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5
그날, 아린의 집에는 한 명이 며칠간 나감과 동시에 적어도 당분간은 새로운 가족이 될 사람이 늘었다.
“소야, 소야,”
”'솔'이라니까.”
“쨌든야, 이거 먹으야. 야, 이거도 먹고, 으야, 으야, 그래 이거도 먹어보이.”
아레인과 제이미는 평소 밥상에서라면 거의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던 아린이 자기 밥상에 (물론 어디까지나 평소보다는) 덜 집중하면서, 중간중간 이것도 먹어보고 저것도 먹어보라는 등, 애가 좀 느리다 싶으면 아예 자기가 젓가락으로 집어서 먹여주기까지 하는 모습을 빤히 쳐다봤다. “우웁,” 소야, 아니 솔은–제이미가 듣기에 정확히는 '솔야'와 '소야'의 중간쯤 되는 발음으로 부르고 있었다–아린이 자꾸 이것저것 먹여대자 일단 배를 채워주는데 고마워하면서도 약간 먹는 걸 힘겨워하고, 또 자신을 이렇게 챙겨준다는 것에 대해 역시 감사하면서도 또 부담스러워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 잠깐, 나 이제 그만…”
“야?”
그렇게 계속 먹고 먹여주고 하는 일이 계속되다가 그만 솔이 얼굴이 빨개지면서까지 힘들어하자, 결국 아린은 손을 멈췄다.
“으야, 남자애가 뭔 밥도 제대로 못 먹고 그리야? 너 대체 어디서 살다 온 야?”
“말했잖아. 저 산 어디라고.”
제이미는 먹으면서 목으로 올라오는 웃음을 참았다. 한편 이런 제이미의 옆에서는 서아가 역시 아린과 솔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곧 자기 밥을 얌전하게 먹다 또 둘을 쳐다보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아레인의 옆에서는 어느 아주머니, 얼굴이며 느낌이며 서아와 많이 비슷한 여자가 앉아서 자신의 딸과 비슷한 시선으로 소년과 소녀를 쳐다봤다. “그래,” 그녀가 말했다.
“구해줬다고?”
“그래.”
아레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번엔 인간계로 빠져서 엔시나를 데려오더니, 이젠 산에 올라갔다 이 아이를 데려온 거야. 정말 쟤는 참… 하, 진짜, 내 딸이지만 도대체 정체를 모르겠다니까.”
“우야!”
아린이 입안 가득 밥과 반찬을 쑤셔 넣고서 쏘아붙였다.
“어무얘는 내가 좋은 일 하는데도 그렇게 불만– 으얏!”
결국 엄마에게 한 번 쥐어박히고서 밥 먹는 데나 집중하는 딸내미. 제이미는 푸핫 웃음을 터뜨렸고, 서아도 숨죽여서 쿡쿡 웃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서아의 어머니가 제이미를 보면서 “저기,” 친근한 웃음과 함께 말을 꺼냈다.
“제이미라고 했죠? 내가 사실 어렸을 때부터 인간계가 궁금하긴 했는데, 어디 거기서는 잘 살아요, 사람들이?”
“네? 아, 네에… 뭐,”
어색하게 웃어 보이는 제이미였다. “그냥 살죠.” 그러자 아주머니의 얼굴이 살짝 빛났다.
“저쪽에 적이 있다는 얘기만 없었다면 거기 놀러 갈 수도 있었는데, 안 그래? (그녀는 아레인을 쳐다봤다) 왜 인간계엔 사람들만 있다는 거 아냐. 분명 여기 남정네들보다 훨씬 더–”
“엄마!”
이번엔 서아가 자기 엄마에게 뭐라고 하자, 아주머니는 손을 내젓고는 웃음과 함께 밥을 먹었다. 아레인은 이런 아주머니가 대충 이해되면서도 한심하다는 듯, 두 가지가 섞인 얼굴을 했고, 이를 본 제이미는 미소를 지으면서도 왠지 몇 년 뒤엔 자기도 저렇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살짝 오싹해졌다. 한편 솔은 밥 먹은 자리를 얌전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잘 먹었습니다.”
그리고는 일어나서 자기 그릇을 가져가려는 순간 아린이 “으야,” 벌떡 일어나 그가 빈 그릇을 가져가는 것까지 도와주었다. “무슨,” 아린의 뒷모습이 조금 멀어지자 제이미가 중얼거렸다.
“자기가 구해왔다고 완전히, 애를 동생인지 애완동물인지 뭔지 아주 정성을 들여서 보살피네.”
이 말에 나머지 셋이 웃었다. 그리고는 서아의 어머니가 다시 아레인에게 묻는 말.
“그러고 보니, 집회에 이진이 갔다며? 어쩐지 애가 없다 했더니 정말이네. 너가 가라고 했어?”
“아니, 자기가 가겠대.”
지금 시간은 어느새 늦은 저녁이었던 것이다. 슬슬 여기저기 떠다니는 영 덩어리들이 달빛을 여러 개의 거울처럼 주고받아 이 안에까지 비추는 그런 시간. 물론 그 영 덩어리 자체의 밝기도 있었지만, 그것들이 이렇게 협조해주는 덕분에 집안이 정말 전등을 켜놓은 것처럼 밝았다. 그것도 기계의 그 불빛과는 다른, 향을 피운 것처럼 은은하면서도 곱게 퍼지는 그런 빛. 그리고 이런 빛 속에서 아레인은 약간 걱정이 섞이면서도 아들에 대한 믿음이 담긴 얼굴로 끄덕였다.
“애도 어른이야. 혼자 가는 것도 아닌데 별일 없겠지, 뭐. 게다가 말하는 거 보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쪽에 친구라도 사귄 모양이야. 누구 만날 일이 있다던데.”
“망령들 쪽에 친구가 있다고?”
서아 아주머니의 얼굴이 살짝 뒤틀렸다.
“애가 원래 착하긴 했지만 대단하네. 망령들이랑도 친하게 지내고.”
“뭐 어때.”
한 번 으쓱하고 남은 찻잔을 비우는 아레인.
“거기도 누구 사는 동네인데 알아서 잘 지내겠지. 그리고 전에도 말했지만 딱히 나쁜 건 아니잖아?”
“그래, 뭐, 그거야 그렇지.”
그리고는 두 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 상을 정리하기 시작하자, 서아가 항상 그랬다는 듯이 따라서 어른을 도왔다. 제이미는 자기 그릇을 챙겨서 부엌으로 향했고, 그렇게 집의 뒤편으로 향하자 웬걸, 갑자기 비눗방울 하나가 열린 문으로 두둥실 떠왔다. 제이미는 멈칫했다가 다시 움직여서 부엌으로 들어갔고, 곧 그녀의 눈엔, 아니, 이것들이 무슨 어린애도 아니고, 그 사이에 완전히 물 범벅을 만들어 놓고는 비눗방울을 불면서 놀고 있었다.
“후, 후욱, 훅”
다만 솔은 이게 대체 어떻게 만드는 건지, 얼굴이 빨개지도록 바람만 불어대지만 손가락 사이로 방울은 나와봤자 콩알만 한 것만 이따금씩 나오는 정도였다. 반면 아린은 마치 꽃냄새를 맡듯 가볍게 불어,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저마다 다른 크기의 방울들이 밀려 나와 여기저기 떠다녔다. 제이미는 이런 둘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솔이 그녀를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 곧 아린을 쿡쿡 찌를 때 이 난장판의 주동자를 보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야?” 아린은 동글동글한 눈으로 언니얘를 바라봤다가 곧 그녀의 손에 들린 밥그릇을 보고는,
“다 먹었으얘? 그럼 말을 하야.”
한 마디 하더니 쭈그린 자리에서 펄쩍 뛰어 부엌의 한가운데에 섰다. “나오얘.” 솔에게 손짓을 하며 말하자 소년은 그녀를 멀뚱히 쳐다보며 제이미 쪽으로 느릿느릿, 움직였고, 이어서 그녀가 마치 몸을 풀듯 두 손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혹시 영으로 저걸 다 치우려는 건 아니겠지.]
엔시나가 중얼거리는 말에 제이미는 “뭐?” 무슨 뜻인지 몰라 멍하니 소녀를 쳐다보는데, 일순간 소녀가 갑자기 두 손과 함께 몸을 거의 바닥에 닿을 정도로 낮추더니, 갑자기 펄쩍 뛰어오르면서 “흐야아!” 손을 위로 쳐올리듯 뻗자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바닥에 흥건한 물이며 거품이며 모두 그녀를 따라 뛰어올랐다. “어어?” 제이미는 무슨 생선도 아니고 정말 저 난장판이 일시에 솟아오르는 광경을 놀라서 보는데, 그것이 곧 공중에 모이자마자 아린은 곧바로 두 팔을 다시 아래로 휙 내리며 “얏!” 짧은 기합을 넣었다. 그러자 이번엔 제이미가 보기에도 분명히 무언가가 일어났다고 느낄 정도로 어떤 기운이 작지만 강한 바람처럼 내리쳤고, 이에 따라 물과 거품들이 모두 저 밑의 작은 배수로를 향해 날아가, 곧 집 밖으로 쓸려나갔다.
“저, 저거,”
제이미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아린을 쳐다봤다.
“저런 것도 가능해? 그 영인지 뭔지…”
[응.]
엔시나가 끄덕이는 게 느껴졌다.
[그런데 저렇게 능숙한 걸 보면, 아마 지금까지 저런 식으로 많이 했을 거야.]
“흐야,”
작은 물기까지 싹 빠져나간 부엌 안에서 아린이 한숨과 함께 축 처졌다.
“역시 청소는 힘드얘. 그래도 이럼 적어도 어무얘한테 혼나진 않야.”
“그거 어떻게 한 거야?”
솔 또한 완전히 멍한 얼굴로 묻자 아린은 헤헤 웃더니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게, 지금까지 부엌에서 놀다 많이 혼났그이, 어째 정리하다 보니 이렇게 하게돼얘. 오라부이가 도와주긴 했으야.”
[아아, 그랬구나. 애초에 성인도 아닌데 저런 식으로 영을 다룰 리 없어.]
“그게 무슨 말이야?”
아직 속으로 말하는데 익숙하지 않은 제이미가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엔시나가 이럴 때마다 언제나 그러했듯 조용히 시를 읊는 것처럼 설명했다.
[아린은 방금 손에 영을 주입하거나 하지 않고, 그 주변에 영을 둘렀어. 중간에 조금 뭉치긴 했지만 어쨌든 저렇게 바깥에서만 영을 다루는 건 이곳에선 전혀 가르칠 리가 없으니까. 그건 지금 망령이라 불리는 저들이 주로 쓰는 방식이거든.]
“어어?”
[그러니까, 이진이 그쪽 혼령들과 친하게 지냈다고 얘기가 나왔지? 그러면서 저들의 방식을 조금 익힌 것 같아. 그걸 아린에게 청소를 도와준다고 조금 가르친 거고.]
그리고 여전히 뭐가 뭔 소린지 얼굴만 찡그린 동반자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곧 가볍게 고개를 젓는 혼령이었다.
[나중에 처음부터 말해줄게. 이야기가 조금 길어]
“으응.”
한편 소년은 자신을 구해줬던 소녀가 그날 그 거대한 뱀과 어떻게 싸웠는지가 떠올랐다. 처음 보긴 했지만 분명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하는 게 딱 봐도 불가능한 그것을, 마치 그냥 실제 크기의 뱀 다루듯 치고 때리고 했던 모습. “저기,” 소년은 고개가 살짝 기울어지며 물었다.
“그 치운 거, 혹시 어제 그거랑 비슷한 거야?”
“야? 으야!”
아린이 고개를 끄덕끄덕, 웃으면서 대답했다.
“영을 쓰면 되이. 직접 하는 것보다 훠얼씬 편하야.”
“영?”
소년이 영 모른다는 얼굴을 하자 아린은 그를 빤히 쳐다봤고, 그러자 리니아가
[말했잖아. 저 아이, 혼령이 없는 것 같다고.]
한마디 하자 “으야,”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에, 그럼 내가 나중에 더 보여주얘! 영으로 정말 무든지 할 수 있으야! 하지만 집에서 하긴 좀 그러얘…”
그리고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아린은 가만히, 자기가 솔에게 영이란 것의 힘에 대해 마음 놓고 '보여줄' 수 있는 곳이 있긴 할까 하는, 정작 리니아가 보기엔 영 쓸데없는 고민이나 하고 있다가 그냥 어떻게 되겠지 하는 식으로 으쓱한 그녀.
“쨌든얘, 내일 보여줄그얘! 약속!”
말을 마치며 다짜고짜 새끼손가락을 내미는 아린 앞에서 흠칫한 솔은 이번엔 뭔가 하고 잠시 멍하니 그 손가락만 쳐다보다가, 곧 뭔지 알겠다는 듯, 자신의 약지를 구부정하게 펴서 내밀었다. 이를 보며 제이미는 그만 웃음을 터뜨렸고, 아린은 “으야야,” 역시 재밌어하며 웃더니 곧 그의 손을 잡고는 약지를 접음과 함께 마지막 손가락을 펴줬다. “약속!” 곧 두 손가락을 마주 건 그녀가 웃자 솔도 “어, 응.” 마지못해하는 식으로 끄덕이며, 그래도 조금은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