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2
“그래,”
잠시 뒤 나무들에 둘러싸인 작은 풀밭에서, 호리에르는 반가움과 함께 씁쓸한 감정을 드러냈다.
“많이들 살아있고, 많이들 죽었군. 또 많이들 태어났겠지.”
“호리에르,”
분명 떠나기 전과 지금 뭔가 달라진 그를 보며 한 명이 물었다.
“그동안 대체 어디 있던 거예요? 솔직히 지금 말하지만, 당신이 나갈 때 다들 얼마나… 어…”
그 혼령은 말을 잇지 못하고 다른 혼령들을 둘러봤다. 갑자기 날이 갈수록 지쳐가는 모습을 하더니만 결국 여기서 나가고 싶다며 어디론가 사라졌던 그를 이 자리의 모두가 기억할 게 분명했고, 시히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래,” 호리에르도 지금 자신에게 실망한다거나 하는 감정을 전혀 부정하지 않았다. 아니, 지금 그는 그때의 돌발행동에 대해서 자기 스스로에게도 실망했음을 모두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내가 이성을 잃었지. 무슨 어린애도 아니고, 더이상 못 견디겠다고 그렇게 뛰쳐나갔으니 말야. 자네들은 그나마 살아있으니 다행이지만, 그동안 죽은 이들에게는 평생 미안하겠지.”
단순히 말만 그런 게 아니라, 그는 지금 이렇게 얘기하면서 지난 세월을 돌아보는 것 같았다. 그게 느껴졌다고 해야 하나? 이상했다. 어떻게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을 하는지 느껴질 수 있는 걸까? 시히델은 일단 그가 말하는 걸 더 지켜봤다.
“그렇게 나가고서도 사실 이 근처를 한참 맴돌았어. 내가 이게 잘하는 건가 하고 며칠을 계속 고민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아니었더군. 그 부분부터는 내가 그렇게 후회하지는 않는 거지만, 이렇게 계속 몇백 년을 서로 싸우기만 해서는 아무 답도 나오지 않는다는 게 내 생각이었지.”
“으음,”
이에 다른 혼령이 목소리를 냈다.
“그게, 사실 당신이 떠난 이후로 저도 그렇게 생각해서… 어… 지금 싸우는 일엔 나서지 않습니다.”
“맞아요, 저도.”
“저도.”
호리에르를 제외하고 열댓 명 가량 되는 혼령들이 제각기 동의하는 중에 조용한 건 단 둘, 애초부터 싸움을 피했던 마르한과 지금조차도 수많은 인간들에 맞서 죽이는 시히델이었다. 당장 지금으로부터 한 시간쯤 전에도 한바탕 접전이 있었기에, 그녀는 아직 아물지 않고 기운이 주르륵 새어나오는 자신의 상처를 흘끗 보더니 그걸 슬쩍 가렸다. “그렇군.” 하지만 이미 호리에르에게 들킨 뒤였고, 그는 시히델을 보다가 다른 혼령들을 번갈아 보고는 계속했다.
“지금까지 누가 어떤 선택을 했든, 딱히 그렇게 잘못을 따지거나 할 게 아냐. 결국 살려고 싸우는 거지, 저들에게 정말로 원한이 있거나 해서 죽이는 건 아니잖나, 안 그런가?”
”……”
시히델은 호리에르의 말에 이 자리에 있는 모든 혼령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마르한의 잔소리에도 흔들리지 않던 게 조금 불편해지며 “네, 네에,” 조금 기가 죽어서 대답했다. 마르한이 말없이 옆에서 기운을 구부렸다 피는 게 보였다. “그래.” 한편 이런 그녀의 심정을 안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호리에르는 일단 긍정만 하고 말을 이었다.
“어쨌든, 그동안 어딜 갔었냐는 얘기 말이네만, 그렇게 나가서 돌아다녔다고밖엔 할 수 없겠군. 정말 방향도 무엇도 없이 마음이 가는 데로 향했지. 그러면서 우리가 살던 곳 말고 다른 산도 올라봤고, 아마 지금 생각하면 가뭄이 들어서 갈라진 땅 위를 다니기도 했네. 그리고, 아, 그래! 신령님들께서 '바다'에 대해 얘기해주신 거 기억하나? 실제로 봤네. 마치 세상의 끝에 간 것 같았어. 같은 물인데도 냇물이나 호수와는 전혀 다른 그것 앞에 서서 해가 뜨고 지는 걸 볼 때는 정말 그 느낌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거야. 그리고 또…”
자신이 버린 동족들에 대한 사죄와 걱정은 금방 사라지고, 그 수십 년 동안 자신이 어디를 다녔는지 늘어놓는 그는 나이에 맞지 않게 젊은이의 그것에 가까운 열정과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세상 경험을 덜 한 어린아이 혹은 청년이 어딘가를 여행하고 와서 자신의 체험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는 듯한 느낌. 하여간, 시히델은 속으로 웃었다. 생각해 보면 저렇게 열정이 가득한데 이렇게 한 자리에 틀어박혀서 뚜렷한 목적도 없이 싸움만 하느니, 여기서 잠시라도 나가는 게 차라리 그에게는 현명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시히델이 대충 그를 이해할 때 호리에르는 어느새 자신이 물도 풀도 없고 바위만 잔뜩 있다는 어떤 협곡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저어, 호리에르?”
그러다가 한 혼령이 끼어들자 말을 멈춘 호리에르. “죄송하지만,” 그 여자 혼령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희들은 그만뒀지만, 지금도 대부분의 혼령은 계속 인간들과 싸우고 있어요. 아까도 몇 명이 죽었고요. 이런 말씀 드려서 죄송하지만, 적어도 저희들 중 대부분은 당신이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나갔다가 왔으면 뭔가… 이런 상황에 도움이 될 만한 걸 가지고 왔을 거라 기대를 했는데, 아니, 혹시 그게 부담스럽다면 별로 신경쓰지 않으셔도 되지만, 음,”
횡설수설하다가 더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를 조용히 바라본 호리에르. 실은 시히델 또한 그녀의 말에 동의하고 있었다.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밖을 돌아다녔다가 왔으면 뭔가 중요한 조언이라도 해줄 만한 그라고 할까, 평소에도 언제나 고심 끝에 무언가를 결정하고, 거의 신령님들에 버금갈 정도로 좋은 답을 내놓는 그가 아니었던가. 시히델은 수백년 동안 혼령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고, 과연, 호리에르는 그녀와 비슷한 태도로 자신을 바라보는 혼령들을 죽 둘러보더니 곧, 가벼운 미소로 몸의 기운을 은은하게 퍼뜨렸다.
“좋아.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고개를 끄덕인 그는 잠시 둘러보면서 여러 시선 속에 마음을 조금 무겁게 잡았다. 아니, 정말? 시히델은 어리둥절해서 몸을 떨었다. 그의 기운에는 변화가 없는데 속으로 진지해졌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는 걸까? “자네들,” 그리고 이에 대답하듯 호리에르가 말했다.
“지금까지 내가 얘기하는 중에, 무언가 느끼지 않았나?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내가 어떤 기분이라든가, 혹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다든가 하는 느낌 말이네.”
“네?”
혼령들은 서로를 쳐다봤다. 아직 뭔 말인지 모르겠다는 모습에 호리에르가 다시 말했다.
“느낌 말이네, 느낌. 말을 하지 않고서도, 몸을 뻗거나 하지 않고서도 뭔가 알 것 같고, 그런 거 말야.”
“조금 그렇긴 했어요.”
다른 혼령들 대부분이 여전히 말이 없자 먼저 대답하는 시히델. 이에 다시 한 번 모두가 그녀를 쳐다봤다. 이번엔 다들 놀란 시선으로. 그리고 호리에르는 천천히 긍정했다. “그게,” 이야기를 시작하는 늙은 혼령에게 다시 모두가 주목했다.
“나도 어쩌다가 그걸 배웠는지 잘은 이해되지를 않네. 잡힐 듯 하면서도 닿지 않았다고 할까. 어쨌든 내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만일 신령님들께서 살아게셨다면 언젠간 우리에게 저런걸 가르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 적어도 내가 그걸 발견한 곳은 그때까지 여행한 지역과는 완전히 달랐어.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 같았네.”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곳이라면…”
혼령들도 인간들도 계속 서로를 끝장낼 기세로 싸우느라 바쁜 탓에 누구도 여기서 멀리 갈 리 없었다. 일단 혼령 중에는 호리에르라는 예외가 있지만, 분명 인간은 수명이란 것이 있어 수십 년 이상 살기가 힘드니까. 즉, 혼령이나 인간이 저 밖에서 뭘 만들었거나 했을 리가 없다는 의미였고, 시히델의 생각이 여기까지 미쳤을 즈음 호리에르는 “그래,” 다시금 모두를 한 번 둘러보면서 대답했다.
“난 내가 거기서 신령님들이 남기신 무언가를 발견한 게 아닌가 싶네.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여기로 돌아온 거고.”
그의 주위로 둘러앉거나 서있는 혼령들이 서로 수군거렸다. 시히델 또한 신령님들이 무언가를 남겼을지 모른다는 말에 마음 속 어딘가에서 반짝임이 일어, 이미 자신을 쳐다보는 마르한을 마주했다. “사실일까?” 하지만 먼 옛날, 열정적인 학생이었던 모습의 그녀는 지금에 와서 꽤 죽었기에, 약간은 의심해보는 그녀였다. 어쩌면 호리에르가 다른 의도로 저런 말을 했을 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마르한은 아니었다.
“거짓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돌아오진 않았을 거야. 너도 저분을 알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호리에르가 방금 말한 그 느낌이란 것을 혼령들 중에서 거의 뚜렷하게 느낀 모양인 그녀였지만, 아직은 이걸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가 없어서 그런지 다음 순간 호리에르가
“적어도 하루는 쉰 다음에 얘기해주려 했지만, 이제 보니 그냥 빨리 본론을 말하는 게 낫겠군. 난 지금 우리들 중 그곳에 돌아가서 좀더 알아볼 이들을 모으려고 하네. 물론 선택은 자네들 몫이지만, 이건 알아뒀으면 해서… 난 거기 신령님들께서 무엇을 남겨놨든, 분명히 이 지겨운 싸움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해줄 것을 발견할 거라고 생각해.”
다시 한 번 웅성거리는 혼령들. 오랜 세월동안 그를 알아왔기에 그가 지금 진심이라는 말을 알고 있지만, 지금 그가 한 말은 여기 있는 동족들을 버리고 떠나야 한다는 말이다. 분명 모두가 동의하지는 않을 게 분명하기에. 그리고 시히델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비록 오랜 세월, 이젠 무엇 때문에 죽고 죽이는지 그 감을 잃어버릴 정도의 그녀였지만, 그럼에도 혼령들을 두고 떠난다는 건 그녀에게 있어 마치, 마지막 지푸라기를 스스로 놓는 것 같은 그런 행동이었다.
“저는 가지 못하겠어요.”
“시히델,”
일어서서 자리를 피하는 그녀를 마르한이 불렀으나 그녀는 다시 한 번, 부정의 의사만 주위로 퍼뜨린 채 천천히 움직였다. 호리에르도 딱히 그녀를 막을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그저
“다시 말하지만 선택은 자네들 몫이야. 나도 단순히 느낌뿐인 거라 확신은 없어.”
라고 말한 뒤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천천히 기운을 오므릴 뿐이었고, 이런 그를 한 번 돌아본 시히델은 잠시 가만히 서 있다가 곧 다시 자리를 떠났다. 신령님들이 남긴 거라니, 어떤 걸까. 이 싸움에서 벗어나게 해줄 무언가라고? 그 두 가지만 해도 충분히 그녀를 붙잡아둘 것 같았지만, 아니, 전혀 아니었다. 그건 아냐. 시히델은 먼 옛날, 신령들의 가르침을 듣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지금의 자신은 그 애가 아님을 다시 한 번 되새겼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왜 이러는 걸까 하고 그녀의 한 부분이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이제 누군가를 죽인다는 느낌도 없이, 마치 살아가는 것도 아닌 것처럼 인간들을 죽이고 있다.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더이상 싸움에서 무엇도 느끼지 못했다. 그래, 마르한의 말처럼 허망하다고 해야 할까. 이미 그런 곳에서 그녀는 어쩌면 그녀 스스로 점점 견디기 힘들어진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혼령들이 없이 조용한 곳에서 쉬기 시작했고, 그래서 지금 호리에르가 말한 무언가를 가장 뚜렷하게 느끼는 건지도 모른다. 이제 동족들을 지킨다거나 그런 건 그녀에게 핑계일 뿐인 거 아닐까? 이미 더이상 아무 감각도 없는데, 자기가 감각이 있다고 고집부리는 것만 같았다.
시히델은 몸을 떨었다. 자기가 어린애처럼 고집부리고 있다는 생각을 스스로 하다니 불쾌해졌고, 이런 그녀의 정신을 일깨우는 듯, 저쪽에서 갑자기 “아아아!!” 혼령들의 비명이 울려퍼졌다.
“응?”
기운이 파르르 떨리고는 이럴 때마다 항상 그랬듯 그 쪽으로 향하는 그녀. 뒤에서는 “기습인가?” 혼령들이 중얼거리면서 그녀를 따라 달리고 있었다.
그래, 지금은 고민할 때가 아냐. 시히델은 다시 한 번 싸울 준비를 하며 방금 들은 건 일단 지워 버렸다. 속 편한 생각이야, 전부. 속 편한 생각. 이곳에 남아있기 위한 핑계가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마음에 걸리는 게 있든 말든, 저들은 죽고 있다. 그리고 어쨌든 그건 시히델이 전혀 좋아하지 않는 것이었다.
화륵,
촛불이 순간 큰 소리를 내며 타올랐다. “앉거라.” 이미 차분히 앉은 유가 말하자 신령의 방 안을 신기하게 둘러보던 솔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방석 위에 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자 신령이 자신의 기운을 최대한 억눌러, 눈으로 보기엔 거의 사람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서 소년을 조용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름이 '솔'이라고 했느냐?”
“네에.”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나 전혀 사람같지 않고, 혼령이라고 하기엔 단순히 영이 맴도는 것이 아니라 마치 거대한 불덩이 혹은 폭발을 압축해놓은 듯한 위세. 솔은 저절로 그녀 앞에서 움츠러들었다.
“눈을 뜨고 보니 산의 어느 곳에 있고, 거기서 달과 별만 쳐다보다가 내려왔다고 들었다. 정말이냐?”
“네에.”
솔은 기가 눌린 채 고개만 까딱였다. 유는 이런 그를 보며 잠시 말이 없었다. 그녀의 기운은 아지랑이를 이루다가 갑자기 훅 불어 꺼지는가 하면, 마치 안개처럼 그녀의 몸 주변을 떠다니며 시야를 살짝 흐리기도 했다. 솔은 이런 그녀의 몸과 그 몸에서 새어나오고 다시 들어가기를 반복하는 영을 보면서 겁먹은 얼굴이 차츰 호기심으로 물들었다. 이건 뭘까? 딱 봐도 그가 영이라는 것이 뭔지 모른다는걸 드러내는 표정을 본 신령. 곧 유가 고개를 살짝 움직임과 함께 주위의 기운은 멈춰서 그녀의 목소리를 전달해주었다.
“어쨌든 환영한다. 아린과 리니아가 구해줬다고 하지? 그럼 당분간은 그곳에서 지내거라.”
이 말에 다시 유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인 솔. 그러자 신령은 소년에겐 볼 일이 끝난 듯, 옆에서 커다란 영 덩어리와 희미하게 보이는 무언가로 연결된 제이미에게 시선을 돌렸다. 눈을 감고 있는 제이미와 밝게 빛나는 그 덩어리 사이에 무언가가 오가고 있음을 솔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첫 싸움은 교란이 목적이었던 듯 했다. 시히델은 인간들이 이런 시도를 한두번 한 게 아니었기에 잘 알고 있었다.
인간들이 이번엔 아예 숲에 불을 지르기로 작정했었는지 화살에 불을 붙이고 쏴대는가 하면, 아예 칼 대신 횃불만 들고 온 인간들도 있었다. 물론 나무와 풀이 큰 해를 입기 전에 그녀를 비롯한 혼령들이 재빨리 제압했긴 하지만, 그럼에도 몇몇 곳에서 보이는 작은 불꽃이나 불씨들이 죽어간 그들의 미련을 대변하고 있었다.
”……”
피와 불, 그리고 분노가 만들어낸 열기 속에서 시히델은 단 하나, 분노를 더이상 느끼지 못하는 모습으로 조용히 움직였다. 곳곳에 쓰러진 인간들과 그들이 쓰던 무기들, 그리고 불의 흔적. 지금까지 수많은 싸움을 거쳐왔던 이 여성 혼령은 그렇게 누군가가 봤다면 기겁을 하는 곳에서도 아무런 느낌 없이, 아무런 감정도 무엇도 없이 그저 돌바닥 위를 움직이듯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중에 그녀에게 닿는 무언가가 있었다.
“으, 으으,”
“응?”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시선을 돌린 시히델. 보아하니 인간의 목소리였고, 그녀가 다가가자 어느 인간 남성이 나무 밑에 쓰러져, 몸이 살짝 풀에 가려진 채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시히델은 그에게 다가갔다. 흙이 미처 다 빨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그의 앞에는 피가 흥건했고, 그로 인한 고통을 견디지 못하는지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바스락, 시히델이 그의 앞에 다다랐을 즈음 풀이 가벼운 소리와 함께 흔들렸고, 이에 인간은 눈을 감은 채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구… 사람이야?”
“아니.”
인간들끼리는 자신들을 사람이라 부르기도 하는 것을 시히델은 알고 있었다. 어쨌든 그녀가 부정하자 그 남자는
“그럼 혼령이군. 우리가 진 건가.”
하고 중얼거리며 그로 인한 절망감 때문인지 숨소리가 더 힘겨워졌다. 아니면 그냥 몸에 힘이 빠져가기 때문일까. 시히델은 그의 상처를 보았다.
“상처도 그렇고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 넌 곧 죽을 거야.”
있는 그대로 말하자 인간은 대답 대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뱉었다. 시히델은 그를 조용히 내려다봤다. 지금 이 인간을 건드릴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죽을 거고, 지금 저런 상태로 소리를 지를 힘도 없을 게 뻔하니까. 그리고 이를 아는 건지, 그 인간 또한 자신을 왜 바로 죽이지 않냐는 물음따위 묻지 않았다. 다만 그는 다시 입을 열었고, 시히델은 그가 하는 말을 들었다.
“너가 누구든 이젠 상관없어. 하나 물는다. 이번이 네 처음 싸움이냐?”
“아니.”
시히델이 대답하자 남자는 숨을 다시 크게 들이마시더니 말 마디 마디에 온 힘을 불어넣었다. 약해보이지 않으려는 걸까.
“그래. 잘 됐구나. 만일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다면…”
잠시 무언가를 꿀꺽 삼키는 인간. 시히델은 그게 피겠거니 짐작했다. 하지만 이 인간, 그런대로 특이하다. 보통 이렇게 죽어가는 인간들은 자기 가족에 대해 얘기하거나 그러지 않았던가? 그런데 보아하니 다른 얘기를 하려는 것 같은 그였다.
“나도 처음이 아냐. 지금까지 수도 없이 혼령들을 죽이러 왔고, 그만큼 많이 죽였고… 후우, 그리고 또 여기 왔어. 그래야 한다고 배워서. 혼령들은 나쁘다고. 먼 옛날에 신령님들이 살았는데 혼령들 때문에 죽고, 지금은 우리도 죽이려 한다고. 후우, 후, 난 그래서 당연하다고 생각했어. 당연하다고…”
“훌륭하게도 가르쳤구나.”
시히델이 한 마디 하자 그 인간은 빈정거리는걸 아는지 힘이 다해가는 상태에서도 작게 웃었다. “아니,” 하지만 이어지는 그의 말은,
“지금 보면, 다 의미없어. 그래서 뭐야? 서로 죽고, 죽이는 데나 가서 싸우고… 후우, 난 처음엔, 내가 무슨 사람들을 위한 영웅인가 그런 생각도 했어… 함부로 나서지 않거든, 사람들은. 하지만, 하지만,”
잠시 말을 멈추고는 고개를 살짝 숙이는 인간. 무언가를 참으려는 듯 그의 몸이 살짝 떨렸다.
“계속 죽이다 보면, 그런 거 없어. 죽고 죽이는 곳에서… 영웅도 악당도 없는 게 전쟁이야. 지금 돌아보면, 난 그냥 죽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죽이고 있었어. 지금 돌아보면, 지금 보면, 이게 뭐야? 누군가를 죽이는 게 당연하다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거지.”
별 느낌 없이 얘기하는 그녀였다. 그런데 다음 순간,
“아니!!”
시히델의 말이 끝나기 직전에 그 인간이 갑자기 무슨 발작이라도 일으키듯, 크게 소리를 질렀다. 놀란 시히델은 일단 그 소리를 누가 들었나 주위를 둘러보기부터 했고, 그 뒤 갑자기 무서운 기세로 고함친 인간을 다시 내려다보자 그는 이를 악문 채 가쁜 숨을 반복하고 있었다. 안그래도 몸이 망가졌는데 소리를 지른 탓에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모양이었다.
“잘 봐. 서로를 죽여서 먹는 것도 아냐. 서로 말을 못하는 것도 아냐. 그런데 죽이는 게 당연해? 아냐. 죽이는 건 당연한 게 아냐. 죽이는 건…”
더이상 말을 하기 힘든지 그의 숨이 빨라졌다. 시히델은 어느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상처를 덮어주려 하고 있었다. “말해.” 그녀가 재촉하자 그 인간은 혼령의 기운에서 무엇을 느끼는지는 몰라도 그나마 아주 약간은 나아졌는지 입을 열었다.
“지금 내 죽음을 걸고 장담해. 인간이든 혼령이든, 어느 쪽도 다 죽을 일 없어. 어쨌든 살아갈 거야… 다만, 다만 서로 죽고 죽이는 게 그 살아가는 방식이 된 거라고… 그래서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거야. 미친 방식이야. 미친 방식에 미친 일상. 언제든, 언제든 그 방식은 달라질 수 있어. 사는 방식은, 달라져. 난 그걸 못하지만, 무언가가 있다면… 바꿀 무언가가 있다면…”
인간은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시히델이 그의 상처를 막아주고 있는데도, 아니 더이상 그 상처에서는 피도 잘 나오지 않았다. 새어나올 피조차 거의 없으니까. “무언가가…” 점점 숨소리조차 작아가는 그의 입에서 마지막으로 한 마디가 이슬처럼 떨어질 때, 시히델은 그를 놔주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왜 인간의 상처를 막아주고 있었지? 분명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되었음을 알았을 때, 이미 그 인간은 완전히 죽은 뒤였다.
”……”
시히델은 죽은 인간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래도 자기 할 말은 거의 다 하고 죽었다는 듯, 그렇게 기를 쓰다 죽었음에도 그 인간은 전혀 고통스런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