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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카루와 하치만이 친구가 아닐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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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카루와 하치만이 친구가 아닐 무렵~아오이 (8)


<7장. 사오토메 아오이도, 시키부 호노카도 히키가야 하치만에게 수난을 준다.>

  늦은 밤, 방에 들어 와 미카도와 이야기를 한다. 지금까지 미카도에게 들은 이야기들을 미카도에게 확인했다. 그러다 보니 문득 내가 아주 중요한 것을 아직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미카도에게 물었다.

  “그런데, 네가 준비했다는 여섯 개의 선물이라는 게 대체 뭐냐?”

  미카도가 내 질문에 자신이 생전에 짠 계획을 털어놓았다. 그것을 들은 나는 침음성을 흘렸다.

  ​“​으​음​.​.​.​.​.​.​.​”​

  내가 미카도를 보고 말했다.

  “......협력 그만둬도 되겠냐, 미카도?”

  미카도가 의아한 얼굴로 내게 말을 건다.

  “갑자기 왜 그래, 하치만?”

  “아니, 나는 네 선물이라는 게 비밀 장소에 보관해둔 물건이라든지 그런 건 줄 알았는데, 그게 뭐냐고! 그냥 평범하게 액세서리 같은 걸 여섯 개 준비하지 뭣 하러 그런 귀찮은 걸 준비하냔 말이다. 나 같은 놈이 그걸 전하는 것은 절대로 무리라고. 너는 부탁을 할 대상을 잘못 고른 거다.”

  내가 그렇게 말했다. 아니, 그렇잖아? 외톨이인 나보고 그런 창피한 일을 하라고 하는 거냐? 나는 너처럼 낯 뜨거운 소리를 뻔뻔하게 내뱉는 철면피가 아니야. 이제 미카도의 부탁은 귀찮은 일을 넘어 불가능에 가까운 일로 보일 지경이었다. 젠장, 애초에 그날 장례식장에 가는 게 아니었어. 이제 와서 나는 이틀 전의 일을 후회했다. 그런 나를 미카도가 위로한다.

  “걱정하지 마. 하치만이라면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대체 뭘 보고 그런 소리가 나오냐? 나는 자타공인 외톨이라고. 네가 준비한 ‘선물’은 웬만한 리얼충이라도 쉽게 전하지 못할 거다. 그런데 나보고 그걸 전하라니, 애초부터 네 인선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어!”

  나의 불평을 들으면서도 미카도는 뭐가 좋은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뭐, 하치만이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고 내가 하치만이 죽을 때까지 하치만에 씐 채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힘내 볼까!”

  바로 기합을 넣는다. 미카도 녀석, 나에게 의욕을 주는 방법을 익혔군. 안 할 경우의 리스크를 명확히 알려줌으로써 내가 행동하게 하다니, 책사였던 건가.

  그래, 유령에 시달린 채로 살 수는 없지. 회피할 수 없는 문제가 내 앞에 있다면, 적어도 해볼 수 있는 건 해봐야 한다. 그래야 돌파구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벌써 포기해서 어쩌자는 건가. 이런 나라도 이 상황에서 뭔가 할 수 있는 것은 있을 것이다. 나는 분명 많은 선택지를 타고 나지 못한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나에게도 선택지는 있다. 해보자.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되더라도, 어차피 나는 외톨이고 잃을 것도 없다. 벌써 무릎까지 꿇었는데 뭔가 성과를 얻어야 한다.

  ......물론, 만약 그래도 안 된다면 어쩔 수 없겠지.

  “만약 실패한다면 믿을 만한 제령사나 찾아봐야겠다.”

  일이 잘 안 풀리면 뒷맛이 찝찝한 방법이라도 쓰겠다는 내 의사 표명에 미카도가 반발한다.

  “너무해, 친구를 버리려고 하다니!”

  “뭐? 누가 친구라는 거냐, 미카도.”

  내가 어제 나한테는 친구가 없다고 하지 않았었나?

  “나랑 하치만 말이야!”

  미카도의 주장에 나는 지극히 타당한 질문을 했다.

  “언제부터 우리가 친구였는데?”

  그 말에 미카도가 대답한다.

  “아까 전에 이름으로 부르고 싶다고 하니까 허락해줬잖아. 나는 그때 하치만과 친구가 됐다고 생각해서 기뻤어.”

  “야, 미카도. 이름으로 부른다고 다 친구는 아니겠지. 또, 보통 친구라는 건 쌍방향적인 관계 아니었냐? 그렇다면 ‘너는 나를 이름으로 부르니까 친구, 나는 널 성으로 부르니까 친구 아님’이라는 이상한 관계가 성립하는데?”

  미카도는 역시 친구가 없었기 때문인지 친구 관계에 있어 중대한 착각을 하고 있다. 알고 보면 서로 친구라는 놈들 중에도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는 상당히 드물거든? 미카도의 친구론에 트집 잡을 부분은 더 있지만 일일이 말꼬리를 잡는 것도 귀찮고 하니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기로 하자.

  “어, 그건 그러네. 그럼 앞으로는 하치만도 날 히카루라고 불러.”

  “거절한다.”

  얼토당토않은 요구를 다 하고 있다. 내가 말을 이었다.

  “앞으로 그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내 눈 앞의 유령은 ‘미카도’다.”

  밀짚모자 일행이 X표시를 하며 말했던 풍으로 단언했다. 미카도는 그 말을 듣고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치만도 고집이 상당히 세구나. 그래도 나는 언젠가 네가 나를 히카루라고 불러주면 좋겠어. 내가 사라지기 전에 꼭 그렇게 부르게 만들 거야.”

  야, 그렇게 말하는 시점에서 네 고집도 만만치 않다는 게 증명되거든?

**

  내 작전대로라면 오히려 가만히 있어도 사오토메 선배 쪽에서 호기심을 못 이기고 나에게 접촉을 할 것이다. 그러니 오늘은 미카도의 부탁에 휘둘리지 않고 나만의 페이스대로 생활하면 되는 것이다. 미카도에게도 어제 그렇게 설명해주었지만, 그는 이런 내 처사가 불만스러운 모양이었다.

  “하치만, 진짜 이대로 내버려 둘 거야?”

  “아오이 누나가 걱정돼.”

  “눈가를 보니까 잠도 잘 못 잔 것 같은데.”

  “아오이 누나 상태를 좀 보러 가자, 응?”

  수업을 듣는 도중에 계속 이런 말들을 하며 나를 귀찮게 굴었다. 내가 미카도를 보고 소곤거리며 말했다.

  “시끄러, 수업에 집중이 안 된다고.”

  “오늘도 아오이 누나를 보러 가준다고 약속하면 조용히 할게.”

  미카도의 요구에 내가 교과서에 글자를 씀으로써 답했다.

  ‘말했잖아. 섣부르게 접근하면 스토커라는 오해를 사서 <디 엔드>다.’

  그러자 미카도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뭔가 떠오른 듯 심술궂은 웃음을 띠며 말했다.

  “하치만이 그런다면 내가 다 생각이 있지.”

  그러고는 갑자기 내 옆의 여자애-시키부에게 다가간다. 그러더니 그녀를 칭송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시키부는 참 멋있는 여자애야. 당당해 보이는 눈빛이 나를 사로잡아. 라이트브라운 색상의 머리카락도 매력적이야. 스타일도 좋고, 무엇보다 뛰어난 건 각선미지. 그 매끈한 다리는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해. 시키부를 꽃에 비유한다면 뭐라 부를 수 ​있​을​까​.​.​.​.​.​.​.​”​

  참으로 닭살이 돋을 정도로 재수 없는 표현의 연속이었다. 그래, 객관적으로 봤을 때, 시키부가 예쁘장하게 생겼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정도로 칭송을 해대다니 네 혓바닥에는 대체 무엇이 발라져 있는 거냐.

  그러다 미카도는 또 나와 자리가 가까운 편인 다른 여자아이에게 날아가 또 그녀를 칭송하기 시작했다. 야, 그만 해. 닭살 돋는다고. 재수 없어. 올라올 것 같아!

  미카도의 이런 행동은 나에게 스트레스를 줄뿐더러, 그의 목소리 때문에 내가 수업을 놓치게 되는 효과 있었다.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미카도를 노려보았다. 미카도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다시 나에게로 다가와서 말했다.

  “아오이 누나를 만나러 간다고 안 하면 수업 때마다 계속 이렇게 할 거야.”

  웃는 얼굴이 참으로 가증스럽다. 나는 교과서에 문장을 휘갈겼다.

  ‘알았다고. 그만 좀 해.’

  점점 미카도가 자기 뜻대로 나를 조종하는 법을 익혀가는 것 같아서 무섭다.

**

  수업이 다 끝나고 어느덧 방과 후, 나는 미카도의 협박을 동원한 요구에 따라 미술실로 가고 있었다. 이렇게 오늘도 집에 늦게 들어가게 되는 것인가. 아니, 그것보다는 스토커 취급 받지 않을 방법부터 생각해내야겠군.

  이런 내 고민도 무색하게 미카도는 사오토메 선배를 만나러 가는 것이 좋은지 싱글벙글이었다. 야, 그 사람 너를 엄청 매도해댔잖아. 그런데도 만나러 간다는 것만으로 이렇게 기분이 좋아지다니, 얼마나 좋아하는 거냐.

  이렇게 보니 미카도는 분명 최악의 바람둥이 자식이었고 여자를 심하게 좋아했지만, 그 중에서도 사오토메 선배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 벌써 또 미술부실 앞인가. 나는 긴장하면서 노크를 했다.

  “실례합니다.”

  그렇게 말하고 들어갔다. 어제의 일을 목격한 부원들이 나를 쳐다본다. 대충 ‘뭐하는 놈이지.’ 정도의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로군. 그러고 보니, 나는 어제 일이 어느 정도는 소문이 되었을 거라 생각하고 대책도 생각해뒀는데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은 걸까? 알고 보면 이 사람들도 나처럼 외톨이인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뭔가 불쌍해 보인다.

  그 마음을 담아 그들에게 살짝 목례를 했다. 사오토메 선배는 어제와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를 돌아보지 않고 캔버스를 바라보고 있다. 그저 멍하니 붓만 쥐고 있었던 어제와는 달리 오늘은 제대로 붓에 물감을 바르고 캔버스에 색을 칠하고 있었다.

  일단 용무가 있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오토메 선배의 안위를 확인하는 것뿐이므로 굳이 말을 걸 필요는 없다. 방해하는 것도 미안하니 그냥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고만 있기로 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어제 그녀의 폭발이 너무 무서워서 그런 겁니다. 네.

  뒤에서 사오토메 선배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바라본다. 그 그림은 빛나는 계단이 그려져 있는 그림이었다. 회화 쪽에는 조예가 없다시피 한 내가 보기에도 고등학생치고는 상당한 수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옆에서 미카도가 나에게 말한다.

  “아오이 누나는 풍경화 전문이야. 어때? 정말 잘 그리지 않아?”

  왜 네가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는 건데? 리얼충의 여자친구 자랑은 듣기 어렵다. 미카도는 사오토메 선배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아오이 누나, 나 왔어. 나 때문에 많이 화났었지? 미안해. 그래도 꼭 약속을 지킬게. 반드시 일곱 개의 선물을, 아오이 누나에 대한 내 마음을 전할 거야. 기다려줘, 아오이 누나.”

  오직 나만이 미카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저 서글픈 광경은 오직 나만이 알 수 있겠지. <하치만만이 아는 세계>다. 내가 없었으면 아예 없었을 것이나 다름없는 모습이다. 그래서 적어도 나만은 그 광경을 기억해두기로 했다. 소중한 사람에게 아무리 말해도 닿지 않는 목소리에 대해서도 오직 나만은 기억해두기로 했다. 그러니까 내가 있는 한 결코 없는 일이 되지는 않는다.

  미카도가 사오토메 선배를 향한 말을 이어간다.

  “저기, 아오이 누나, 혹시, 만약에, 아주 만약에라도, 내 목소리가 들린다면, 손가락을 입술에 대서 신호를 보내줘. 언제나 그랬듯이 말이야. 아오이 누나, 내 목소리가 ​들​린​다​면​.​.​.​.​.​.​.​”​

  얼굴은 여전히 웃고 있지만 이번에는 쓴웃음이로군. 그렇게 울 것 같은 표정을 하면서도 결국 울지 못하고 웃을 수밖에 없는 거냐, 미카도. 그렇게 간절한 목소리로 말할 수 있으면서 울지는 못하는 거냐.

  그래도 그 목소리가 사오토메 선배에게 닿는 일 따위는 없었다. 사오토메 선배의 손은 여전히 파레트와 붓을 들고 있을 뿐이었다.

  사오토메 선배의 붓이 이번에는 검은색 물감을 찍는다. 물감을 머금은 붓을 든 그 손은 이번에는 망설임 없이, 그림 전체에 가위표를 그었다. 나와 미카도는 모두 깜짝 놀랐다. 뒤에서 다른 부원들의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오이 누나?”

   미카도가 망연히 중얼거렸다. 나도 스스로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참​신​한​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네요.”

  만약 그 스트레스의 원인에 나도 들어가 있다면 정말 미안한 일이다. 사오토메 선배는 이제야 나를 돌아보았다.

  “오늘도, 히카루에 대한 이야기를 하러 온 건가요?”

  그녀의 질문에 내가 대답했다.

  “그럴 생각이었는데, 불편하시다면 그냥 물러가겠습니다.”

  이건 내 진심이었다. 이 사람은 지금 정신적으로 위험해 보인다. 섣불리 자극하는 것은 상책이 아니다. 사오토메 선배가 그런 나에게 차갑게 내뱉었다.

  “내가 히카루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 건, 히카루가 최악의 바람둥이에, 최악의 거짓말쟁이였다는 것뿐이에요.”

  점수가 짜다. 하지만 이건 미카도의 자업자득이므로 뭐라 말을 못하겠군. 내가 말이 없자 다시 그녀는 미카도를 매도하기 시작했다.

  “결국 마지막까지 나한테 거짓말을 했어요! 히카루는 최악이에요.”

  미카도의 표정에서 웃음이 사라진다. 그 얼굴에 고통이 깃든다. 별로 상관없는 사람에게 욕을 먹어도 기분이 좋지 않을진대 좋아하는 사람이 바로 앞에서 그렇게 말하니 참담하겠지. 미카도가 중얼거렸다.

  “그랬구나. 아오이 누나한테 나는 결국 거짓말쟁이로 남고 ​말​았​어​.​.​.​.​.​.​.​ 미안, 미안해, 아오이 누나.”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사오토메 선배는 미카도를 미워하고 있다. 만약 그 미움이 완전히 고정되어 버렸다면 그 어떤 수를 써도 마음을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고착화되면 쉽게 바뀌지 않는다. 애매하게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얼마든지 뒤집힐 수 있다. 하지만 정말로 좋아하고, 정말로 싫어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뒤집기 위해서는 엄청난 일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오토메 선배의 미움은 과연 돌이킬 수 없는 골을 넘은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내가 미카도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에 하나, 어찌어찌 선물을 전한다 해도 미카도의 ‘마음’을 전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사오토메 선배가 지금 단지 갈피를 못 잡고 있는 것뿐이고 미카도에 대한 미움이 굳어지지 않았다면 아직 희망은 있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나답게 가는 거다. 결코 멋있지 않고, 꼴사납고, 비겁할지라도, 그런 방법밖에 쓸 수 없을지라도 나는 희망이 있는지 확인하는 거다. 정말 미카도는 미움받고 있는 것인가? 미카도, 지금 그 답을 확인해주마.

  내가 입을 열었다.

  “맞아요. 정말 최악인 녀석이었죠.”

  미카도와 사오토메 선배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나는 망설임 없이 말을 이었다.

  “저도 수많은 여자들이랑 놀아나는 그 꼴이 정말 역겨웠거든요.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다 싶으면 반반한 생김새와 잘난 집안을 이용해 꼬시고 질린다 싶으면 버리는 일을 반복했을 거 아니에요? ......여자는 꽃이다, 모든 꽃은 아름답다, 아름다우니 사랑한다느니 하면서 자신의 바람기를 미화하고 아무 잘못도 없는 척했죠. ......저만 해도 그 자식 때문에 몇 번이나 곤욕을 치렀는지 모릅니다. 살아 있었다면 꼭 한 대 때리고 싶을 정도예요!”

  남을 험담하려고 하니 말이 술술 잘 나오는데? 내 성격이 얼마나 고약한지를 새삼 깨닫는다. 그런데 야, 미카도, 너는 왜 내가 네 욕을 하고 있는데 그렇게 표정이 홀가분한 거냐. 정말 M이냐? 어찌 됐든 나는 기세를 타고 말을 이었다.

  “잘난 척하더니 결국 꼴사납게 물에 빠져 죽은 걸 보니 제 속이 다 ​시​원​.​.​.​.​.​.​.​”​

  순간 내 얼굴이 차가워졌다. 얼굴에서 물방울이 떨어진다. 사오토메 선배가 나에게 물감을 터는 물을 끼얹은 것이다.

  ​“​듣​기​.​.​.​.​.​.​싫​어​요​!​ 당장 내 앞에서 사라져요!”

  그러고는 붓이며, 연필이며, 지우개며 손에 잡히는 것들을 나에게 던지기 시작한다. 어? 가방을 들었다. 저걸 나한테 던지려는 건가? 위험하다! 나는 황급히 미술실 밖으로 나갔다. 문을 열고 복도를 향해 다이빙한다.

  쿵!

  뭔가에 부딪쳐서 바닥을 뒹굴었다. 잠시 동안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응? 손에 뭔가 형용하기 힘든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지는데?

  미카도의 목소리가 들린다.

  “하치만, 지금 당장 비키는 게 좋지 않을까? 아무리 나라도 그렇게 한 적은 없어.”

  무슨 소리지? 의아해하는 내 귓가에 분노에 찬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장! 비.켯!”

  우왓! 내 밑에 여자애가 있었던 거냐!? 게다가 이건 시키부잖아! 시키부는 날 밀쳤다. 나는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시키부의 분노에 찬 고함이 다시 들려온다.

  “이 변태!”

  그리고 그녀는 나에게 강력한 킥을 날렸다. 커억! 내가 충격에 몸을 떨고 있을 때, 시키부는 아직도 분이 안 풀린 듯 나를 몇 대 더 때렸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고 몸을 웅크렸다.

  퍽! 퍽! 퍽! 퍽!

  잠시 후 이어지던 난타가 끊기자 나는 살짝 눈을 떴다. 복도에서 일어난 소란 때문에 어느 새 주변에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사람들이 ‘치한이래.’ 하고 중얼거렸다. 몇몇은 시키부에게 박수를 치고 있었다.

  사오토메 선배도 미술부실 문틈으로 내 모습을 보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최악이에요.’ 하며 문을 닫는다. ......일단 일이 이렇게 된 것은 선배 잘못도 있는데 말입니다.

  “한 번만 더 이래봐! 박살을 내줄 테니까!”

  시키부는 나에게 으름장을 놓고는 재빨리 자기 가방에서 떨어진 물건들을 챙기고는 몸을 돌렸다. 나는 그런 그녀를 불러 세웠다.

  “잠깐.”

  시키부가 돌아봤다. 딱 봐도 경계하는 표정을 지은 채 나에게 말한다.

  “뭐, 뭐야?”

  나는 시키부의 교복을 바라봤다. 물을 끼얹어진 나와 부딪힌 탓에 그녀의 교복도 젖어 있었다. 게다가 그 물이 그리 깨끗한 물도 아니다. 아마 교복을 깨끗이 하기는 힘들겠지. 그리고 그것은 내 탓이다. 할 일은 정해져 있다.

  나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는 아예 이마를 바닥에 갖다 댄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어. 미안하다.”

  잠시 간에 침묵이 흐른 뒤 시키부의 목소리가 들렸다.

  “됐어, 이제.”

  터벅터벅 걷는 발소리가 점점 멀어져간다. 내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시키부는 이미 사라지고 난 뒤였다. 나는 말없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물건들을 가방에 쓸어 담았다. 정리는 나중에 하자.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내 옆에서 미카도가 쓴웃음을 지으며 사과했다.

  “미안해, 하치만. 내가 아오이 누나를 보러 오자고 하지만 ​않​았​어​도​.​.​.​.​.​.​.​”​

  나는 발걸음을 떼며 그 말에 대꾸했다.

  “아니, 이건 내가 네 험담을 했기 때문이야.”

  그렇다. 분명 사오토메 아오이는 내가 미카도를 헐뜯자 분노했다. 그 때문에 내가 이런 꼴이 되고 말았다. 내일쯤이면 나는 또 다시 학교의 유명인이 될 거다. 안 좋은 쪽으로 말이지.

  하지만 가장 중요한 성과를 얻었다. 지금은 그것으로 만족하자. 나는 미카도에게 말했다.

  “아까 봤듯이 사오토메 선배는 지금은 널 싫어할지도 몰라. 하지만 그건 아직 완전히 굳어지지 않았어.”

  애증(愛憎)에서 아직 애(愛)가 남아 있는 거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나는 단언할 수 있었다.

  “아직 희망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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