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
“응…”
천천히 눈이 떠진 아린. 그대로 잠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곧 “야–암–” 입을 쩍 벌려 하품을 토해내는 그녀였다. 그리고는 몇분을 더 그렇게 굳은 듯이 누워있다가, 갑자기 이불 밑에 불이라도 난 마냥 “으얏!” 온몸을 던져 일어나고는 옷을 꺼냈다.
잠시 뒤 방문을 열어젖히고 나온 그녀는 아침부터 분주히 움직이는 이진을 빤히 쳐다봤다.
“오라부이 무얘?”
“어? 아, 아린… 일어났구나.”
방 앞에 뭘 쌓아놓고는 하나하나 세던 이진. 멀뚱히 눈을 깜박이는 동생을 보고도 그렇게 쌓아놓은 것들을 방으로 가지고 가더니, 곧 다시 나오고서야 그녀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 뭐 말할 거 있니? 밥은 엄마가 곧 하신댔어.”
“지금 뭐햐?”
팔을 걷어올린 채 숨을 가볍게 헐떡이는 오빠의 모습, 그것도 아침부터 저러는건 처음 보는 아린이었다. “아, 그,” 이진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아린이 고개를 내밀어 방 안을 보려고 하자 얼른 막아서며 말했다.
“있어. 그, 무슨 일 있어서. 좀 정리하는 거야.”
“야…”
뭐 별거 아니겠지 싶어 고개를 끄덕인 아린은 집 안을 둘러보더니 다시 오빠를 바라봤다.
“언니는 어딨으얘?”
“제이미?”
이에 이진도 주위를 한 번 슥 보고는–계속 거실과 방을 왔다갔다했을 것인데 정말 바쁘긴 한걸까–어깨를 으쓱했다.
“못 봤어. 아마 처음 왔으니 여기저기 구경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리고는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는지 방으로 들어가서는 옷 몇 벌을 꺼내보는 이진.
“곧 밥 먹으니까 가서 데려와. 난 좀 바빠서…”
“야.”
아린은 그렇게 꺼내놓은 옷의 수량도 점검하는 이진을 두고 마당으로 나갔다. “리냐,” 신발을 대충 구겨신으며 혼령을 불러보지만 대답이 없자 결국 혼자 나서는 그녀였다.
혼령계의 아침은 거의 언제나 밝은 편이었다. 사실 인간계에 건너가서 뭐랄까, 조금 '지저분한' 하늘을 몇 번 보고 온 아린은 오늘 저 위를 다시 보자 그때의 칙칙함이 남긴 찌꺼기가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으야,”
마을이 그리 넓진 않았기에 제이미를 찾는다면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아린은 일단 늘 하던대로 산을 조금 올라가, 그녀가 사는 곳과 비슷하면서도 약간 좁은–사실 이 마을의 집 모양이 대부분 거기서 거기지만–마당으로 들어섰다. “서야!” 아린은 제 집앞에 비해 제법 깔끔한 앞마당 들어서자마자 저기 앉아있는 소녀를 불렀다. 아린보다 겨우 한 살 어리지만 몸은 훨씬 왜소한 소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아린을 봤다.
“아, 아린.”
마루에 다소곳이 앉아 손을 흔들더니 사뿐사뿐, 고양이 담 위를 걷듯 다가오는 '서아'는 사실 몸이 왜소하기보다는, 아린이 맨날 잠시도 쉬지 않고 이리저리 활개치는 것과는 반대로 언제나 얌전히 다니기에 더 많이 비교되는 것뿐이었다.
“잘 잤어?”
그러나 아란 소속의 이 소녀에게 그런 성격차쯤은 별 의미가 없었다. 애초에 마을 안에서 아린과 친하지 않은 사람을 찾아봐야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니까.
“인간계에 갔었다며?”
그동안 들은 얘기를 꺼내는 서아의 초록빛 눈은 약간 겁먹으면서도 호기심이 묻어있었다. 동글동글한 아린과 달리 살짝 갸름하고 전체적으로 작은 얼굴 주변으로는 약간 푸른 빛이 섞인, 짙은 남색의 머리카락이 한 송이의 꽃처럼 묶여 뒷머리 아래쪽에 핀 모습. “으야.” 다만 키는 아린보다 주먹 하나 정도만 작은 소꿉친구를 보며, 서릿눈 소녀는 자랑스럽게 어깨를 폈다.
“사령들한테 쫓기다 갔으이. 나름 재밌게 놀다왔으야.”
엄한 데 가서는 죽을 고비를 넘긴 일을 훌륭한 모험담처럼 풀어놓는 그녀였다. “와아,” 그리고 이런 그녀의 자랑이 (언제나 그랬듯) 반쯤은 허풍인걸 알면서도 눈이 동그래지는 서아.
“부럽다. 나도 언젠가 가보고 싶어.”
“야, 야! 그르야. 다음엔 서야도 꼭 데려가–”
“아린!”
어느새 잠에서 깬 리니아가 다그쳤다. 갑작스런 칼바람에 움찔한 아린을 보며 푸훗 웃는 소이.
“안녕하세요, 리니아.”
이러는게 이미 일상이 된지 오래였기에, 언제나처럼 이런 식으로 둘에게 인사하는 그녀였다. 그리고 아린은 더이상의 허풍 대신 자신도 키득대고는 “맞야,”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물었다.
“혹시 우리 언니 봤야?”
“언니?”
놀라는 서아.
“너한테 언니도 있었어?”
“야, 그건 아니이, 인간계에서 데려온 언니얘. 우리랑 같이 살기로 했으야. 아! 그 언니얘, 엔시나 동반자얘.”
“어? 엔시나!?”
더 놀라는 서아.
“정말로 살아있었구나! 이제 돌아온거야, 그럼?”
“야, 야.”
끄덕끄덕. 아린은 그 엔시나와 동반자가 자기 집에 산다는 게 굉장히 뿌듯했다. 이미 다일도 있겠다. 그렇게 몸이 몇 배는 부풀어오른 기세로 다시 물어보는 그녀.
“쨌든 언니 못봤야?”
“나도 이제 일어난거라,”
머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서아였다. “잘…” 그러자 아린은 기다렸다는 듯 친구의 팔을 덥석 잡고는 그대로 마당을 나가며
“잘됐으얘. 너한테 언니 직접 보여주고 싶었으야.”
라고 한 마디 하고는, “자, 잠깐,” 종종걸음으로 끌려나오는 서아와 함께 산을 내려갔다. “못 살아.” 리니아가 혀를 차면서 그녀의 시야에 보이는 것들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여기가 옛날에 살던 곳이야.”
한편 제이미는 산을 다 내려와, 가장 밑에 있는 집 중 하나 앞에 섰다.
“나르사는 워낙에 활발한 애였어서, 집을 나오자마자 몰래 숲에 들어가서 돌아다니곤 했어. 아린처럼.”
“그래?”
엔시나가 추억에 잠겨 부드럽게, 그리고 먼 산을 보듯 씁쓸하게 말하는 것에 제이미가 대답했다.
“내가 맞춰볼게. 그럴 때마다 슨우가 잡아서 데려왔지?”
“잘 아는구나.”
작은 소리로 웃는 엔시나. 그리고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제이미가 고개를 들자 보이는 집을 천천히, 위에서 아래로 훑어보다가 집앞에 걸린 어느 장식에 눈이 꽂혔고, 이를 느낀 제이미도 그것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청화 쪽이구나, 이 집.”
둘의 눈에 보이는 건 사실 장식이라기보다는 그냥 푸르고 초롱초롱한 꽃이 여럿 피어있는 작은 나무. 하지만 딱 봐도 일부러 여기 심었을거란 확신이 들 정도로 눈에 띄는 곳에 피어있었다. “여기,” 엔시나가 그 꽃을 가만히 바라보는 제이미에게 설명해주었다.
“저렇게 푸른 꽃이 피어있으면 청화 소속이라는 소리야. 아린이 사는 곳처럼 국화가 피어있으면 서릿눈, 난초가 있으면 아란이야.”
“그럼 그… 초생달이라 했던가? 그건?”
제이미가 묻자 고개를 젓는 엔시나.
“내가 인간계에서 지내는 동안 새로 생긴 일파인 것 같아. 잘은 몰라.”
“흐응,”
얘기를 끝낸 제이미는 혼령과 함께 말없이 저 오래된 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엔시나는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여는데,
“그러고보니 원래는–”
“언니얘애~!!”
온 산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퍼지는 메아리에 흠칫한 제이미는 고개를 돌렸다. 아린이 웬 또래 여자애와 함께 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햐, 흐야,” 제이미 앞에 도착해서는 크게 숨을 헐떡이는 아린과, 역시 숨을 고르지만 일부러 소리를 죽이는 듯 조용한 서아가 굉장히 비교되어 보였다.
“차… 찾았으얘. 얼른… 햐… 밥먹으러 가얘.”
저 위에서 여기까지 계속 달려온걸까. 한 마디 한 마디 힘겹게 하는 아린을 보며 제이미가 피식 웃었다. “딱 나르사야.” 엔시나 또한 재밌어하며 아린과 그 친구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렸다. “여, 여기,” 정신을 차리자마자 서아를 가리키는 아린.
“인사햐. 내 친구얘. 서아라고, 아란이얘.”
아직도 숨이 차는지 짧게 말하는 그녀. 제이미는 이름을 듣더니 그 소녀를 보며 미소와 함께 물었다.
“아, 그럼 너가 얘 사고치면 잡아온다는 애구나. 반가워.”
“야?”
땅에 대고 헉헉거리다가 고개를 드는 아린.
“어무가 그런 것까지 말했얘?”
이에 제이미는 낄낄거리더니 아린의 등을 탁 치고는 “가자.” 먼저 돌아갔고, 서아가 얼른 그녀를 따라갔다. “어, 언니얘!” 아린도 부리나케 뛰면서 기껏 내려온 산을 다시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