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9 (2)
“아빠…”
제이미는 덜덜 떨고 있었다. “제이미?” 마크윈은 놀라기도 하고 당황하기도 한 얼굴로 딸아이에게 다가갔고, “무슨?”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한편 제이미는 마크윈이 다가오자 주저앉은 상태에서도 벽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그 다음에는 벽을 뚫고 저 뒤로 사라지기라도 할 듯이. 그리고 제이미의 이런 폭발적일 만큼 혼란스러운 마음 속에서 “제이미?” 엔시나가 깨서 그녀를 불렀다. “아아, 세상에.” 그리고 재빨리 상황파악을 하고는 괴로운 듯 신음하는 혼령.
“제이미?”
마크윈은 여전히 뭐가 뭔지를 몰라 일단 제이미를 일으켜세우려고 “왜 그러니?”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제이미가 그걸 잡을 턱이 없었고, “제이미?” 애가 왜 이러지 하는 얼굴로 자기가 먼저 잡으려는데,
“안돼!!!”
갑자기 엔시나가 거의 발작에 가까울 정도로 칼끝같은 비명을 질렀다. 그 충격에 안그래도 정신이 날아가듯 하던 제이미는 그만 눈앞이 아득해져 버렸고, 다음 순간 제이미의 몸은 자신의 손을 잡은 마크윈을,
“아!?”
마크윈은 갑자기 딸아이가 자신의 손을 잡고 일어섬과 동시에 그 팔을 비틀자 놀라서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단 1초도 되지 않아 그녀가 발로 매섭게 차서 중심을 잃게 하더니 그대로 저 침대에 물건 던지듯 내다꽂는 것을 전혀 어찌하질 못했다. “어흑–” 너무나도 매서운 공격에 침대가 박살이 나고, 그렇게 완전히 내동댕이쳐진 그를 제이미의 발이 꾹 누름과 함께 한 손은 그의 목을 조르며 당장이라도 꺾어버릴 듯 옆으로 살짝 움직였다. “제…이…” 마크윈은 자기 딸이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것인지, 놀람과 충격이 뒤섞인 얼굴로 딸의 얼굴을 보았다. 한편 이런 그를 보며 제이미는 목소리를, 아니,
“이번에는 여기까지만 하고 끝낼 거야.”
더이상 제이미의 목소리 같지도 않았다. 그 음성과 말소리 하나하나에 소름끼칠 정도의 분노가 서려있는 것도 전혀 제이미답지 않았지만, 이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 또한 마치 만 년을 얼어붙으며 인내한 얼음 덩어리 같이 차갑고, 심지어 눈의 모양새나 눈빛의 느낌마저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어두워서 그렇게 잘 보이진 않았지만 평소의 제이미와는 심각하게 다른 모습임을 누구라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하지만,” 이렇게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한 딸아이, 아니 그녀의 모습을 한 엔시나는 마크윈에게 경고했다.
“한 번만 더 제이미가 상처받으면, 그때는 이 애가 뭐라고 하든 너를 내 손으로 죽일테니 그리 알아라.”
“너,”
서서히 숨이 멎으려는 순간, 마크윈은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게 제이미 앨리슨이 아님을 깨달았다. “넌…” 어떻게든 손을 뻗어 무언가를 해보려는 그였으나 그마저도 힘이 빠졌고, 그렇게 완전히 힘을 잃고 다음으로 죽어가기 시작하려는 찰나 엔시나는 그를 발로 세차게 밀어, 박살난 침대 밑으로 쳐넣음과 동시에 자신은 그 반동으로 뒤로 튀어나와, 방을 나가 복도를 뛰어갔다.
“흑,”
마크윈은 간신히 숨을 들이마시며, 최대한 빠르게 심호흡을 했다. 그러면서 그는 제이미의 몸을 한 그 누군가가 사라진 쪽을 식은땀을 흘리며 바라보다가, 곧 고개를 젓더니 재빨리 침대 옆쪽 벽에 있는 무언가를 주먹으로 쾅 치듯이 눌렀다. 이에 그가 가지고 있던 무전에서 이제 막 잠에서 깬 듯한 목소리들이 들려왔고, 이미 깨어 있는 이들은 “무슨 일입니까?” 한 마디씩 했다
“비상사태인가요?”
곧이어 레브의 목소리도 들려왔고, 이에 마크윈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지금 이 말을 믿지 못하겠지만,” 얼른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가 미처 상황을 설명하기도 전에, “아니 넌–” 무전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곧 누군가가 넘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숨 넘어갈 듯 괴로워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제어실?” 마크윈이 중얼거리더니 더 지체할 것도 없이 얼른 소리쳤다.
“모두 제어실로 가! 당장!”
곧 그의 주변에서 방문이 세차게 열리는 소리와 함께 빠른 발소리가 울려퍼졌다. 오직 레브만이 “갑자기 무슨…” 상황을 설명해달라는 듯이 말했고, 마크윈은 이제 숨이 좀 진정되자 잠시 떨어뜨려놨던 무전에 대고 다시 말하려 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다른 목소리가 먼저 말했다. “제어실입니다.” 그 목소리와 함께 굉장히 당황한 듯한 기색이 무전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누군가가 여길 기습한 것 같습니다. 코튼도 바이어도 완전히 기절했고, 여기 카메라가… 어?”
“뭐야, 이거 어떻게 한 거야?”
“아무래도 시스템 자체를 날려먹은 것 같은데.”
“아니 이게 가능해? 진짜 전문가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됐나?”
마크윈이 재촉하자 무전에서는 혀를 차는 소리가 먼저 들렸고, 곧 “죄송합니다.” 난감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CCTV 네트워크가 완전히 죽었습니다. 이정도면 복구에 최소 한 시간은 걸릴 것 같습니다.”
”……”
정말이었나. 마크윈은 눈을 감았다.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진 건가. 그는 정말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한 마음을 다잡고 무전을 잡은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을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상황을 말해주겠다.” 그리고는 이어서 본론으로 들어가려는데,
“어? 따님께서 여길 왜– 아악!”
“뭐, 뭐하는… 헉!”
”…모두 잘 들어.”
벌써 둘이 더 쓰러지는 소리가 들리자 마크윈은 더이상 당황해있을 시간도 없음을 알고 서둘러 말했다.
“후아,”
엔시나는 제이미가 운동부족이라는 건 충분히 고려하고 있었지만, 벌써부터 땀이 이렇게 줄줄 날 줄은 몰라 제법 힘들어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 애가 설마 직접 교감까지 시도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기에 더 난감해하는 것도 있었고. 일단 그녀는 방금 쓰러뜨린 대원 둘에게서 권총과 섬광탄, 최루탄 등을 얼른 빼내고, 그 중 연막탄과 섬광탄 하나를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다가 쓰러진 대원들 밑에 하나씩 두었다. 그리고 자신은 얼른 옆의 방으로 숨어들어가자, 잠시 뒤 발소리가 들리더니 한 열 명은 될 듯한 대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엔시나는 이를 잠시 기다리다가 곧 주머니의 수신기를 꺼내 버튼 하나를 눌렀다.
그러자 섬광탄이 먼저 터지더니 이어서 다른 쪽에서 짙은 연기가 뿌려졌고, 엔시나는 머뭇거릴 틈 없이 재빨리 달려들었다. 비록 그녀에게는 별 장비가 없었으나 '감각'으로서 충분히 누가 어디쯤에서 방황하는지를 알 수 있었고, 때문에 고글을 끼려는 대원들부터 하나하나씩 때려눕혔다. 비록 이런 그녀에게도 몇 번의 허공에 휘두르는 듯한 타격이 가해지긴 했으나 그녀는 이를 악물고 참아내었다.
잠시 뒤, 마침내 마지막 대원까지 쓰러뜨렸을 때 엔시나는 목 옆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슥 닦아내며 전리품을 챙기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기습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애초에 이쪽 세계에서 그녀의 힘에 의지해 버티는 건 한계가 있었다. 이제 남은 시간동안은 숨고 피해다니며 버티는 수밖에. 곧 챙길 것을 다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엔시나는 뼈에 금이라도 간 듯 통증이 좀 심한 다리에 손을 대고 무언가를 했고, 곧 그녀, 그러니까 제이미 안의 혼령으로부터 무언가가 살짝 나와서 잠깐동안 감각을 마비시킬 수 있었다. 회복을 하기에는 너무 급한 상황이니까.
“전부 의식이 없습니다. 총이고 수류탄이고 뭐고 거의 다 뺏겻습니다.”
잠시 뒤 한바탕 소란이 일어난 자리를 발견한 대원들이 무전으로 소식을 보내자 마크윈은 눈을 감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옆에서는 레브가 그의 어깨에 연고를 바르고 있었다. “네 명씩 움직여.” 마크윈이 무전에 대고 말했다.
“모든 방향을 보면서. 어디서 기습해올지 몰라.”
이에 무전에서는 “네.” 대답과 함께 대원들끼리 잠시동안 수군거리는 소리와 함께 잠시 뒤 발소리가 이어졌고, 이를 들은 레브는 “생각해봤지만,” 마크윈의 팔을 붕대로 감싸면서 말했다.
“이해할 수가 없군요. 그러면 그 혼령은 니콜 루이즈가 죽자마자 따님에게 갔다는 겁니까?”
“아마도.”
마크윈이 대답했다. 그의 표정에는 여러 가지가 복잡하게 뒤섞인 듯, 최대한 자신의 심정을 숨기려는 노력이 얼굴에 나타나고 있었다. 이런 그의 태도를 본 레브는 여기서 더 있어봤자 좋을 게 없다고 판단했는지 조용히 문 쪽으로 걸어갔고, 마크윈이 이에 “레브?” 그를 부르자 청년은 차분히 말했다.
“저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정말 같은 혼령이라면 평범한 길로 다닐 리가 없으니까요.”
이렇게 말하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마크윈은 “맘대로 해.” 짧게 말하고는 옆에 있던 수화기를 들었다. “총장님 연결해.” 그가 말하는 사이 레브는 문을 닫고 나갔다.
“어디야?”
엔시나가 조그마한 수신기, 제이미 몰래 주머니에 넣고 온 그것–그리고 아까 살짝 조작한 연막, 섬광탄도 터뜨린–에 대고 묻자 곧 이진의, 아니 다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의 왔어.” 그가 대답했다. “새벽이라 다행이군.” 한편 옆에서는 아린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으야야, 무슨 애기가 어른보다 훨씬 빨리 기어가얘? 언니야는 이게 어딜 봐서 애기라고–”
“이건 자동차라는 거야, 아린. 생명체가 아니라 기계라고.”
과연 얼마나 빨리 달리는지 그 웅웅거리는 소리가 수신기를 통해서도 들려왔고, 다일이 “몇분만 더 버텨.” 라고 말하자 “응.” 짧게 대답한 엔시나는 수신기를 다시 주머이네 집어넣었다. 그런데 이때 뒤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고개를 돌렸고, 저쪽, 비록 아예 어둡지만 희미하게 보이는 그림자가 이쪽으로 오는 것이 보이자 그녀는 이번엔 최루탄 하나를 꺼내 장치를 하고는 옆에 두었다. 그리고 먼저 앞쪽으로 기어간 그녀는 위의 통로를 짚고 올라갔고, 잠시 뒤 쫓아오는 소리가 좀 더 가까워지자 그것을 터뜨렸다. 그러자 들려오는 레브의 기침소리. 엔시나는 과연 환풍구를 통해 쫓아올 인간은 저 녀석밖에 없다는 생각과 함께 얼른 위로 더 올라갔다.
계속 올라가고 앞으로 기어가며, 그러다가 안되겠다 싶으면 섬광탄이나 최루탄을 하나씩 터뜨리기를–여기 대원들 중 그냥 파편탄 같은 걸 가진 인간은 한 명도 없었다–반복하면서 계속 나갔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곧 바깥 공기가 느껴지자 그녀는 슬슬 지쳐가는, 그리고 억눌렀던 통증이 다시 돌아오는 몸을 재촉했고, 이런 그녀의 기척을 느꼈는지 저 뒤에서도 속도가 빨라지는 듯 했다.
엔시나는 환풍기를 발로 차서 열었다. 2층쯤 되는 듯한 높이에서 그녀는 최대한 안전한 식으로 뛰어내려 어떻게든 착지했고, 마침 레브의 신호를 받은 것인지 저쪽에서 하나둘씩 뛰어오는 대원들을 향해 남아있는 최루탄이며 섬광, 연막탄이며 마구 던져댔다. “이대로는 안돼!” 저쪽에서 빠른 속도로 차 한대가 접근해올 즈음 대원 한 명이 소리치는 게 들렸다. “쏴! 사격!” 엔시나도 이에 질세라 권총 하나를 꺼내들어 연기 너머를 향해 쏘기 시작했고, 그러나 역시 숫자는 어쩔 수 없었는지 결국 안그래도 통증이 심했던 종아리 한쪽에 총알이 박히고 말았다. “흐윽!” 엔시나는 고꾸라지면서도 이를 악물었고, 이를 본 아린이 “언냬!” 하고 달려옴과 동시에 같이 달려온 그녀의 오빠가 팔을 한두 번 크게 휘두렀다. 그러자 그 셋을 향해 날아와야 했던 총알이 전부 빗나가 철조망 쪽에 튀었다. 팝콘 튀기듯 요란한 소리 속에 아린은 여기저기 흠이 난 제이미의 몸을 어떻게든 차로 끌고가다가, 순간 저쪽에서 달려오는 한 청년을 보고 거의 본능적으로 그녀를 놓았다. “멈추세요!” 빠른 속도로 달려오며 레브가 소리치자 아린은 어느새 위험을 직감한 리니아에게 자리를 넘겨줬고, 잠시 뒤
“저리 가!”
아예 앞장서서 그에게 선공하는 리니아였다. 하지만 그걸 막아내는 것을 보고 리니아는 역시 보통 인간은 아닌가 싶어 온 몸에 힘을 불어넣었고, 뒤에서 다일이 엔시나를 차에 태우는 사이 매서운 속도로 팔과 다리를 휘두르다가 곧, 이제 레브도 안되겠다 싶어 그녀에게 공격을 가하려 들 즈음 먼저 그의 배에 주먹을 날렸다. “억–” 레브는 곧장 뒤로 날라가 바닥에 주욱 끌렸고, 이 틈에 리니아는 다시 저쪽에서 총을 쏘는 것을 다일이 했던 것처럼 빗겨가게 하면서 차로 뛰어갔다. 다만 처음 하는 탓에 차 뒤편에 총알 몇 개가 꽂혔다.
“으으,”
한편 엔시나는 총알소리에 정신을 차린 제이미에게 말을 걸었다. “괜찮아?” 아직 몸은 엔시나가 주도하고 있었지만, 깨어나자마자 통증이 거의 고스란히 전해져 오자 제이미는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엔시나는 “나가는 중이야.” 짧게 대답하고는 아린에게 상처를 부탁했고, 아린은 “피 싫으얘.” 투덜대며 다시 리니아에게 넘겨주려다가도 얼른 제이미의 몸에 난 상처들을 확인했다.
한편 끝까지 차를 쫓아가던 레브는 결국 몇초만에 놓치고 말자 무전을 꺼냈다.
“소울메이트를 놓쳤습니다. 세 명 다요.”
“이 말은 차에 타고 있는 셋에게도 살짝 들렸고, 통증에 끙끙거리던 제이미가 이에 “소울메이트?” 속에서 중얼거리자 엔시나가 대답했다.
“혼령과 그 동반자를 말하는 거야. 우리를 아는 이들… 그 존재를 아는 이쪽 세계의 인간들이 옛날부터 그렇게 불러왔어. 그리고 저들이 그 명칭을 쓰고 있다는 건 전혀 좋은 현상이 아냐, 제이미.”
”……”
제이미의 머릿속에는 엔시나가 저 안에서 빠져나오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스쳤다. 그리고 그 전에 일어난 일, 자신이 무슨 행동을 했는지, 그럼으로써 무엇을 얻었는지가. 제이미는 다시 몸서리치기 시작했고, 이에 엔시나는 고개를 저었다. “자, 제이미.” 혼령이 그녀를 진심으로 걱정하며 말했다. “자고 있어. 다시 깨울게.” 이에 제이미는 군말 없이, 거의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다시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