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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서 도대체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다만 굉장히 긴 시간이 지났다는 건 분명했다. 신령님들께서는 해와 달이 한 번씩 뜨는 주기를 하루라고 했었다. 그리고 한 주, 한 달, 한 해… 그래, 세어보진 않아서 잘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수백 년은 지났음을 시히델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모두가 알고 있다. 물론, 그렇게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들에 한해서지만.
으득!
“어흑!”
그렇게 긴 시간동안, 너무나 많은 이들이 죽었다. 혼령이든, 인간이든, 그 세월만큼 하나하나 세기도 힘든 이들이 죽고 죽어야 했고, 그럼에도 어느 쪽이든 전멸하지는 않아, 시간이 지나면 또 수가 늘어났다. 신령님들께서 인간에 대해 가르쳤던 내용을 시히델은 기억한다. 어느 정도 성장한 남녀 한 쌍으로부터 하나 혹은 둘, 가끔은 셋의 어린 인간이 태어난다고. 그리고 혼령들은… 잘 모른다. 신령님들조차도 모르는 게 있는데, 그중 하나가 혼령의 탄생이었다. 전혀 알아낸 게 없다고 한다. 그저, 언제 어디선가 나타난다. 여리고 약한 모습으로 나타나 소통을 배우고, 그 소통으로서 지식을 터득하고, 그 지식으로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 과정은 시히델이 아는 한 인간에 비해 꽤나 빨랐기에, 태어나는데 약 한 해가 걸린다는 인간에 비해 어디선가 발견되는 주기가 제법 길었음에도, 그 차이를 충분히 극복할 수 있었다.
촤악–
“아아아!!”
다시 말해, 혼령과 인간은 서로 싸우면서, 그렇게 싸울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이들이 비슷한 속도로 채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수가 채워질 때마다, 혹은 미처 채워지기도 전에 서로가 서로에게 목숨을 걸고 달려들어, 죽이거나 죽는 쪽 중 한 가지를 맞이한다. 그리고 오늘도,
“사, 살려줘요! 난 사실 여기 오고 싶지도–”
으드득–
“어억…”
각종 무기, 이를테면 칼이라든가 활 따위를 들고 덤벼드는 인간을 상대로, 피하고 막고 때로는 불행히도 맞으면서 시히델은 하나하나, 아무런 자비심도 없이 인간들을 잡아 목을 꺾어 버리고, 몸을 찢어 버리거나 허리를 이젠 나뭇잎 접듯이 접어 버리고 있었다. 아니, 이젠 자비심이라는 개념조차 희미했다. 그냥 이게 일상이 되었다고 해야 하나? 이젠 인간을 죽여야 한다는 살의조차도 거의 사라져 있었다. 그저 저들을 가만 놔두면 그녀와 같은 혼령들이 죽어나간다, 이 사실 하나만이 커다란 기둥처럼 고정되어 있었고, 그 주변에는 이미 수많은 인간의 피를 봤고, 앞으로도 못할 거 없다는 지극히 당연한 일상이 깔려 있었다.
“저기 하나 도망간다!”
혼령들 중 한 명이 외쳤다. 마침 한 명의 팔을 잡아 찢어 버린 시히델은 공중으로 튀는 피를 뚫고 달려들었고, 잠시 뒤 도망가던 인간의 등을 후려쳤다. 인간은 그대로 고꾸라졌고 곧 마무리를 하려 했으나, 곧바로 정신을 잃은 줄 알았던 인간이 손에 들고 있던 칼을 휘두르자, “앗,” 시히델은 짧은 소리와 함께 몸이 흐트러졌다. 하지만 지금까지에 비하면 큰 상처도 아니었고, 설령 큰 상처라 해도 지금까지 죽을 고비를 수도 없이 넘겨온 그녀였기에 별로 대수롭지도 않았다. “아윽–” 하지만 감히 인간들의 도구 따위로 자신에게 상처를 낸 그 인간을 시히델은 간만에 최선을 다해 사지를 뒤틀어 놓았다.
“괜찮아요?”
차마 몸부림치지도 못하면서 죽어가는 불씨처럼 꺼져가는 마지막 침입자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시히델. 이런 그녀에게 혼령들 중 한 명이 다가오면서 묻자 시히델은 살짝 옆으로 퍼질 뻔했던 몸의 기운을 다시 모았다. “괜찮아.” 짧게 대답한 그녀는 무심히 뒤돌아서서 돌아갔다. 인간이나 다른 생물들과는 달리 신령과 비슷한 몸, 정해진 형체는 딱히 없이 그저 뭉쳐놓으면 보이기만 하는 어떤 기운을 안정적으로 압축해 놓은, 다만 그렇게 함부로 퍼져나가지 않도록 형체를 갖추니 어째 인간과 비슷하게 보이고 느껴지기도 하는 몸을 혼령들은 가지고 있었다. 그 몸에 상처가 날 경우 상처로 속에 모아놓은 기운이 새어나가, 그렇게 많은 양이 빠져나가면 점점 힘이 빠지고 움직이기도 힘들어지며 그러다 더 나가면 죽음을 맞이하며 완전히… 날아가 버린다. 불 위의 물처럼 증발한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혼령들은 이걸 보고 자신들이 죽어서 날아가면 저 하늘에서 우리를 지켜볼 거라 믿고 있다. 다만 시히델은 지금까지 수도 없이 많은 혼령들이 허망하게 죽는 모습을 봐온 탓인지, 이젠 그런 거 따위 별로 믿는 의미도 없다고 여기고 있지만.
“인간들이 점점 더 성가신 도구를 만들어내는 것 같아. 너희도 각자 열심히 훈련해.”
비록 인간과 비슷한 형태라고 했지만, 어디까지나 뚜렷한 형체의 크기가 비슷할 뿐, 혼령에게는 팔이라고 할 만한 것도, 다리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다. 몸의 어느 일부, 어느 기운으로든 강하게 뭉쳐서 뻗으면 실체가 있는 것처럼 무언가를 잡거나 쳐낼 수 있고, 동시에 상처가 날 수도 있다. 다만 생각과 정신은 오로지 하나였고, 그 기운의 느낌에 따라 개개인의 성별이나 대략적인 나이, 그리고 인간들처럼 각자가 가진 특유의 개성 등을 알고 느낄 수 있었다.
“어, 시히델, 다쳤어?”
예를 들어, 지금 그녀는 수백년 전, 신령님들의 가르침을 받을 때라면 물결처럼 조용하면서도 빠르게 흘러, 이따금씩 흐르다가 바위에 부딪혀 튀는 것처럼 약하지 않은 날카로움을 띄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폭포와 같다고 할까, 비록 신령님들의 가르침을 잊은 건 아니었지만, 지금은 강한 충돌과 그로 인한 충격, 상처와 격정 등이 일상이 되어 있는 모습. 몸을 이루고 그 밖과 안에서 흐르는 기운 또한 조용히 흐르던 예전에 비해 지금은 깊고도 빠르게, 무겁게 감돌고 있었다.
“괜찮아요. 곧 나을 거니까.”
지금도 몸의 상부, 인간으로 치면 목 밑에서 기운이 스멀스멀 새어나오고 있으나 이 정도는 별로 신경쓰지도 않는 시히델은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게 움직여–혼령들은 걷거나 기지 않는다. 그냥 바닥 위에서 움직인다고 하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혼령들이 활발히 소통하는 곳으로부터 좀 떨어진, 어느 한쪽 구석의 나무 밑에 조용히 앉았다. 평소에도 이쯤에서 쉬곤 했다. 뭐랄까, 언제부터인가 그녀는 혼자 있는 게 편했다. 누군가와 같이 있다 하더라도 얘기를 잘 하지 않게 된다고 해야 하나?
“시히델! 너 다쳤어?”
다만 저 한 명은 빼고. 지난 수백년간 언제나처럼 그녀 옆에 있어준, 또 그럼에도 지금까지 잘만 살아남은 마르한이 부상당한 시히델을 발견하고 빠르게 다가왔다. “괜찮아.” 상처를 덮어주려는 그를 거부한 시히델. 이런 그녀를 보며 걱정하는 마르한은 평소에도 남자 치고는 굉장히 부드럽고, 여리고, 정이 많아 한 명 한 명의 죽음–심지어 가끔은 인간의 죽음에도–에 슬퍼하며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먼 옛날 사라진 신령님들께 기도를 올리는 녀석이었다. 마치, 마치 여러 수중, 그리고 수면에 떠다니는 생물을 품고 있는 연못이나 호수처럼. 아니, 연못이라 하는 게 더 적절하다. 겉모습만 봐도 마치 모두를 감싸고 이해하려는 것 같은 깊음을 가진 연못이지만, 호수라고 하기엔 지금까지 한 번도 강하게 나서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괜찮다니까. 나 좀 가만 놔둬.”
자꾸 상처를 감싸려 드는 그를 보다 강하게 밀어내며, 시히델은 천천히 기운을 늘어뜨렸다. 고였던 물이 풀어지듯 휴식을 취하려는 태도의 그녀를 마르한은 영 아니라는 듯 내려다보고 있었으나, 시히델은 그의 정 많은 시선 정도는 이미 충분히 익숙해져서 그대로 나무 밑에 늘어졌다.
“그래서, 다들 죽인 거야?”
이런 그녀를 보며 마르한이 묻자 시히델은 긍정의 표시로 기운을 짧게 살랑였다. 이에 마르한은 평소에도 풀어헤치고 다니던 기운이 일렁였고, 조그맣게 한탄하는 그의 몸은 살짝 느린 흐름을 보였다.
“그래, 오늘도 다 죽었구나.”
“그러면 죽여야지.”
당연하게 대답하는 그녀.
“아니면 우리가 죽어. 몇 번이나 말했는데 넌 아직도 그런 걸로 고민해? 참 편하게 사는구나.”
”……”
마르한은 시히델을 다소 불만스런 시선으로 쳐다봤다. 물론 저런 시선 또한 익숙하기에 그녀는 별 움직임도 없이 그냥 저 먼 앞만 쳐다볼 뿐이었지만. “넌,” 이렇게 영 반응이 없는 그녀에게 마르한이 물었다.
“지겹지 않아? 아니면 지겹다는 생각 해본 적 없어?”
“뭐가?”
“죽이는 거.”
이렇게 말하는 그 또한 당연하다는 태도였다.
“지금까지 계속, 계속 죽이고 죽고… 도대체 지금까지 몇 명이야? 벌써 수백 년이 지났잖아.”
이 말에서야 시히델의 시선이 움직여 친구를 쳐다봤다.
“너도 아는구나.”
“당연히 알지!”
성을 내는 마르한.
“지금까지 살아남은 혼령이라면 다 알고 있어! 도대체 얼마나 지났는지… 그리고 그렇게 산 혼령들 중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건 너 혼자밖에 없잖아, 알아? 지금 그 혼령들, 다들 싸움은 포기하고 다른 혼령들을 돌보거나 하고 있어. 너 혼자만… 계속 이렇게 죽이고, 상처입고,”
“약해진 거야, 그 친구들은.”
그게 뭐가 그렇게 문제냐는 듯 느릿느릿 대답하자 이에
“지치니까 약해지는 거잖아.”
하고 대답하는 그였다. 그리고 친구는 그녀의 시선 속에 이제 자신은 울먹일 힘도 없다는 투로 말을 계속했다.
“넌 어떨지 모르지만, 난 지금까지 나랑 친하게 지냈던 혼령들 다 기억해. 또 인간들이 습격해올 때마다 꼭 보이던 얼굴들, 그동안 죽지 않고 잘만 살아남았던 몇 명도 기억하고. 그런데 그렇게 친하게 지냈던 애들도, 정말 끈질기다 싶을 정도로 안 죽고 잘만 살아서 도망가던 인간들도, 결국 저렇게 죽을 땐 뭐랄까… 뭔가 무너지는 것 같아. 너무, 텅 비었어. 아무 것도 남지 않고 끝나.”
“죽음이란 게 그런 거잖아.”
사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대답을 툭툭 던지는 시히델을 이젠 불만이 가득 찬 모습으로 노려보는 마르한.
“단순히 죽는 문제가 아냐. 그러니까 죽는 건데, 그냥 죽는 게 아니라, 그…”
이렇게 말을 하다가 뭐라고 표현하기가 힘든지 다시 한탄과 함께 기운이 잠시 굳어지는 그였다. 그리고 잠시 둘 다 아무 말이 없더니, 이렇게 고요한 속에 시히델이 점점 앞이 흐려지며 수면에 들려고 할 때, 다시 “너는,” 말을 꺼내서 그녀를 깨우는 마르한이었다.
“이러다가 세상이 끝난다면 어떨 것 같아? 계속 이렇게 죽고, 죽이고, 계속 그러다가 이 세상이 끝나면?”
“세상이 왜 끝나?”
시히델이 대답했다.
“누가 죽든 세상은 안 끝나. 인간들이 다 죽어도, 우리가 다 죽어도 세상은 세상이야. 신령님들 말씀 잊었어?”
“전혀. 오히려 너가 잊었지. '별 의미도 없는 행동이 일상이 되면 세상은 끝난다'라고. 기억나?”
”……”
그렇게 말씀하실 때 지금 이런 상황을 두고 하신 거였을까. 시히델은 대답 없이 가만히 누워있었다. 그녀가 더이상 대답이 없자 마르한도 오늘은 여기까지만 잔소리를 하기로 했는지 자신도 그 옆에 누웠고, 단지 “싫어.” 한 마디와 함께 천천히 몸을 늘어뜨리는데,
“어, 호리에르!?”
어디선가 놀라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시작으로, 갑자기 저쪽에서 혼령들이 외치는 기운이 여기까지 흘러왔다.
“호리에르 맞나요!?”
“호리에르다!”
“호리에르가 왔어!”
“응?”
마르한이 벌떡 일어났다. “호리에르?” 시히델 또한 몸을 일으키지는 않았으나 꽤 놀라서 몸 주변의 기운이 요동쳤다.
“살아서 돌아왔구나.”
“가보자!”
마르한이 먼저 혼령들이 있는 쪽으로 빠르게 달려갔고, 시히델이 그 뒤를 따랐다. 북적한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쉬고 있었기에, 둘은 금방 웅성거림이 가득한 곳에 도착했다. 정말로, 한 혼령이 모두의 놀란 시선 속에 웃음을 기운 속에 건네며 인사하고 있었다. “정말로?” 시히델은 대략 수십 년 전처럼 높은 바위와도 같은, 아니 단순한 바위가 아니라 오랜 세월 속에 이끼가 자라고, 바람에 깎여나가면서도 꿈쩍하지 않음과 동시에 자신 밑의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커다란 산 위에 꽂힌 그런 바위와도 같은 혼령을 멍하니 쳐다봤다. 물론 그런 바위는 처음엔 눈에 잘 띄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 번 보면, 단순히 오랜 세월을 지내온 것이 아니라 그만큼 여러 가지를 쌓고,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민하며 더욱 단단해져왔음을 뚜렷하게 알 수 있다.
지금 저 호리에르라는 혼령이 그러했다. 신령님들께서 계셨던 때부터 그는 자신이 받은 가르침을 다시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접어보고 또 펼쳐보기도 하는 이였기에 시히델보다도 더 칭찬을 많이 받았다. 다만 수십년 전, 아까 마르한의 말대로 가장 먼저 싸움에 지친 이들 중 하나였고 곧 세상을 좀 더 돌아다니고 오겠다는 말과 함께 사라졌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멀쩡하게 돌아온 걸 보면 역시 저 혼령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는 시히델이었다.
“아, 시히델과 마르한도 있군.”
혼령들과 하나하나 인사하던 그가 둘을 발견하고 말을 건네오자, 왠지 그동안 무언가 중요한 걸 알아낸 듯 별처럼 밝게 빛나고 있음이 느껴졌다. “오랜만이예요.” 시히델과 마르한도 인사하고는 왠지 전보다는 조금 달라보이는 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일단 좀 쉬고, 내 한 명 한 명 얘기하도록 하지. 이만 다들 할 일 하시게.”
그 말에 혼령들은 하나하나 응하고 그에게서 떨어졌으나, 시히델만은 그를 전부터 잘 봐왔던 탓일까, 그가 조금 달라졌다는 사실을 확실히 눈치채고 있었다. 아니, 마르한도 그런 것 같았다. 이 둘이 움직이지 않고 서있자 호리에르는 다른 혼령들을 다 보내고서 둘을 발견하고는, 역시 가만히 서있는 다른 혼령들, 이제 보니 역시 그 옛날부터 살아남은 이들을 죽 둘러보더니 부드러운 기운을 짧게 흘려보냈다.
“그래, 옛 친구들이 아직 있군. 그럼 자네들부터 같이 얘기를 좀 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