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6
그날 늦은 밤, 산 아래 마을의 가장 높은 곳에서 유는 조용히 고개를 올린 채 서 있었다. 작은 소녀의 모습으로, 이어서 젊은 아가씨의 모습과 나이가 지긋한 여인의 모습으로, 그렇게 만년설과도 같이 조용한 연못의 수면을 딛고 선 그녀의 모습은 마치, 세상에서 가장 높지는 않지만 가장 외진 곳에 솟아있고, 가장 안개가 끼어 있고, 동시에 물이 가장 조용히 흐르는 산. 그 산의 어딘가에 한 마리의 용이 조용히 앉아 있다면 바로 이런 모습일 것이다.
”……”
자신의 몸에 흐르는 기운과 함께 하얗고 은빛으로, 그리고 달빛이 섞인 제3의 빛을 두른 신령은 아무 말도 없이, 마치 이 자리와 함께 한 장의 그림이 되는 것처럼 오직 저 달과 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평범한 인간이라면 감지하기도 힘들 법한 눈을 이따금씩 깜박였고, 그러다가 아주 적막한 이 자리에 바람이라도 침입해 올 때쯤이면, 흩날리는 옷깃…처럼 보이는 기운과 함께 불만 없이 눈을 감았다.
신령도 수면이 필요하다. 인간이나 혼령처럼. 하지만 그건 신령 또한 가끔은 잠을 못 자는 날이 있다는 의미였고, 유에게 있어 바로 오늘이 그러했다. 하지만 그녀는 가끔씩 어린아이의 모습에 갇힐지언정, 진짜로 어린아이는 아니었다. 투정도 한탄도 없이, 이렇게 조용히 물 위에 서 있는 것만이 그녀가 가끔 불편함이 있을 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사실 인간의 형태로 자신을 다스리고도 겉모습의 나이가 계속 바뀌는 것부터 그녀는–
바스락,
갑자기 어떤 소리가 들리자 서 있는 자세도, 높이 든 고개도 유지한 채 시선만 살짝 내려가는 유. 정확히는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니었다. 소리가 기운을 타고 넘어왔다. 신령은 주위를 둘러보거나 하지 않았다. 어차피 앞으로 어떻게 될지 그녀는 오직 자신의 느낌만으로 뻔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잠시 뒤, 저쪽에서 무언가 공 같은 것이 굴러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저 앞쪽, 휑하지만 그나마 나무가 조금 자라고 있는 자리에서 사령 한 마리가 튀어나와 가만히 있는 신령을 향해 펄쩍 뛰었다. 하지만 마치 거대한 나비가 날개를 피듯, 연못 위에 떡하니 서 있는 유의 앞에 그것은 기분 나쁜 괴물이 아닌, 그냥 검은 반점 정도로 그 기운부터 축소되었고, 이내 그것이 유에게 닿지도 못하고 연못에 빠지려 하는 순간, 그것은 갑자기 사납게 요동쳤다. 아예 물에까지 닿지도 못한 채 그대로 공중에 떠 있는 사령. 연못은 여전히 잠잠했고, 그 위에서 육안으로는 알 수 없는 힘에 붙잡혀 발버둥치지도 못하는 그 사령을 보며, 신령은 속삭이듯 낮은 소리와 기운으로 고했다.
“수면을 해치지 마.”
짧고 나지막한 명령과 함께, 유는 한 팔–팔이라고 할 만한 것–을 천천히 뒤로 빼며 침묵을 지키던 공기를 저었다. 그것은 마치 사형을 선고받은 죄수처럼 완전히 기운을 잃은 채 그녀의 옆으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둥둥 떠가더니, 그 사형수가 신령의 뒤를 지나치고 조금 더 갔을 즈음 갑자기, 어느새 어른의 모습을 하고 있는 유의 뒤가 밝아졌다. 작지만 아주 밝은 빛과 기운이 아주 잠깐동안, 그 사령이 유의 손짓에 따라 공중에서 날아가는 자리와 함께했고, 잠시 뒤 점점 잦아들기 시작하더니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빛이 비로소 꺼진 순간에 이 신령의 등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유는 다시 눈을 감았다. 다시 한 번, 작은 바람이 불어와 그녀와 그녀가 있는 자리를 두드렸다.
“손 똑바로 안 들어!?”
“흐, 흐야…”
다음 날 아침, 서릿눈 소속의 어느 집 거실 한구석에서, 웬 아가씨가 무릎을 꿇고서 양손을 들고 있다. 뭐, 어쨌든 나이는 열아홉의 아가씨가 맞지만, 아침부터 이렇게 벌을 서는 아가씨… 혹은 소녀의 이름은 아린.
“용서해 주얘. 제는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으야.”
“시끄러! 너 때문에 또 저 아랫집만 물 샐 뻔한 거 알아!?”
지금으로부터 불과 며칠 전–말이 며칠 전이지 굉장히 멀게 느껴지는 시간이지만–있었던 일로 인해 집에 가족이 한 명 늘었고, 바로 그제의 또 다른 일 때문에 다시 한 명이 더 늘어난 상황에서, 그 둘에게 뭔가 구경거리를 보여줬다가 오늘 아침에 들켜서 이렇게 혼나는 그녀였다. 한편 그녀가 어릴 때 동반자로 선택하고 이 모든 철없는 고생을 함께한 혼령, 리니아는 이렇게 곧 성인식까지 치를 예정인 아린이 어린애처럼 벌을 설 동안, 그 안에서 쉴 새 없이 투덜거렸다.
[그러게 내가 몇 번을 말했어? 그냥 정직하게 알아서 걸레라도 잡고 있었으면 이렇게 혼나진 않았을 거 아냐. 애초에 너가 힘 조절을 잘할 리가 없다는 걸 내가 몰라서 그랬는 줄 알아? 저 애한테 뭐 재밌는 거 보여주겠다고 했을 때부터 난 너가 사고 칠 거 알고 있었단 말야, 응? 넌 정말 네 오빠의 절반도 따라가지 못할 거야. 아, 그러니까 지금 손이라도 좀 똑바로 들고 있으란 말야. 어떻게 벌받는 중에도 잔머리를 굴려? 너 올해 열아홉 맞아? 지금까지 별별 동반자를 다 거쳐왔지만 너 같은 애는 도대체 앞을 좀 내다볼 생각이 필요하다고, 좀! 하, 차라리 내 잘못이다. 너가 어제 그럴 때 말렸어야 했는데. 영만 잘 조절했어도 그런 물난리가 나진 않았을 텐데… 손 똑바로 들라고! 배고프긴 뭐가 배고파!]
“으야,”
밖와 안 두 쪽에서 동시에 잔소리를 늘어놓는 탓에 아린은 어느새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한편 아레인은,
“당신도 조용히 있어요, 리니아! 왜 애가 저럴 때 가만 놔뒀어요? 결국 둘이 똑같잖아!”
[으흠,]
헛기침과 함께 조용해진 혼령. 뭐라고 하는지 잘은 모르지만 뭐라고 막 늘어놓는 게 느껴진 탓에, 그리고 지금까지 아린이 이렇게 벌을 설 때 자신도 그 팔이 아프고 무릎이 저리는 게 느껴져서 투덜댔는지라 금방 알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그녀가 무언가를 '보여준다고' 그 물난리를 일으킨 중 관람했던 시청자 둘은 저쪽에서 멀쩡히, 다만 아린에 대한 미안함과 화난 아레인에 대한 불안이 섞인 얼굴로 조용히 서 있었다. 물론 그 중 제이미는 뭐 어차피 저렇게 크는 거지–나이상으로는 이미 다 컸지만–하는 식으로 팔짱을 끼고 있었지만, 그 옆의 소년은 완전히 움츠러든 채 옴짝달싹 못하고 있었다. 이따금씩 입은 우물거리는걸 보니 뭔가 말하고 싶긴 한데 못하고 있는 모양. 그런 소년의 모습을 보던 제이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제 그정도면 됐다고 생각해요, 아주머니. 어차피 애가 이렇게 혼난다고 또 사고 안 칠 애도 아닌 것 같은데.”
“네에, 그 말이 맞긴 해요.”
아레인 역시 푹 꺼진 한숨과 함께 대답하고는, 이어서 아린의 머리를 한 번 세게 쥐어박고 “으야야!” 아침밥을 만들러 갔다. 제이미는 그래도 최소한 아린보다는 어른스러운(?) 자신을 인식하며 슬슬 식사준비도 자기가 도와야겠단 생각에 부엌으로 따라 들어갔고, 아린은 무릎을 꿇은 채 다리만 쭉 뻗어 주저앉았다. “미안.” 솔이 조심스럽게 걸어와서는 아린의 옆에 앉았다.
“괜히 나 때문에 그랬다가, 그, 미안…”
“야, 야, 괜찮얘.”
하지만 아린은 이런 일이 한두 번이냐는 얼굴로 웃으며 다리를 주물렀고, 솔은 그 옆에 가만히 앉은 채 식사를 기다렸다.
그리고 정말 아린의 말대로 잠시 뒤 넷은 언제 누가 사고치고 혼났냐는 듯 평소와 같은 얼굴로 밥을 먹었고, 그러면서 중간에 아레인이 제이미에게 물었다.
“생각해 보니, 인간계에서는 그, '국가'라는 곳마다 주로 먹는 게 다르다던데, 여기 음식은 입에 맞아요?”
“네에, 뭐,”
어차피 제이미는 딱히 좋아하는 음식도 싫어하는 음식도 없었다.
“다르다고 해봐야 사람 먹는 게 다 거기서 거기잖아요. 맛있고 배만 차면 됐지.”
이에 기분 좋은 미소를 짓는 아레인. “맞으야.” 옆에서 아린도 음식을 마구잡이로 빨아들이다 한마디 하고는 다시 허겁지겁 먹었다. 그러다가 역시 오늘도 중간에 솔에게 몇 가지 반찬을 건네는 등, 그를 챙겨주는 모습을 제이미가 재미있게 지켜볼 때, 마당 쪽에서 무언가 소리가 들려왔다. “왔네.” 제이미가 투덜거렸다.
“어째 맨날 밥 먹을 때 불러가지고, 것도 저거에 그냥 몇 마디 담아서 오면–”
“아, 식사 중이군.”
아니, 이번엔 기운이고 뭐고 없이 사람 목소리만 들리자 제이미는 말을 뚝 끊어 버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인지 오늘은 란이 직접 찾아왔다. 제이미는 입에 음식을 문 채 눈을 깜박였다. 웬일이래? 갑자기 제 발로 납시고. 그녀가 멀뚱히 쳐다보는 사이 아레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은 아침이예요, 신관님. 오늘은 직접 찾아오셨네요?”
“안녕하십니까, 아레인. 식사 중에 갑자기 와서 죄송합니다.”
그래도 어른에게는 깍듯하게 대하는 란이었고, 그는 나머지 세 명의 식구들을 둘러본 뒤 용무를 말했다.
“제이미, 너는 어제와 같아. 밥 먹고 바로 신령님께 가면 돼. 그리고, 솔이라고 했지?”
“네에.”
소년은 자신을 쳐다보는 젊지만 엄한 신관 앞에서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이에 란과 마르한은 그를 가만히 쳐다본 뒤 입을 열었다.
“너는 일단 나를 따라와라. 가서 얘기할 게 있으니까.”
식구들의 표정이 제각기 바뀌었다. 제이미는 얘가 애한테 뭔 소리를 늘어놓으려는 걸까 하는 생각으로 그를 빤히 쳐다봤고, 아린과 솔은 비록 그 차이가 있었지만 호기심이 수면 위로 조금 올랐다. 아레인은 다른 건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아린이 어제 이 아이를 마중 나간 것처럼 이번에도 따라갈 것 같다 싶은 생각을 하며, 일단 신관에게 허리를 살짝 숙였다.
“수고 많으세요.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네에. 식사 맛있게 드십시오.”
란 또한 허리를 숙인 뒤 나갔고, 그가 마당을 나서는 사이 솔은 남은 밥을 얼른 먹어치우고는, “저어,” 식구들을 둘러보면서 소심하게 인사를 했다.
“갈게요, 그럼.”
그리고 아린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얼른 신관의 뒤를 밟는 솔. 아린과 제이미는 소년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각자 다른 생각을 하며 밥을 마저 먹어치웠다.
“아린, 오늘은 너가 같이 정리할 수 있지? 언니는 먼저 갔다오라 그러게.”
“야?”
“네? 아니, 전 괜찮…”
제이미는 대답하다가 아레인의 얼굴을 보고는, 뭐 애를 또 혼내려고 저러나, 아니면 그냥 둘이 얘기할 게 있는 건가 하는 식으로 대충 눈치를 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먼저 다녀올게요. 아린은 수고해.”
“으야, 잠깐얘,”
아린이 대답도 채 하기 전에 얼른 마당을 나섰다. 그리고 아린은 멍하니 둘이 나간 자리를 바라봤고, 이런 그녀에게 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릇을 치우며 어서 정리하자고 재촉했다. 아린은 이 말에도 좀 더 밖을 바라보더니, 곧 어깨를 으쓱하고는 상을 정리했다. 물론 눈치를 보면서 대충 하는 그녀였지만.
란은 맨 아래의 들판까지 산길을 내려왔다. 솔이 종종걸음으로 그 뒤를 따랐고, 그러다가 먼저 가던 이가 멈출 즈음 뒤에 있던 이도 멈췄다. 신관이 등을 돌려 자신을 가만히 쳐다보는 소년을 봤을 때, 그 얼굴은 제법 부드러워져 있었다.
“솔이라고 했지요. 소개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신관이자 계승자인 혼령 마르한입니다. 아까 전까지 말하던 제 동반자는 란이고요.”
“네, 네에.”
갑자기 자기소개를 하자 솔이 약간 당황한 듯 움츠러들었고, 이에 마르한이 가볍게 미소지었다.
“별 걱정이나 그런 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저, 보아하니 혼령이 없는 사람인 것 같은데, 동반자 없는 혼령이라면 모를까, 그런 경우가 근래엔 처음이라서 말이죠. 산에서 오셨다고 했나요?”
“네에. 저기 위예요.”
솔의 대답에 마르한은 고개를 올려 산을 둘러보았다. 높은 나무들이 이루는 부드럽고 딱딱한 선과 그 위로 날아다니는 새 몇 마리. 하지만 어디를 봐도 그 중간에 어딘가 빈 공간이 있으리라고는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그저 나무와 바위 뿐인 것만 눈에 들어온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소년을 바라보며 말했다.
“가깝진 않은 것 같군요… 혹시 지금 그곳으로 안내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또다시 당황하는 소년 “네?” 그리고는 자신도 뒤돌아 산을 올려다보며, 시선을 천천히 돌리더니 곧 머리를 긁적이는 그였다.
“어어, 음,”
계속 웅얼거리면서 어깨가 늘어지던 소년은 약간 고개를 갸웃하더니, 잠시 뒤 비로소 한 발을 내딛었고, 그렇게 시작된 소년의 걸음을 마르한은 조용히 지켜보다가 곧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