는 쪽을 보자, 어느새 피범벅이 된 경찰 옷을 입은 가짜 경찰이, 무릎과 머리에 구멍이 뻥뻥 뚫린 채 벌러덩 누워 있었다.
제이미는 아린의 이 시선을 따라서 그걸 본 순간, 잠시 무언가를 잊은 듯한 게 갑자기 머릿속에서 일제히 폭발했고, 비록 입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으나, 얼굴색과 두 눈은 곧 죽을 때가 다 된 사람처럼 확 뒤집히고 말았다.
그래, 내가 사람을 죽였구나. 제이미는 온몸이 덜덜 떨려왔다. 선생 일도 이제 끝났네. 난 망했어.
아니, 선생 일이 문제가 아니라 당장 감방에 쳐넣어지는 꼴이니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정말 대놓고, 한 발도 아니고 아예 총알을 다 써가면서 이렇게 확실하게 죽여 놨으니 진짜 빼도박도 못하는 꼴이었다.
…라고 하기 전에, 총알을 다 쓴 건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걸까. 그녀는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한 번 부르르 떨었다.
“난 망했어. 진짜 망했어.”
곧 입을 연 제이미는 연신 중얼거리면서, 그렇게 귀신이라도 된 듯 창백해진 얼굴을 눈앞의 시신으로부터 떼지 못했다.
한편 엔시나는 그동안 조용하다가 또 뭔 꿍꿍이인지, “촉박해졌어.” 한 마디를 내뱉었다. 이에 퍼뜩 정신을 차린 제이미.
“촉박해졌다고?”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그래, 촉박해졌지, 하핫. 지금 당장 뭐라도 안하면 난… 나는…”
죄수복을 입고 돌바닥에 쭈그려 앉은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언니얘,” 그런데 이때, 옆에서 아린이 천천히 걸어와 어깨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주었다. 그러면서 또박또박 밝은 소리로 말하는 그 애.
”혼령이랑 얘기할 때는 그냥 속으로만 해도 돼야. 모르고 있었으얘?”
”……”
지금 속으로 얘기하고 뭐고가 문제가 아닐텐데 얘는 또 뭔 소리일까. 제이미는 여전히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정말 몇 번을 봐도 지금 이 상황은 어떻게 할 수가 없는데. 이정도로 저질러 놨다면 분명 아빠라도 어떻게 할 수가 없–
스르륵,
“응?”
순간 무슨 소리가 들려온 것에 제이미도 아린도, 그리고 두 혼령들도 저절로 시선이 그 시신에 쏠렸다.
각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서 잘 듣지는 못했지만, 마치 무언가가 미끄러지는 소리가 난 것 같았는데?
스륵, 스르르,
그리고 이런 그녀들의 반응에 응하기라도 하듯, 마치 깨진 독에서 물 새어나오는 모양새의 무언가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저, 저거,” 아까 엔시나가 '사령'이라고 했던 그 기분나쁜, 정말로 기분나쁜 검은 무언가가 저 죽은 시체로부터 스멀스멀, 정말 무슨 징그러운 벌레들이 그러는 마냥 기어나오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벌레들보다 더하지.
단지 저렇게 기어나오는 꼴을 보는 것만으로도 뼛속까지 서늘해질 정도니까. “징그러.” 제이미는 자동적으로 입에서 툭 내뱉었다.
“세상에 뭐 저딴 게 다 있어?”
안그래도 까지고 긁히고 얻어맞은 자리가 화끈거리면서 욱신거리는 와중에 저런 뭐같은 걸 봐야 한다니. 제발 오늘 저녁 먹을 때 저게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기를 그녀가 바라던 찰나, “제이미,” 엔시나가 그녀를 다시 깨웠다.
“여기서 나가.”
“어?”
제이미는 발을 움직이는 대신 고개를 돌렸다. 마치 그쪽에 혼령이 있기라도 하는 듯이. “갑자기 왜?” 그녀가 입을 연 순간,
훅–
“우야!?”
아린이 소리를 지르며 뒤로 펄쩍 뛰었다. 동시에 공중에 뜬 그녀의 발 밑으로 무언가가 빠르게 스쳐갔고, 옆에서 들린 소리에 고개를 돌린 제이미는 분명 저 시체에서 흘러나와 썩은 물처럼 고여있던 그것이 움직였음을, 그것도 마치 최후의 발악이라도 하듯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저쪽에 무너진 상자들을 향해 달아난 걸 알았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탓에 눈이 동그래져서 그쪽을 쳐다보는 제이미는, 엔시나가 경계심을 잔뜩 곤두세우고 있음을 느끼고, “뭐야?” 왠지 당황한 듯한 그녀에게 물었다. “역시 안돼.” 그녀가 대답했다.
“한두 마리가 들어간 것도 아닌데, 총알 몇 발 가지고 다 죽일 수 있을 리가 없었어. 그런데 왜 저쪽으로…”
이어서 무언가를 하는지 잠시 집중하다가 놀라서는 그녀가 제이미에게 무언가를 전해주었다.
말을 하지 않고서, 그녀가 지금 무엇을 신경쓰는 건지 그 생각을 짧게 정하는 걸 건네받은 제이미는 그 생소함에 잠시 흠칫했다가, 어쨌든 그녀의 의도대로 옆의 검은 머리 여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저기,” 하지만 역시 뭐랄까, 생전 처음 보는 옷에 얼굴도 좀 외국인, 아니 외국인도 너무 심하게 이색적인 모습을 한 사람인지라 일단 조심스럽게 묻는 그녀.
“그, 다른 사람 어떻게 했어?”
“야?”
아린이 그녀를 쳐다보자 제이미는 그 방울처럼 동그란 눈이 자신을 쳐다보는 것에 약간 불편함을 느꼈다. 저렇게 맑은 눈은 생전 본 적이 없는데.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여자가 어깨를 으쓱하면서
“저 파란 사람얘? 그냥 저거로 깔아버렸으야.”
하고 저쪽의 상자들을 가리키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는 게 문제였다. “어,” 제이미의 입끝이 뒤틀렸다. “그, 그래,” 어쨌든 애써 웃어넘기고–물론 자기는 아예 대놓고 쐈지만–엔시나가 이 말에 또 뭐라고 하는지 들으려는데, 갑자기 아린이 가리킨 상자들, 아까 봤듯 아주 요란하게도 무너진 그것들 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자 둘 다 그쪽을 쳐다봤다.
들썩, 그리고 두 여자의 시선을 받은 순간 그게 한 번 크게 움직이면서, 위쪽에 쌓여있던 몇몇 상자가 후두둑 떨어졌다.
마치 저 아래에서 무언가가 일어나는 듯, 계속해서 들썩이는 모습에 제이미는 왠지 불길한 느낌과 함께 몇 발짝 물러나려는데, 일순간 아까보다 더 많은 상자들이 큰 소리를 내며, 마치 팝콘 튀듯 사방으로 확 튀어올랐다. “어?” 제이미의 입이 벌어졌다.
하지만 상자들 몇 개가 튀어오른 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다음 순간 그 밑에 깔려있던 남자가 재빨리 일어섰기에.
그것도 마치 사람이 일어서는 모습을 담은 필름이 돌아가듯, 정말 기괴하고 부자연스런 움직임으로 그 남자가 일어선 순간,
휘익–
“우왁!?”
제이미는 엔시나가 어떻게 하기도 전에 스스로 바닥에 철퍼덕 엎어졌다. 그녀의 머리 위로 상자 하나가 날아가는 게 보였고, 그렇게 자신의 눈으로 보고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곧 일어나서는 먼지를 털 생각도 없이 그게 날아간 쪽을 멍하니 쳐다봤다.
붕 날아간 나무상자는 저 뒤편의 벽에 쿵 부딪혀서는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고, 이를 본 제이미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저,”
그녀와 아린이 있는 쪽을 쳐다보며 어째서인지 손가락을 이상하게 구부렸다 폈다 하면서, 동시에 몸을 이리저리 뒤틀고 있는, 마치 처음에 저 '사령'들에게 빙의되었을 때 그랬던 것처럼, 아주 힘에 부치는 듯 끙끙대는 그를 보면서 말하는 제이미.
“저거, 방금 이쪽으로 상자를 던진 거야? 아니, 던진 게 아니라,”
던진 게 아니라, 날려보냈다. 제이미는 그걸 알고 있었지만,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기에 차마 입 밖으로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저쪽에서 다시 일어서자마자 저 가짜 경찰이 무언가를 한 순간, 상자가 이쪽으로 날아왔다. 도대체 어떻게?
무슨 마술이라도 하는 거야? 도저히 뭔지를 모르는 일이었지만, 그러다가 또다시 저 남자가 두 팔을 위로 쭉 뻗음과 동시에 휙, 또다른 상자 하나가 그녀 쪽으로 날아오자 제이미는 이번엔 옆으로 몸을 날렸다. “도망가, 제이미!” 엔시나가 소리쳤고, 이에 그녀도
“뛰어!!”
멍하니 서있는 아린에게 외침과 동시에 문 쪽으로 죽어라 뛰기 시작했다.
안그래도 지친 몸이 비명을 지르고, 이리저리 긁히고 까진 다리가 그녀를 말리는걸 다 치우고 잽싸게 뛰어간 제이미는 곧, 저들이 들어올 때 난 문틈으로 쏙 들어가, 어느새 해가 다 지고 있는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어느 쪽이었지?”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저쪽이야!”
엔시나가 가리키는 방향을 본 제이미는 저 멀리 그녀의 차가 얌전히 주인을 기다리는 걸 봤고, 그게 눈에 들어오자마자 다시 미친듯이 달렸다. 그리고 어느새 아린이 그녀의 옆에서 같이 뛰고 있었다.
뭐가 뭔지 영문을 모르겠지만 일단 리니아가 시키는 대로 저 언니를 따라가던 그녀는, 그러다가 갑자기 뒤에서 사나운 소리가 울려퍼지며 문이 거의 부서지듯 열리는 걸 돌아보고는 “으야야,” 겁에 질려 속도를 더 냈다.
제이미는 옆에서 뛰던 애가 갑자기 바람을 일으키며 저 앞으로 가버리자 “자, 잠깐,” 하다가 다음 순간, 왠지 저 뒤에서 무언가가 또 날라올 것 같은 느낌에 뒤를 돌아봤다가, 과연 드럼통 하나가 날라오자 얼른 고개를 홱 숙였다.
앞에 가던 애는 그걸 옆으로 휙 점프를 하면서 피했고, 그 몸놀림을 보며 놀랄 새도 없이 제이미는 계속 달렸다.
철조망까지의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아, 곧 잽싸게 차에 탈 준비를 하며 그녀는 버튼을 꾹 눌렀고, 이에 띠릭 하고 차문이 슬슬 열리면서 이번엔 그걸 본 아린이 “야아?” 놀라게 만들었다. “안에 타!” 제이미가 소리를 질렀다.
“저거 뭐얘? 고철 수레?”
아린은 리니아에게 물었으나 리니아가 어깨만 으쓱하자 뭐 어쨌든 언니 말대로 그 안으로 냉큼 들어갔고,
이어서 제이미가 철조망 사이에 난 구멍으로 몸을 날려, 그 틈에 옷이 긁히든 찢기든 말든 재빨리 열린 차문으로 들어갔다. “옆으로 가.” 아무 것도 모르고 운전석에 앉은 아린을 확 밀어낸 그녀는 재빨리 시동을 걸었고, 곧 전조등이 켜지자 마자
“제발 좀 빠져라, 제발!”
일단 후진을 하면서 얼른 이 정신나간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온 힘을 다했다.
한편 저 뒤에서 쫓아오던–다리를 성큼성큼 부자연스럽게 뻗으며–남자는 제이미가 철조망을 통과하자 안되겠다 싶었는지, 달려오면서 갑자기 두 팔과 함께 몸을 뒤로 내빼더니만, 앞으로 확 뻗었다. 마치 두 팔과 몸이 무언가에 던져지듯 하는 것처럼.
그리고 저 괴이한 동작이 무언가를 일으키기라도 했는지, 제이미는 순간 무언가가 파도처럼 거세게 밀려옴과 동시에, 분명 멀쩡히 있던 철조망이 흔들거리는 걸 제이미는 봤다. “허,” 그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도 안돼…” 차를 얼른 뺐다.
“달려 애기야! 제기랄, 달리라고!”
저 앞의 남자가 계속 달려오며 다시 한 번 두 팔을 뒤로 뺐다가 또 내지르는 것에 점점 더 세게 흔들리는 철조망.
당장이라도 이쪽으로 엎어질 듯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제이미는 공간이 생기자마자 얼른 차를 홱 돌리며 엑셀을 밟았고, 이에 차는 매서운 소리로 표효하며 그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뒤의 철조망도 무언가가 끊어지듯 우지끈 쓰러져, 제이미는 차가 곧 저 위에서 덮쳐오는 가느다란, 그리고 거대한 그림자를 벗어나기 직전 뒤에서 무언가 끼이익 하는 소리를 들었다.
“흐이익–”
칠판을 손톱으로 긁을 때 나는 것처럼 듣기만 해도 이가 갈리는 소리에 몸서리친 제이미는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마침 그 타이밍에 엎어진 철조망 끝이 차 뒤편에서 미끄러져 내려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이걸 보는 그녀의 머릿속엔 지금 그녀가 애지중지하는 차의 뒷면이 마치 닭고기처럼 죽 찢어지는, 아니면 적어도 저 수십개의 발톱에 생채기가 나는 게 아주 선명하게 스쳐 지나가며, 이런 그녀의 얼굴을 심각하게 일그러뜨렸다.
“너 나중에 고소할 거야!!”
제이미는 창밖에 대고 악을 썼다.
“아이고~”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웬 창고지대에 갔다가 별 정신나간 봉변을 당한 탓에 오는 길 내내 정신을 놓고 운전만 하던 그녀는, 마침내 집앞에 돌아온 뒤, 차 뒤편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확인하고는 그 위에 그대로 쓰러졌다.
“우리 애기 어떡해… 아이고~ 내가 정말…”
애통함을 이기지 못한 채 그렇게 제대로 긁혀나간 트렁크를 두드려대던 그녀는, 갑자기 차가 들썩하는 것에 “으아!?” 통곡하던 걸 멈추고 뒤로 물러났다. “으야~” 그리고는 옆을 바라보자, 같이 온 저 검은머리 여자가 차를 들어올리기라도 하려는 듯, 밑을 잡고서 끙끙대고 있었다.
“진짜 무거우야. 뭔 애기가 이리 무거으얘?”
물론 차가 들릴 리 없었지만, 아린은 안간힘을 쓰면서 어떻게 해보려고 했다.
마치 어려서부터 살이 디룩디룩 찐 아기를 어떻게 안아보려고 하는 듯이. 그러면서 계속 뭐라고 불평을 하는 그녀.
“이쪽 세상 사람들 참 신기하얘. 이런 고철덩어리를 낳아서는, 정말 이게 자라서 사람이 되야?”
”……”
낑낑거리는 그 애를 얼빠진 얼굴로 바라보던 제이미는, 곧 눈이 가늘어지면서 그녀에게 다가가, 머리를 세게 한 번 쥐어박았다. “으얏!” 아린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고, 이어서 머리를 감싸쥐며 “야야야…”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왜 때리야?”
지쳤지만 감정이 실린 주먹이라 꽤나 아팠는지, 아린은 그 동그란 눈에 눈물이 글썽이는 얼굴로 제이미를 노려봤다. “너,” 이에 제이미는 안그래도 오늘 이리저리 뛰고 구르고 난리치면서 쌓인 스트레스를 이 기집애한테 그대로 쏟아냈다.
“지금 이걸 고철덩어리라고 했어? 엉? 이게 어디서 뭣도 모르고–”
“그럼 이게 고철덩어리지 무야?”
아린이 맞받아쳤다. 이어서 그녀는 입을 삐죽 내밀고서
“혼령이랑 말도 제대로 못하는 언니가 인생 한 번 이상하게 살으얘. 이런걸 애기라 부르고, 바보같이…”
어린애마냥 작은 소리로 툴툴거렸다. 이런 모습을 보며 제이미는 정말 황당하기도 하고 열받기도 하고 좀 웃기기도 해서, “이게,” 또 한 번 쥐어박을 듯 손을 들었다가, 아린이 다시 머리를 감싸쥐고 “무식하게 또 때릴거얘?” 하자 멈칫하고는,
곧 으휴 한숨을 쉬고는 손을 내렸다. 안그래도 오늘 저런 난리 속에서 어쩌다가 사람까지 죽였는데, 지금 이런 꼴로 또 누구랑 아주 작은 다툼이라도 있었다간 더이상 못 버티고 쓰러질 것만 같은 그녀였기에.
“됐으니까 와.”
먼저 걸어가면서 제이미가 입을 열자, 아린은 여전히 주저앉은 채 고개를 들고 “으야?” 눈만 깜박였다. 이에 뒤돌아서 말하는 그녀.
“여기 계속 있을 거야? 밥 먹고 자야지.”
“야!”
아린이 벌떡 일어났다. “밥! 배고프야!” 이렇게 반사적으로 말하는 그녀를 희안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그녀였다.
겉은 다 자랐으면서 완전 어린애잖아. 그녀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며 어깨를 으쓱했고, 곧 안으로 들어갔다.
“네!?”
한편, 두 여자가 그런 난장판 끝에 만났을 즈음, 한 남자는 어딘가에서 버럭 화를 내고 있었다.
“지금 농담하시는 거라면 당장 그만둬 주세요. 인간계라니 그게 대체…”
“하지만 정말인걸 어쩌겠나.”
다른 남자는 팔짱을 낀 채, 그러나 자신도 난처한 듯 언짢은 얼굴로 이에 응수하는 중이었다.
“네 동생이 사라지고 난 이후에 그쪽에서 반응이 있었다고. 혼령과 인간이 동시에 들어간 게 분명하니까 말야.”
“분명 나물 캐러 갔을 텐데 어떻게 거기까지 갔다는 건지.”
청년은 어이가 없는 듯, 한숨을 크게 내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지만, 속으로는 그렇게까지 이상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아린…” 워낙에 사고를 잘 치는 동생이기에 숲 속 어딘가를 헤매고 다닌다 해도, 대체 무슨 재주를 부렸는지 꼭 돌아왔으니까.
그런데 이번엔 어디까지 헤매고 다녔기에 저쪽으로 넘어가기까지 했다는 건지, 인간계라는 말에 그는 그대로 멍해지고 말았다.
“혹시 거기까지 가는 게 부담된다면 내가 대신–”
“아뇨,”
하지만 누군가가 대신 가겠다는 말에는 바로 손을 내젓는 그였다. “제가 가죠.” 쓴 물을 삼키듯 대답하는 그 청년.
“제 동생이니 어쩌겠나요. 무엇보다 지금 그곳에 무사히 다녀올 수 있는 건 저 뿐이니까.”
“흠,”
이에 다른 남자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으나, 곧 “알았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용무가 끝난 청년에게 등을 돌리고 섰다.
“그럼 몸 조심해서 다녀와, 이진.”
“네.”
이진이 대답하자마자 얼른 짐을 챙길 때, 이런 그에게 혼령이 조용히 말을 걸어왔다. “못말리는군.” 왠지 아주 천천히, 마치 이 정도의 소동이 전에도 몇 번 있었던 듯이 꽤나 느긋함을 흘려보내는 그 혼령이었다.
“꼭 나르사를 보는 것 같아, 네 동생은. 그 여자도 정말 조용히 사는 법을 모르는 인간이었지.”
그리고 이 말에 쯧, 혀를 차는 그였다. “그렇지.” 고개를 끄덕인 이진. 하지만 두 입은 굳게 다문 채 짐을 다 챙긴 그는, 곧 마루에서 뛰어나와 나무들이 촘촘히 자리잡은 쪽을 향해 발을 움직였다. “그럼,” 그러면서 혼령에게 한 마디.
“마침 그때를 다시 기억할 기회도 왔으니까 잘 부탁해, 다일.”
“맡겨둬.”
짤막한 동의를 나눈 뒤, 둘은 숲속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