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4 (종편) (1)
사람들은 이따금씩 그들만의 상식을 통해 서로를 연결하곤 한다. 그들 내에서 공유되는 수많은 상식들이, 마치 특정한 징표가 새겨진 반지나 옷처럼 그것을 소유한 이들을 하나로 묶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이들은 말한다. 상식이 있어야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고.
하지만, 만일 이 말이 전부 헛소리가 아닌 사실이라고 한다면, 서로 다른 상식이 부딪힌다는 건 무엇일까? 한 명도 빠짐없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연결해놓은 가장 기본적인 상식이 무언가에 부딪힌다는 것을, 그들은 재해 혹은 천재지변같은 것으로 표현하던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이다.
“정말로,”
그리고 마침내 침묵을 깨며, 나르사가 말했다.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해?” 무거운 표정의 옆에서 슨우 또한 별로 좋은 얼굴은 아니었고, 키리는 아예 눈물을 참으려고 하는 티가 보였다. “어쩔 수 없어.” 슨우의 목소리는 최대한 침착하고 냉정했으나 역시 내키지 않는다는 식이었다.
“저렇게 출입구를 목숨 걸고 지키는데 지금 우리가 돌아갈 방법이 없잖아. 적어도 아직은 저걸 뚫을 방법이 없어.”
모두들 이미 본 것이다. 이쪽 세계의 사람들이 무엇을 만들고 다루는지. 아무래도 그들은 '도구'라는 개념에 수천 년 동안 굉장히 집중을 해온 모양이었다. 이젠 도구를 넘어서서 '기계'라는 것들까지 저렇게 크고 작은 것들을 만들어 상대를 위협하는 데까지 써먹는 걸 보면, 확실히 서로 편하게 교류하면서 지내는 건 이미 물 건너간 듯 싶었다. 이젠 서로 대화고 뭐고 쫓고 쫓기는 상황까지 되어 버렸으니.
“그렇다고 우리 셋이 뭉쳐서 다니면 그것도 위험해. 알잖아. 벌써 우리를 어떻게든 잡으려고 별별 방법을 다 쓰고 있어.”
이어지는 슨우의 무거운 목소리에 나르사는 생각난 듯 “그러고보니,” 고개를 들며 말했다.
“소울메이트… 라고 했던가?”
“소울메이트?”
키리가 그녀를 쳐다봤다. “그래.” 슨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를 그렇게 부르고 있었어. 그 사람들이 말야.”
“정말,” 그리고 역시 고개를 끄덕이는 나르사. “그렇게 우리를 따로 부르면서 출구까지 막아놓을 정도면 작정한 게 맞긴 한가봐.”
“하, 하지만,”
당장이라도 울기 직전인 키리가 눈물이 글썽이는 눈으로 둘을 번갈아보고 있었다. “그렇다고 흩어져?” 나르사 또한 그녀를 안쓰러운 얼굴로 쳐다봤다. 평소에도 혼자 있기 싫어한 애였는데다 저번에 그 총알이란 것에 맞은 이후로는 이쪽 세계의 그것들에 대해 더 겁을 먹었으니. 사실 나르사는 키리를 먼저 집으로 보내기 위해서라면 저들이 지금 그 출입구 근처에 배치해놓은 것들–전차라고 했던가?–보다 더한 것을 동원하더라도 어떻게든 돌파를 시도할 수 있엇으나, 이런 그녀도 결국 저 정도는 너무 삼엄하다고 인정한 뒤였기에 별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한 슨우의 말이 전혀 틀린 게 아니고. “미안.” 나르사는 더는 참지 못하고 친구의 눈가에 흐르는 물방울을 닦아주었다. “싫어.” 키리가 말했다.
“싫다고. 이렇게 왔는데 갑자기 헤어진다니… 모두 혼자 있어야 한다니…”
훌쩍이는 키리를 나르사가 지그시 안아주자,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나르사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계속 우는 키리를 슨우가 씁쓸한 얼굴로 등을 두드려 주었다. “미안해.” 그는 정말로 미안해하고 있었기에 나르사도 말없이 키리만 꼭 안아주었고, 그렇게 셋은 잠시 서로 의지한 채 아무 말 없이 마음만 서로 나누었다. “미, 미안,” 그러다 이번에는 키리가 마안하다고 하며 나르사를 풀어주었고, 스스로 눈물을 닦으며 주눅든 목소리로 말했다.
“계속, 헤어지는 거 아니지? 우리 다시 만날거지?”
“으응.”
나르사가 곧바로 대답했다. 슨우도 고개를 끄덕였고, 이에 키리는 다시 눈물을 몇 방울 흘리면서 “정말?” 울먹이는 소리로 다시 물었다. “그래.” 나르사가 말했다. 그리고는 다시 눈물을 닦아주고 “약속할게.” 하는 그녀에게 키리는 “약속?” 작게 속삭였고, 이에 슨우가 “그래, 약속.” 평소답지 않게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고, 그렇게 재차 확인받자 키리도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녀가 말했다.
“약속이야. 언젠가 다시 만나기로. 알았지?”
“응, 약속.”
웃으며 대답하는 나르사. 슨우도 실로 오랜만에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에 키리도 마지막 눈물을 닦으며 힘겹게 웃었다. 그래, 나르사는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둘을 보며 스스로 맹세했다. 언젠간 다시 만나기로. 설령 나는 다시 만날 수 없을지언정… “알았어.” 엔시나가 당연하다는 듯 이에 대답하자 나르사는 속으로 그녀에게도 웃어주었다. 그리고 이렇게 셋이 서로에게 미소짓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나르사는 더이상 아무 것도 보거나 들을 수 없었다. “응?” 마치 이 모든 게 꿈인 것처럼 느껴졌고, 꿈이라면 이게 꿈이라는 것을 자기가 스스로 아는 것도 특이하지만, 지금 뭐가 뭔지 모르는 것부터가 우선이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뭐라고 중얼거렸으나 그 말은 입에서 나오지를 않았고, 마치 머릿속에서 물결치는 듯 좌우로, 그리고 앞뒤로 울려퍼졌다. 하지만 그것들은 그저 그렇게 퍼져나가기만 할 뿐이었고, 제이미는 이런 느낌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아니 지금 눈으로 뭘 보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아니, 그전에 내가 누구라고?
“아?”
비록 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자기가 어느새 나르사가 아닌 제이미라는 것을 그녀는 알 수 있었다. “뭐야,” 마치 꿈 속에서 무언가를 지켜보는 관찰자라도 된 것처럼, 자기 자신의 몸은 여기 있다는 느낌이 없이 그저 보고 들리고 또 느껴지기만 했다. “대체 뭐야?” 생전 있던 적이 전혀 없는 일에 당황한 제이미에게, 갑자기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짐과 동시에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억이 끝난 거야.”
“응?”
제이미는 목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봤다. 아니, 바라보기보단 그 목소리가 들리고, 이상하게 들릴 뿐만 아니라 어떤 감각으로 느껴지기도 한 쪽을 의식하자 그곳에는 한 명의 여자가 서 있었다. “잘 봤어?” 바로 나르사였다.
“어, 으응. 그, 봤어. 아니, 봤다기보단…”
지금까지 엔시나가 보여줄 때마다 본 것을, 아니 본 게 아니라 이걸 뭐라고 해야할지 몰라 머리를 쥐어짜는 제이미를 보며 나르사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기억이야.” 그녀가 말했다.
“보는 게 아냐. 떠올리는 거지. 내가 기억하는걸 너가 기억하는 걸로써 말야.”
“네 기억?”
제이미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고보니,” 하지만 애초에 저 여자가 왜 여기 있는 거지?
“너 죽었잖아. 아니, 내 말은 그러니까 그거 분명 옛날 아니었어? 너도 사람이라며.”
그리고 이런 제이미의 말에 나르사는 조금도 기분나빠하는 기색 없이 오히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뭘 몰라서 당황해하면서도 비록 드러내지는 않지만 신기해하는 제이미의 태도가 꽤 재밌는 모양이었다. “동반자는,” 그녀가 이해할 수 있도록 천천히 설명하는 나르사.
“죽는다고 끝나는 게 아냐. 죽기 전에 혼령과 같이 살면서 겪은 그 모든 것들은 동반자의 기억으로서 혼령에게 끝까지 남아. 물론 그 많은걸 전부 기억하진 않겠지만 중요한 건 확실하게 기억하니까. 그리고 새로운 동반자가 생기면, 필요에 따라 그걸 보여주는 거야. 이전 동반자, 즉 현재 동반자와 같은 인간의 기억을, 그 사람이 되어 직접 기억하는 식으로.”
“으응.”
고개를 끄덕인, 물론 끄덕일 고개가 있는지는 지금 느껴지지 않지만 어쨌든 알았다는 표시를 한 제이미였다. 하지만 여전히 궁금증이 남아있어 다시 한 번, “그런데 너 죽었잖아.” 그 사실을 상기시키자 나르사 역시 “그렇지.” 대답했다가 잠시 가만히 있더니 곧 다시 말했다.
“아니, 조금 애매하긴 해. 사실 나도 내가 지금 잠깐 살아났는지 아닌지 몰라. 그냥,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 동반자가 될 사람한테 할 말이 있었거든. 그래서 살짝 손을 썼는데 아무래도 그게 너인 것 같네.”
“응.” 제이미가 대답했다. “맞아.” 그러자 조용히 고개만 몇 번 끄덕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나르사였고, 이런 그녀를 본 제이미는 “그래서,” 조금 미심쩍어하는 눈으로 물었다.
“할 말이 뭔데?”
“아, 그게,”
나르사는 잊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제이미에게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수고했어.” ”……” 수고했어. 이 한 마디로 끝나고는 더 말이 없는 것을 제이미는 빤히 쳐다보다가 “그게 다야?” 목소리를 냈고, 그것이 연못에 돌을 던지듯 가벼운 파장을 내면서 퍼져나가자 나르사는 제이미에겐 당황스럽게도 “응.” 고개를 끄덕였다가, 잠시 그녀를 쳐다보고는 말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 수고해달라고. 그거에 대해선 미리 고맙고, 또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어.”
“아,”
제이미는 생전 처음 얘기하는 사람이 이렇게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사과하자 어쩔 줄을 몰랐다. “어, 응.” 어쨌든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기에 말을 더듬으면서도 받아넘긴 순간, 갑자기 주위가 미묘하게 밝아져오는 느낌이 들자 그녀는 주위를 둘러봤다. “뭐야?” 나르사 또한 그것이 보이지는 않는 듯 했지만 역시 무언가를 느꼈는지 고개를 살짝 들었고, 이어서 한 쪽을 쳐다보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싶더니 “여기까지구나.” 다시 제이미를 보며 말했다.
“그럼 난 이만 가볼게. 그러니까 다시… 죽어있겠지, 아마. 물론 이미 예전에 죽었지만. 애초에 지금의 나는 죽기 전 내 기억에 손을 써둔 것에 불과하거든. 어쨌든 나를 만났다는 건 엔시나한테는 비밀로 해줘, 응? 너가 스스로 말하지 않는 이상 내가 이런걸 할 줄 알고 있었다는 것도 모르고 있을 테니까.”
“어?” 제이미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아예 숨길 수도 있어?” 이에 후훗 웃은 나르사가 말했다.
“어차피 완전히 하나가 되지 않는 이상은 서로 숨기는 것도 생기는 법이야. 애초에 그래야 더 사는 맛이 있잖아?”
“하긴,”
인간끼리의 관계에서도 그런 게 있기에 제이미는 충분히 이해하며 끄덕였다. 그리고 주위가 더 밝아져, 곧 나르사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지기 직전, 그녀가 “그럼,”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 점점 이곳에서 멀어져가는 제이미를 감싸주었다.
“안녕, 제이미 앨리슨. 이렇게 얘기할 일은 더이상 없겠지만, 앞으로 우리 모두의 기억이 네 곁에 있어줄 거야.”
……
…..
….
…
..
.
툭툭툭,
”–니얘, 언니얘,”
누군가가 팔을 두드리고 있었다. 이어서 등에서는 조금 차가우면서도 부드러운, 마치 여러 개의 구름이 살랑거리는 위에 누워있는 듯한 감촉이 노래하듯 흘러들어왔고, 잠시 뒤 팔이 따끔거리는 느낌이 유리창을 깨부수듯 그 평안함을 깨자 저절로 눈이 떠졌다. “어… 어어?” 눈을 떴음에도 어째 어두워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으나, 저기 아주 작은 틈 사이로 햇빛이 살짝 보이는 것에 자기가 지금 나무 밑에 있음을 안 제이미였다. “언니얘!” 한편 그녀가 깨어난걸 본 아린은 팔을 꼬집던걸 멈추고 와락 안겨들었다.
“걱정 많이 했으야! 언니야도 엔시냐도 영 깨질 않고… 으야아, 언니얘…”
정말로 많이 걱정했는지 제이미는 아린이 흘리는 눈물에 옷이 젖는걸 느꼈다. “으, 으응.” 왠지 방금 봤던, 물론 그걸 본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르사와 키리가 생각난 그녀는 소녀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줬다. “괜찮아.” 웃으면서 말한 그녀는 그런 자신을 내려다보며 미소짓는 이진이 눈에 들어오자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요.” 이진이 말했다. 왠지 여기저기 멍이 들고 피가 맺혀, 지금 저 돌 위에 앉아있는 것도 왠지 일어서지를 못해서 그러고 있다는 게 보였지만 어쨌든 목숨은 멀쩡한 그에게 제이미가 물었다.
“그러고보니, 그… 어떻게 됐어요?”
“잘 됐어요.”
제법 가벼운 목소리로 대답하는 이진.
“덕분에 사령들은 어떻게든 다 잡을 수 있었어요. 다일 말도 그렇고 제가 봐도 이제까지의 사령들과는 조금 달랐지만. 아, 그리고 그… 요원들이라고 했던가? 그 사람들은 뭐, 어차피 다들 지쳤고, 적당히 말해서 보냈어요.”
“네에.”
제이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제보니 여긴 그 창고가 아닌데? “건너왔어요.” 이진이 미리 대답했다.
“여기가 바로 혼령계예요. 우리들이 사는 세계.”
“혼령계…”
주위에는 온통 큰 나무와 잡초들, 벌레들 뿐이었기에 여기가 정말 다른 세계인지 뭔지 잘 느낌이 오지 않았지만, 일단 옆을 보니 그 구덩이가 있었고, 제이미는 그걸 보며 자기가 맞고 기절하기 직전 창고에 있는 그것에 떨어진 사실을 기억해냈다. “으,” 한편 제이미의 이런저런 생각이 알람을 울린 건지, 엔시나가 정신을 차리면서 고개를 마구 흔드는 게 느껴졌다. “내가,” 그녀는 아직 덜 깬 상태에서 평소답지 않게 투덜거렸다.
“내가 사령 따위에게 두 번이나 당해가지고…”
“이봐,”
슬쩍 부르는 소리에 “아!”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는 상황을 파악한 엔시나. “괜찮아, 제이미? 여긴…” “니 집.” 제이미가 말했다.
“니가 그렇게도 오고 싶어했잖아.”
“아아,”
제이미의 시야 속에서 두리번거리는 엔시나. “왔구나.” 짤막한 말과 함께 그녀의 얼굴이 밝아지는 것을 제이미는 느꼈다. 한편 제이미를 놓아준 아린은 곧 자리에서 일어나 “이제 가야!” 밝게 웃으며 먼저 걸어가려 했다. 사실 사령이 또 올까봐 얼른 나가려 한다는 건 혼자서만 생각하며. 하지만 제이미가 잠시 멍하니 있더니 “아, 잠깐!” 역시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섰으나 앞으로 걸어가지는 않고 옆의 구덩이를 내려다봤다.
“지금 여기로 내려가면 다시 돌아갈 수 있는거지?”
“뭐?”
이진과 엔시나가 동시에 놀라서 물었다. “아니 왜?” “뭘 두고 왔어.” 이렇게 말하는 제이미의 얼굴을 본 이진, 아린 그리고 생각도 읽은 엔시나는 아무래도 여기서 안된다고 하면 안될 듯한 느낌에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고, 곧 제이미가 먼저 뛰어들었다.
이쪽 세계는 아직 새벽. 다행히 창고에는 아무도 없었다. 창고 밖에도 마찬가지였고. 다만 수많은 시체들이 널린 광경을 제이미는 메스꺼움을 간신히 참으며 넘어가, 그렇게 계속 걷다가 마침내 그녀가 애기라고 부르며 아끼던 차, 지금은 다일로 인해 완전히 찌그러진 그것의 안을 둘러보았다. “아,” 제이미는 차 안에 들어가지는 않고, 몸을 숙여서 무언가를 꺼냈다. 집에서 다들 총 따위의 무기를 챙기느라 바쁠 때 제이미 혼자 조용히 챙겼던 액자. 어린 소녀와 소녀를 껴안은 엄마가 웃으면서 찍은 사진이 담긴 액자를 제이미는 가만히 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미소짓고는, 곧 그것을 가지고 “가자.” 한 마디 했다. 그런데 그녀가 몇 발짝 내딛기 전에, 갑자기 웬 노랫소리가 들려오자 고개를 돌린 제이미. 망가진 차 안에서 뒹굴고 있는 망가진 핸드폰 하나가 보였고, 그나마 멀쩡한 화면에는 '아빠' 두 글짜가 써진 것이 눈에 들어왔다.
”……”
제이미는 조용히 그것을 내려다봤다. 제발 받아달라는 듯 계속 울리는 폰을 가만히 둔 채, 제이미의 머릿속에는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 처음 혼령이란 것을 만나 쓰러진 것을 시작으로, 갑자기 들려오는, 아니 느껴지는 목소리와 서로 싸우며, 혼령이네 뭐네 하는걸 전부 웃기지도 않는 소리라고 하며 욕했던 일, 어쩔 수 없이 처음 여기 왔다가 웬 특이한 여자애를 만난 일이며 그 이후, 엄마가 죽고, 그리고 왜 죽었는지를 알고…
말없이 바닥만 쳐다본 채 계속 생각하던 제이미는 고개를 돌려, 그렇게 한 순간에 가족을 잃은 자신을 쳐다보는 아린과 이진을 봤다. 그리고 더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엔시나를 잠깐 생각하다가, 제이미는 머릿속에서 아까 들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앞으로 우리 모두의 기억이 네 곁에 있어줄 거야.”
“응?”
엔시나가 무언가를 느꼈는지 흠칫했다. “무슨 일 있었어?” 다행히 그녀는 뭐가 있었는지는 알아낼 수 없는 모양이었고, 제이미는 “아니, 딱히.” 어느새 입을 닫은 채 속으로만 그녀에게 대답하고 있었다.
“이 차, 완전히 터뜨릴 수 없어?”
“제이미?”
“무슨 증거라든가 그런거 남으면 귀찮아질 거 아냐.”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제이미에게 엔시나는 조용히 몇 가지를 전달해주었고, 그녀가 알려주는 것이 머릿속에 들어온 제이미는 먼저 차에 시동을 켠 뒤, 이미 더 나이갈 수도 없는 차의 액셀 위에 무거운 파편 하나를 얹어놓았다. 그리고는 “가자.” 고갯짓을 해서 둘을 먼저 걸어가게 한 뒤, 자신은 차의 보닛을 열었다. 저 안에서 아직도 울려대는 폰도 그대로 놔둔 채. 다시 출입구가 있는 곳으로 향하며 제이미는 혹시나 몰라서 들고 나온 권총을 잠시 만지작거리더니 천천히 장전했고, 그러면서 자신이 엔시나를 만나기 전에 있었던 모든 것, 그 모든 일을 기억나는 대로 떠올려 봤다. 그렇게 떠올리면서 하나씩, 전부 없었던 것처럼 잊기 위해. 전부, 지금의 제이미에게는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제이미,” 이런 제이미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엔시나가 보다못해 입을 열었다.
“어쨌든 이 세계는 너의 고향이야. 너가 태어나고 자란 곳.”
“더이상은 아냐, 난…”
쓰러지기 전 제이미의 머리카락은 지저분하게 잘려나갔었다. 이를 이제서야 알고 뒷머리를 만지작거린 그녀는, “나는…” 아직 길게 남아있는 머리카락을 잡고는 그 절반, 다른 머리가 잘려나간 만큼 엔시나가 허리에 찬 칼로 툭 끊어 버리는 제이미. 그리고 아직도 매끄럽지만 먼지가 묻은 그것을 땅에 아무렇게나 버리며, 동시에 마지막 기억까지 전부 내던져 버렸을 때 제이미는 뒤를 돌아 총을 겨누었다.
3. 혼령과 그 동반자
“난 소울메이트야.”
짧은 한 마디와 함께 제이미는 방아쇠를 당겼고, 총알은 앞이 열린 차의 한쪽에 정확히 맞아, 곧 과부하를 일으켜 그대로 불이 붙게 했다. 제이미가 다시 뒤돌아서 천천히 걸어갈 때, 그녀의 뒤에서는 차가 완전히 폭발하고 있었다.
2014년 연재 시작, 암운의 첫번째 이야기
Soulmate, 1부 : “두 세계” 끝
2부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