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5 (에필로그) (2)
뚜– 뚜–
무심한 저음만이 반복되는 폰을 든 채, 마크윈 앨리슨은 그 차가운 기계보다도 더 굳은 얼굴을 하고서 책상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이미…” 그가 낮게 신음하면서 폰을 내려놓고는 조용히 눈을 감자, 그의 머릿속에 딸아이에 관한 여러 기억들이 지나가며 아버지를 더 참담하게 했다.
한편 그가 이러는 중에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문을 열고 레브가 술병 하나와 잔이 담긴 플레이트를 들고 왔다. “74년산입니다.” 짤막하게 말한 레브는 그에게 한 잔을 따라준 뒤, 병도 옆에 놓고서 나가려 했다. 하지만 이런 그에게 마크윈이 아무 말이 없는 것을 돌아본 청년은, 그의 표정을 잠시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가 곧 닫기를 몇 번 반복하더니, 약간은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냈다.
“제가 남의 가족사에 참견할 수는 없지만, 따님께서 무사하길 바라신다면… 이제 앨리슨 양은 이쪽보다는 저쪽 세계에 있는게 더 안전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마크윈은 고개를 들었다. “그걸 몰라서 이러나.” 신경질을 내는 건 아니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나가라는 메시지가 쓰여 있었다. 레브는 허리를 살짝 숙인 뒤 방에서 나갔고, 문이 닫히자 다시 책상만 멍하니 내려다보던 마크윈은 잔을 잡고는 한 모금 들이켰다. 달고도 쓰면서 맵기까지 한 향이 입안에 불길처럼 퍼지자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을 때는 잔을 잡았던 손이 서랍을 열고 있었다.
서랍에 넣은 손이 들고 나온 것은 작은 액자 하나. 그것을 책상 위에 세운 마크윈은 그 안에 있는 세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남녀 한 쌍이 작은 소녀를 양쪽에서 껴안으며 셋이 다같이 웃는 모습. 그리고 저 사진속의 남자는 계속 그 사진을 바라보다가, 곧 시선이 사진 속의 여자에게 향했다. “니키,” 마크윈이 중얼거렸다.
“이게, 당신이 내게 남긴 거야? 내가 고통받을거면 이런 식으로 고통받으라고, 당신이 이렇게 선택한 거야?”
대답이 없는 사진 속의 여자를 먼 눈으로 바라보던 그는, 더는 참지 못했는지 두 손을 얼굴에 파묻었다. 하지만 손으로 막았음에도 곧 책상에 작은 물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는데 한 마리가 다가와 주위를 맴돌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역시 아무 소리나 신호도 나지 않았는데 다른 한 마리가 저쪽으로 나갔다가 오기를 반복하고, 그리고 나머지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무언가에 반응해, 주위에서 왔다갔다 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편 이런 침묵 속에서 유일하게 자신만의 소리라는 것을 내는 이가 있었다.
“다시 막혔다고? 그 외에 다른 건 없어?”
죽은 바람처럼 기이하게 감도는 목소리가 물을 때, 주위를 떠돌던 것들 중 하나가 공중에 살짝 떠 있었다. 그리고 이 무언가가 아무 소리도 밖으로 내지 않았음에도 처음에 목소리를 낸 이가 “알았어.” 짧게 대답하자 곧 바닥에 부드럽게 닿아서는 다시 주위를 맴돌았다. “그래,” 검은 물체들, 흔히 모두가 '사령'이라 부르는 것들에 그렇게 둘러싸인 이는 앞으로 살짝 움직였다.
“인간계가 정말로 있긴 있다 이거지.”
앞으로 움직이자 검은 물체들도 그의 뒤를 따라와, 다른 곳에서라면 마치 고여서 썩은 물처럼 물컹거리며 움직였던 것들이 지금 여기서는 마치 하나하나가 작은 짐승처럼 빠르게 오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 중심에 있는 이가 천천히 앞으로 움직일수록 사령들 또한 그렇게 맴도는 중심을 앞으로 옮겼다. “너무하잖아.” 한편 어느새 다른 사령 하나를 들어올린 채 얘기하던 이는 혼자 중얼거렸다.
“나만 빼놓고 그런걸 다 알고 있었다니. 화가 조금 나기도 하고, 이해가 되기도 하고,”
그리고는 그것을 내려놓고서 앞으로 가던 움직임을 멈추고는, 살짝 미소를 지은 채 주위의 모든 것들에게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넘어가고 싶진 않아. 이제 갖출 것도 거의 갖췄겠다, 조금 놀래켜주는 정도는 해야지. 다들 대기해.”
명령이 떨어지자 주위를 맴돌던 사령들은 갑자기 어디론가 제각기 퍼져나갔고, 마치 파도가 일듯 퍼져나가는 것들 가운데서 미소를 짓던 이는 천천히, 다시 앞으로 움직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