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카루와 하치만이 친구가 아닐 무렵~아오이 (9)
<8장. 뭔가, 시키부 호노카는 안쓰럽다.>
“꽤 심한 꼴을 당했군.”
집에 돌아온 나는 씻으면서 중얼거렸다. 더러운 물을 뒤집어쓰고, 여자애에게 얻어맞았다. 더러운 물이야 씻어버리면 괜찮지만 아까 시키부에게 맞은 곳은 아직도 아프다.
“괜찮아, 하치만?”
내 옆에서 미카도가 물어온다. 나는 그 물음에 대답해주는 대신, 지금 내가 궁금한 것을 물었다.
“......너, 그 모습은 뭐냐?”
왠지 모르게 지금의 미카도는 맨몸에 샤워 타월로 하반신만 가린 모습을 하고 있었다. 미카도가 웃으면서 나에게 설명한다.
“어제 하치만이 잠들고 나서 할 일도 없고 해서, 내가 뭔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을까 여러모로 시도를 해봤어. 염동력이라든가, 빙의라든가 하는 것들 말이야. 그러다 보니 내 스스로 의상을 바꿔 입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거야!”
“참 대단한 발견이군.”
내가 코웃음 쳤다. 별 도움이 안 되는 능력에도 정도가 있다. 나밖에 못 보는 유령의 복장 따위 바꿔서 뭘 하려고?
아니, 잠깐. 방금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어이, 미카도? 너 방금 빙의도 시도해봤다고 했냐?”
내 질문에 미카도는 눈을 피하고 하하하 웃는다.
“너 내 허락도 없이 내 몸을 조종해보려고 했단 말이지?”
내 말에 미카도는 양 손을 싹싹 빌며 나에게 사과했다.
“미, 미안해! 잘못했어! 그냥 보통 유령이 할 수 있을 만한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 떠올라서 한 번 해봤을 뿐이야! 다시는 안 그럴게!”
한 번만 더 그랬다간 박살을 내줄 테다. 나는 마음속으로 아까 내가 시키부에게 들었던 말을 되뇌었다.
다 씻고 나오니 세탁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내 교복도 저 안에 있겠지. 얼룩이 안 남기를 바랄 뿐이다. 만약 지워지지 않는다면 세탁소에 드라이 클리닝이라도 맡겨야 한다.
욕실에서 나온 나에게 코마치가 다가왔다. 코마치는 아까 내가 꽤나 불쌍해 보이는 몰골로 나타나자 깜짝 놀랐다. 그리고 바로 ‘옷은 내가 빨 테니까, 오빠는 빨리 씻어!’라는 기특한 소리를 했다. 코마치가 그 뒤에 ‘포인트 높지?’ 운운만 안 했어도 나는 감동의 눈물을 흘렸을 거라 확신한다.
코마치가 평소 같지 않게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따돌림이라도 당하는 거야?”
코마치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만하긴 하다. 하지만 이것은 약간 경우가 다르다. 당연히 나는 부정했다.
“아니. 조금 사고가 있었을 뿐이야.”
코마치가 다시 묻는다.
“진짜야? 진짜 괴롭힘 당하는 게 아니지?”
“그렇다니까.”
그런데 이런 문답은 오히려 나이 많은 쪽이 어린 쪽에게 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지 않나? 뭔가 입장이 바뀐 것 같은데?
미카도가 옆에서 나에게 귓속말을 한다.
“코마치 양, 진짜 착하구나. 하치만이 부러워. 나도 저런 여동생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바보야, 그런 말 하지 마. 코마치가 착하다는 것 정도는 누가 말하지 않아도 내가 제일 잘 알아. 내 앞에서 코마치를 칭찬해봐야 전혀 기쁘지 않다니까? 진짜야! 절대 흐뭇하지 않고, 절대 어깨가 으쓱하지 않아!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코마치에게 말했다.
“나는 방에 들어가 있을 테니까, 세탁기가 다 돌아가면 말해줘. 내가 널게.”
“알았어, 오빠! 아, 오빠 가방은 방 앞에 던져 놨어!”
“땡큐.”
코마치의 대답을 듣고 나는 방을 향해 몸을 돌렸다. 뒤에서 코마치가 무언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역시, 오빠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구나.......)
무슨 소리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미카도는 알아들은 모양이다. 뭔가 따뜻한 눈으로 나를, 그리고 코마치 쪽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분명 나를 걱정하는 말이었겠지. 고맙다, 코마치. 하지만 나는 여동생까지 내 학교 일에 끼어 들이고 싶지는 않다.
문 앞에 있는 가방을 들고 방에 들어왔다. 자, 이제 가방을 정리해보자. 가방을 열고 뒤집는다. 교과서, 필기구 등이 땅바닥에 떨어진다. 음, 잃어버린 것은 없나?
눈으로 하나하나 확인을 해보려는 찰나, 나는 ‘그것’을 발견했다. 핸드폰이다. 웬 스마트폰이 하나 있었다.
“이건.......”
내가 침음성을 내자 미카도가 옆에서 물었다.
“하치만 거 아니지?”
내 것이 아니다. 내 폰에는 이런 쓸데없는 장식이 달려있지 않다. 무엇보다 나는 아까 분명 교복을 벗을 때 폰을 교복 주머니에서 꺼내 거실 소파 위에 던져두었다. 아, 그러고 보니 들고 오는 걸 까먹었네. 내 폰은 아마 지금도 거기 있을 것이다.
즉, 상황을 정리하면, 다른 사람의 핸드폰이 왠지 모르게 내 가방에 들어가 있었고 그것을 방금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내 기억에 따르면 오늘 다른 사람의 물건이 내 가방에 섞였을 만한 상황은 단 한 번밖에 없었다.
“아마 시키부 거겠군.”
진짜냐. 웬만하면 얽히기 싫은데 또 이렇게 얽히게 되는 거냐고. 내일 최대한 빨리 돌려주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폰이 진동하기 시작한다. 화면을 보니 ‘우리 집’이라는 문구가 떠 있다. 아마 집에 와서야 폰이 없어졌다는 것을 확인한 시키부가 집전화로 전화를 건 것이겠지. 나는 잠시 망설이다 폰을 들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여, 여보세요? 저, 제가 그 전화 주인인데요. 실례지만 받으러 갈 수 있을까요?”
목소리 톤의 차이는 있지만 이건 분명 나를 두드려 패던 여자애의 목소리가 맞군. 내가 대답했다.
“......시키부지? 나는 학교에서 네 옆자리인 히키가야 하치만이다. 아까 복도에서 너랑 부딪쳤을 때 네 폰이 내 짐에 섞인 것 같다. 나도 방금 알아챘다. 내일 아침에 바로 돌려주지. 참고로 미리 말해두겠지만, 절대 일부러 네 폰을 훔치거나 한 것은 아니다.”
내가 생각해도 쓸데없는 말은 제외한 간결하고 주제가 명확한 의사전달이다. 완벽하다. 그런데 내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시키부가 소리쳤다.
“보지 마!”
“어, 뭐라고?”
나는 예기치 않게 꼭 한 번쯤 해보고 싶은 대사를 입에 담고 말았다. 난청 흉내, 다들 한 번쯤 내보고 싶지 않아?
시키부가 나에게 쏘아붙였다.
“내 폰에 손대지 마! 만약에 내 폰을 들여다본다면 절대 가만 안 둘 거야!”
“어차피 그럴 생각이다만.”
왜 이렇게 열을 내고 있지? 내가 입을 열었다.
“이봐, 너도 패턴 보안 설정 정도는 해놓았을 거 아냐? 그럼 내가 그런 짓을 할 수 있을 리 없지.”
보통 폰에 남에게 보여주기 싫은 정보가 담겨 있는 사람들은 상당히 복잡한 패턴을 설정해놓는다. 내 생각에 그렇게 열 낼 정도로 폰이 중요하다면 시키부도 그렇게 해두었을 것이다.
“‘그런 짓을 안 한다’가 아니라 ‘못 한다’를 강조하는구나.......”
옆에서 미카도가 중얼거린다. 미카도, 이건 경험이야. 사람들이 내가 하지 않은 일 가지고 나를 뭐라 할 때, 거기에 대응하려면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해야 된다고.
“으음, 그렇긴 한데.......”
전화기를 통해 시키부의 목소리가 전해진다. 나는 재차 말했다.
“내일 아침에 바로 돌려주마.”
그러자 시키부도 납득한 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알았어.”
그리고 통화는 끊어졌다. 이제 이걸 어떻게 할까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또 폰이 진동한다. 그리고 메일 알림(일본에도 그런 게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문자, 카톡 메시지가 왔을 때 순간적으로 화면에 그 내용의 일부가 떴다 사라지는 그것을 말하는 겁니다.)이 뜬다. ‘퍼플 공주님, 도와주세요!’라고? 아차, 무심코 읽어버리고 말았다! 어쩌지?
“오빠, 빨래 다 됐어!”
방문 너머로 코마치의 목소리가 들린다. ......일단 빨래부터 널고 생각하자.
빨래를 널고 하는 김에 거실에 방치된 내 폰도 들고 왔다. 내 옆에서는 미카도가 무언가 중얼중얼거리고 있다.
“퍼플 공주라,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데, 어디서 들었더라?”
“이봐, 방금 그거 그냥 못 본 걸로 하자고.”
내가 말했다. 아무래도 그 ‘퍼플 공주’라는 것은 시키부의 안쓰러운 이명(異名)이겠지. 중학교 때 내가 하치만 대보살을 내 여러 가지 이명 중 하나로 삼은 것과 일맥상통하리라 생각된다. 고등학생씩이나 돼서 인터넷 세계에서 그런 이름으로 활동하다니 대단하다. 나는 지금은 누가 하라고 해도 자괴감이 들어서 못할 것 같은데 말이지. 어떤 의미에서는 존경스러운 여자이다. 나는 대화 한 번 제대로 해본 적 없는 시키부에게 묘한 친근감이 들었다. ‘이 녀석도 사실은 안쓰러운 녀석이었어.’의 효과라고나 할까.
“누구에게나 안쓰러운 면은 있는 법이지. 가끔 들키면 죽고 싶어질 거란 걸 알면서도, 몰래 즐기는 걸 끝내 못 끊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고 말이야. 그러니 모르는 척해주자고.”
“그러는 게 좋을까?”
“최선이지.”
나는 단언했다. 이렇게 나와 미카도는 시키부의 안쓰러운 이명을 모르는 척해주기로 합의했다.
내 폰을 본다. 아직 배터리는 많이 남아 있다. 충전은 나중에 해도 되겠군. 아, 그러고 보니 시키부의 폰은 충전을 해야 되지 않나? 나는 아까 내 책상 위에 올려 둔 시키부의 폰을 집어 들었다. 잠시 화면을 켜 배터리 잔량을 확인한다. 충전해둬야겠군.
시키부의 폰에 충전기를 연결하려는 순간, 또 메일이 왔다. 화면에 뜨는 문구는 ‘퍼플 공주님! 감사합니다!’다. 아차! 또 읽어버렸잖아! 끄자. 이 폰을 아예 꺼두자. 나는 전원 버튼을 눌러 시키부의 폰을 아예 꺼버렸다.
“......이번 것도 못 본 것으로 하자.”
내 제안에 미카도는 힘 빠진 얼굴로 말없이 웃었다. 이 이야기를 계속해서 좋을 것도 없다. 나는 이제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야, 미카도, 네 부탁 말인데.......”
그 순간 갑자기 미카도가 소리를 질렀다.
“생각났다!”
“뭐, 뭐야? 뭐가 떠올랐기에 그래?”
내 물음에 미카도가 답했다.
“퍼플 공주 말이야! 어디서 들은 건지 생각이 났어! 여자애들이 이야기하는 걸 들은 적이 있어. 연애에 대한 상담과 인터넷 연재 소설로 인기 있는 블로그의 운영자 닉네임이야!”
“그딴 거 몰라도 돼!”
이 자식, 모르는 척하자고 했더니 아예 끝까지 파헤쳐버리다니!
“엄청 유명해! 지금 당장이라도 인터넷 검색을 하면 나올걸? 우와, 같은 학교 학생이 그런 유명인이었다니! 정말 대단하다!”
......그 정도냐. 미카도의 말에 순간 나는 호기심이 생겼다. 어느 정도로 유명하길래 미카도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고작 고등학생이 운영하는 블로그가 그렇게까지 인기가 있다니, 대체 어떤 블로그일까?
나는 나도 모르게 내 폰을 들어 구글에 ‘퍼플 공주’를 검색해보았다. 아, 진짜다. 나오네. 방문자 수 엄청나잖아. 이게 파워 블로그라는 건가? 오호라, ‘퍼플 공주의 상담실’, ‘소설’....... 소설이라? 고등학생밖에 안 됐는데 여러 사람의 인정을 받았다는 말이지? 대체 얼마나 잘 쓰길래 그런 걸까? 살짝 봐볼까. 나는 소설 게시판에 들어가 거기에 적힌 글을 읽었다.
......30초 만에 인터넷 창을 모두 닫고 폰을 침대에 던진다. 나는 양팔을 교차해 다른 팔을 긁적이며 말했다.
“......오글거려.”
내 말에 미카도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대꾸했다.
“응? 나는 괜찮은 거 같은데?”
미카도, 너 여자에 대해서라면 모든 것에 너무 점수가 후한 것 아니냐? 미카도가 말을 잇는다.
“아, 우리 모르는 척하기로 했는데 너무 많이 알아버렸네.”
아, 맞다! 그랬었지! 젠장, 남의 비밀을 캐고 말았잖아. 미안하다, 시키부. 네가 상당히 안쓰러운 사람이라는 걸 알아버리고 말았어. 난 내일 어떤 얼굴로 폰을 돌려주면 되는 거지?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혼잣말을 하며 자기 암시를 거는 나였다.
**
결국 어젯밤에는 ‘퍼플 공주’ 건으로 사오토메 선배 건에 대해서는 제대로 생각도 하지 못했다.
교실에 들어오면서 확인해보니 나를 보는 사람들이 소금씩 수군거리고 있다. 아마 어제의 소동이 소문으로 퍼진 모양이다. 가급적 눈에 띄고 싶지 않았는데, 이렇게 되어버렸다. 특히 여자애들의 눈빛이 따갑다. ‘감히 황태자를.......’ 하는 식의 소리가 많이 들리는 걸로 봐서 아마 내가 치한이라는 소문보다는 미카도를 욕한 소문이 더 농도 있게 퍼진 모양이다.
교실에 들어서니 시키부는 이미 자리에 앉은 채였다. 나는 가방에서 시키부의 폰을 꺼냈다. 그리고 자리로 향하면서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오직 시키부만이 눈치 챌 수 있게 시키부의 책상에 슬쩍 올려놓았다. 그리고 바로 내 자리에 앉는다. 완벽하다.
자리에 앉은 나를 보고 시키부가 물었다.
“아무것도 안 봤지?”
“물론이지.”
살짝 양심에 찔리지만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
베스트 플레이스에 앉아 빵을 먹으면서 현 상황을 생각한다. 안 좋다. 미카도가 나에게 물었다.
“안 좋은 소문이 퍼지고 있는데 괜찮겠어?”
“별 문제 없어.”
내가 말했다. 지금 나는 미카도 히카루를 모욕한 자로서 많은 여학생들에게 공공의 적이 되어 있다. 우리 반만 해도 나를 노려보는 여학생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았어. 그것이 끝나면 조용히 지낼 거다. 나는 내 존재감을 지우는 방법을 잘 알거든. 그러면 다시 외톨이로 돌아갈 수 있겠지.”
내 말에 미카도가 다시 물어온다.
“......하치만은, 외톨이로 있는 게 좋아?”
분명 처음에는 고등학교에서 어떻게든 외톨이 생활을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교통사고가 내 고등학교 생활을 결정적으로 꼬아놓은 이후 나는 적어도 이 학교에서는 내가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러니 외톨이로 있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여기에서만큼은 외톨이로 있는 것이 더 낫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말했다.
“이 학교는 이상해. 여러모로 이상해. 일례로 너를 좋아한다는 여학생들을 보자고. 너는 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여자애들을 사랑한다고 말했지. 하지만 꽃은 자신에게 물을 주는 사람을 소유하려 하지도, 관리하려 들지도 않아. 그럴 텐데도 그녀들은 너를 오직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황태자’로 있게 하기 위해 나한테 저주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사실, 네가 ‘이상적인 황태자’에 아무리 가까워도, 이상적인 것 자체는 될 수는 없어. 그럼에도 그녀들은 그 사실을 외면하고 자기 이상에 너를 멋대로 끼워 맞추려고 남에게 폐를 끼치고 있지. 내가 보기에는 너와 그런 여자들의 관계는 그런 거다. 그런 관계는 기만에 지나지 않아.”
“하치만.......”
“거짓말은 싫다. 알지 못했으니까, 누군가 나에게 거짓말을 하면 거기에 넘어가서 상처 입고 말아. 그러니까 거짓말은, 거짓된 것은 싫다. 달콤한 거짓이 사라지고 어느 새 잔혹한 진실만 내 앞에 남았을 때의 느낌은 진절머리가 나. 그럴 바에는 처음부터 잔혹한 진실을 마주하고 싶다. 그러니까, 이런 기만이 가득한 학교라면 차라리 외톨이가 되는 게 나아.”
미카도는 아무 말도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다. 미카도가 나에게 말했다.
“하치만은 참 올바르구나.”
“뭐?”
“나는 올바르지 못했어. 그래서 하치만이 말하는 기만적인 관계를 만들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그럴 수밖에 없었어. 외로움을 견딜 수 없었으니까, 올바르지 못하더라도 주변에 누군가를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어. 그래서 나는 하치만의 올바름이 부러워.”
또 그런 표정을 짓는 거냐, 미카도. 그럴 바엔 지금 당장 억지로라도 울려고 해보라고.
이야기를 돌리자. 확실히 나를 둘러싼 상황은 중요한 문제이지만, 그건 사오토메 선배 문제와 연관되어 발생한 것이다. 사오토메 선배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해결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 우선되어야 할 것은 사오토베 선배 쪽이다.
“사오토메 선배 건에 대해서나 이야기하자.”
내 말에 미카도가 고개를 끄덕인다.
“응, ‘지금은’ 그렇게 하자. 아오이 누나에 대해서 생각하는 거야.”
그러고 우리는 다시 침묵했다. 나도, 미카도도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며 앞으로 어떻게 할지에 대해 생각한다. 잠시 뒤, 미카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으음, 하치만이 벌인 일들이 나로서는 너무 예상 밖의 일들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누구 다른 사람이 조언을 해 주면 좋을 텐데....... 아! 시키부의 도움을 받는 게 어떨까? 퍼플 공주잖아! 분명 큰 도움이 될 거야.”
“흥, 그럴 리가 있냐. 어제 그런 일이 있었으니 시키부가 나를 도와줄 리가 없는 데다 도움을 받는다 해도 도움이 안 될걸.”
“어, 어째서?”
미카도, 너는 그렇게나 여자에게 인기가 많았던 연애 마스터이면서 그런 것도 모르냐. 내가 설명해주기로 했다.
“너처럼 소문난 바람둥이라면 모를까 일개 고등학생이 연애를 해봤자 얼마나 해봤겠어? 시키부가 연애의 달인일 리 있겠냐. 아마도 인터넷 상으로 허세나 부리는 거겠지. 뭐, 꽤나 예쁘장하게 생겼으니까 남자 몇 명 정도는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것만 가지고 남에게 제 잘난 듯 조언을 할 수는 없겠지. 아마 상담에 대한 답변도 경험에 바탕을 둔 게 아니고 그냥 자기 생각에 적당한 답을 하는 것이겠고 말이야. 아, 어쩌면 연애 경험 한 번도 없는데 인터넷 상으로만 연애의 달인인 척하는 걸 수도 있겠군.”
내 말을 듣고 있던 미카도가 갑자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치만, 또 무릎을 꿇더라도 용서를 비는 게 좋을 거라 생각해.”
응? 뭔 소리야? 그런 내 뒤에서 여자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봤.구.나!”
내 기억에 있는 목소리다. 그녀가 맞다면, 나는 오늘 죽을지도 모르겠군. 나는 뒤를 돌아보며 목소리를 낸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시, 시키부.”
또 무릎을 꿇어야 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