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및 문화 콘텐츠 사이트 삼천세계

Soulmate


014


아린은 먼지떨이를 들고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얘?” 웬 막대기에 지저분하게 생긴 털뭉치 같은게 다닥다닥 붙은 모양새. 저쪽에서 식탁을 닦던 제이미는 그녀가 멀뚱멀뚱 그걸 보고만 있자 “그냥,” 인내심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그거 잡고서 탁탁 털면 돼. 먼지 없애려고 쓰는 거야.”
그리고는 다시 닦는데 집중하면서 “거기 마스크 쓰고.” 덧붙인 그녀는 곧바로 입을 다무는 대신, 뭐라고 또 중얼거렸다.
“정말, 오라고는 했지만 왜 하필 이런 때에 오고 난리야. 도움도 안되가지고서는.”
물론 그녀도 속으로는 이런 때에 아빠라도 와 줘야지 그러지 않고서는 그녀 혼자 뭘 어떻게 감당해낼지,
웬 혼령이라는 게 그녀와 같이 있으면서 이것저것 명령질을 하고, 집에 갑자기 '몽마'인지 뭔지 누군가가 침입하고, 그 다음에는, 오, 세상에, 정말 생각하기도 싫고 당장이라도 잊어버리고 싶지만, 어쨌든 사람을 죽이기까지 한 상황에서, 정말 누구라도 와 줘야지. 지금 그녀 혼자, 아니 그녀와 저 세상 모르는 기집애 둘이서는 뭘 어떻게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다만 며칠 전까지는 혼자 있는게 싫어서 와주기를 바라던 거지만, 지금은 누가 도와줬으면 해서 와주길 바란다는게 차이일 뿐.
“그래, 잘 하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제이미는 그걸 잊으려 애쓰며–특히 자기가 이제 살인자라는 사실을–아린 쪽을 보고 말했다.
마스크를 반대로 쓰고 있지만, 지금 잘 하는지 보려고 이러는 것도 아니니까. 제발 잊어버리자.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도 말했지만, 차라리 내가 죽였다고 생각하면 편할 거야. 굳이 잊으려고 하지 말고.”
“그래, 그래,”
엔시나가 말을 거는 순간 제이미의 얼굴은 곧바로 일그러졌다. 이제는 거의 조건반사가 되었다고 할까.
“그게 퍽이나 도움이 되겠네. 너가 뭘 할 수 있다면 그냥 어제를 좀 잊게 해줄 순 없어?”
“기억을 지우는 건 못해.”
혼령은 고개를 저었고, 제이미는 “그럼 도움도 안되니까 닥쳐.” 쏘아붙이듯이 내뱉고는 다시 식탁이나 닦는데 열중했다.
한편 아린은 아까 제이미가 말한 것과는 달리, 사실 그다지 잘 하고 있지는 않았다.
아까 '교감'으로 밥 먹고 정리하는 법은 대충 알았지만, 오직 그것 뿐이지 이런 집에서 청소하는 요령이라든가 뭐라든가, 그런 세세한 것들까지 다 알아내진 않았던 것이다. 이 금발 언니의 아빠가 와서 청소를 해야 하는 상황인 건 알겠는데, 이런 솜털 붙은 막대기를 들고 별 이상한 물건들 사이를 툭툭 털어내는 짓이라니, 정말 생소하기 그지없던 것이다.
“우, 에, 에, 에췻!”
결국 마스크 사이로 먼지가 새어들어와, 한 번 크게 쏟아낸 아린을 제이미가 쳐다봤다.
먼지를 털어내는 것도 같은데, 어째 좀 많이 느려터진 저 애한테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비록 아직까지도 믿고 있지는 않지만, 정말 다른 세상이란 게 있다면 그런 곳에서 건너온 듯 무슨 청소 하나 제대로 못한다니.
아니, 이건 다른 세계고 뭐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애가 왠지 청소 한 번 안 하고 편하게 자랐을거란 느낌이 딱 들기도 했다.
“이봐,”
보다못한 제이미는 걸레를 선반 위에 탁 올려놓고, 이미 거꾸로 쓴 마스크를 가지고 입 주위에 꾹꾹 눌러대는 아린을 불렀다.
“넌 너네 집 청소 누가 하니?”
“야?”
마스크를 쓴 채 아린이 머리를 긁적였다. “어, 엄마랑 오라부이얘.” 이에 제이미는 그럼 그렇지 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제 그 공장에서 거의 날아다니다시피 하던 모습과는 다르게 청소 한 번 안한 기집애라니. 정말 이상한 애잖아. 이런 제이미의 생각을 가만히 지켜보던 엔시나는 “제이미,” 닥치라고 한 지 몇 분도 안 되었음에도 다시 말을 걸어왔다.
물론 그녀는 누가 조용히 하라고 하든 말든 진짜로 조용히 있을 만하진 않지만. “뭐?” 제이미가 대답했고, 이에 혼령은 조용히
“아까 애기하다 만 거 말인데, 그럼 저 애한테 청소도 알려줄 겸 교감을 시도해보는 건 어떨 것 같아?”
라고 넌지시 말을 흘려보내는 게 아닌가. “엉?” 제이미는 다시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고 보니 아빠 때문에 잊고 있었던 걸 그녀는 다시 생각했다. 무슨 기억이나 정보를 공유하느니 어쩌구 하는 그거 말인가.
하, 그런걸 정말로 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더군다나 아까라면 몰라도 지금 같은 때에 그런 농담 따먹기나 하자는 건지 하고서, 제이미는 고개를 휘휘 젓고는 일단 아린에게 걸레질을 시키고 먼지터는 건 자기가 빨리 해놓을 생각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날 믿어, 제이미. 너도 전혀 믿지 못할 것들을 이미 몇 가지 봤잖아? 아니, 사람 죽인 거 생각하지 말고.”
어제 일을 생각하면 바로 떠오르는 것에 제이미가 몸서리를 치자 엔시나는 그것을 털어냈–아니, 털어냈다?
마치 뿌연 연기에 휩싸여 현기증이 날 것 같은데, 누군가가 한 손으로 연기를 마구 저어서 걷어내는 듯 했다.
그리고 제이미는 자신의 생각이 갑자기 흩어지자 흠칫했다가, 이어서 엔시나가 말하는 걸 들었다.
“이미 말했지만 얼마 걸리지도 않아. 또 무엇보다 넌 앞으로의 일에 조금이라도 더 빨리 익숙해질 필요도 있고.”
“앞으로의 일?”
지금 그녀에게 있어서 앞으로의 일은 아주 오랫동안 연락도 없다가 이제야 오는 아빠에게 잔소리나 좀 퍼부어 주는 것인데 말이다.
하지만 엔시나가 그걸 그다지 중요하게 여길 리 없었고, 아니 지금 제이미의 태도에 조금 화가 났는지 고개를 세게 젓는 혼령이었다.
“그런 일은 너무 신경쓰지 마. 어차피 이쪽 세계에 오래 있지도 않을 거니까.”
“아, 좀,”
또 그 '다른 세계' 같은 잡소리 시작이군. 제이미는 지금 청소하다 말고 이게 또 뭐 하는 짓거리인지 혼자 투덜대다가, 아, 하지만 젠장, 저 망할 혼령인지 뭔지 하는 게 저번처럼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걸 어떻게 떨쳐낼 수가 없었다.
“으, 알았어.” 제이미는 고개를 저었다. “알았다고!” 이어서 손까지 마구 내저으며 성질을 내자 엔시나는 조금 물러났고, 제이미는 지금 자기가 이러는 꼴을 다른 사람이 보면 얼마나 한심할까 여기며, 아린에게 가서 물었다.
“저, 저기, 아까 그 교감인지 뭔지, 그거 정확히 어떻게 하는 거야?”
도대체 이 정신나간 주제에 대한 걸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 건지, 그녀는 아린 앞에서 손짓까지 해가며 목소리를 냈고,
아린은 이런 제이미를 보며 마스크를 내리고는 “야,” 이 언니는 왜 갑자기 불쾌한 얼굴일까 하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냥 머리에 손 대고 집중하면 끝인데 뭘 그런걸 물어보고야, 언니도 참 특이해얘.”
“어, 어어?”
사실 그녀는 교감이란 거에 대해 생각하는 순간, '그냥 손 대고 집중하는' 것보단 훨씬 더 복잡한 무언가를 상상했던 것이다.
비록 소설은 잘 읽지 않지만 영화는 친구들이랑 본 것도 있고 이런저런 판타지를 접해보곤 했던 것이다.
덕분에 비록 저 망할 혼령때문에 억지로 한다지만, 일단 하는거 어떻게 하는건지를 생각하면서, 뭐랄까, 그녀 스스로도 자기가 뭘 상상했는지 정확히 설명을 하지 못하겠지만 어쨌든 머리에 손 대고 집중하는 그런 건 아니었기에.
적어도 무슨 책이나 종이 쪼가리라도 꺼내들고 무슨 주문이나 외우면서 어떻게 하는 행동거지는 되지 않을까 했던 그녀였다.
엔시나가 약간의 웃음과 함께 한숨을 내쉬는 게 느껴졌다.
제이미는 “아,” 손을 막 내저으며 왠지 이런 자신을 재밌어하는 듯한 그녀를 몰아내고, 그 손을 천천히 아린 쪽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막상 말은 그렇게 들었다고 해도, 머리에 손을 집중해서 뭘 어쩌자는 건지 도대체 이해가 되든 말든 해야 말이지.
어쨌든 일단 (바보가 된 기분으로) 아린의 검고 매끄러운 머리에 천천히, 부드럽게 손을 올려놓긴 했고, 이어서 엔시나의 지시를 기다렸으나 그녀가 조용히 있자, 슬슬 이렇게 있는 자기가 한심해지기 시작해 안절부절못하는 제이미.
“쉿, 제이미. 이건 너 혼자 하는 게 아냐. 적어도 이게 무엇인지 잘 모를 때는.”
보다못한 엔시나가 곧 이렇게 말할 때쯤에서야 그녀는 지금 이 혼령이 어제처럼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니, 어제와는 달라. 그저 느낌뿐이지만, 어제가 무언가를 그녀의 몸–정확히는 손이었지만–이나 물건에 주입하는 식이라면, 지금 이러는 건 주입한다기 보다는… 연결? 잘은 모르겠지만 왠지 그렇게 표현해야 할 것 같았다.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게 아니라, 다른 쪽에 먼저 다가가서 연결을 하는 그런 느낌.
역시나 너무 생소한 느낌에 제이미가 비틀거리자 “집중해.” 엔시나의 주의를 주었고, 제이미는 대체 무엇에 집중하라는 건지,
아, 아무래도 지금 이 연결하는 듯한 무언가에 집중하라는 걸까. 제이미는 도대체 자기가 뭘 하는지도 모른 채, 어쨌든 지금 엔시나가 하고 있는 일에 자신도 집중하려고, 도대체 이거에 집중한다는 게 어떻게 하는 건지는 몰랐지만 어쨌든, 왠지 아린과 자신 사이에 서서히 무언가가 일어나는 것 같은 느낌에 어떻게든 '집중'을 하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잠시 뒤,
“으, 으와!?”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기자 제이미는 놀라서 소리를 내었으나, 이상하게도 그 소리는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녀가 이따금씩 속으로 투덜거릴 때처럼, 머릿속에서만 울리는 그런 소리. 정확히는 소리가 아니라 생각이지만.
마치 엔시나가 그녀에게 말을 할 때 전해져 오는 그런 것처럼. “뭐야?” 제이미는 당황해서 혹시나, 어제처럼 엔시나가 자신의 몸을 ​차​지​하​고​–​그​러​고​보​니​ 도대체 그건 또 어떻게 한 걸까–뭐라도 하는 줄로 알았다가,
다음 순간 아린이 어제의 그, 사령인지 뭔지 하는 것들에게 쫓긴 일이 기억나자 말하려던 것을 멈췄다.
아니 잠깐, '기억났다'고? 이건 내가 겪은 일도 아닌데? 제이미는 또 한 번 놀라서 뭐라고 소리를 내려 했으나 역시 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기억이 머릿속에 떠오르다니, 이게 대체 뭐냐고 하기도 전에, 그녀는 아린의 다음 기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웬 구덩이를 발견하고 다짜고짜 뛰어들어서는… 아, 잠깐, 지금 갑자기 머리가 너무 아팠는데?
갑작스럽게 웬 통증이 전해져 온 다음으로는 신기하게도 제이미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린이 본 제이미의 모습이.
아무래도 방금 전의 통증은 그녀와 머리를 부딪힌 게 떠올라서 그랬던 걸까. 그때의 아픔까지 생생하게 느낀다니.
이어서 아린의 제이미에 대한 생각, 뭐 특이한 언니야가 어쩌구 하는 게 지나가고서는, 그 가짜 경찰들과 싸운 기억, 자기는 약초 캐러 갔을 뿐인데 어느새 '자동차'라는 고철 덩어리–아직도 그걸 그따위로 부른다고?–에 타서 가고 있는 기분.
그리고 다음 기억, 또 다음 기억, 제이미가 자는 사이 교감을 시도해서 설거지가 뭔지 알아낸 것과, 또다시 다음–
저벅, 저벅,
“응?”
어째 이른바 '교감'이라는 걸 하면서도 눈앞의 시야는 멀쩡하고–단지 눈앞에 보이는 거에 신경을 못쓸 뿐이지만–귀도 멀쩡해, 왠지 저쪽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한 순간 엔시나가 마치 줄을 가위로 자르듯 무언가를 딱 끊는 게 느껴졌다.
다음 순간 제이미는 여전히 아린의 머리에 손을 올린 채, 멍하니 그 동그란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가 곧 고개를 저었고, “으,” 남의 기억이 자기 머리에 떠오르는 별 이상한 일을 처음 겪어서 그런지 머리가 아파,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그녀가 아린에게 무언가를 말할 새도 없이 발소리가 멈추자마자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고, 이에 현관을 바라본 제이미.
“아, 아빠,”
잠시 정신이 멍해져 있던 그녀는 실로 오랜만에 보는 마크윈 앨리슨을 이런 상황 속에서 맞이했다.
그는 나이가 제법 있음에도 오히려 제이미보다 더 생기가 감도는 모습을 했으면 했지,
누구도 그를 '늙은이'라고 함부로 부를 법한 이미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엄하다'라는 느낌도 있지는 않은 것이, 제이미와 비슷하게 푸른 빛을 띄는, 그러나 모양은 그녀보다 좀더 동그란 눈과 조금은 뭉툭한 코,
그리고 단단하게 굳었지만 그저 무표정이란 느낌에서 그치는 입술이 얼굴 전체에 조금씩 묻은 주름과 묘하게 어울리고 있기 때문.
흰머리가 조금씩 나기 시작한 흑발은 그럭저럭 짧게 잘 정리되어 있었고, 그렇게 약간은 각진 얼굴 밑으로, 체격은 그럭저럭이고 그 위에 걸친 옷에는 한쪽에 별 모양의 장식이 세 개 있었다. TV에서 흔히 나오는 느낌의 군복은 아니지만.
“거기는 네 친구니?”
마크윈이 눈을 깜박이면서 묻자, 제이미는 “아,” 그제서야 여기 누가 들어오면 어떻게 기록이 남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하지만 뭐, 워낙에 요즘 너무 정신이 없어서 잊고 있던걸 이제 기억해봐야 무슨 소용인가. 또 그 기록을 주로 보는 건 엄마였고.
어쨌든 제이미는 일단 어떻게 넘겨야겠다 싶어, 다른 세계가 어쩌구 하는 얘기는 일체 꺼내지 않은 채
“응. 외국인인데 좀 친한 동생 있어.”
대충 이정도면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말했다. “그래.” 그녀의 아버지도 별 긴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왠지 오늘따라 얼굴이 굉장히 어두워 보인다고 할까, 아니 아린을 보고서가 아니라 아예 문을 들어오면서부터 그런 것 같지만.
“제이미,”
그래도 혹시 모르니 괜히 “무슨 일 있어?” 라고 물었다간 잔소리나 듣겠지 생각하려던 찰나, 마크윈이 입을 열었다.
“잠시 얘기 좀 하자. 친구는 잠깐 방에 들어가 있으라 하고.”
이 '친구'는 별로 신경도 쓰지 않는 듯, 마크윈은 아린을 딱히 쳐다보지도 않고서 말했다. 이에 눈썹을 치켜올리는 제이미였으나, 어쨌든 아린에게 손짓을 좀 하자 검은머리 '외국인' 소녀는 곧 제이미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조심스럽게 닫았다.
곧 넓은 거실에 아버지와 딸이 남아 있어, 그 중 딸아이는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걸까 하는 얼굴로 조금 초조해졌으나, 일단 십중팔구 왜 말도 없이 남을 집에 들이느냐 하고 잔소리부터 하겠지 하는 생각으로, 거기에 뭐라고 대답을 할까 생각했다.
가장 중요한 건 그녀가 정말 오랫동안 집에 혼자 있어야 했던 거였지. 그 말을 빼먹어선 절대 안된다고 그녀는 확실히 정했다.
다음으로는 으음, 혹시 지금 그녀가 살인자인 걸 아빠가 벌써 알았을까?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었잖아.
물론 여전히 소름이 끼치긴 했으나, 아까 엔시나가 어떻게 진정시켜서 그런지는 몰라도 어쨌든 그녀의 말이 맞긴 했다. 그때 죽이지 않았다면 내가 죽었을 테니까. 그렇게 사납게 날뛰는 놈한테서 도망치는 건 불가능해 보였고. 말이 통할 리도 없었고.
아, 제이미는 그 밖의 일들에 대해서도 점점 머리가 복잡해져서 어느새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도 모르게 되기 시작했다.
“제이미,”
그러다가 마크윈이 부르자 제이미는 잠에서 깬 사람처럼 정신이 퍼뜩 들며 “으, 응?”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크윈은 그녀를 쳐다보고 있지 않았고, 어째서인지 평소의 그답지 않게 고개를 숙인 채 들지 못하는 듯한 그런 모습. 아무 것도 없는 저쪽 의자 다리에만 시선을 고정시킨 채, 제이미의 아버지는 맥이 풀려 눅눅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미안하다. 그동안 연락이 없어서. 혼자 어떻게든 잘 버텨줘서 다행이구나.”
“어, 어어,”
갑자기 왜 저러지. 하긴 그건 사과할 일이긴 했지만. 제이미는 아빠가 갑자기 저러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뭐, 곧 “하지만” 하고서 잔소리를 시작하겠지 하고 일단은 가만히 있는 그녀였고, 과연 마크윈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또다시 “제이미,” 그녀를 부르면서 얼굴이 더 어두워졌다. 이에 그녀는 어떻게 변명을 막 늘어놓을 준비를 하려는데,
”니콜이 죽었다.”
갑자기 그의 입에서 말이 나온 순간, 제이미는 세상이 멈추는 것을 느꼈다. “어?”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그녀는 갑자기 아빠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조금 멍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지금 엄마 얘기야? 아니, 아빠–”
“어느 공원 근처 호수에서 발견됐더구나. 익사했어. 정확한 건 나오지 않았지만.”
“아니아니, 아빠!”
제이미가 팔짱을 꼈다. “갑자기 뭐야?” 지금 그녀는 슬픈 것도 아니고, 화가 난 것도 아닌 어이가 없어서 목소리를 크게 했다.
“요즘들어 뭔 일만 계속 생기고, 아빠는 또 왜 그래? 뭐? 엄마가, 잠깐, 아빠, 아니 아빠, 엄마가…”
하지만 자기 딸에게 이런걸로 거짓말을 할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그걸 당연히 알고 있는 제이미였지만,
“아빠, 아빠 제발, 거의 몇달만에 와서 하는 소리가 갑자기 뭐야? 엄마가 죽었다니, 엄마가 왜 죽어? 쓸데없는 소리 좀 꺼내지 마. 아니, 엄마가 죽긴 왜 죽냐고, 갑자기. 엄마가 왜?”
“미안하구나.”
마크윈의 대답은 그것뿐이었다.
제이미는 뭐라도 더 말해보라는 식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저쪽만 쳐다볼 뿐, 더이상 말이 없었다.
아무리 침묵으로 대답을 요구해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제이미는 두 손부터 시작해서 서서히 팔이 떨려오기 시작했고, “잠깐,” 이런 자신을 진정시키려고 고개를 저으며 머리를 가볍게 쥐어보나, 애초에 추워서 떠는 것도 아닌 게 멈출 리 없었다.
“아니아니아니, 아빠, 잠깐만, 엄마가, 아니 엄마가,”
계속해서 고개를 젓는 제이미. 아냐, 갑자기 왜 아빠가 이런 소리를 하겠어? 그냥 좀 겁주려고 그러는 건지, 아니면 뭐, 좀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그래서 정신없는 소리를 좀 하는 건지, 아니면 술에 완전 죽어나기라도 한 건가?
평소에 잘 마시는 아빠가 아니지만, 가끔 취할 수도 있지. 갑자기 아빠가 왜 이러겠어? 제이미는 겉으로도 속으로도 고개만 저었다.
“미안하구나, 제이미.”
한편 이런 그녀를 도저히 쳐다볼 수가 없는지, 마크윈은 여전히 한쪽으로 고정된 얼굴로 죽은 목소리를 이어갔다.
“장례식이, 곧 있을 거다. 내일 출발하자. 네 친구는 내일 보내도 좋으니까, 일단은, 일단은 짐부터 챙기거라. 미안하다.”
“아빠!!”
제이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동시에 그녀를 복잡하게 만들던 머릿속의 뿌연 연기들도 한 번에 뚜렷해졌다.
“갑자기 뭔 지랄이냐고! 엄마가 죽었다니 지금 나한테 그게 뭐야? 어? 엄마가 왜 죽어? 어!? 왜 죽어! 갑자기 왜 죽냐고!”
“그만해, 제이미.”
이번엔 엔시나가 그녀에게 말했다. “그만해.” 그녀 또한 굉장히 기분이 좋지 않은 게 느껴졌으나, 안그래도 지금까지 민폐만 잔뜩 끼친 녀석의 말 따위 그녀가 상관할 게 아니었다. “넌 꺼져.” 그녀는 아까 교감을 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아빠가 앞에 있어서인지 비로소 목소리를 내지 않고 속으로만 말했다. “지금 넌 이게–”
“난 충분히 알아.”
혼령은 그녀의 말을 딱 가로막았다.
“니콜 루이즈는 정말로 죽었어. 그러니 이제 그만해.”
“좀 꺼지래도! 너가 뭔데 엄마를…”
마구 성질을 내던 중에, 갑자기 제이미는 온 몸이 얼어붙을 정도로 오싹한 무언가가 전해져 왔다. “너,” 속으로 말하는 그녀.
방금 엔시나가 말한 거 때문인지는 몰라도, 갑자기 그녀에게 전해진 건 분명, 정말 도무지 부정할 수가 없을 정도로,
“알고 있었어? 엄마 죽은 거, 너 알고 있었어?”
“미안해, 제이미.”
엔시나는 어느새 마크윈처럼 딴 곳만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 그녀 또한 굉장히 심란해져 있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사실이야. 네 어머니는 죽었어. 인정 못하겠지만 사실 니콜이 바로–”
“그래, 인정 못해.”
제이미가 딱 잘라 말했다. 이 한 마디는 그녀의 입 밖으로도 툭 튀어나왔고, 이에 그동안 석상이 되었던 마크윈이 그녀를 쳐다봤다.
“엄마가 죽었다니, 갑자기 뭐야? 다 지랄이야. 옘병 지랄이라고. 웃기지마. 엄마가 죽기는.”
이어서 그녀는 더이상 말할 가치도 없다는 듯, 냉큼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일단 짐은 챙기거라.” 뒤에서 아빠의 말이 들려왔다. 하지만 대답도 안한 채 문을 쾅 닫은 그녀는 이런 자신을 보며 놀라 “어, 언니얘?” 눈이 동그래진 아린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뭔 일이얘? 갑자기 화났으얘?”
“아니,”
제이미는 사실 아린을 보는 게 아니라, 마치 세상 저편을 바라보듯 하는 눈으로 고개만 저었다.
“아무것도 아냐. 정말로 아냐, 아무것도.”
”……”
엔시나가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는 게 느껴졌지만 제이미의 반응은 그저 고개를 한 번 더 마구 젓고 끝났다.
“청소나 계속 하자, 응?”
“으, 으야.”
아린은 제이미의 표정을 보고는 바로 끄덕였고, 얼른 먼지떨이를 들고서 일어났다.

댓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