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화와 비형
신라 제 25대 임금인 진지왕은 굉장한 호색가였다.
어느 때 왕은 사량부의 서녀이며 도화랑이라는 여성이 정말로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녀를 궁중으로 들여, 자신의 의지로 따르게 하고자 했다.
그랬더니 그녀는 절개는 여자의 보물이며, 이 보물은 어떠한 권세로도 빼앗을 수 없다. 자신은 지금 남편이 있는 몸이니, 어의에 따를 수 없다고 거절했다.
왕은 그녀를 죽음으로 겁박했지만 따르지 않았다. 남편이 없으면 따를 것이냐. 그때는 따르겠습니다. 하는 대화 끝에 그녀는 아무 일 없이 풀려났다.
그 해에 왕은 정란으로 폐위되어, 얼마 뒤 죽었다.
2년 뒤, 그녀의 남편 또한 우연히 병을 얻어 죽게 되었다.
남편이 죽고 100일째 되는 날 밤, 도화에게 진지왕의 혼이 찾아왔다.
왕은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도화의 방에 들어와서 지금은 남편이 없으니까 이전의 약속대로 따르라며 다가왔다.
도화는 이 일을 부모님과 상의했는데, 임금의 명이니 피해선 안 된다 하였다.
그리하여 도화는 왕과 7일간 인연을 맺었다.
그동안 계속 오색구름이 지붕 위에 드리우고 방 안에 그윽한 향기가 가득했지만, 7일이 지나자 왕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도화는 그 뒤로 몸을 조심히 다루다, 달이 찼을 때 천지가 진동하는 상서로운 일과 함께 남자아이를 낳았다.
그 이름을 비형이라 한다.
그 때의 왕인 진평대왕은 이 일을 기이하게 생각하고 비형을 궐안에 들였다.
비형이 15세가 되었을 때 집사(執事) 관직을 내렸지만, 비형은 매일 밤 궁을 빠져나와 성의 서쪽으로 나가서 귀신들의 우두머리가 되어서 놀다가, 절들의 종이 새벽을 알릴 때 귀신들이 흩어짐과 함께 비형도 궐 안으로 돌아오길 되풀이했다.
왕은 그 일을 알고는 비형이 귀신들을 거느리는 힘이 있으니 귀신들을 데리고 신원사의 북쪽 도랑에 다리를 지으라 명했다.
비형은 그 말에 따라 귀신들을 부려 돌을 옮기고 닦아, 하룻밤만에 커다란 돌다리를 만들었다.
(이 다리는 그 뒤로 귀신다리라 불리게 되었으며, 지금도 경주의 사적에 포함되어 있다.)
진평왕은 그 공사에 감탄해, 귀신들 중에는 사람이 되어 조정의 일을 잘 보좌할 수 있는 자도 있을테니 혹시 그 중에 있다면 불러들이라 명했다.
비형은 그 중 길달이라 하는 귀신을 추천했다.
길달을 임용해 보자, 과연 충직하기 이를데 없어 임금은 굉장히 기뻐하였고, 친아들이 없는 임종에게 길달을 양자로 삼게 했다.
임종은 길달에게 명해 흥륜사 남쪽에 다락문을 세우도록 했다. 그랬더니 그 뒤로 길달은 매일 밤 그 다락문 위에서 잠들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이런 이유로 그 문을 길달문이라 불렀다.)
그러던 어느 날, 길달은 여우로 변해서 도망갔다.
이에 비형은 귀신 하나를 보내 그를 잡아 죽여 버렸다.
그 뒤로 귀신들은 비형을 굉장히 두려워하게 되어, 비형의 이름을 들은 것만으로도 달아나게 되었다 한다.
당시에 이 일을 노래로 삼아서,
“성스러운 임금의 혼이 자식을 낳았으니, 비형랑의 집이 여기로다. 날뛰는 온갖 귀신들아, 여기 머무르지 마라.”라고 노래했고,
그 뒤엔 그 싯구를 문에 붙여 귀신쫓는 부적으로 삼는 것이 시골 풍속으로 남게 되었다.
(삼국유사, 기이(紀異) 제 1, 도화녀, 비형랑 조목)
이 전설에서 살필 수 있는 부분들은
(1) 왕의 사령, 즉 혼이 살아있는 여자와 관계를 맺어서 여자를 임신시킬 수 있다고 전해지는 것을 보면, 죽은 사람의 혼이 살아있는 사람과 관계를 맺어서 생리적인 효과를 일으킬 수 있었다는 것.
(2) 왕의 혼은 죽은 뒤에 2년이 지나 도화가 있는 곳에 와서 생전의 바람을 이루고 연기처럼 사라졌다. 즉,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 동안에는 그 혼의 시간도 멈추고, 바람이 이뤄지면 그 혼이 사라진다는 것.
(3) 비형이 자주 귀신들과 놀거나, 귀신을 부려서 일을 하거나, 길달이 여우로 변해 도망치거나, 귀신을 시켜 그걸 잡아 죽였다는 등, 사람이 귀신을 부려서 자신의 뜻에 따르게 할 수 있었다는 것.
(4) 왕의 혼이 생전의 모습으로 여자 방에 들어가고, 길달이 몸을 출현시켜 조정의 일을 보좌했다는 이야기에서, 혼도 귀신도 둘 다 사람의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 또한 길달이 도망칠 때 여우로 변한 것 처럼, 귀신은 어떠한 대상으로도 변할 수 있다는 것.
(5) 사람과 귀신, 사람과 혼은 대화를 나눌수도 있고, 서로간에 뜻이 통하기도 한다는 것.
(6) 귀신은 돌다리를 만들고 다락문을 세우며 조정의 일을 보좌하는 등, 사람과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
(7) 귀신은 힘있는 자를 두려워하고 몸을 피하며 도망친다는 것. 예를 들면 비형의 이름을 들으면, 귀신들이 도망치는 것 처럼.
(8) 비형이 거느리는 귀신들이 새벽 종소리를 들으면 흩어지는 것을 통해 추측해 보면, 귀신은 어두운 밤을 좋아하며 밝은 아침과 쇳소리를 꺼린다는 것.
(9) 임종이 자식이 없어서 길달을 그 양자로 삼았다. 라는 점을 통해 살펴보면 당시에는 피가 이어져 있지 않으면 제사를 지낼 수 없다는 식의 관념이 없었으며, 따라서 아버지의 혼과 자식은 기가 비슷하다느니 운운하는 생각도 없었을 것으로 보임.
이상과 같이, 신라시대의 귀신신앙에서는 귀신을 일종의 신비한 힘을 지닌 존재로서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 성정은 거의 인간과 유사하며, 인간과 귀신의 세계는 서로 교류할 수 있으며, 귀신이 사람에게 이익이나 해를 미칠 수 있고, 동시에 사람도 역시 귀신에게 제약을 가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여서 삼국유사는 1206-1289년 무렵에 일연이 썼으며, 5권 3책으로 되어 있는 기록이며, 조선 고대의 설화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자료로 쓰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